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8화 (340/427)

지구는 어떻게 될까요?

몇만 명이 죽든 말든, 서울의 게이트를 막지 말았어야 했다.

유호에게 권한정의 이야기를 듣고, 계나리를 통해 그를 조사한 한율이 한 후회였다.

권한정은 본래 김대현처럼 게이트가 열렸을 때 죽었어야 할 인물이었다.

게이트가 열리던 그 날, 그는 인근 카페에서 아르바이트 중이었다. 그러나 한율이 게이트를 결계로 막는 사이 무사히 서울을 빠져나갔고, 현재 각성자 연구소에서 진짜 각성자를 가려내는 일을 돕고 있었다.

‘방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각성자 탐지가 가능한 자들이 있기는 했지. 하지만 한국에도 있을 거라곤.’

설령 이해원과 만나 각성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스스로 능력을 의심하도록 유도하거나 예외적인 사례로 생각하게 만들면 된다. 아니면 권한정이란 인물 자체의 신뢰도에 흠집을 내거나.

하지만 하필이면 길우성과 가까워진 게 마음에 걸린다.

‘길우성에게 밝힌 능력이 그게 다일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어.’

지금은 보잘것없어 보여도 훗날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아무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면 일찌감치 싹을 제거하는 게 좋다. 하지만 당장 권한정에게 변고가 생기면 유호부터 의아하게 여길 터.

‘초조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길우성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야 각성할 수 있으니까.’

마요르카섬 게이트 예상 지점과 가깝고, 밭이 늘어선 한적한 시골에 홀로 지어진 저택. 차명으로 산 이 저택은 방이 많고 아름다운 정원과 수영장까지 있지만, 주로 사용하는 곳은 침실과 주방뿐이었다.

한율은 깊게 한숨을 내쉬곤, 아직 깨끗한 물이 찰랑거리는 수영장을 바라보았다. 수영장 한가운데엔, 전 집주인이 놓고 간 튜브를 타고 둥둥 떠다니는 구동이 있었다.

“……?”

별생각 없이 그 광경을 보던 한율은 뒤늦게 놀라서 손을 뻗었다.

“너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 아니, 거긴 왜 들어간 거야?”

언제 자신을 발견해줄까. 한율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구동이 애처롭게 울었다. 끼우웅.

벤치에 앉은 달냥은 멀뚱멀뚱 구경하다가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다.

한율은 살며시 바람을 일으켜 구동을 구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이불 속에다 녀석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장 좀 보고 올 테니까, 둘 다 나가지 말고 이 방에 얌전히 있어.”

따라 들어온 달냥이 대답했다.

므앙.

차를 몰고 도착한 가까운 시내는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여름 휴가철이지만, 거리엔 관광객 대신 군인들이 더 많이 보였다. 문을 닫은 가게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쇼핑을 마치고 다시 거처로 돌아왔을 땐 대문 앞에 경찰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한율에게 신분증과 여권을 보여달라 요구하고선, 어설픈 영어로 이곳은 위험하니 떠나라고 당부했다.

두두두. 하늘엔 게이트 예상 지점을 살피기 위한 헬기나 드론이 자주 날아다녔다.

‘결과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는데.’

장 본 물건을 정리하는 동안, 한율은 TV에서 나오는 국제 뉴스에 귀를 세웠다.

혹시 내 마법이 게이트 예상 시기를 앞당긴 데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쳤다면, 강한 마법을 사용했을 시 그 원인 자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실험해볼 가치가 있었으므로, 몇몇 게이트 예상 지역에서 크고 작은 마법을 사용했다. 그의 행적을 따라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는 주장이 나오면 번거로운 일이 생길 수 있기에,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그리고 한율은 차라리 영향을 끼쳤기를 바라는 중이었다. 영향을 끼쳤다는 건, 자신의 마법이 게이트에 직접 통한다는 뜻이므로.

그런 바람에 부응하듯 다음 날인 6월 29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러셀 게이트 예상 지점 상공. 게이트 전조가 발생했다. 30일엔 버지니아비치 게이트 예상 지점에서.

모두 작년 12월, 서울에서 벌인 모의 훈련 때와 비슷한 수준의 환영 마법을 전개해본 곳이었다.

예상보다 일찍 게이트 전조가 나타나자 그곳 시민들은 패닉에 빠졌겠으나, 한율은 속보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며칠 차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영향을 끼쳤다고 봐도 무방해.’

계나리의 말에 따르면 6, 7년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다. 그러니 마요르카의 게이트가 열리면 결계를 쳐놓은 뒤 당분간 지켜보다가, 다른 게이트로 가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볼 생각이었다.

