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3화 (323/427)

[오늘 대화 정말 즐거웠어요, 한율. 뉴욕엔 언제까지 있을 예정인가요?]

인사했을 때부터 내내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던 여성, 수잔 리드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리 덥지도 않은데 가슴골이 환히 보일 정도로 노출이 심한 옷, 살살 치는 눈웃음, 그리고 테이블 아래에서 발끝으로 다리를 살짝살짝 건드리는 행동에서 목적이 빤히 보였다.

아주 노골적인 성적 유혹.

‘상당한 미인이긴 하지만.’

한율은 수잔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에둘러 거절한다는 의미로.

[이제 보스턴으로 갈 예정이에요. 그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거든요.]

[지금이요? 한율, 바로 어젯밤에 뉴욕에 왔잖아요. 그럼….]

한율은 애니를 향해 미소 지었다.

[이왕 미국으로 오는 김에, 애니 당신과 만나고 싶었거든요.]

[어머.]

애니가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었다.

[어쩌죠? 전 이미 남자친구가…. 아, 이참에 뻥 차버릴까요? 그 사람, 벌써 내가 슈퍼 히어로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거든요. 부담스럽게.]

[그런 의미가 아닌 거 알잖아요.]

한율은 장난스럽게 웃었던 입가를 내렸다.

[언젠가 미국에도 게이트가 열리겠죠. 애니 당신도 높은 확률로 신비로운 힘을 얻게 될 거고요. 그때, 당신이 많이 다치지 않았으면 해요. 왜 고작 이런 힘이냐며, 혹은 이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제대로 못 했냐며 자책하는 일도요.]

아주 천천히 얕은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무력감이, 나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더라고요.]

[한율….]

애니가 안타까운 얼굴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한율도 내려가던 시선을 들어 애니를 향해 웃었다.

[이 말을 직접 해주고 싶었어요. 우리 꼭, 건강하게 다시 만나요.]

훌쩍. 애니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다시 만나요.]

[그전까진 계속 메일도 주고받고요.]

[그럼요, 당연하죠.]

[한율, 그럼 지금 바로 공항으로 가는 건가요?]

[네.]

루크가 잘 됐다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마침 그쪽에 볼일이 있거든요. 가는 길이니 태워다 줄게요.]

한율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야 감사하죠.]

카페를 나와 다른 사람들과 헤어지기 전, 한율은 애니에게 어스래빗 키링 굿즈를 건넸다.

[행운의 부적이에요, 애니.]

[고마워요, 한율. 그럼 몸 조심히.]

[애니도요.]

만났을 때처럼 가볍게 포옹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이번엔 수잔이 와락 한율을 안았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한율.]

[…네, 저도요.]

다른 한 사람과도 악수로 인사하곤, 루크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루크가 넉살 좋게 웃었다.

[차가 조금 지저분해도 이해해주세요.]

[네.]

[음…. 아직 궁금한 게 넘쳐서 그러는데, 비행기 시간까지 여유 있으면 같이 점심 먹는 거 어때요?]

[네, 좋아요. 저도….]

한율도 씩 미소 지었다.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참 많거든요.]

[네?]

한율은 태연하게 거짓말했다. 유창한 텍사스 사투리로.

[아, 제가 영어가 서툴러서.]

[……음.]

한편, 서한율이 루크의 차를 타고 떠나는 걸 확인한 애니는 남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수잔에게 어스래빗 키링을 건넸다. 키링은 지구를 끌어안고 윙크하는 귀여운 토끼 캐릭터와 어스래빗 로고 아크릴, 고리가 전부였다.

수잔의 얼굴에선 조금 전까지 살랑살랑 짓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무언가 설치하래야 할 수 없는 단순한 열쇠고리네요.]

[그럼.]

애니는 돌려 달라는 의미로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나 수잔은 새침한 얼굴로 키링을 핸드백에 넣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져가서 자세히 살펴볼게요.]

[제가 받은 선물이니 꼭 돌려주셔야 해요.]

[네, 네. 그나저나 한율, 아직 어려서 그런 건지 전혀 반응을 안 하네요. 아니, 어리면 더 취약해야 할 텐데.]

수잔의 중얼거림에 다른 남성, 1130 증상자이기도 한 FBI 요원이 피식 웃었다.

[너무 노골적이라 오히려 경계심이 든 거겠죠. 아니면 가슴 큰 금발 미녀가 취향이 아니거나. 재력 있는 젊은 유명인이라 주변에 여자도 많을 테고?]

[한율을 샅샅이 조사해놓고 그런 말이 나와요? 아주 깨끗, 그 자체였는데?]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키링을 돌려받지 못해 뚱해진 애니는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툭 내뱉었다.

