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7화 (339/427)

언젠가는 멋있게 각성할 거야

길우성은 진은수와 로비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버스에서 만난 권한정도 은근슬쩍 옆에 자리했다.

“후배님… 아니, 은수 씨도 테스트받으러 온 거예요?”

“아니요. 제 테스트는 어제 시험 삼아 끝냈고, 오늘은 다른 분들 테스트 도우러 왔어요.”

“와….”

길우성이 존경한다는 눈빛으로 진은수를 바라보았다.

“은수 씨 훈련소에서도 훈련받는 중이라고 알고 있는데. 힘들지 않아요?”

“힘들기는 하지만, 저한테 꼭 필요한 과정인 것 같아서요.”

엄지척.

“진짜 멋있네요. 난 솔직히 사람들을 구하는 힘이 생겨도 막상 위험한 곳에 가라 그러면 무서워서 엄두가 안 날 것 같은데.”

진은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방어선의 실상을 잘 몰라서 마음만 앞서는 건지도 몰라요. 거긴 정말로… 사람이 죽고 다치는 무서운 곳이잖아요. 실전에 들어가도 정말 도움이 될지는.”

길우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재차 감탄했다. 진은수와는 같은 아이돌 1130 증상자로서 대화를 나눈 게 대부분으로, 이렇게 따로 보니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도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지켜줘야 하는 동생 같은 이미지였는데.’

어쩌면 음악방송에서 유호와 함께 있는 모습, 일본 RMMA 이후 퍼플아워 멤버들에게 보살핌을 받는 모습, 아림 엔터에서 만났을 때 언니인 호수 옆에서 수줍게 있는 모습만 봐서 저도 모르게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단톡방에서도 조용했고.

‘이래서 사람은 직접 겪어봐야 하는구나.’

“반성합니다.”

“네?”

“해원 선배님이랑은 만나셨어요? 같은 훈련소에 들어갔다고 알고 있는데.”

“네, 어제 만났어요.”

권한정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런데요, 형. 서한율 님은 같이 안 왔어요? 그분도 각성자잖아요.”

“네, 안 왔어요.”

자세한 대답은 피했다. 서한율이 당분간 한국에 없고, 다음 달 18일에 열리는 콘서트에도 불참한다는 사실은 아직 공표되지 않았기에.

권한정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쉽네요. 실제로 가까이에서 뵙고 싶었는데.”

쿠웅.

“깜짝이야.”

체육관 밖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렸다. 세 사람은 일어나서 창으로 다가갔다.

“히익.”

곱게 포장된 아스팔트 바닥. 체육관 이름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거꾸로 반쯤 내리꽂혀 있었다.

그 앞에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한 남자.

그는 놀라서 주춤거리는 연구소 관계자들, 창에 붙어서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듯 가소롭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다 진은수를 발견하더니, 관계자들에게 잘난 척 크게 떠들었다.

“이런 강한 힘을 실내에서 테스트하는 건 여러모로 민폐잖아요, 선생님들. 안 그래요?”

권한정이 질색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욱, 재수 없어. 그렇게 능력 자랑하고 싶으면 당장 방어선에나 갈 것이지, 왜 멀쩡한 기물이랑 길 파손하고 지랄이야. 우성이 형 손가락보다 못생긴 놈이.”

내 손가락?

길우성은 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진은수는 조금 전부터 길우성에게 묻고 싶었던 걸 물었다.

“옆의 분은… 친구분이세요?”

“아뇨, 여기 오는 버스에서 처음 만난 사이에요.”

권한정이 진은수에게 꾸벅였다.

“안녕하십니까, 스무 살 권한정이라고 합니다. 누나, TV로 봤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우세요. 참고로 저 고등학생 때 퍼플아워 춤 커버했었어요. 완벽한 춤 필요 없어, 네가 있어 완전한 축제, 퍼플아워~.”

“와.”

퍼플아워 데뷔곡을 부르며 춤까지 재현하자, 진은수는 작게 손뼉을 쳤다.

“감사합니다.”

“헤헷. 그럼 나중에 사진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각성자로 인해 벌어진 소란 탓일까. 곧 연구소 관계자가 크게 알렸다.

“물리적인 파괴력을 지닌 분은 미리 말씀해주십시오! 실외에서 따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권한정이 쯧쯧 혀를 찼다.

“완전히 주먹구구식이네요. 하긴, 전례 없이 급히 만들어진 기관이라 어쩔 수 없나.”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나중에 또 봐요, 선배님. 나중에 봐요, 한정 씨.”

“네. 수고해요, 은수 씨.”

