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잘 막았나
조유찬이 벙벙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설마 지난번 송파에서 발생한 동물 집단 이상 행동… 그건 아니겠지? 그때 하루, 아니, 밤사이에만 그러고 말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신고부터 해야 하나?”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용산이었다. 유호는 핸드폰을 꺼내서 무리 지어 얌전히 걸어가는 개떼를 촬영했다.
조유찬이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찼다.
“주인들이 애타게 찾고 있을 텐데. 얼른 집으로 돌아가렴, 얘들아.”
“그때 못 찾은 개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대피하면서 버리고 간 이 지역 개들 아닐까요?”
“어?”
“송파에서 집 밖으로 뛰쳐나갔던 개들은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나중에 다들 얌전히 있는 게 발견돼서 동물 관련 단체, 마이크로칩이랑 이름표 덕분에 대부분 주인에게 돌려보내졌다고 알고 있거든요. 고양이들은 모르겠지만.”
유호는 드문드문 지나가는 다른 차나 행인을 살폈다. 무서워서 건물 안으로 숨은 사람, 차에 탑승한 사람 모두 유호처럼 신기하다는 듯 핸드폰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눈에 띄는데도 잡으려고 시도하는 사람도 없고. 개들도 열흘 정도 헤맨 것 같은 꼴을 봐선….”
하아. 조유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열흘이면 게이트 열리고 얼마 안 됐을 때네. 어떻게 인간들이 그러냐.”
“휴가철이나 명절 연휴에도 외지에다 동물 버리고 가는 사람 많잖아요. 본인들 목숨부터 건사하려니 더 쉽게 자기합리화하면서 버리고 간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우리 남석이랑 라이언은 강아지 데리러 갔다가 괴물이랑 싸우기까지 했는데!”
유호는 서한율과 계나리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펫펫바이오에서 실험하던 게이트 괴물 중, 동물에게 영향을 끼치는 개체가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 괴물이 송파구에서 벌어진 동물 집단 이상 행동의 원인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그리고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고 했었지.’
『펫펫바이오에서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거나, 아니면 펫펫바이오도 그런 힘이 있다는 걸 파악하기 전에 도망친 것일지도 모르지만요.』
‘버려진 개들이 무리를 이루는 일이야 종종 벌어지는 일이지만, 만약 그 괴물의 영향이라면.’
유호는 핸드폰 카메라를 확대했다.
바로 이 근처에 그 괴물이 있지 않을까.
‘설마 저 족제비 닮은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누군가 버리거나 잃어버린 애완 페럿일 거야.’
게이트 괴물이 저렇게 귀여우면 안 되잖아.
저도 모르게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유호는 커다란 개의 가방에서 쏙 나온 작은 머리에 초점을 맞췄다.
찰칵.
* * *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양평으로 돌아가기 전. 한율은 이해원의 차를 타고 어스래빗 숙소로 향했다. 이해원의 몸 여기저기에 묻은 피를 우선 씻어내고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채현 씨 만난 거 맞죠?”
“응….”
이해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예전 이야기만 했어. 미스터리 해커나 제임스, 게이트 관련된 이야긴 전혀 꺼내지 않더라.”
고개를 끄덕인 한율은 더 깊게 묻지 않았다. 지극히 사적이고 조심스러운 영역이므로.
“뒤에 둔 상자는 뭐에요?”
“김대현한테서 날 지켜준 까마귀. 양평 집 정원에 묻어주고 싶은데. 괜찮을까?”
“그럼요.”
사실 김대현은 계나리가 넘겨준 각성자 리스트엔 없는 인물이었다. 살상력이 강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리스트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계나리가 겪은 시간대에선 일찌감치 사망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게이트를 몇 시간 동안 막고, 대피가 순조롭게 이어지면서 죽지 않게 된 다른 각성자들이 더 있을지도.’
현재 국내 각성자 리스트가 있기는 하지만, 능력 조사는 아직이니 말이다.
“형이 마법 사용하는 모습은 김대현 말고 아무도 못 본 거죠?”
“글쎄…. 기절한 척하고서 엿보거나 소리를 들은 놈이 있을지도 몰라.”
“어쨌든 국가 관리 대상에 포함되면 이런저런 활동에 제약이 걸릴 테니, 제가 게방부에 잘 말해볼게요.”
