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다들 어른이 됐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서한율이 한국행 비행기에 타지 않았다니? 분명히 두 눈으로 출국장 게이트 안까지 들어가는 걸 확인했는데….”
서한율에 관한 미스터리를 풀려고 일부러 이탈리아까지 온 수잔 리드는 기가 막혔다. 한편으론 다시 눈앞에서 그를 놓쳤다는 사실에 어이없는 웃음도 나왔다.
‘어젯밤 파티에서도 미꾸라지처럼 쏙쏙 빠져나가더니.’
서한율이 패션쇼에 초대되었던 이유는 주연으로 활약한 드라마가 글로벌 OTT에서 큰 인기를 얻은 데다가, 품행이 방정하고 평소 기부도 많이 하면서 이미지까지 좋아서였다. 외적인 모습도 명품과 잘 어울리기도 하고.
그런데 각성자 제임스와 친분이 있다는 의혹까지 더해져서 그럴까. 서한율은 내내 예상보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다. 개중엔 안토니오 소령처럼 패션쇼와 어울리지 않는 인물도 섞여 있었다.
“GPS는 당연히 꺼져 있거나 제거됐겠죠?”
“네.”
“이탈리아 쪽은 어때요?”
“전혀 당황하지 않은 눈치로 보아.”
“서한율이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네요. 오히려 그를 도와줬을 수도 있고요. 아, 어제 안토니오 소령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었어야 했는데…!”
계속해서 치근덕거리는 남자들과 마르첼로란 사업가의 경계로 인해 전혀 다가가지 못했다.
수잔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화를 삭이다가 지도를 확인했다. 서한율이 이안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럼 이미 각성한 사람은 어떨까요. 게이트가 열리는 걸 미리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요?』
“혹시 모르니 여기와 제일 가까운 게이트 예상 지점. 그곳으로 가보죠.”
밀라노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전세기.
비행기가 이륙 준비를 시작하자, 진사랑은 의아한 얼굴로 조유찬을 바라보았다.
“한율 씨는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조유찬이 미소 지었다. 그는 품에 한율이 면세점에서 사준 선물을 보물처럼 꼭 안고 있었다.
“나아중에 따로 온대요.”
“네? 그럼 달냥이랑 구동이는….”
“달냥이랑 구동이도요.”
진사랑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달냥이랑 구동이 줄 간식 챙겨왔는데….”
“하하.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산 건데요.”
진사랑은 손까지 내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조유찬이 더 쓸쓸해 보이는 까닭이었다.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한 것도 그렇고.
사실, 조유찬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몇 년 전, 배우 이희우의 매니저가 그녀의 뒤통수를 거하게 때리고 도망간 사건이 있었다. 그때 서한율에게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고 조언했는데, 서한율은 폭탄을 터뜨리게 되면 예고는 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조유찬은 오늘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예고를 해도 폭탄은 폭탄이란 사실을.
‘짧아도 몇 달, 길게는 몇 년 동안 못 돌아올 수 있다니….’
그런데도 서한율을 잡지 못했다.
잡을 수 없었다.
『아직 열리지 않은 게이트를 조사해보려고요.』
조유찬이라고 서한율을 둘러싼 의혹을 본인에게 묻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서한율이기에 언젠가 스스로 말해줄 거라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막상 에둘러 진실을 들으니 현실적인 문제와 더불어 걱정만 태산처럼 쌓였다.
‘혼자 정말 괜찮을까?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하지? 게이트가 갑자기 열리면? 애 혼자 두고 나만 이렇게 떠나도 되는 거야? 다른 어스래빗 애들한텐… 뭐라고 설명하지?’
조유찬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동안 비행기는 활주로로 이동했다. 그리고 차차 속력을 내며 이륙하는 순간, 조유찬은 기내 벽에다 옆머리를 쿵 박았다.
‘한율이 부모님껜 뭐라고 말씀을….’
한편, 한율은 조유찬이 탄 비행기가 떠나는 걸 확인하곤 옆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토니오 소령이 씩 웃었다.
[아닙니다. 제임스와 만나게 해준다는데 이 정도쯤이야.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네. 기회가 되면 또 뵙겠습니다.]
소령이 먼저 자리를 떴다. 한율은 그의 부하의 안내를 받아 관계자용 통로를 통해 다른 비행기에 탑승, 밀라노를 떠났다.
* * *
박가람은 포슬포슬한 감자를 그릇에 가득 담고선, 유호의 가족이 지내는 객실 문을 벌컥 열었다. 유호의 부모님 두 분 다 안 계시기에 거리낌 없이.
“호 형, 뭐 하… 함?”
“응?”
거실에 있던 유호가 박가람을 돌아보았다.
