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여기에서 지낼 거야
[게이트 피해 성금 마련 <부산 K-POP 콘서트> 티켓 오픈!]
[부산시와 FJ그룹, 이우그룹이 함께 주최하는 게이트 피해 성금 마련 <부산 K-POP 콘서트>가 관객 약 5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종합경기장에서 7월 17일부터 18일 이틀 동안 열린다.
이번 콘서트에는 솔로 가수 진사랑과 김우재, 래퍼 자이씨, 인기 아이돌그룹 루트, 온더로즈, 스카이러너, 히아신스, 원카운트, 퍼플아워, 스타믹스, V12, 크리스탈래빗, 어스래빗, SP래빗, IOMU 등이 출연하며 MC는 스타믹스의 JE와 각성자인 퍼플아워 진은수, 방송인 정태현이 맡는다.
출연료 및 공연 수익은 모두 게이트 피해 성금으로 쓰일 예정이며 티켓 예매는…(중략).]
-라인업이 RMMA보다 더한 수준인데ㄷㄷㄷ
-오픈하자마자 매진되겠다
-이틀이면 관객 10만 명은 몰린다는 얘기 아님? 가뜩이나 지금 부산, 서울에서 온 이재민들 때문에 미어터질 지경인데 숙박시설까지 초비상사태 걸리겠네
-토끼 셋! 토끼 셋! 토끼 셋!
ㄴㅋㅋㅋㅋㅋㅋㅋ
ㄴ왜 드림래빗은 없죠ㅜㅜ
-대기업 두 곳이나 후원하니까 라인업 장난 아니네
-출연료만 기부할 게 아니라 지금까지 팬 주머니 털어서 번 돈도 기부해야지?
ㄴ아이돌한테 돈 맡겨놨음?
ㄴ꼭 앨범 한 장 구매는커녕 평소에 듣보라고 무시하던 인간들이 돈만 탐냄
-은수 하나만 보고 간다.
-어스래빗 출연 감사합니다ㅜㅜ 컴백 하자마자 게이트 열려서 진짜 아쉬웠는데ㅠㅠ
-모금하는 건 좋은데 정확히 얼마 모았고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도 투명하게 다 공개해라. 중간에 장난질 치는 놈 있으면 죽여버린다 진짜
6월 28일 이른 아침.
길우성은 기사를 보며 감탄했다. 그는 길미현, 유호와 함께 세종시에 만들어진 각성자 연구소로 가는 길이었다.
“출연자인 우리도 연락받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기사 떴네. 빠르당.”
뒷좌석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길미현이 물었다.
“그런데 테스트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받는 거래?”
“공무원 각성자가 요령 같은 거 알려준다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어. 가보면 알겠지.”
“가서도 또 안 되면 한율이한테 그랬던 것처럼 짜증 내지 말고.”
“내가 언제 짜증 냈냐?”
“약 올리는 것 같다고 투덜거렸잖아.”
운전 중인 유호는 서한율의 말을 떠올렸다.
『맞아요, 작은 희망. 게이트 근처에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으니까요.』
‘게이트랑 멀기도 하고, 어제 한율이도 괜찮을 거라고 했으니까… 별일 안 생기겠지?’
각성자 연구소는 흔히 연구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동떨어져 있었다. 간판이 없는 평범한 3층짜리 작은 건물에, 이제 막 설치한 듯한 녹색 펜스가 빙 둘려있었다.
근처에 모인 수많은 취재진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맞게 찾아왔나 여러 번 확인했을 법한 외관.
주차장도 좁고 자리도 없는 것 같아, 그들은 근처를 빙글빙글 돌다가 한참 떨어진 공영 주차장에다 차를 세우고 걸어왔다.
들어가기 전, 길우성이 다시 한번 연구소 외관을 살폈다.
“워낙 급하게 만들다 보니, 음. 이 모양이 된 것 같다.”
“너 솔직히 말해봐. 순간 미국 게이트 각성자 연구소는 어떨까, 이 생각 했어, 안 했어?”
“쳇. 이래서 눈치 빠른 곰순이는.”
“너 언제까지 나 곰순이라고 부를 거야?”
“할머니 돼도 곰순이라고 부를 건데.”
“야.”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틈만 나면 티격태격한다. 유호는 두 사람을 말렸다.
“공공장소에서 떠드는 거 아니야. 사람들 더 오기 전에 들어가자.”
이렇게 말하며 정문을 넘으려던 순간이었다.