“고마워. 한율이 너한텐 늘 신세만 지네.”
“별말씀을. 제자한테 이 정도도 못 해줄까 봐요.”
이해원은 한율에게 고마운 눈길을 보내곤,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어스래빗 숙소.
박가람이 씩씩거리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호 형이랑 유찬이 형이 나 버리고 갔어. 나도 절도범 멱살 잡을 줄 아는데!”
“그래서 버리고 간 거 아닐까요.”
“양평에 쳐들어왔던 놈들 잡았다며. 어떻게 됐어?”
한율은 이해원이 씻는 동안 박가람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김대현 패거리를 향한 박가람의 욕을 한 귀로 흘려들을 때였다.
우웅. 유호가 동영상과 사진을 보냈다.
“……?”
무리 지어서 도로를 가로지르는 개떼의 영상이었다. 그리고 족제비를 닮은 작은 동물의 머리.
우웅. 이어서 조유찬의 전화.
-[한율아, 시간 괜찮으면 회사에 잠깐 들를래? 이탈리아에서 한율이 너한테 옷이랑 구두, 여러 아이템을 선물로 보냈거든. 가서 스타일리스트랑 내일 출국할 때 입을 옷, 도착해서 입을 옷을 미리 고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스타일리스트분들, 출근하셨어요?”
-[응. 한율이 너 멋있게 보내서, 세상 사람들한테 자랑하고 싶대.]
아무리 회사가 통제 구역에 포함되진 않았다고 해도, 게이트 방어선을 빠져나오는 괴물 수가 늘어나는 상황이라 출근하는 게 무서웠을 텐데.
한율은 시간을 확인했다.
“네. 지금 바로 갈게요.”
-[가람이랑 같이 가면 되겠다. 혼자는 무섭잖아. 내가 걱정되기도 하고….]
어스래빗 활동은 멈췄지만, 조유찬이 제임스가 한율의 차를 몰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을 리 없었다. 사람들이 ‘서한율도 미스터리 해커랑 관련 있는 거 아니야?’라고 떠드는 이야기도.
그래도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그의 목소리에, 한율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네.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응. 조심, 또 조심하는 거 잊지 말고.]
“네.”
그러나 한율은 박가람에게 같이 가자는 얘기 대신, 그가 빌려 간 픽업트럭 키를 돌려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다른 차는 멀리 세워두고 왔거든요. 나중에 해원이 형이랑 양평으로 와요.”
“나도 회사 가보고 싶은데.”
“키.”
“…자.”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앞.
5년 전부터 내 집 드나들듯 수없이 출근한 회사 앞은 고요했다. 소속 아이돌을 보기 위해 늘 모였던 팬들은커녕 행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길우성을 발견하고, 배고플 때 간식거리를 사 먹었던 편의점 또한 매대가 텅 빈 채 문이 잠겨있었다.
WB래빗 정문도 셔터가 내려진 상태. 이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것으로, 한율은 주차장의 비상구를 통해 내부로 들어갔다.
‘2주도 안 지났는데.’
현재 바깥 기온은 30도. 그러나 회사는 에어컨 특유의 냄새가 짙지 않은데도 묘하게 서늘했다. 늘 환하게 켜져 있던 조명도 대부분 꺼졌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쓸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한율은 로비에 걸린 어스래빗 대형 포스터를 보다가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무심코 스친 시야. 어스래빗 연습실로 들어가는 지하 출입문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
이제 두 번 다시 어스래빗 연습실에서 멤버들과 함께 노래와 안무를 연습하고, 지쳐서 바닥에 뻗은 채 시시한 잡담을 나눌 일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컴백하고 처음이자 마지막 음악방송을 마친 뒤, 게이트의 기운을 감지했을 때 느꼈던 아쉬움과 비슷한 감정.
유희는 끝났건만.
한율은 천천히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서한율?”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2층 계단 위에서 난간에 팔을 걸치고 있던 드림래빗의 박세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회사엔 어쩐 일이야?”
건물 안이 워낙 조용해, 그녀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한율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넌 여기에서 뭐 해?”
박세은이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대답했다.
“우리야 연습하러 왔지?”
우리? 연습? 현재 엔터 산업 전반이 멈추고, 지역 행사 또한 줄줄이 취소됐을 텐데.
