철컹. 동시에 이채욱의 입가엔 희미한 승자의 미소가 번졌다. 아무리 이해원이 이우그룹 사람들을 껄끄럽게 생각해도, 미국인들처럼 무시하진 않는다는 안도감에.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 뭐 하는 겁니까?!”
김민지를 향해 인사하려던 이채욱은 당황했다. 벌컥. 김민지가 살짝 열린 대문을 밀어젖히며 안으로 뛰어 들어간 까닭이었다.
“토끼를 깨운 건 당신이에요!”
“네? 그게 무슨…! 이봐요!”
이채욱은 황급히 김민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찰리까지 들어가려 해, 이채욱의 운전사이자 경호원이 그의 팔을 잡아 막았다.
“어딜 허락도 없이 들어가? 이거 무단침입 아닌가? 미국엔 그런 법 없어?”
[미안하지만 내가 한국어를 잘 몰라. 그리고 들어오라고 열린 문 아닌가?]
“뭐라는 거야, 이 근육 돼지가.”
[지금 날 모욕한 건가?]
“한판 붙어봐?”
한율이 도착한 건, 막 두 덩치가 서로 맞붙으려 탐색전을 벌일 때였다.
찰그락, 덜컹. 무성한 덩굴과 나무로 가려진 곳에서 돌연 문 열리는 소리와 인기척이 들리자, 두 사람이 흠칫 놀라며 돌아보았다.
“사람…?”
“……?!”
길게 드리워진 나뭇가지를 치우며 등장한 한율은 두 사람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품에는 나기혁에게 받은 위스키와 와인을 끌어안은 채.
[한밤중에 왜 남의 집 앞에서 싸우고 계세요, 다 큰 어른들이.]
김민지는 CCTV를 살피다 현관 앞으로 나온 고은훤에게 잡혀, 대문 밖으로 내쳐졌다.
“허락받지 않은 손님은 나가주세요.”
“이해원 씨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그럼 내일! 내일 아침은 어떠세요?! …어, 한율 씨?”
“…….”
한율은 이렇게 무례한 사람들일 줄 몰랐다는, 대놓고 실망했단 얼굴로 김민지와 찰리를 번갈아 보았다.
김민지가 민망한 얼굴로 웃었다.
“아…. 저희가 못난 꼴을 보였죠. 하지만 다음 게이트가 미국에서 열릴 수도 있단 초조함에 그만… 무례하게 행동했네요.”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안녕히 가세요.”
“네. …찰리.”
찰리도 주먹에서 힘을 풀곤 묵례 후 걸음을 옮겼다. 곧 미 대사관 차량이 천천히 후진으로 빠져나갔다. 조쉬는 함께 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서한율 씨.”
차의 전조등이 완전히 사라지자, 이채욱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네요. 이채욱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따라 시간을 잊은 손님이 많네요.”
“이해원 씨에게 긴히, 급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 이야기만 하고 금방 가겠습니다.”
“네. 저한테 허락을 구할 일은 아닌 것 같지만요.”
이채욱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선, 한율이 편히 들어올 수 있도록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리고 집에서 나오는 이해원에게 손짓, 정원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율은 고은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정원에서 이채욱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던 이해원이 들어왔다.
“전화 놔두고 여기까지 직접 무슨 일로 온 거래?”
“아….”
고은훤의 물음에, 이해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입을 벌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야. …많이 피곤할 텐데 여기까지 올라오게 해서 미안해, 한율아.”
“위스키랑 와인 나눠줄 겸, 구동이도 데려갈 겸 온 건데요, 뭘.”
“구동인 왜?”
“달냥이가 심심해해서요. 그럼 저도 이만 가볼게요.”
“응. 내려갈 때 계단 조심하고.”
“네.”
한율은 구동을 품에 안은 채 이해원의 집을 나왔다. 끼웅, 뀽. 구동이 기분 좋다는 듯 비비적거리며 울었다.
저 멀리 서울 쪽 하늘은 번쩍번쩍, 천둥소리도 희미하게 들렸다. 각성자들이 느꼈던 게이트 전조 증상이 아닌, 괴물과 싸우는 전장의 빛과 소리.
역대급으로 가장 크고 위험할 뻔한 괴물을 사살하긴 했으나, 그놈에게 집중하는 동안 놓친 괴물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율은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이제 시간이 더 지나면 군인들만으론 괴물을 상대하기가 힘들어지고, 그렇게 공무원을 거쳐 일반 시민들까지. 괴물과 싸우며 지내는 게 일상이 되겠지.’
당연한 일상이.
* * *
짙푸른 새벽하늘 아래. 일찍 일어난 한율은 관리동 로비 한쪽에 정돈된 양궁 장비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쐐엑, 퍽! 오래간만에 쏴보니 손맛이 짜릿하다. 하지만 과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하나를 더 뒤로, 아예 끝까지 밀었다.
객실을 나오던 길우성은 그런 한율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주 신났네, 신났어. …흐아암.”
이불을 가지고 나오던 길미현은 기대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스대 신궁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거야?”
