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2화 (334/427)

썸은 무슨

오후. 비가 추적추적 쏟아지기 시작했다.

양궁 장비를 관리동으로 들인 길우성이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털었다.

“내일은 비 온종일 내린다던데. 서울은 괜찮을까?”

“글쎄.”

게이트 괴물 영상을 유심히 보던 차남석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장마. 폭우가 쏟아진다면 가시거리가 나빠지는 건 물론, 그러잖아도 불안정해진 지반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아직 처리하지 못한 괴물 사체도 많다던데, 걱정이긴 하네. 각종 오염물질도 그대로 하수구로 흘러 들어갈 거고.”

“군인들 진짜 고생 많겠다. 기부라도 하면 조금 나아질까?”

“하고 싶으면 말리진 않겠는데.”

차남석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커피머신 앞으로 향했다.

“언제 좋아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선 최악의 경우도 늘 생각해야 하지 않냐? 다른 사람 돕는다고 돈 썼다가 정작 네 가족한테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하려고.”

“음…. 잘 생각해 보겠소.”

비 내리는 펜션은 고요했다.

서한율이 달냥과 구동을 데리고 조유찬과 함께 이탈리아로 떠났다. 은근슬쩍 눌러살 것 같았던 나기혁도 원카운트 멤버들의 귀국 소식을 듣고선 서울로 돌아갔다. 강보배는 부모님이 데리러 와서 강원도 본가로.

강보배의 부모님은 다른 멤버들에게도 같이 가자 했지만, 모두 폐가 될까 봐 사양했다.

고민이 많아 보이던 유호는 스타일리스트들을 데려다줄 겸, 서울에 있는 부모님을 뵈러 간다며 나갔다. 여기엔 라이언도 동행했다. 박가람은 객실에 있는지 아까부터 보이지 않았다.

“어?”

핸드폰을 확인하던 길우성이 놀란 소리를 냈다. 차남석은 커피머신에 컵을 놓으려던 자세로 돌아보았다.

“왜.”

길우성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미랑이 누나, 지금 펜션에 온대.”

“…그래?”

한 박자 늦게 대답한 차남석은 컵을 올바른 위치에 맞췄다.

“박현우처럼 잠깐 왔다 가는 거지?”

“당연하지. 여기에서 지내러 올 리 없잖아. 형들이 여기에 있는 거 이프림이 다 아는데 무슨 스캔들 터지라고. …아니, 잠깐 왔다 가도 터지려나? 아냐. 이젠 별장 앞에 죽치는 사람도 없으니 괜찮지 않을까?”

“…….”

위잉. 차남석은 컵에 내려지는 커피를 보며 가만히 섰다. 길우성이 툭툭 손을 털고선 옆을 지나갔다.

“미랑이 누나 온다고 멋 부리면 안 돼, 남석 씨.”

“…내가 왜?”

길우성은 쭈욱 기지개를 켜면서 우산을 챙겼다.

“나기혁이 가서 천만다행이당.”

별 뜻 없이 그냥 한 말인가?

차남석은 관리동을 나가는 길우성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있는 듯 없는 듯, 테이블 앞에 앉아서 글로벌 팬덤 플랫폼 스타아이로 이프림과 소통하던 이건우가 조용히 말했다.

“별 뜻 없이 그냥 한 말 아닐걸, 남석아? 우성이, 은근히 눈치 빠른 거 알지?”

“……?!”

차남석은 놀란 눈으로 이건우를 돌아보았다. 이건우가 문 쪽을 힐끗하더니 그를 향해 씩 웃었다.

“우성이, 아직 모르잖아. 너랑 미랑이, 입사 초기에 썸 탈 뻔했던 사이인 거.”

“썸은 무슨.”

차남석은 한숨을 쉬며 완성된 커피를 들었다.

“저 그때 중학생이었잖아요. 그 나이대야 뭐…. 선배님이 너무 예쁘니까 몇 번 시선이 간 게 다였다고요. 그리고 선배님은 저한테 전혀 관심 없었고. 지금은 저도 아무 감정 없어요.”

“그래, 그래.”

이건우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 시국엔 사소한 기류도 위험하게 번질 수 있으니까 조심하자, 남석아.”

“감정 없다니까요.”

* * *

서울의 게이트 방어선 본부.

김관식 소장과 면담을 마친 이해원은 정상욱 중위와 자리를 옮겼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여기라면 제아무리 온갖 전쟁터를 겪은 용병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니까요. 그리고 가족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당 지역 군부대와 경찰서에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 부탁해두었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해원 씨 혼자 김대현 패거리를 잡았는데, 우린….”