그때였다. 적막한 건물 안 어디선가 작지만 경쾌한 음악이 들리더니, 탁탁탁. 누군가 복도를 달리는 기척이 가까워졌다.
와락! 드림래빗의 막내 멤버 신혜란이 박세은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세은 씨! 여기에서 뭐 해! …어? 한율 선배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내일 이탈리아로 가는 것 때문에 오셨구나. 맞죠?”
“네. 드림래빗 분들은?”
“취소되지 않은 해외 공연 스케줄이 있어서, 그거 연습하러 왔어요.”
슬슬 고개가 아파, 한율은 계단을 올랐다.
“회사에 있는 줄 알았다면 뭐라도 좀 챙겨왔을 텐데.”
“이탈리아에서 돌아올 때 챙겨주시면 되죠?”
한율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대신, 가벼운 미소를 짓곤 박세은에게 물었다.
“사무실에 오 팀장님 계시지?”
“응.”
2층 사무실엔 오동식 팀장 말고도 서너 명의 직원이 출근해서 일하고 있었다.
“왔어요, 한율 씨?”
“어서 오세요.”
“안녕하십니까.”
어느 때보다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 한율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일이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하곤 오 팀장의 자리로 향했다.
오 팀장과 만나는 건 게이트가 열리기 바로 전날, 컴백 쇼케이스 이후 처음이었다. 전화나 단톡방으로 서로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다 알지만, 오 팀장 또한 평소보다 살갑게 한율을 맞이했다. 일어나서 한율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듯 두드렸다.
“유찬 씨는 가람이랑 같이 보낸다고 했는데. 혼자 왔어?”
“네. 스타일리스트 누나는요?”
“안쪽 회의실에.”
오 팀장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한율은 스타일리스트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이탈리아 명품 회사에서 보낸 옷과 구두, 가방, 판매용 상품이 아닌 특별한 맞춤 브로치 등을 확인했다.
“한율이 네가 가진 이 브랜드 아이템도 같이 매치하면 좋은데.”
“비싼 건 거의 도둑놈들이 털어가서요.”
“나쁜 놈들!”
“아. 양평에 가져다 놓은 짐 속에 몇 개 남았을지도 모르겠네요.”
“…….”
분개했던 스타일리스트의 눈이 반짝거린다.
“괜찮으면 지금 같이 가실래요?”
“그래도 돼?”
“네. 남는 객실도 많고, 형수님이나 길우성네 누나도 있어서 그리 불편하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가져간 협찬 물품도 회수해서 반납해야 하잖아요.”
“응! 그럼 바로 준비할게. 조금만 기다려.”
“네. 천천히 하세요.”
스타일리스트가 회의실을 다급히 나갔다.
“오 팀장님은 어떠세요? 양평에 아직 한 번도 안 오셨잖아요.”
“할 일이 남아서 다음에.”
“네.”
테이블에 옷과 구두, 각종 아이템이 어지럽게 널려졌으나, 두 사람은 정리한답시고 함부로 손대지 않았다. 잘못 개켰다간 스타일리스트에게 각이 흐트러졌다며 혼나는 까닭이었다.
아주 잠깐 대화 없이 침묵이 흐르고, 오 팀장이 말을 꺼냈다.
“대본 들어왔다, 한율아.”
“이 시국에요?”
“어떤 상황이 닥쳐도 낙관적으로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조만간 드라마랑 예능 프로그램도 하나둘 정상 방송될 거란 소문도 돌아. 초거대 괴물 출현 후로 게이트에서 나오는 괴물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단 이야기도 있고.”
“그럼….”
오 팀장이 한율을 보며 웃었다.
“어스래빗, 활동 재개할 수 있어.”
“아….”
한율은 속으로 작게 한숨 쉬었다.
내가 너무 잘 막았나.
쫓아가서 뒤통수를
미국 뉴욕.
게이트 조사위원회에 파견된 FBI 요원, 수잔 리드는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고 수상해.’
매사추세츠 보스턴에서 서한율의 행적을 놓쳤다. 처음엔 감시 임무를 맡은 요원들의 근무 태만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요원들이 하필 그날 숙면했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웠다.