한율은 계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부탁해. 몸조심하고.”

-[네. 오빠도 몸조심하고… 무리하지 마세요.]

“그래.”

몇 시간 후. 너튜브에 계나리가 만든 영상이 올라왔다.

한국의 공중파 3사, 뉴스 전문 채널에선 미스터리 해커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며 해당 영상을 뉴스로 내보냈다.

영상은 제한 시간으로 시작되었다.

[48:00:00]

[47:59:59]

* * *

[미스터리 해커가 또 한 번,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에 의미심장한 영상을 올렸습니다. 48시간. 전 세계 게이트가 열리기까지 남은 시간일까요? 영상이 업로드된 지 벌써 7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건 41시간.]

앵커가 잠시 쉰 뒤 말을 이었다.

[41시간 뒤, 지구는 어떻게 될까요?]

서울시 강동구. WB래빗 엔터가 어스래빗을 위해 빌린 연습실.

잠깐 쉬는 동안 켠 TV는 멤버들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가 예정보다 빨리 열렸을 뿐, 다른 나라 게이트도 몽땅 열릴 걸 알고 있었는데…. 막상 카운트다운 시작되니까 무섭다.”

“해외 일부 SNS는 서버가 마비됐나 봐.”

“와…. 쟤네 이 와중에 또 폭동 일으켰어. 이미 게이트 예상 지점에 병력 배치하고 대비 중인데, 대책 마련하라면서 약탈하고 방화하는 건 또 뭐지.”

“나라마다 사정이 있겠지. 어떤 나라는 게이트 대비한답시고 세금을 강도처럼 뜯었다던데.”

“어떤 곳은 사이비 종교가 사람들 현혹해서 게이트가 거짓이라고, 악마의 음모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선동하더라.”

“그럼 우리나라는 뭔데.”

“다 가상으로 꾸며낸 거래.”

“헐…. 게이트 방어선 상황이 라이브로 중계도 되는 마당에.”

강보배가 걱정되는 얼굴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미국도 괴물이랑 강도, 갱단 대비해서 가정마다 창이랑 문에 단단한 셔터 설치하고 무기까지 준비한다는데. 라이언 너희 집은 괜찮아?”

“총이랑 총알 잔뜩 사라고 돈 보냈어. 알아서 하겠지.”

이건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면에선 미국이 총기 소지 허용 국가란 게 부럽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총기 허가증 가진 사람들이랑 예비군으로 방위대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무기도 적고 위력도 약해서 경찰이랑 군인한테 더 의존할 수밖에 없잖아.”

“대신에 군이 게이트 방어선 잘 막고 있잖아. 사람들도 엉뚱하게 폭동 같은 거 일으키지 않고.”

“사재기 현상이 다시 심해지긴 했지만요.”

길우성도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부산 공연은 예정대로 열릴까? 그때쯤 되면 전 세계적으로 아주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을 것 같은데….”

“취지가 게이트 피해 성금 마련이니까 난 그대로 진행할 것 같아. 7월에 다른 게이트가 열린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한율인 괜찮겠지? 그런데 한율이 지금 정말 어디에 있는 거야? 영상통화를 걸어봤는데도, 어디에 있는지 감이 전혀 안 잡혀.”

쉿. 박가람이 입가에 검지를 세웠다. 그가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안다고 해도 입 밖에 내선 안 되는 곳?”

“없는 녀석 걱정은 그만두고.”

차남석이 스트레칭을 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우리 할 일이나 하죠.”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서울 게이트가 열린 뒤 좌절했던 아이돌이 다시 무대에 서기 위해 연습하는 동안에도, 방어선 군인들이 이대로 상황이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사투를 벌이는 동안에도, 자진해서 훈련소에서 들어간 능력자들이 훈련을 받는 동안에도.

[30:00:00]

[20:00:00]

[08:00:00]

뉴스는 온통 전 세계 게이트 예상 지점 실시간 영상을 내보냈다. 폭동이 일어났던 해외 여러 도시도 잠잠해졌다. 거리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남은 시간이 줄어들수록 세상은 숨을 죽였다.

[03:00:00]

한국 시각으로 7월 2일 오후 6시 20분.

해외에 있는 서한율, 객실에 있는 차남석을 제외한 어스래빗 멤버 6명은 펜션 관리동 2층 거실에 모였다.

뉴스 자막.

[세계 곳곳 게이트 전조 발생… 지도에 미 표기된 곳도]

강보배가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제발 사람이 많이 다치거나 죽지 않기를.”