세 사람이 지나가던 구경꾼이 아니라 각성자 연구소 방문객이란 걸 알게 되어서 그럴까. 근처에 모인 수많은 취재진의 카메라가 일제히 세 사람을 향했다.
차칵차칵!
MBS 마이크를 든 기자가 앞을 막았다.
“안녕하세요! 혹시 1130 증상자이신가요? 아니면 각성…. 어스래빗의 길우성 씨 아니세요?! 맞죠?”
“어….”
1초의 머뭇거림. 길우성이 활짝 웃으며 푹 눌러썼던 모자를 벗었다. 여러 카메라를 향해 손 구호와 함께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어스, 래빗! 의 길우성입니다!”
동시에 취재진의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 뉴스나 기사로 내보낼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한 까닭이었다.
“각성 능력 테스트를 받으러 오신 건가요?”
“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 조금만 더 인터뷰를…!”
“감사합니다!”
길우성과 유호는 다른 카메라에도 꾸벅꾸벅 인사한 후, 빠른 걸음으로 정문을 통과했다. 그들에게 다가오려던 다른 언론사 기자들의 손이 허망하게 허공을 갈랐다.
경비원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1130 증상자 관리센터에서 받은 메시지와 신분증 부탁드립니다.”
“여기용. 두 사람은 보호자입니다.”
“네, 확인했습니다. 들어가서 데스크 직원에게 다시 보여주시면 됩니다.”
“네, 수고하세요.”
차칵차칵. 잡지는 못해도 여전히 그들을 찍는 카메라. 세 사람은 경비원, 취재진 쪽을 향해 재차 고개를 꾸벅이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1층 로비엔 길우성처럼 1130 증상자로 보이는 사람들과 동행인들로 가득했다. 연구소 출범 첫날이라 호기심에, 혹은 능력을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몰려온 듯했다.
“어? 저거 아이돌 아냐?”
“걔네. 서한율이랑 뉴스에 나왔던.”
“옆에 여자 예쁘다. 여친인가?”
그런 사람들이 있다. 상대가 연예인이면 무례하게 굴어도 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길우성은 활짝 웃으며 길미현에게 또박또박, 큰 소리로 말했다.
“누나! 데스크는 어디에 있을까? 신분증을 계속 들고 다니려니 불안해, 누나!”
길미현이 창피하다는 듯 동생의 팔을 때렸다. 찰싹.
“조용히 해. 목소리 낮춰.”
“아얏. 누나가 동생 팬다!”
“둘 다 조용.”
데스크로 가서 각성 능력 유무 판별 테스트를 받고 싶다고 하자, 직원은 길우성이 받은 메시지와 신분증을 확인하고 PC로 조회하더니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각성 능력 테스트는 별도로 마련된 장소에서 진행됩니다. 10분 후에 연구소 버스에 탑승하시면 되고, 보호자는 동행 안 됩니다.”
“네?”
“안전과 정보 보호를 위해, 미성년자의 보호자가 아닌 경우 테스트 장소 동행이 제한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가,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곤 자리를 옮겼다.
길우성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유호와 길미현의 팔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보호자를 둘이나 데려온 보람이 사라져 버렸구먼. 그래도 나도 더는 어린애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게.”
“이상한 말투 집어치우고, 정신 바짝 차려.”
길미현이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길우성을 데리고 갔다. 주위를 살피며 그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충고했다.
“펜션에 침입하려던 놈들처럼 나쁜 사람이 있을 수 있어. 범죄자까진 아니더라도 의도가 불순하거나 이상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그러니 괜히 팬인 척 다가온다고, 상대가 착해 보인다고 경계심 풀지 마. 알았지?”
“엉, 알았어.”
유호도 길우성을 살폈다.
“핸드폰 잘 챙겼지? 지갑 잃어버리지 않도록 가방 깊숙한 곳에다 넣고. 지퍼도 잘 채워.”
“응. …아니, 나 어린애 아니라니까?”
잠시 후. 길우성은 테스트를 받기 위해 온 사람들과 각성자 연구소에서 준비한 버스에 올랐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해.”
“응. 나 빼고 둘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면 안 돼.”
“알았어. 맛없는 거 먹으면서 기다릴게.”
버스가 출발했다. 길우성은 유호와 길미현을 향해 창밖으로 손을 흔들다가 문을 닫았다.
후우. 천천히 작게 심호흡하는데, 통로 건너편에 앉아있던 또래의 청년이 힐끗힐끗 쳐다보더니 불쑥 옆자리로 옮겨왔다.