보스턴 공항에 렌터카를 반납한 이후 서한율의 흔적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카드 사용 기록도 없고, 핸드폰도 내내 꺼졌다. 워싱턴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까지의 며칠이 새하얀 공백이었다.
‘돈은 오로지 현금으로. 핸드폰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 우리가 모르는 다른 핸드폰을 갖고 있었단 소리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재 유명한 각성자들은 초대박이 난 할리우드 스타처럼 팬덤이 형성, 순식간에 규모가 커지는 중이었다.
가장 인기가 많은 건 초거대 괴물을 잡는 데에 일조하며 엄청난 활약을 보인 제임스. 귀티가 흐르는 미남이라 여성 팬들이 무척 많았다.
그다음은 진은수. 작고 가냘픈 소녀가 용감하게 게이트 방어선에 합류하겠다 선언하고 정말로 훈련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감탄하며 그녀를 응원하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외모에, 노래도 잘 부르는 스타이기도 하고.
두 사람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게 바로 서한율이었다. 각성자로서의 능력은 웃음이 나올 만큼 귀여운 수준이지만, 본래 글로벌 OTT에 등록된 영화와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하며 얼굴이 알려진 배우라.
‘외모도 훤칠하고, 젊고.’
아무리 한국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서한율이라고 하면 ‘아. 손부채질 능력의 한국 각성자’라고 알아볼 정도였다.
그런데 인터넷이나 SNS를 아무리 뒤져봐도, 공백 동안 서한율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목격담이 한 줄 뜨지 않았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면 수상하다며 신고, 경찰이 불러세우는 나라가 바로 여기 미국인데 말이다.
‘단순히 돈 많은 일반인이 감시와 추적을 완벽히 따돌린다고? 말이 안 돼. 절대로. 그를 도와준 사람 혹은 단체가 있어. 그리고 그 단체는 분명 미스터리 해커….’
“수잔.”
동료가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가 책상에다 손을 짚으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의 동명이인이 죽었어.”
“무슨 소리야?”
“메인주 포틀랜드에 사는 수잔이 죽었다고. 바로 한 시간 전에,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웃 주민에게.”
“포틀랜드의 수잔….”
입속으로 중얼거린 수잔은 미간을 깊게 찡그렸다.
“1130 증상자?”
“그래. 우연일 수 있겠지만, 루크에 이어서 두 번째야.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말이지.”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수잔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우연이겠지. 사망 원인이 너무 다르잖아. 루크는 약물 과다 복용 부작용으로 비틀거리다 사고를 당한 거니까. 스스로 약을 먹는 장면이 CCTV에 찍히기도 했고.”
“일단 알고만 있으라고. 그나저나 한국 소식 들었어? 이해원 집과 서한율 펜션에 침입하려 했던 한국 각성자들이 전부 잡혔대. 그리고 제임스가 서한율 명의의 차를 타고….”
“내가 서한율도 미스터리 해커와 관련된 것 같다고 말했잖아.”
“차를 빌려줄 만큼 가까운 사이일 줄은 몰랐지. 이것도 물론, 제임스가 미스터리 해커 집단일 때의 얘기지만. 어쨌든, 당신도 서한율 따라서 이탈리아에 갈 거야?”
수잔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무슨 서한율 스토커야? 미국에서 술도 못 마시는 어린애를 상대로?”
“그래. 차였다고 집착하는 거 꼴불견이야. 그러지 마.”
퍽.
“아욱!”
“이탈리아에 파견된 요원들한테나 잘하라고 전해. 서한율의 이탈리아 패션쇼 참석 사실이 널리 알려진 만큼, 온갖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테니까.”
* * *
한율이 스타일리스트 두 명과 함께 양평으로 돌아온 건 저녁이 될 무렵이었다. 몇 년 동안 함께 일한 사이라, 어스래빗 멤버들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고 냉동고에 있던 고기를 꺼냈다.
“서한율의 귀국과 나쁜 놈들을 잡은 걸 축하하며.”
“서한율이 이탈리아 스케줄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기를 바라며, 건배.”
“건배!”
정말 술잔을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멤버들과 조유찬 부부, 스타일리스트들은 건배를 외치고 음료수나 물을 시원하게 마셨다.
“크으!”
박가람은 김이 빠진 감탄사를 냈다.
“크으….”