“착잡하지만, 우리나라 보면서 많이 연구하고 대비했을 거라 믿는다.”

[02:00:00]

초조함 속에서 한 시간이 더 지났다.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온 시각. 반대로 환한 대낮인 독일 뮌헨에 또렷한 징후가 포착되었다.

“어…?”

아름다운 푸른 하늘 위로 검은색 잉크가 또르르 떨어진다. 파앗. 지상에 지저분하게 번지는 불길한 검은색.

[독일 뮌헨, 게이트 전조 포착]

이건우가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흔들었다.

“더는 무서워서 못 보겠다. 저기 사람들, 다 대피한 거 맞지?”

“응. 군인들만 남기고.”

차가운 두 손을 만지작거리던 길우성이 벌떡 일어났다.

“나 객실로 돌아갈게.”

“응. 미현이 혼자 무섭겠다. 얼른 가 봐.”

무서움을 물리치기 위함인지, 길우성은 여느 때보다 더 소란스럽게 퇴장했다.

“누나아! 동생 지금 간다아!”

[01:00:00]

다시 한 시간이 지났다.

차남석이 들어왔다.

“서한율이 SNS에 글 올렸던데. 봤어요?”

“어. 다들 무사했으면 좋겠다고 썼더라.”

“여기 앉아, 남석아. 커피 줄까?”

“이 밤에 커피요?”

유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상황 지켜보느라 밤샐 것 같아서.”

차남석은 고개를 젓고선 멤버들에게 말했다.

“다들 계속 이러지 말고 각자 객실로 돌아가요.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을 우리가 내내 TV로 지켜본다 해도 어쩔 방법이 없잖아요. ”

나지막한 한숨 뒤, 차남석이 말을 이었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 잠을 자면서, 몇 시간 후 밀려들 파도에 대비할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고 봐요. 이 말 하려고 왔어요.”

“까딱하다간 이대로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잠이 오겠냐.”

“지난번처럼 초거대 괴물이 나타나서 곧바로 한국에 쳐들어온다면 모를까….”

하아. 박가람이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차남석아. 모두가 이성적으로, 국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열심히 궁리하면서 싸우면 얼마나 좋겠니. 하지만 이성을 잃고 과잉 방어하는 곳이 있을 수도 있잖아.”

“무슨 말이에요?”

유호는 예전, 계나리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뒷일 생각 안 하고 핵무기를 쓰는 나라가 있을지도 몰라. 만약, 가까운 북한이나 중국이 핵무기를 사용한다고 생각해봐. 낙진이 어디까지 날아오겠어?”

“……!”

“하지만 생각해 보니까.”

유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석이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설마하니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핵무기부터 날리는 곳이 있겠어? 게이트 자체를 없앨 수는 없는지, 우리나라가 이미 온갖 방법으로 실험해봤는데 말이야.”

“으음.”

박가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도전도 뒷일 감당할 수 있을 때,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나 하는 법이지. 설마하니 무턱대고 그런 멍청한 짓을 벌이는 곳이 있으려고. 그래도 걱정되고 무서우니까 나랑 같이 계속 뉴스 볼 사람?”

“난 객실 가서 볼래.”

“그럼 나도.”

라이언이 갈 준비를 하자, 같은 객실을 사용하는 강보배도 따라 일어났다. 박가람이 이건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건우건우.”

“너랑 둘이서만 보긴 싫다, 박가람가람.”

“어차피 같은 객실이잖아.”

거실을 깨끗이 정리한 멤버들은 마지막으로 TV와 조명을 끄고 그곳을 나왔다. 그리고 각자 객실로 흩어졌다.

하지만 이들 중 밤새 제대로 잠을 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00:05:30]

아직 5분 넘게 남았으나, 성질 급한 게이트가 하나둘 열리기 시작했다.

[00:00:01]

[00:00:00]

48시간 전에 올라온 영상이 끝날 무렵. 게이트 지도에 표시되었던 모든 레드 게이트가 열리며 괴물들을 쏟아냈다.

같은 시각, 스페인 마요르카섬.

게이트 전조가 나타났을 때부터 잔뜩 긴장한 채 주시하던 스페인군은 입을 쩍 벌렸다.

[저건…!]

대한민국 서울 상공에 나타난 게이트를 감쌌던 푸른색 장막. 그 신비로운 장막이 이곳에도 일렁일렁, 게이트를 감싸기 시작했다.

누군가 외쳤다.

[미스터리 해커야! 미스터리 해커가 여기에 왔어!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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