“보기만 할 게 아니라 가르쳐 달라고 해야지. 야, 써한! 나 자세 좀 봐주라!”
한율도 큰소리로 대답했다.
“장비 가져와!”
곧 길우성이 자신이 쓸 활과 화살을 품에 안고 달려왔다. 길우성의 자세를 봐주는데, 객실 테라스 난간에다 이불을 널던 길미현도 다가와 기웃거렸다.
“누나도 배우실래요?”
“응.”
“관리동으로 가서 장갑이랑 보호대 맞는 거 있는지 봐 드릴게요.”
“응!”
“넌 그 자세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주의하고.”
“오냐.”
길우성과 길미현의 자세를 봐주는 동안 서서히 해가 떴다. 양궁 연습을 구경하는 사람도 늘었다.
이곳에 온 뒤로 정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던 계마루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 양궁! 배우고! 싶습니다! 형님!”
“…….”
그 옆에서 계나리도 수줍게 손을 들었다.
유호와 차남석도.
“저도 가르쳐 주세요, 선생님.”
“나도 가르쳐 주라. 어제 길우성한테 가르쳐 달라고 했었는데, 더럽게 못 가르치더라고. 라이언도 마찬가지고.”
라이언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라이언과 같은 객실을 사용한 나기혁도.
“네. 일단 아침 먹고 나서 개인 장비 고르도록 해요. 과녁이 다섯 개뿐이니까 일단 지금 손든 분들이랑 미현 누나까지 봐 드릴게요.”
계마루가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크게 외쳤다.
“감사합니돠악!”
계나리가 오빠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시끄럿!”
퍽!
“악!”
“써한, 네 팬이 사람 팬다.”
“…….”
어스래빗 멤버들과 가족의 아침 식사는 조유찬의 부인인 김진희와 차남석, 차남석의 할아버지가 함께 준비했다. 며칠 사이에 물가가 굉장히 오른 데다가 신선 식품 공급도 원활한 편이 아니라서 식탁은 풍족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맛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각자 자신에게 맞는 양궁 장비를 고를 때였다. 차남석이 길미현에게 물었다.
“누나, 나 차 좀 빌려도 될까요?”
“되긴 하는데, 어디 가려고?”
“강아지 데려가도 된다고 연락이 와서요. 남양주에 방치된 차 찾아서 거기에 태울 테니, 개털은 걱정하지 마세요.”
길우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남석 씨 분신술 쓸 줄 알아? 차 두 대를 동시에 어떻게 몰아?”
“한 명이 같이 가줘야지.”
“형, 찐빵이 무슨 연구소로 갔다고 했죠?”
“송파에 있는 곳인데, 여기. 원래 동물용 의약품 임상시험 했던 곳이라더라.”
한율은 차남석이 핸드폰에 띄운 지도를 살폈다.
펫펫바이오. 현재 생포한 소형 괴물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임상시험을 하는 연구소 중 하나로, 게이트 방어선에서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약간 흥미가 일었다. 본래 세상에선 언어의 한계로 게이트 괴물에 관한 자료를 제대로 읽지 못했으니.
“저도 같이 갈게요.”
그 시각, 언덕 위 집 차고에선 이해원의 차가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운전 조심히 할게요
“엄마, 지금 출발해요. …네, 운전 조심히 할게요. 이따 봬요.”
통화를 끝낸 이해원은 라디오 뉴스를 켰다.
[현재 저는 육눈박이 괴물이 쓰러진 장소에 와 있습니다. 이 괴물을 사살하는 과정에 큰 피해가 있었는데요. 우선 건물 수백 채가 본래의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무너졌습니다. 지하철이 있던 장소는 더욱 심각한데요.]
다른 채널.
[한강을 타고 이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괴물이 영동대교 아래에서 발견되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사살됐습니다.]
[출입 통제 구역 외 지역에서 발견되는 괴물의 수가 늘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괴물을 발견하면 절대 직접 잡으려 하지 마시고, 즉시 112나 119에 신고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한 시민단체는 게이트 방어 지휘부의 잘못된 판단과 명령으로 억울한 사망자나 피해가 발생했는지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며 방어선 현장 실시간 중계를 요청….]
[국내 각성자들을 국가에서 관리하겠다는 정부의 계획이 알려지자 일부 1130 증상자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해원은 계속 채널을 바꾸다, 사람 목소리가 없는 클래식 채널에 이르러서야 손을 뗐다.
“……?”
그때 맞은편에 어젯밤에 본 미 대사관 차량이 나타났다. 운전석에 있는 이해원을 알아봤는지 잠시 멈칫했으나, 이해원은 그 옆을 유유히 지나쳤다.
“…잠깐만요, 이해원 씨! 이해원 씨?!”
김민지가 창을 내려 이해원을 불렀다. 그는 미안하단 의미로 비상 점멸등을 잠깐 눌러주곤 큰길로 나갔다.
잠시 후. 어머니와 외조모가 사는 시골집에 도착했다.
“저랑 양평으로 가요, 엄마. 할머니도요.”