이 자리에서 한율이 이탈리아에서 곧장 마요르카섬으로 떠날 거란 사실을 아는 건 유호와 박가람뿐이었다. 그리고 한율은 당분간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거란 이야기를 이탈리아에서 전할 예정이었다.
“한율이 너 내일 몇 시 출국이랬지?”
“아침 9시요.”
“그럼 새벽에 나가야겠네. 시차 적응도 제대로 하기 전에…. 피곤하겠다.”
“괜찮아요.”
“야, 써한.”
강보배에게 살짝 웃어 보인 한율은 길우성을 보며 입가를 내렸다.
“묻지 마.”
“허, 참! 아니, 내가 뭘 물어볼 줄 알고?”
“들어보나 마나, 왜 제임스가 내 차를 타고 다니냐 이거 물어보려던 거겠지.”
“잘 아네! 나 제임스 형님 사인 좀.”
한율은 길우성을 무시,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박가람에게 건넸다.
“제임스가 각성자 놈들 검거 현장에다 제 차를 놓고 왔거든요. 회수 부탁할게요.”
“낮에 진작 말하지. 그럼 올 때 들러서 가져왔을 거 아냐.”
덥석. 길우성이 박가람의 어깨를 잡았다.
“회수하러 갈 때 나도 데리고 가, 가람 씨.”
“싫당.”
“그런데 그 도둑놈들은 어떻게 됐어? 그놈들이 훔친 물건은?”
스타일리스트의 물음에 유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가 회사 공식 입장이랑 SNS로 도둑맞았다고 알렸잖아요. 그러니까 추적당하기 쉬운 명품은 장물업자한테 넘기고, 나머진 중고 거래 플랫폼 통해서 팔아치웠대요. 그래도 경찰이 최대한 물건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준다는데….”
하아. 재차 깊은 한숨을 내쉬며 유호가 사이다를 집었다.
“요즘 경찰이 워낙 바쁜가요. 그나저나 절도범들, 정말 뻔뻔하더라고요. 이모님… 아니, 그 아줌마, 모자 뒤집어쓰고 고개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이젠 정말 사람, 함부로 믿으면 안 될 것 같아.”
이건우가 울컥한 얼굴로 말했다.
“몇 년 동안 집을 맡길 정도로 신뢰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뒤통수를 빡! 하고 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또 이렇게 배신당하는 일 생기면 그땐 내가 쫓아가서 뒤통수를 빡! 하고 쳐버릴 거야.”
부웅. 이건우가 허공에다 휘두른 손에서 바람이 일었다.
“…….”
펜션에 온 하루 이틀 동안은 게이트 사태에 촉각을 곤두세우느라 아무것도 못 했지만, 이후에는 기구 없이도 열심히 운동하는 이건우를 봤었다.
저 손에 맞으면 정말 아프지 않을까.
한율은 조용히 제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TV로 시선을 옮겼다.
뉴스 자막.
[게방부, 각성자 범죄 조직 검거]
이해원의 집 담을 넘는 침입자들의 CCTV 영상 일부가 나왔다.
아삭아삭. 라이언이 생당근을 먹으며 말했다.
“조직? 그렇게 규모가 컸었어?”
이어진 다음 뉴스는 [정부, 각성자 국가 관리 정책 계획 공식 발표], [각성자 특별법 발의]였다.
왁자지껄한 저녁 식사가 끝난 뒤.
2층으로 올라온 한율은 신중히 고민하며 짐을 쌌다. 오랜 해외 스케줄 경험을 토대로,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최소한만 담았다. 대신, 국내 회사에서 제조된 달냥의 사료와 간식을 챙겼다.
‘좋아하는 장난감도 챙기고, 먹다 만 영양제도….’
딩동.
“……?”
달냥의 짐을 챙기고, 구동이 마실 수액을 따로 물병에다 옮겨 담을 때였다. 한율은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고선 캐리어를 덮고 지퍼까지 채웠다.
길우성과 라이언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길우성이 덥석! 문을 잡으며 괴상한 웃음을 지었다.
“흐흐. 나는야 물음표 살인마. 써한 널 죽이러 왔다.”
“꺼져.”
다음 날 새벽. 한율은 캐리어와 달냥, 구동을 함께 넣은 이동장을 들고 1층으로 내려왔다. 로비에는 박가람과 유호, JE가 기다리고 있었다.