“어제 회사에서 챙겨온 것들 정리 중.”
거실엔 그가 회사 작업실에서 사용했던 각종 장비가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실은 어제 2층에 있는 방에 설치해봤는데 좁더라고. 그래서 다시 1층 넓은 방에다 설치하려고. 어쨌든 잘 왔다, 가람아. 온 김에 침대 위치 옮기는 것 좀 도와줘.”
“이건우 부를까?”
“둘이서도 충분히 옮길 수 있어.”
“그럼 감자부터 먹고 할까?”
“해 떨어진다.”
박가람은 ‘기껏 형한테 감자 챙겨주는 착한 동생 노릇 좀 하려고 왔더니. 이래서 사람은 평소에 하던 대로 해야 해’ 이렇게 투덜거리면서 소매를 걷어붙였다.
“나의 힘을 보여주겠다!”
잠시 후. 박가람은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우으, 펜션 침대는 저렴하고 가벼운 거 쓰는 게 보통 아니었어? 왜 이렇게 무겁고 크냐….”
“원래 영업용으로 사용하던 건 다 처분하고, 지금 있는 건 다 새것이라던데?”
“서한율 이 자식. 어쩐지 숙소 침대처럼 눕기만 하면 잠이 솔솔 잘 오더라.”
원래 아무 데서나 잘 자지 않았나? 유호는 웃으면서 책상을 정리했다.
박가람은 빙글 몸을 돌려 유호가 장비 세팅하는 걸 구경했다.
“어제 오래간만에 회사 가보니까 어땠어? 서한율이 갔을 땐 드림래빗 후배들이 연습 중이었다고 하던데.”
“여름인데도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쓸쓸하더라. 9년 동안 내 집처럼 드나들었던 회산데… 그렇게 낯설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어.”
“나 연습실 캐비닛에 소시지 두고 왔는데.”
“뭐?!”
박가람의 한 마디는 막 감상에 빠지려던 유호를 흔들었다.
“야, 먹을 걸 그 안에 두면 어떡해! 벌레 생기면 어쩌려고!”
“그거 있잖아. 단단히 밀봉된 천하장ㅅ….”
유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팀장님한테 말씀드려.”
“유통기한 아직 남았을 텐데. 팀장님 드시라고 해야겠당.”
“팀장님 배탈 나면 가람이 네 책임이다.”
“침대도 옮기고 먼지도 청소했으니까 감자 먹자, 감자. 적당히 식었겠다.”
“말 돌리기는.”
감자는 오늘 차남석이 남양주에 갔다가, 밭에서 수확했다면서 몇 상자씩 가져왔다. 다른 여러 채소도.
두 사람은 거실에서 삶은 감자를 먹으며 TV를 보았다. 게이트 방어선에서 폭우로 인한 피해 복구 작업을 하는 전문가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선 군인들의 모습이 나왔다.
두 번째 감자를 집으며 박가람이 운을 뗐다.
“뭐야.”
“어?”
“뭔데.”
“뭐가.”
톡톡. 박가람은 껍질을 벗긴 감자를 설탕에 찍었다.
“게이트 열린 뒤부터 심각해진 거야 나도 그러니까 넘겼는데, 어제 해원이 형 입대한다고 했을 때부턴 심각을 넘어서서 인생까지 고찰하는 것 같아서. 형도 차남석처럼 입대 기회 엿보는 건 아니지?”
“그냥.”
유호는 허심탄회하게 대답했다.
“나도 해원이처럼 조금 더 수련에 매진했더라면, 각성자인 척 사람들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 생각을 하기엔 곡 작업까지 하느라 여러모로 바빴고, 우리 중 가장 늦게 입학했고.”
“그래서 나도 최소한 해원이처럼 위험한 각성자들 때려잡을 수 있는 수준이 되면, 그때 방어선에 자원하는 건 어떨까 고민을 좀 하다가.”
“형. 1130 증상자가 몇천 명에 한 명꼴이잖아. 그런데 서한율, 길우성에 이어서 형까지 갑자기 ‘나도 각성자다!’라고 나서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 그것도 일본 RMMA에선 멀쩡하던 사람이?”
유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노선을 바꿨어.”
“곡 작업?”
“어. 그동안 컴백 준비로 바빠서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곡이 몇 개 있거든. 일단 그 곡들부터 완성하려고.”
우물우물. 박가람은 감자를 먹으며 유호를 바라보다가 사이다를 집었다.
“…크으, 역시 삶은 감자엔 사이다!”
“가람이 넌? 다른 나라에서도 게이트가 열리면 아이돌로서의 미래는 더 장담할 수 없잖아. 따로 생각해두는 계획 있어?”
