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9화 (341/427)

생각보다 잘 막는 중

여러 대의 모니터에서 여러 나라 게이트 실황이 흘러나온다. 뒤로 멀찌감치 뺀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살피던 계나리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 알고 대비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한국은 갑작스레 전조가 나타나고 몇 시간 만에 게이트가 열렸다. 서한율이 괴물들을 가두는 동안 대피가 이뤄지고 군도 대응을 준비했으나, 그래도 급히 움직이느라 미흡한 점이 많았다. 대피 행렬로 인해 군 장비가 충분히 못 들어왔으니.

반면에 다른 나라는 이런 한국의 상황을 지켜보고 참고할 시간이 많았다. 한국이 수집한 게이트 괴물의 정보를 공유받고, 원활한 전투를 위해 게이트 예상 지점 환경도 정리했다.

그 결과, 계나리가 겪은 이전 시간대와 다른 전개가 벌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던 곳이 이번엔 괴물들의 시체로 가득 찬다.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그 자리에서 분쇄되거나 찢기며 스러졌다.

훌쩍. 계나리는 저도 모르게 나오는 눈물을 닦았다. 지나온 시간에서 절절히 느꼈던 절망과 괴로움, 슬픔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설레발일지도 모르지만, 세상을 구했다는 뿌듯함도 들었다. 이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준 서한율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아무리 뛰어난 해킹 실력으로 여러 기관을 협박하고 정보를 퍼뜨렸어도, 과연 사람들이 쉽게 게이트 사태 예견을 믿어줬을까? 아니. 서한율이 뉴욕을 비롯한 곳곳에 게이트 환영을 만들어 경각심을 준 덕에, 세상은 몇 개월 전부터 게이트를 대비할 수 있었다.

‘율이 오빠 보고 싶다. 오빠도 지금쯤 아주 뿌듯하겠지?’

마요르카섬 게이트에 결계를 치느라 바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전화를 거는 대신, 너튜브에 ‘어스래빗 서한율 직캠’을 검색했다. 게이트가 열리기 직전 출연한 음악방송 컴백 스페셜 무대 영상이 떴다.

계나리는 마저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마법을 쓸 때도 멋있지만, 역시 무대 위 모습이 가장 멋있어.’

그러나 모든 나라가 제대로 대비하고, 괴물들을 수월하게 물리치는 건 아니었다.

병력과 무기, 자원이 없는 빈곤 국가엔 UN이 미리 지원을 보냈으나 턱없이 부족했고, 사람과 장비가 접근하기 힘든 지형에 게이트가 생긴 곳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여기에 게이트 지도엔 표기되지 않았던 게이트까지.

7월 3일 아침.

펜션 관리동에 모인 멤버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곤 실소했다. 밤새 한숨도 못 잤는지 안색들이 퀭했다.

“몇 시간 후 밀려들 파도에 대비해 잠을 자면서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면서요, 차남석 씨. 비축은커녕 방전된 몰골인데요?”

“…….”

차남석은 박가람의 놀림을 무시하곤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길우성이 뉴스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닷속에 열린 게이트도 있대.”

“수심이 깊으면 질식사라도 하겠지만, 그래도 문제네. 바다 오염될 거 아냐. 어쩌면 괴물을 뜯어먹은 생선을 우리가 또 먹…. 윽.”

“아, 상상했어. 가람이 형 때리고 싶다.”

“때려, 우성아. 내가 허락한다.”

찰싹. 길우성이 박가람의 팔을 때렸다.

“아얏. 그러나 용서한다. 하지만 사주한 이건우는 용서 못 해! 싸우자!”

“조용, 조용.”

“다들 잘 잤어? 응, 못 잔 것 같구나.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지?”

들어오며 인사하던 조유찬이 스스로 대답하고선 멤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까 한율이한테서 전화 왔는데, 달냥이랑 구동이랑 안전한 곳에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달라더라. 그리고 이제 잘 예정이니까 전화하지 말래.”

“안전한 곳에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라이언이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잔다면, 우리랑 밤낮이 다른 나라에 있다는 거?”

“그런가 봐.”

우웅.

길우성은 울리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안녕하십니까, 길우성 님. 귀하의 (예비)각성자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국가 각성자 관리 정책은 하단 링크를 클릭하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국가 게이트 방어 지휘부 각성자 관리과]

“……?”

길우성은 의아한 얼굴로 메시지를 여러 번 읽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내가 언제 각성자 등록을 했다고? 신종 스팸인가? 링크 누르면 랜섬웨어 감염돼서 폰 다 털리나?’

우웅. ‘국가 게이트 방어 지휘부 각성자 관리과’라고 적힌 곳에서 연달아 다른 메시지가 왔다.

-[각성자 관리 정책에 따라 오늘 3일부터 예비 각성자를 포함한 모든 각성자의 출국 허가제도가 시행됩니다. 자세한 문의 사항은 아래 번호 혹은 홈페이지(링크)를 통해 주시기 바랍니다.]