[방정맞은 이모 팬 같아서?]

수잔이 울컥했다.

[뭐라고요?]

* * *

한 인터넷 커뮤니티.

[어제 JFK공항에서 서한율이랑 이해원 봤다.]

[(사진)

경찰들이 두 사람 경호해 주더라

그런데 둘이 언제부터 친했음?]

-끼리끼리는 과학이라던데 ㅅㅎㅇ 좀 실망이네

ㄴ제임스:???

ㄴ제임스는?

ㄴ아 ㅅㅂ 잠깐만; 제임스 형 아니야 오해하지 마

ㄴ재벌 3세를 찬 남자가 우스워 보임?

-서한율 미국으로 튐?

-서한율보단 이해원이 왜 미국에 갔는지가 더 궁금하다. 제임스도 그날 이후 출근 안 하잖아 나만 불안하냐?

ㄴ출근ㅋㅋㅋ 게이트 방어선이 직장임?

ㄴ많이 피곤한가부지 나 아는 각성자도 신기해서 능력 막 쓰다가 탈진햇씀

-이해원도 미스터리 해커 집단이랑 연관 있다는 소문 돌던데. 애초에 1130 증상자들 관리하고, 미스터리 해커랑 만난 게 바로 이우그룹이잖아. 스폰서는 이우그룹 회장 손녀 이채현이었고.

ㄴ닥쳐 조용히 해

-미국에도 조만간 게이트 열리나?

-그냥 막 찍은 사진인데도 비율이랑 피부 보소

지인을 통해 해당 게시글 링크를 받은 박가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체 들키지 않게 조심하랬더니, 아주 동네방네 내가 서한율이오! 하고 알리고 다녔네. 뉴욕 미스터리 홀 발생 지역에서도 목격담 나왔어. 태평하게 선글라스 벗고 사진 찍다가 갔다고.”

이해원의 거처.

JE가 졸린 눈을 끔뻑거리며 무심히 대답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냐? 사람들 관심이 집중되면 누구도 함부로 허튼짓 못 할 거 아냐. 그것보다 난 해원이가 걱정이다.”

“한번 전화해볼까?”

박가람은 이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꺼놨어!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시간도 늦었는데 너도 슬슬 가지? 나도 들어가서 자야겠다.”

“새벽 두 시에 사람을 내쫓으려 하다니. 선배가 인간이오?”

“…마음대로 해.”

JE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사용 중인 1층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미간을 구기며 돌아보았다. 박가람이 거실 TV와 조명을 끄더니 졸졸 쫓아왔다.

“왜 따라와.”

“바닥에 이불 깔고 자려고.”

“애냐? 혼자 자기 무서워하게?”

“…….”

슬쩍 시선을 피하는 박가람을 내려다본 JE는 힐끗, 거실 통창 쪽을 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신 방문을 닫았다.

“서한율은 어떻게 골라도 이런 집을 골랐냐.”

“펜션이랑 세트로 저렴하게 사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데, 참 멱살 잡고 싶다. 본인 눈엔 전혀 안 보인다 이거지.”

“그냥 너랑 내가 예민한 거야. 해원이랑 은훤이도 멀쩡히 잘 지내잖아.”

끼융?

“구동이도.”

박가람은 붙박이장에서 이부자리를 꺼냈다.

“그런데 나기혁이 잡은 괴물,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걸까?”

오늘 낮, 나기혁이 계곡 근처 바위틈 굴에 숨어있던 게이트 괴물을 찾아냈다. JE는 구동의 리드 줄로 기절한 괴물을 꽁꽁 묶어서 펜션으로 가져와, 찐빵이 사용하던 이동장에 가뒀다.

차남석과 라이언은 괴물을 보자마자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도망친 새낀가?』

『크기가 딱 이 정도였지?』

괴물은 신고받고 출동한 경찰이 이동장째 가져갔다.

“남양주 미니 게이트랑 여기, 거리상 가깝잖아. 인적이 없는 산 통해서 계속 도망치다 보니 이쪽으로 온 거 아니겠어? 난 나기혁이 더 신기하던데.”

대체 어떻게 괴물의 위치를 정확히 알았냐는 물음에, 나기혁은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꿈에서 괴물이 거기로 숨는 걸 봤어요.』

그 얘기를 계나리에게 들려주자, 계나리는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서 각성 능력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던 거구나.』

“꿈으로 괴물을 찾는 능력이라…. 발동 조건이 영 까다로워서 실전에선 거의 도움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오늘 일을 생각하면 아주 조금은?”

JE는 방의 조명을 껐다.

“그만 떠들고 잠이나 자.”

“엉. …구동아, 왜 내 베개를 뺏는 거냐.”

끼웅.

박가람은 구동을 JE의 침대에 올려놓았다.