“저도 같이 가요, 누나.”

“……?”

진은수와 길우성은 의아한 얼굴로 권한정을 바라보았다. 권한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누나처럼 각성자 테스트 도우러 왔거든요. 형, 제가 버스에서 말했죠? 제 각성 능력, 도착하면 알려주겠다고.”

그가 씨익 웃었다.

“안에서 만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예요.”

“응…. 아니, 네.”

길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라 경계하고 있었지만, 조금은 호기심이 생겼다. 대체 어떤 능력이길래 이렇게 기대감을 심어주는 걸까.

잠시 후, 테스트가 시작되고 한 사람씩 호명되었다.

테스트는 한 사람당 짧게는 10초, 길게는 10여 분씩 걸렸다. 길우성의 차례는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돌아왔다.

“길우성 씨, 들어오세요. 핸드폰을 비롯한 소지품은 이 바구니에 넣어주세요.”

“네.”

앞서 들어갔던 각성자의 여파일까. 두꺼운 방음문을 열고 들어가자 알 수 없는 매캐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길우성의 시선을 끈 건 일부 박살 난 천장 조명도, 휘어진 쇠 파이프나 흥건히 젖은 바닥,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갈가리 찢긴 농구공 잔해도 아니었다.

무섭고 깐깐해 보이는 연구소 사람들과 나란히 앉은 권한정이었다. 옆에 앉은 사람에게 무어라 말하는데, 소리가 작아서 들리진 않았다.

‘원래 연구소 쪽 사람이었나? 그런데 어째 눈동자가 회색으로 변한 것 같은데….’

길우성은 바구니에다 가방을 넣고 그들 앞에 섰다. 일렬로 늘어선 책상 앞에 앉은 그들을 보자니, 기획사 오디션을 봤을 때와 월말 평가를 받을 때가 떠올랐다.

‘노래나 춤을 춰야 할 것만 같은 이 압박감! 몸에 새겨진 아이돌 DNA 탓인가?!’

한 직원이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다.

“긴장하신 것 같은데. 음악 틀어드릴까요?”

“네! 아니, 괜찮습니다!”

가장 직급이 높아 보이는 중년 여성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우성 씨. 자진해서 테스트를 신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3일에 우성 씨가 뉴스에서 인터뷰한 영상을 봤었는데요, 그 이후로도 각성하지 못했다고 하던데. 맞나요?”

“네.”

“지금까지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재 대부분의 각성자에게 각성의 결정적인 힌트를 준 건, 바로 진은수의 능력이 발현되는 순간을 담은 영상이었다.

당시 진은수는 누가 봐도 사람들의 시선과 카메라로 인해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런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발현한 카모플라쥬 능력.

혹시 나도?

게이트가 열려 퍽 불안한 상황이었다. 진은수와 마찬가지로 1130 증상자였던 사람들은 저마다 바람을 담아 여러 가지를 시도했고, 하나둘 각성에 성공했다.

“자연스럽게 각성한 분도 있지만, 아직 떠올려야 하는 구체적인 이미지, 혹은 조건을 몰라 각성하지 못하는 분도 있을 거로 생각됩니다. 길우성 씨가 그런 예로 보이네요.”

“하지만….”

서한율은 ‘왜 그게 안 되는지 모르겠다’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봤다. 나기혁은 한술 더 떠서 ‘그냥 꿈꿨는데?’라고 말했고.

길우성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증상자라고 다 각성하는 건 아닌 것 같다란 말이 있어서요, 선생님….”

“아니에요. 여기 우리와 함께 앉은 권한정 씨의 능력이.”

권한정이 반갑게 손을 들며 그녀의 말을 이었다.

“각성 능력 유무 및 위험도 판별. 그게 제 각성 능력이에요, 형. 제 ‘눈’에 따르면 형은 아직 각성하지 않은 예비 각성자예요. 일반인과 달리 형 몸 주위로 은은한 회색빛 아우라가 보이거든요.”

“……!”

길우성의 눈이 기대로 반짝거렸다.

“그럼 어떤 능력인지, 어떻게 하면 각성할 수 있는지도…?!”

권한정이 들었던 손을 뒤통수를 내리며 긁적였다.

“하하. 거기까진 몰라용.”

길우성의 어깨가 다시 힘없이 내려갔다.

“네…”

* * *

“형, 우성이 형.”

테스트를 끝내고,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기 위해 로비에서 기다릴 때였다. 권한정이 나와 길우성을 찾았다.

“SNS 팔로우해도 돼요?”