“호 형, 이거….”

“어? 저 보호막!”

길우성은 유호에게 메시지를 보여주려다 강보배가 가리키는 TV를 보았다. 스페인 마요르카섬. 게이트 지도에 노란색으로 표시되었던 게이트가 푸른색 장막 안에 꽁꽁 갇혀있었다.

“서울 게이트 막았던 그거랑 똑같지 않아?”

라이언이 눈을 빛내며 TV 앞으로 다가갔다.

“응, 똑같이 생겼어.”

“그 장막 만든 게 미스터리 해커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저걸 막았다는 건… 저 게이트도 상당히 위험하단 소린가? 그런데 노란색이었잖아.”

“미스터리 해커, 노란색이 뭔지 설명 안 했어.”

강보배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스페인군, 지금 저렇게 좋아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 * *

전 세계에 게이트가 열린 지 만 24시간이 지났다.

이대로 지구가 멸망하는 건 아닐까. 이런 두려움에 떨었던 사람들은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했다.

[미국 레드 게이트 사망자, 현재 42명]

[영국 레드 게이트 사망자, 현재 27명]

생각보다 많은 나라가 게이트를 잘 막아내는 중이었다.

괴물들은 전술 따위 없이 닥치는 대로 공격하거나 숨거나 도망치는 게 전부라, 일찌감치 게이트 예상 지점을 포위하고 만반의 준비를 한 방어선을 쉽게 뚫지 못했다.

아주 강하거나 기상천외한 능력을 지닌 괴물들을 제외하곤.

그리고 인간들에겐 성능이 뛰어난 강한 무기가 무척 많았다. 붉은 여왕 효과.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에도 나라마다 벌인 군비 경쟁 때문이었다.

-[드디어 전화를 받는군요, 한율. 바빴습니까?]

한율이 있는 마요르카섬은 고요했다.

스페인군이 여전히 게이트 앞을 지키고 있지만, 파란색 장막으로 둘러싸인 게이트 너머에서 아무런 낌새도 없는 까닭이었다.

한율은 안토니오 소령에게 영어로 대답했다.

[네, 조금.]

-[스페인 마요르카섬 게이트를 감싼 푸른색 장막. 뉴스로 봤습니다. 당신 친구들이 한 일입니까?]

한율은 망원경을 들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헬기를 살폈다. 방송국 헬기였다.

[이탈리아는 어때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소령은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제임스와 만나게 해주겠다는 약속, 지켜주십시오. 제임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후우. 소령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드 게이트와 멀지 않은 곳에 해체 작업 중인 원전이 있습니다. 괴물들이 그쪽으로 가지 않도록 최대한 반대 방향으로 유도하곤 있지만, 모두의 두려움이 큽니다. 자칫하다간 우리 스스로 파멸을 가져올 수 있으니까요.]

한율은 지도와 달력을 확인했다.

[그가 도착하려면 빨라도 사흘은 걸릴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버텨보겠습니다. 그리고 배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어떤 방법을 써서든 보내드리겠습니다.]

현재 제임스가 마요르카에 있지 않냐고 확인하는 것과 다름없는 말. 한율은 작게 웃고선 대답했다.

[배는 괜찮습니다. 도착할 때 즈음 연락하라고 할 테니, 소령님 비상 연락처 좀 알려주시겠어요? 중간에 엇갈릴 수 있잖아요.]

-[네. 세심한 배려 감사합니다.]

통화를 끊은 한율은 TV를 켰다. 마요르카를 포함, 스페인의 다른 지역에 발생한 게이트의 실시간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아예 한 채널을 게이트 실황 중계 전용으로 만든 모양이었다.

‘덕분에 일일이 가지 않아도 돼서 편하네.’

이틀 후. 한율은 본래 세상과 연결되는 게이트를 한번 살펴본 뒤, 달냥과 구동을 데리고 마요르카섬을 떠났다.

그즈음, 전 세계에선 새로운 각성자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 * *

7월 9일. 강동구의 연습실로 가는 어스래빗의 차 안.

“잉?”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길우성이 놀란 소리를 냈다.

“이 형님 한동안 안 보이더니, 언제 이탈리아로 갔대?”

“누구?”

길우성은 박가람에게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속보] 최강 각성자 제임스, 이탈리아에서 포착!]

“제임스 형님, 이탈리아에서 원전 쪽으로 가려는 괴물들 깡그리 싸잡아 날려버리셨대. 진짜 쩐다. 완전 존경스러워. 멋져.”

“…….”

박가람은 근질근질한 입가를 올리며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네가 멋지다고 존경하는 사람, 네 친구 서한율이란다.

“반면에 써한은 행방불명 루머 기사나 뜨고 말이야. 쯧쯧.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원. 에휴.”

“…….”

박가람은 입가를 내렸다.

바로 오늘 아침에 뜬 기사.