박가람이 잠이 덜 깬 부스스한 얼굴로 웃었다.
“봐. 예상 시간보다 더 일찍 내려올 거라 그랬지?”
“저 배웅해주려고 안 자고 온 거예요?”
“너 말고 구동이 보러 온 건데? 구동아.”
JE가 한율이 든 이동장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구동이 그물창에다 코를 콕 박고 JE의 냄새를 맡더니, 눈을 감고선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끼웅?
JE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꼭 구동이까지 그 먼 곳으로 데려가야겠냐? 오랫동안 길바닥 헤매다가 이제 겨우 보금자리 찾은 애를?”
“얘 원래 야생 마물인데요. 그리고 또 털 색이 변하면 어떡하려고요.”
“내가 수련 열심히 한다니까?”
“마력 모이는 족족 구동이한테 쓰면 성장은 언제 하시려고요.”
“…….”
JE가 힘없이 입을 다물었다. 유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제는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못 물어봤는데, 달냥이랑 구동이 데리고 타는 거 허가받은 거야? 다른 이탈리아 사람들도 비행기에 같이 탄다며. 유찬이 형은 알아?”
“달냥이 화장실이랑 밥 문제는 어떡해?”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가받았어요. 요즘 동물 데리고 전용기 타는 사람이 많아서, 펫 케어 프로그램까지 준비되어 있다고 하더라고요. 오히려 고양이랑 토끼가 비행기 소음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는데 괜찮겠냐고 걱정해주던데요?”
“와아. 이게 바로 전용기 클라쓰인가.”
“유찬이 형은 길우성이 듣고 난리 칠까 봐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거고요.”
“길우성만 난리 치겠냐. 우리도 지금 얘네 괜찮을까 걱정되는데.”
“여차하면 재우면 되니까 괜찮아요.”
“나쁜 집사다!”
“묘권 좀 챙겨주지?”
므앙.
한율은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어두컴컴한 하늘. 야외에 설치된 조명 아래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조유찬이 보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어….”
세 사람의 얼굴에 머뭇거림과 아쉬움이 스쳤다.
계나리가 겪은 미래의 한율은 6, 7년 동안 마요르카 게이트 앞을 지켰다. 바꿔서 생각하면 그 기간엔 별일이 없었다는 뜻. 그래서 한율은 몇 달 정도만 지켜보고 돌아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히말라야와 서울 게이트가 예상보다 일찍 열렸다. 마요르카 게이트 역시 그러지 말란 법이 없으므로, 한율 또한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유호가 손을 내밀었다.
“캐리어 이리 줘. 주차장까지 들어줄게.”
“괜찮아요. 별로 안 무거워요.”
한율은 그렇게 말하면서 캐리어를 덥석 넘겼다. 유호가 휘청거렸다.
“…무거운데, 한율아? 대체 뭘 넣은 거야?”
“달냥이 사료랑 간식, 구동이가 마실 수액이요.”
JE도 함께 걸음을 옮겼다.
“도착하면 전화해라?”
“네. 다들 저 없다고 수련 게을리하면 안 돼요.”
“알았다.”
그리고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탁. 박가람이 손잡이를 잡으며 앞을 막았다.
“내가 전에 말했지? 여유 생기면 너 있는 마요르카로 가겠다고. 그거 그냥 한 말 아니다.”
“…….”
한율은 박가람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팅팅 부은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는 게 참 귀여워서.
툭.
“네, 한식 기대할게요.”
“…너 인마, 키 좀 크다고 형 머리를 쓰다듬어? 엉? 이런 건방진 동생을 보았나!”
차에 타기 전엔 계나리의 가족이 지내는 객실을 돌아보았다. 불이 꺼진 캄캄한 객실 2층.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소녀의 실루엣이 보였다.
다른 멤버들의 객실은 조용했다. 그들은 한율이 여느 때처럼 스케줄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올 거라 믿고 잠들었을 터다.
한율은 가볍게 손을 들어 계나리에게 인사하곤, 이동장을 품에 안은 채 조수석에 탔다.
잠시 후, 인천국제공항.
수많은 취재진과 팬들의 배웅을 받으며 한율은 이탈리아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