“있잖아, 선배님.”

“어….”

JE가 하품을 하고선 침대에 드러누웠다. 박가람은 목 뒤를 긁적이며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고향에 유명한 보살님이 한 분 계시는데….”

박가람은 3년 전, 차남석과 길우성, 서한율과 함께 선녀보살을 찾아갔을 때 들은 이야기, 그리고 최근에 가서 새롭게 들은 이야기를 JE에게 들려주었다.

“어떻게 생각해?”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JE는 되레 물었다.

“너 바넘 효과라는 말 들어본 적 있냐?”

“그게 뭐죠.”

“검색해봐. 잠이 솔솔 잘 올 거다. 자라.”

“엉.”

그때였다.

까악, 까악, 까악!

“……?!”

“깜짝이야!”

밖에서 돌연 까마귀들이 시끄럽게 울었다. JE는 벌떡 일어나 조명을 켜고 밖으로 나갔다. 박가람도 조금 전에 본 귀신을 잊고 후다닥 따라 나갔다.

마법사들의 눈에만 희미하게 보이는 펜션 보호 결계. 그 일부가 진하게 일렁거리며, 감히 결계 내로 침입하려던 자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보통은 결계를 건들기 전에 까마귀들이 저지하는데….”

박가람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까마귀들이 막지 못했다는 건, 완전히 작정하고 넘어오려던 인원이 많았다는 거 아냐?”

“…내려가 보자.”

너 지금 갇혔어

“……?!”

계나리 역시 잠에서 깼다. 결계를 이룬 마력이 일렁거리는 싸한 느낌, 까마귀들의 시끄러운 울음소리에.

위잉, 위잉, 위잉! 곧이어 방범 시스템이 작동하며 요란한 경보음이 터져 나왔다. 외부 조명 또한 일제히 환하게 켜졌다.

발코니로 나가 바깥을 살핀 계나리는 감탄했다.

‘와…. 율이 오빠, 방범 대책을 이중삼중으로 세팅해뒀구나.’

이러면 웬만한 사람이 아닌 이상 당황해서 도망칠 터다. 실제로 대문과 담 위에 켜진 조명 너머, 황급히 움직이는 차 그림자가 보였다.

무작정 펜션으로 들여보내달라고 떼쓰던 사람들의 차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 줄어들던 그들은, 서한율이 미국으로 갔다고 알려지자 해가 질 무렵엔 차 한 대, 사람 한 명도 남지 않았다.

계나리는 노트북을 켜서 펜션 CCTV와 연결된 영상을 확인했다. 차는 번호판을 의도적으로 가려놔서 식별되지 않았다.

우웅.

“네, 지은 씨. 방금 수상한 차 한 대 떠났고, 지금은 CCTV 녹화 시간 되돌려서 정확히 언제 왔는지, 몇 명이 어떻게 침입하려고 했는지 확인하려고요.”

-[박가람이랑 내려갈게요.]

“아뇨, 그 집에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단순한 도둑이면 좋겠지만….”

기잉. 결계가 또 다른 침입 시도를 알린다.

이번엔 계곡으로 길이 난 방향이었다. 까악, 까악. 시끄럽게 울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날아갔다.

가늘게 뜬 계나리의 눈이 은은한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들어오려는 거 보니까 평범한 도둑 집단은 아닌 것 같거든요. 만약 한율 오빠랑 해원 씨 정보를 캐러 온 놈들이면 그 집도 노릴 테니…. 보호 결계는 작동시켰죠?”

-[지금 바로 작동시킬게요.]

“서두르세요.”

결계석을 박살 내거나, 결계 자체를 깰 수 있는 마법사가 아닌 이상 절대 안으론 들어오지 못한다.

‘아직 나도 실력이 안 돼서 강제로 못 깨는걸.’

그래도 침입자들의 정체를 확인해야 대책을 세울 수 있기에, 통화를 마친 계나리는 옷을 갈아입고선 방을 나섰다. 전기충격기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1층엔 경보음을 듣고 잠에서 깬 가족들이 나와 있었다. 막 빗자루를 움켜쥐던 아버지가 심각한 얼굴로 외쳤다.

“딸내미 너 어디 나가려고 그래! 아빠랑 오빠가 나가볼 테니까, 넌 2층에서 활로 엄호 부탁한다!”

“양궁 배운지 고작 며칠밖에 안 된 사람한테 엄호하라니. 아빠, 이 상황에 왜 영화를 찍으려고 해. 그리고 다른 객실에서도 사람들 나오는데, 뭘.”

밖에서 쩌렁쩌렁 길우성의 외침이 들렸다.

“이 새벽에 어떤 놈이 담을 넘어! 덤벼! 다 쏴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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