[서한율, 이탈리아에서 행방불명?! 진실은]

[지난달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명품 패션쇼에 참석한 인기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의 멤버이자 배우 서한율이 행방불명되었다는 괴담이 인터넷에 퍼져, 소속사인 WB래빗 엔터테인먼트가 진화에 나섰다.

(중략).

한편 WB래빗 엔터테인먼트는 게이트 성금 마련 <부산 K-POP 콘서트>에 서한율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불참한다고 공지했다.]

-바로 그저께 그린라이브 라방까지 한 애가 행방불명에 납치됐다는 괴담이 퍼지다니ㅋㅋㅋㅋ

-서한율 한국 버리고 도망감ㅜㅜ?

ㄴ수백억 원 부동산 버리고 도망갈 리가

ㄴ게이트 때문에 서울 부동산 시세 박살 난 지가 언젠데

-제임스한테 차 빌려준 거 지금까지 해명 안 하는 것만 봐도 뭐 있다니까

ㄴ아니 고작 차 빌려준 게 뭐라고 해명까지 해야 하냐

-공지 어디에서 봐요?ㅠㅠ

-서한율 바로 5분 전에 스타아이에 글 올렸는데 행불ㅇㅈㄹ

ㄴ그거 다 소속사 직원이 대신 작성하는 거 모르는 바보도 있음?

ㄴ어스래빗 애들은 직접 다 작성합니다. 님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그런다고 다른 아이돌도 다 그럴 거란 슬픈 편견은 버려요..

-그래서 제목에 적힌 진실이 뭐임? 서한율 지금 어디에 있는데!!!!

“막내야.”

“엉?”

박가람은 길우성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서한율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지 않을까?”

“그놈의 눈치 게임,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

끼익!

“엄마얏!”

“억!”

차가 급정거하며 멤버들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각자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나 사과패드, 간식이 떨어졌다.

“내 초코파이!”

“미안해, 얘들아. 안 다쳤어?”

운전대를 잡은 조유찬이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유호가 이유를 설명했다.

“갑자기 웬 오토바이들이 튀어나와서.”

“엉?”

부아앙! …위잉위잉!

차가 멈춘 곳은 교차로 한복판이었다. 오토바이 여러 대가 시끄러운 배기음을 내며 그들이 탄 차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그 뒤를 경찰차들이 쫓아간다.

“방금 바이크 탄 놈들, 손에 야구 배트 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본 거겠지?”

“요즘 조직적으로 절도랑 강도질하는 범죄자들이 늘었다더니. 방금 지나간 오토바이들도 그런 거 아냐?”

대한민국은 지난번 폭우가 쏟아진 날 새로 조정된 방어선을 유지 중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괴물의 정보와 약점을 파악, 상대하는 전략이 발전하는 데다, 전 세계에 게이트가 열린 지금, 최소한 현 상황을 유지해야 한다는 필사의 각오가 작용한 덕분이었다.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괴물 수도 늘어나기는 했으나, 이젠 경찰이 직접 포획에 성공하는 일도 늘고 있고.

그러나 사람들 삶의 질은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었다.

도심 한복판에 생긴 게이트 때문에 많은 인구가 집과 직장을 잃었다. 엄청나게 오른 물가는 내려갈 생각을 안 하는데, 공권력 대부분이 괴물들을 잡는 데에 동원되니 치안이 엉망이 될 수밖에.

“내 초코파이….”

“바닥에 굴렀잖아. 못 먹어. 버려, 라이언.”

라이언이 울적한 얼굴로 더러워진 초코파이를 주웠다.

“나쁜 놈들….”

한편 그 시각, 서한율의 본가.

서한율의 부모는 막 앞집에 다녀온 참이었다. 앞집은 서석진의 부모님, 즉 서한율의 조부모가 사는 곳으로, 함께 반찬을 만들고 그걸 나눠서 가져왔다.

“직접 재배한 채소로 만든 거니 몸에도 좋고, 맛도 좋겠네요. 이 반찬은 우리 율이가 잘 먹던 건데…. 타지에서 밥을 잘 챙겨 먹고 있긴 한 건지.”

서석진은 부인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며 위로했다.

“우리 아들이잖아. 괜찮을….”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

두 사람은 의아한 얼굴로 인터폰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낯선 소녀가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딩동, 딩동. 소녀가 급박한 얼굴로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꼭 쫓기는 사람 같다.

“…….”

그러나 서석진의 눈엔 짙은 의심이 서렸다.

가끔 나쁜 사람들이나 서한율의 사생 스토커가 서한율의 본가란 걸 알고 허튼수작을 부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 기승을 부리는 여러 흉악 범죄.

‘우리가 집에 들어오는 걸 지켜보고 초인종을 누른 것 같은 타이밍.’

소녀의 표정도 인맥으로 꽂힌 실력 없는 배우처럼 ‘나 겁에 질린 연기 중!’이라고 주장하듯 너무 과했다.

“혹시 모르니 당신은 서재로 가 있어. 신호하면 바로 결계 스위치 눌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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