“으음. 당장 다음 달에 열리는 콘서트 고민부터 해야지? 서한율 없이 무대에 서야 하니까 동선도 새로….”
불쑥.
“써한 없이 무대에 선다고? 왜?”
“깜짝이야!”
인기척도 없이 끼어든 길우성에게 놀란 박가람이 펄쩍 뛰었다. 그러나 손에서 떨어지려던 사이다는 아슬아슬하게 잡았다.
“인마, 소리 좀 내고 다녀!”
길우성이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구겼다.
“써한 없이 무대에 서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그게….”
유호가 박가람의 팔을 잡고선 대신 이야기하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유찬이 형 도착하면 듣게 될 테니까, 지금 미리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잠시 후. 유호의 객실로 어스래빗 멤버들이 모였다. 강보배는 영상통화로 참석했다.
서한율도.
차남석이 이상하단 표정을 지었다.
“너 지금 비행기에 타고 있어야 하는 시간 아니야? 너 어디야?”
-[저, 중요한 일이 있어서 당분간 한국에 못 돌아가요.]
“뭐?”
“야, 써한!”
덥석. 길우성이 서한율과 연결된 핸드폰을 잡으며 따졌다.
“너 가기 전엔 그런 얘기 없었잖아! 그리고 달냥이 어쨌어! 달냥이 내놔!”
-[…….]
서한율은 말없이 길우성을 바라보다가 슥, 달냥과 구동이 들어있는 이동장을 보여주었다.
“달냥아, 안녀엉? …써한율, 너 인마! 아무리 달냥이가 사람 따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냥펀치 날리는 용감한 핵인싸 고양이라지만, 먼 타국에 데리고 다니면 스트레스를 얼마나…!”
휙. 이건우가 길우성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냈다.
“한율아, 위험한 일은 아니지?”
-[네.]
“하지만 7월 18일 무대에는 못 서는 거고?”
-[네. 팀장님에게도 방금 연락드렸어요.]
“응, 알았어. 파트 분배랑 안무 동선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한율이 넌 걱정하지 말고 일 봐. 설명은 나중에 돌아오면 그때 들을게.”
서한율이 미소 지었다.
-[네. 고마워요, 형. 그리고 미안해요, 멤버들.]
“미안하면 달냥이…! 읍, 읍!”
“시끄럽다, 길우성.”
-[전 이만 이동해야 해서. 끊을게요.]
강보배가 크게 외쳤다.
-[나중에 통화하자, 한율아!]
-[네.]
서한율과의 영상통화가 끊겼다. 하아. 어스래빗 멤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비슷하게 한숨을 쉬었다.
차남석이 유호와 박가람을 향해 물었다.
“또 눈치 게임 해야 해요?”
이건우가 차남석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유호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한율이가 돌아오면 그때 설명 듣기로 했잖아. 기다리자.”
“언제 돌아올지.”
차남석이 재차 한숨을 쉬더니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 파트 분배랑 안무 동선부터 수정하죠.”
라이언이 번쩍 손을 들었다.
“하뉼 파트 절반 내 거.”
“누구 마음대로. 프로듀서 선생님하고 같이 정해야지.”
“나 노래 잘해.”
“나도 잘해. 그리고 그것만 중요하냐? 안무도 같이 맞추려면….”
이건우는 사과패드에 이번 앨범 타이틀곡인 퍼포먼스 버전 영상을 띄워놓곤, 퍼포먼스 디렉터에게 연락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아, 대피소에. 저기, 혹시 오 팀장님께 연락받으셨어요?”
강보배는 유호에게 손짓하곤 말했다.
-[호 형, 콘서트 때 2.5 곡 부르기로 결정됐다며. 말고 다른 곡은 어떻게 할까? 콘서트 의미에 맞는 곡도 선택해야 하고, 선택해도 싸비만 뚝 잘라서 붙이는 건 조금 그렇잖아. 노트북을 갖고 오기는 했지만, 회사 작업실에서 작업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서한율에게 중요한 일이 뭔지, 왜 당분간 한국에 돌아오지 못한다는 건지 깊게 묻지 않고 제 할 일들을 딱딱 찾아서 한다.
‘다들 교복 입고 어리바리하게 회사에 들어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어른들이 됐네.’
유호는 가슴에 뭉클 번지는 감정을 느끼며 웃었다.
“회사 작업실에 있던 장비 그대로 펜션에 들고 왔으니까, 보배 넌 노트북 챙기고 다시 여기로 오면 돼.”
길우성이 끼어들었다.
“보배 형, 올 때 가족분들이랑 고양이 가족도 데려와.”
웃던 강보배가 장난치듯 정색했다.
-[그건 좀 생각해 볼게, 우성아.]
“흐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