정상욱이 분한 얼굴로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애초에 그자를 민간 병원에 두지만 않았어도.”

김대현을 놓친 사과는 김관식 소장에게 먼저 받았다. 이해원은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 일로 죄 없는 군인 두 명, 간호사 한 명도 사망했으므로.

“김대현의 동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법대로 처리될 겁니다. 다만…. 아, 아닙니다.”

말하려던 걸 삼킨 정상욱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해원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해원 씨는 준비를 마치고 내일 아침 10시까지 훈련소로 가면 됩니다. 머리카락은 굳이 자르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처럼 단정한 흑발에, 묶을 정도로 길지만 않으면 됩니다.”

“네? 하지만 입대하는 건데….”

“게이트 방어선에 자원하는 각성자에만 두발 규정을 느슨하게 적용해주자. 현재 우리가 상대하는 적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잖나. …윗선에선 이렇게 말하는데.”

고작 머리 스타일 지켜준다는 말에 넘어가, 게이트 방어선에 자원하는 미필 각성자가 얼마나 있으려나.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정상욱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이해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정상욱이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자연스럽게 멈춘 걸음.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해원 씨가 누구보다 멋있게 카메라에 담겼으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게 무슨….”

“윗선에서, 각성자는 앞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타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강한 각성자의 아이콘, 제임스처럼요.”

몇 년 동안 아이돌 생활을 했었다. 이해원은 정상욱이 말하는 바를 대충 이해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활약은 물론이고 보이는 모습도 중요하겠죠.”

“그래도 원하시면 짧게 자르셔도 됩니다. 강요는 아니니까요.”

“네. 그나저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네요.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

정상욱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의 건강이 걱정입니다.”

본부를 나온 이해원은 정상욱과 인사를 나눈 뒤 자신의 차에 올랐다. 앞서 게이트 방어선 합류 의사를 보였던 미필 각성자들이 그랬듯, 그 역시 육군훈련소로 가서 3주 동안 기초 군사 훈련을 받기로 했다.

‘필요한 건 다 알아서 준비해준다고 그랬으니.’

이탈리아와의 시차를 검색하고선 서한율에게 톡을 보냈다. 그쪽은 이른 아침이지만, 왠지 일찍 일어났을 것 같아서.

[한국 날짜로 내일 훈련소 들어가기로 했어.]

역시나 벌써 일어났는지, 금세 답장이 왔다.

-[일요일에요?]

[각성자는 취급이 다른가 봐. 훈련도 일반 훈련병이랑 다르다더라.]

-[한시라도 빨리 방어선에 투입하고 싶은 각성자를 염두에 둔 것 같네요. 어쨌든 몸조심해요.]

[응, 고마워^^]

통화를 끊은 뒤엔 내비게이션에 훈련소 주소를 등록했다.

“…….”

이해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핸드폰 지도 앱을 켰다.

[미용실] 검색.

몇 시간 후, 밀라노.

패션쇼 장소로 이동 중인 차 안. 한율은 마법 학교 단톡방에 올라온 사진을 보곤 저도 모르게 웃었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어색한 얼굴로 웃는 이해원의 셀카. 블블 민준의 입대 당시 사진을 봤을 때처럼 느낌이 묘했다.

박가람이 웃음 의성어로 도배했다.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모티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워낙 잘생겨서 짧은 머리도 어울림ㅇㅇ]

유호.

-[실컷 웃고 나서?]

계나리는 ‘헉’하는 캐릭터 이모티콘을 올리곤 말했다.

-[너무 짧게 자르신 거 아니에영ㅜㅜ?]

이해원의 대답.

-[여름이라 덥기도 해서요ㅎㅎ]

한율도 톡을 올렸다.

[늠름해지셨네요.]

[(이모티콘)]

“재밌는 거라도 떴어?”

조유찬이 한율을 돌아봤다가 물었다. 말 대신 이해원의 사진을 보여주자, 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잘생긴 친구가 잘생긴 밤톨이 됐네.”

패션쇼가 열리는 곳은 초대 손님을 보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 초대받지는 못했지만, 눈길을 받고 싶어서 온 각양각색의 사람들, 엄청난 취재진까지 뒤섞여 북새통을 이뤘다.

다행히 현장 스태프들과 경찰이 길을 잘 통제해, 한국 초대객들이 탄 차는 무난하게 입구 앞으로 나아갔다. 앞서 도착한 초대객의 포토타임을 망치면 안 되기에 천천히.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직 멈추지도 않은 이 차를 향해 큰 환호성과 시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어스래빗 월드투어 당시, 공연장에 다다랐을 때도 이탈리아 이프림에게 비슷한 환호성을 들었다. 하지만 아이돌그룹은 개개인 따로 떨어뜨려 놓으면 인기가 고만고만한 경우가 대부분.