“안녕하세요.”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조심하라던 충고를 떠올리며, 길우성은 다소 딱딱한 얼굴로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 고등학생 때 댄스 동아리에서 어스래빗 춤 커버했어요.”
“정말요?”
저도 모르게 표출되는 반가움.
“…흠흠.”
길우성은 다시 충고를 되새기며 목소리 톤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감사합니다.”
“보기보다 스텝도 빠르고, 쉬는 박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꼼꼼해서 힘들더라고요. 여기에 표정 연기까지…. 정말 아이돌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고 느꼈어요. 그런데 형, 가까이에서 보니까 진짜 얼굴이랑 머리 작다. 영상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빛이 나시는데요?”
중간에 은근슬쩍 반말이 섞여 있다. 길우성은 마음속으로 ‘나는 유호 형이다, 나는 유호 형이다’라고 되뇌며 조용히 대답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전에 뉴스 보니까 아무런 능력도 발견하지 못했다던데. 지금도 그래요?”
“네…. 저기.”
“권한정이라고 합니다. 스무 살이니까 말 편하게 놓으세요.”
“네. 한정 씨는 각성했어요?”
“말 편하게 놓으시라니까. 전….”
권한정이 생글생글 넉살 좋게 웃으며 되레 물었다.
“했을 것 같아요, 안 했을 것 같아요?”
얘 뭐지.
같은 소속사 식구들이나 멤버들, 이프림에겐 무척 까불대면서 들이대지만, 사실 길우성은 처음 보는 사람에겐 낯을 가리는 편이었다. 특히 남자는 더더욱.
어릴 적부터 누나인 길미현과 그 친구인 미랑을 노리고 접근하는 놈들을 워낙 많이 겪은 탓이었다.
“글쎄요. 겉으로 봐선 잘….”
권한정이 씨익 웃었다.
“도착하면 알려드릴게요.”
각성자 연구소가 마련한 테스트 장소는 본래 시에서 운영하던 큰 체육관이었다. 이 더운 날씨에 슈트를 입고,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남자가 그들을 로비로 안내했다.
“이곳에서 대기하다가 호명되는 한 분씩 안으로 들어갈게요.”
그때 사람들이 어느 곳을 보며 웅성거렸다.
헉. 놀라서 헛바람을 들이켜는 사람도 있었다.
“대박….”
길우성도 뭐가 있나? 의아한 얼굴로 사람들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고선, 편한 운동복 차림을 한 진은수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정확히 길우성을 향해 손을 흔들며.
“선배니임…!”
길우성도 반갑게 번쩍 손을 들며 인사했다.
“아이고, 후배님!”
* * *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비행기를 타고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 여기저기 쉴 새 없이 돌아다니다, 바르셀로나에서 비양심적인 방법으로 배를 타고 마요르카섬으로 들어왔다.
입도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차를 빌려, 게이트 예상 지점에 도착했다. 앞서 미국이나 스페인에서 둘러본 다른 곳처럼, 이곳 역시 반경 1km가 통행 제한 구역으로 지정되어 철조망이 처져 있었다.
현지 시각 새벽 1시 27분.
한율은 철조망을 가볍게 넘고선 중심부로 천천히 걸어갔다.
‘바로 이곳에.’
그의 고향과 연결되는 게이트가 생긴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한율은 고민을 거듭했다.
차라리 섬을 통째로 날려버린다면, 길우성만이 아니라 누구도 쉽게 접근할 생각 따위 안 하지 않을까.
이런 유혹도 여러 번 들었었다.
길우성을 이용해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 지구의 침략에 대비하는 건 어떨까.
하지만 결국 지구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상대가 누구든 그의 세상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겠다고 결심했다.
‘고작 고향을 보고 싶단 내 욕심 때문에, 내 자만심 때문에 오히려 고향이 더 위험해질 수 있어.’
그리고 자신은 영혼 상태로 지구로 건너와 시간을 넘었다.
본래 세상으로 돌아갔다가 그 역시 잘 알지 못하는, 범접할 수 없는 세상의 섭리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므앙.
“그동안 답답했지?”
한율은 이동장 문을 열어주었다. 달냥과 구동이 쭉쭉 기지개를 켜면서 밖으로 나왔다. 혹시 몰라 리드줄을 채워주고, 마실 물도 챙겨주었다.
할짝할짝.
목을 축이는 두 마리 앞에 쭈그려 앉으며 말했다.
“이제 우리, 한동안 여기에서 지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