“또 그 소리니? 됐다니까. 엄마는 여기가 좋아. 병원도 가깝고, 친구들도 있고.”
“저한테 부담 줄까 봐 그러시는 거 다 알아요. 마음 같아선 제가 여기로 오고 싶지만….”
“됐어, 그만해. 전화로도 말했지? 엄마랑 할머니, 네가 지켜줘야 할 만큼 약하지 않아.”
“…….”
이해원은 뭐라 말하려다 힘없이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이해원이 MOHE를 통해 데뷔한 게, 이채현에게 스폰을 받은 게 전부 병에 걸린 당신의 탓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게이트로 난리가 난 지금, 또다시 자신 때문에 아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한사코 거부하는 거고.
‘어리석게 판단하고 행동한 건 난데.’
이해원은 가지고 온 가방을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그럼 이거라도 받으세요. 요즘 물가가 굉장히 올랐잖아요. 앞으로 더 오를 가능성도 크고. 은행 전산 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는 소문도 돌고요.”
가방엔 현금이 가득 담겨 있었다. 외조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고, 세상에…. 이게 다 얼마야?”
“이 돈.”
어머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혹시 게이트 방어 지휘부에서 받은 거니?”
‘제임스’가 초거대 괴물을 쓰러뜨리는 데에 크게 일조하고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그와 처음 게이트 방어선에 동행했던 이해원에게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렸다. 이우그룹 회장 손녀의 전 연인이자 아이돌이라고.
어머니와 외조모 역시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아니에요. 기획사 전속계약 무효 처리되고 정산금 받은 거, 현금으로 찾은 거예요.”
사실 절반은 이채환이 납치 범죄 피해보상금이랍시고 준 돈이지만, 그 이야긴 삼켰다.
“그럼 네가 갖고 있어야지.”
“이만큼 양평 집에 더 있어요.”
이해원은 창문 쪽을 살폈다. 몇 달 전 서한율의 조언을 듣고서 높이 쌓은 담이 보였다.
“아무튼 이 돈 쓰세요.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 비밀로 하고요.”
“그래, 그래. 우리 강아지가 고생해서 번 돈인데, 절대 비밀로 하고 허튼 곳에도 쓰지 말아야지.”
“그럼 게이트 방어선엔 왜 간 거야? 그 외국인 각성자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고?”
“제임스는 제가 힘들 때 도와준 고마운 친구예요. 그저껜 혼자 게이트 방어선에 간다는 거, 제가 불안해서 같이 간 거고요. 어쨌든 앞으로 그런 위험한 곳에 갈 일은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에선 걱정의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해원은 그런 어머니를 안았다. 팬들에겐 잘만 하던 애정 표현도, 정작 가장 사랑하는 가족에겐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교통사고로 죽을 뻔한 후, 쑥스러워도 꼭 마음을 표현하겠다 다짐했다.
“엄마 아들, 이제 엄마 속 썩이는 짓 안 해요. 믿어주세요.”
그제야 어머니가 이해원의 등을 마주 감싸 안아주었다.
“그래….”
“참.”
이해원은 살며시 떨어지며 말했다.
“저 조만간 미국에 다녀오려고 해요.”
“그 먼 데까진 왜? 무슨 일로?”
다시 걱정으로 물드는 어머니의 얼굴. 이해원은 안심하라는 미소를 지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 * *
정오가 지날 무렵.
한율은 차남석, JE와 함께 남양주의 한 카센터를 찾았다. JE는 차남석과 아직 데면데면한 사이였으나, 계속 펜션과 이해원의 집에만 있는 게 답답하기도 하고, 서울에 있는 집에도 가보고 싶다며 동행했다.
“깨끗해졌네요. 감사합니다.”
사흘 전, 괴물들에게 공격당해 피 흘리는 경찰을 뒷좌석에 태우고 울퉁불퉁 거칠어진 길을 달렸던 차. 잠깐이나마 괴물까지 들어왔었던 터라, 게방부에서 가져가 살폈었다. 이후엔 이곳 카센터에 정비를 맡겼고.
말끔해진 차를 확인한 차남석이 지갑을 꺼냈다.
“얼마 드리면 될까요?”
“괜찮습니다. 이미 게방부에서 돈을 넉넉히 받았거든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한율과 JE도 따라 고개를 꾸벅였다.
“수고하세요.”
“…여기까지 태워다줘서 고맙다. 그런데 정말 연구소도 같이 가게?”
“괴물 관련 연구를 한다니 궁금해서요.”
별것이 다 궁금하다. 차남석은 이런 눈으로 한율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곳이 일반인을 안까지 들여보내 줄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비 찍고 알아서 따라와.”
“네.”
펫펫바이오는 상가와 일반 사무실이 늘어선 평범한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JE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 트럭, 느낌이 묘하다.”
그들이 도착했을 땐 막 대형 트럭 한 대가 펫펫바이오 건물 주차장에 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따라 들어가기엔 부담스러웠는지, 차남석은 대로변에다 차를 세웠다. 한율도 그 뒤에다 차를 댔다.
“생포한 괴물이 들어있을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