진은수를 비롯해 연구소 소속 각성자들이 어떻게 능력을 각성했는지, 능력을 발현할 때의 경험담을 토대로 조언해주었지만, 길우성은 끝내 각성에 실패했다.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다.

하하. 길우성은 영혼 없이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팔로우는 자유입니다. 늘 열려 있습니다, 형제여.”

“지금까지 내 눈으로 1130 증상자인 척 각성자인 척 사기 치던 놈 다섯을 잡았거든요? 그런데 아직 틀린 적 없어요. 그러니까 너무 의기소침해하지 말아요. 형도 언젠가 아주 멋있게 각성할 테니까.”

“…정말 그럴까?”

머뭇거리던 길우성이 말을 놓으며 경계심을 풀자, 권한정이 활짝 웃었다.

“그럼요! 어쨌든 한 번이라도 능력을 각성한 사람은 오오라가 약간 변하거든요? 형이 형도 모르는 사이에 각성하게 되면, 그땐 내가 바로 알려줄게요. 카메라가 아니라 직접 눈으로 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어쩌면 나도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각성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바람을 안고 아침 일찍 여기까지 달려왔다.

‘헛된 발걸음이 아니었구나.’

길우성은 마주 웃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정 없게 SNS 팔로우가 뭐니. 번호 찍으렴, 한정아.”

잠시 후. 길우성을 포함한 테스트 지원자들이 버스를 타고 각성자 연구소로 돌아갔다.

“수고하셨습니다.”

권한정은 연구소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뒤, 자신처럼 테스트를 도우러 온 각성자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진은수에겐 일부러 마지막에 찾아갔다.

“누나, 수고하셨습니다.”

“한정 씨도 오늘 수고 많았어요, 우리 사진 찍기로 했죠?”

“네!”

팬 서비스로 팬들과 셀카를 자주 찍어서 그런지, 진은수는 거리낌 없이 권한정과 웃으며 손 하트를 했다.

찰칵.

“대대로 가보로 모시겠습니다.”

“확인하려면 오래 살아야겠네요.”

“후손들에게 대대로 인증하라고 부탁을…. 앗차, 뇌절은 1절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런데 누나.”

“네?”

권한정은 진은수와 한 마디 더 나누고 싶어서 아까부터 주변을 얼쩡거리는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눈에 힘을 팍 주고 엿듣지 말라고 경고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정 씨?”

“…아, 음. 이거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권한정은 사람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러나는 걸 확인하곤 목소리를 낮췄다.

“누나가 보기엔 서한율 님이요. 정말 1130 증상자 맞아요?”

한편, 각성자 연구소로 돌아온 길우성은 그곳에서 내내 자신을 기다리던 유호, 길미현과 재회했다.

유호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됐어? 각성은?”

길우성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톡으로 말했잖아. 안 됐어. 그나저나 나 빼고 맛있는 거 먹었어, 안 먹었어. 솔직히 말해”

“넌 지금 그게 중요해?”

“어, 중요해. 왜냐하면 내가 지금 굉장히 배가 고프거든. 아, 나 신기한 능력 가진 애 만났다?”

“어떤 능력? …잠깐만.”

연구소 앞에는 테스트를 받고 돌아온 각성자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기다리는 취재진이 많았다. 세 사람은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주차장에 자리가 좀 생겼으니까, 뒷문으로 나가서 이쪽으로 차를 끌고 온 다음에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대화는 세 사람이 무사히 차에 탄 후 계속됐다.

“각성할 사람, 그리고 각성한 사람을 알아보는 눈?”

“응. 그 친구가 말하길 나도 언젠가 각성할 수 있으니까, 너무 의기소침해하지 말래.”

그건 절대 안 되는데.

유호는 속마음을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다른 얘기는? 나눈 거 없어?”

길우성은 근처에 문을 연 식당이 없는지 살피면서 대답했다.

“기회가 되면 제임스를 꼭 직접 보고 싶다더라. 어떤 색의 아우라가 얼마나 강렬하게 빛나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그렇구나…. 걘 이름이 뭐야?”

이상하게 관심이 많네. 길우성은 이런 얼굴로 유호를 바라보더니 순순히 대답했다.

“권한정. 번호도 교환했어.”

문을 연 식당을 찾았을 때, 유호는 전화를 핑계로 길우성과 길미현을 먼저 내리게 했다.

‘만약 권한정이란 애가 해원이랑 마주친다면.’

이해원이 각성자가 아니란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릴 터다.

이 얘길 들려주기 위해 이해원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그는 훈련 중인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에 톡을 남기고선 서한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

권한정의 이야기를 들은 서한율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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