한율은 진사랑과 배우를 향해 말했다.

“다른 사람 차로 착각했나 봐요.”

진사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닌 것 같은데요? 한율 씨, 본인의 인기가 얼마나 많은지 정말로 모르는 거 아니죠?”

“한율 씨가 뉴스에서 각성 능력 밝히는 너튜브 영상 조회수, 확인한 적 없어요?”

“제임스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보다도 못한데.”

“한율 씨 글로벌 OTT 상위권에 들었던 드라마의 주연 배우이자 K-POP 인기 아이돌이잖아요. 화제성이 완전.”

진사랑이 엄지를 척 세웠다.

“이건데요?”

“한율아, 너 SNS 팔로워 마지막으로 확인한 게 언제야?”

조유찬의 물음에 한율은 SNS에 접속했다. 솔직히 개인 SNS는 지인이 보낸 DM이나 확인할 때만 접속했던 터라, 팔로워 숫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었다.

“아. 많이 올랐네요.”

조유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웃었다.

“4천만을 달성했는데 소감이 그것뿐이니.”

“말실수 한번 잘못했다간 대역죄인이 될 것 같아서 무서운데요.”

“그래도 오늘 찍은 사진은 개인 SNS에 올려야 하는 거 잊으면 안 돼.”

“네.”

대화하는 동안 차가 입구 앞에 도착했다.

꺄아아악! 한율! 서한율! 배우에 이어서 한율이 차에서 내리자, 환호성이 더 크게 머리와 고막을 때렸다. 경호원을 피해 가까이 들어온 카메라 플래시도 눈을 아프게 했지만, 익숙하게 참으며 진사랑이 잘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굽이 너무 높은 것 같아요, 선배님.”

“감사합니다.”

세 사람은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미리 어떤 유명 언론사와 방송국이 어느 위치에 있을지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차례대로 시선을 맞춰주곤 포토월로 이동, 다시 사진을 찍은 뒤 팬들에게 손 인사를 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바짝 붙었던 경호원들이 살며시 거리를 벌리고, 스태프들이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초대객 자리엔 TV나 뉴스에서 본 유명인이 많았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가볍게 눈인사하며 착석.

옆자리에 앉은 할리우드 배우가 한율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율, 맞죠? 만나서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정말 재밌게 봤어요.]

[영광이군요. 나중에 애프터 파티에 참석할 거죠? 당신을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어요. 각성자의 능력을 직접 보고 싶기도 하…. 오!]

살랑. 가볍게 바람을 일으켜 주자, 할리우드 배우가 들썩거리며 과장된 반응을 보였다.

[역시 게이트가 없는 곳에서도 초능력을 쓸 수 있는 거군요! 이래서 인터넷에 떠도는 백 마디 소문보단, 당사자에게 직접….]

귀에서 피 나겠네.

초대박을 터뜨린 영화에선 상당히 중후하고 카리스마 있는 역을 맡아서 실제 성격도 가까운 줄 알았더니. 옆자리의 할리우드 배우는 참 말이 많고, 성량도 우렁차서 시끄러웠다.

그때였다.

“…….”

한율은 저도 모르게 런웨이 너머를 바라보았다. 유명한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요정처럼 연한 금발에 새하얀 피부, 아름답고 청초한 미모의 여성이 자리에 앉고 있었다.

엠마 애커먼.

로건 워커의 약혼녀였던 크리스티나의 손녀.

시선이 마주쳤다.

생긋. 엠마가 미소 지었다.

한율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하곤, 옆자리의 시끄러운 할리우드 배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패션쇼가 끝난 후.

패션쇼를 주최한 명품 회사 디자이너와 관계자들, 다른 셀럽들과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고 나갈 타이밍을 볼 때였다. 엠마가 인파를 헤치며 곧장 한율에게 다가왔다.

[한율,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차칵차칵. 여러 대의 카메라가 두 사람을 향했다.

엠마가 용감하네.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대놓고 호감을 표하다니.

이런 착각 어린 시선도 함께 꽂혔다.

아무리 그래도 전 약혼녀의 손녀와 스캔들이 터지는 건 거북하기에, 한율은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

[안녕하세요, 엠마. 만나서 반가워요. 나중에 파티에 참석하시나요?]

[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좋아요. 나중에 파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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