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하게 대처해
어지간히도 기삿거리가 없었는지, 인터넷에 퍼진 이야기는 금세 포털사이트 연예 뉴스란에도 떴다.
기사 댓글을 본 한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손목을 어디에다 쓰라고.’
아. 미끼로 쓸 순 있겠구나.
심심한 생각을 하면서 앞에 놓인 커피를 마셨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독일어가 들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제임스.]
정장을 입은 여성이 맞은편에 앉았다.
[커피 맛은 어때요?]
[괜찮아요. 실은 제가 커피 맛을 잘 몰라서요.]
[저한텐 기쁜 소식인데요? 당신에게 커피의 즐거움을 알려줄 수 있으니까.]
여성의 이름은 시모나. 이탈리아에서 붙여준 통역사로, 게이트 대책위원회 소속이자 외교부 직원이었다. 그리고 수잔 리드만큼이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 정도로 대단한 미인.
이런 여성을 붙여준 의도가 환히 보였지만, 한율은 가볍게 미소 짓곤 본론으로 들어갔다.
[장소는요?]
[순서를 잊은 건 아니죠, 제임스? 아무리 당신이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줬다곤 해도, 어떤 요구든 다 수용해줄 거란 생각은.]
시모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지도에서 한 지점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땅한 자신감이었네요. 여기와 가까우면서도 인적이 없고, 아직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게이트. 당신이 원하는 조건에 딱 들어맞는 곳이죠.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그게 뭐죠?]
[고도 5만 피트 상공에 있어요. 전투기 조종사가 발견했죠.]
[…다른 곳은요?]
시모나가 한 곳을 새롭게 찍어서 보여주었다.
[아펜니노 남부 산맥에 포함된 국립공원. 저도 동행해야 한다는 거 잊지 마세요, 제임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등산화를 준비해야겠네요.]
* * *
7월 16일.
서한율을 제외한 어스래빗 멤버들은 <부산 K-POP 콘서트> 최종 리허설을 위해 공연장에 들어섰다. 공연장에는 그들과 함께 18일에 출연하는 몇몇 팀이 먼저 와 있었다. MC를 맡은 퍼플아워의 진은수도.
18일 라인업은 솔로 가수 진사랑, 아이돌그룹 온더로즈, 스카이러너, 원카운트, 스타믹스, 크리스탈래빗, 어스래빗, IOMU 등이었다.
“진짜 오래간만이다. 잘 지냈어?”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잘 지냈어요? 다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아요?”
“너무 설레서 잠을 못 잤어요.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든요.”
게이트가 열리며, 연예계는 완전히 죽을 거란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아이돌 시장은 더더욱.
괴물들이 도시를 파괴하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누가 화려한 무대에서 예쁘고 멋지게 꾸민 아이돌이 노래 부르고 춤추는 걸 마음 편히 보겠냐는 것이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연습해 간신히 데뷔하고, 자리 잡기까지 또 몇 년. 그러나 하루아침에 길이 뚝 끊긴 아이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미 성공한 상위 아이돌들은 그나마 버틸 수 있다. 그러나 연습생 시절부터 쌓인 빚을 다 갚지 못한 대다수 아이돌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 콘서트는 아이돌 모두에게 희망이었다. 라인업에 오른 건 성공한 상위 팀들이지만 그래도, 무대에 설 기회가 있다는 걸 알려주는 신호탄이었다.
“서한율은 정말 불참이야? 안 와?”
평소 친분을 떠나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데, 스카이러너의 하신이 길우성에게 다가와 물었다.
“엉.”
“야, 걔 정말….”
길우성은 영혼 없이 입가를 올리곤 질문을 차단했다.
“우리 팀도 아직 눈치 게임 중이라니까.”
“어, 그래.”
그때 길우성의 눈에 원카운트의 나기혁이 들어왔다.
“하신, 잠깐만. …나기혁 선배님!”
나기혁이 의아한 얼굴로 길우성을 돌아보았다. 길우성은 나기혁에게 가까이 가서 물었다.
“선배님, 나중에 출국 허가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들었어요? 각성자 관리과에 전화로 물어봤는데, 되게 어려운 말만 늘어놔서 이해를 제대로 못 했어.”
“글쎄. 난 각성자 등록 안 해서 모르겠는데.”
“잉? 안 됐어요?”
“어. 안 했고, 안 됐어.”
“그럼 이 문자도 받은 적 없어요?”
길우성은 게방부 각성자 관리과에서 받은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나기혁은 금시초문이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 아무리 나라에서 하는 거라지만, 내가 어떤 능력을 각성했는지 알고 각성자 등록을 해.”
“잉?”
“너 각성자 연구소 가서 테스트받았다며. 그래서 자동으로 등록된 거 아냐? 정 궁금하면 저기 은수한테 가서 물어보든가.”
길우성은 그제야 각성자 연구소에 처음 방문했을 때 작성한 접수 서류를 떠올렸다. 비밀 유지 조항처럼 어려운 문구가 많아, 대충 훑고 사인했던 기억이 났다.
“이래서 서류에 사인 같은 거 함부로 하면 안 된다더니! 그런데 선배님은 테스트 안 받아요?”
나기혁은 주위를 둘러보곤 목소리를 낮췄다.
“그냥 꿈으로 나오는 걸 어떻게 테스트하냐?”
“연구소 일 돕는 각성자 중에, 각성자를 알아보는 애가 있거든요? 걔 말에 따르면 각성자마다 다른 아우라가….”
“됐어. 굳이 각성자로 살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무슨. 펜션에서 너한테 빌린 옷은 서울 돌아가면 돌려줄게.”
“깨끗하게 세탁 혹은 드라이클리닝 잊지 마십쇼. 그게 매너입니다.”
“이미 다 끝냈어.”
“우성아, 리허설 준비하자!”
이건우가 길우성을 불렀다. 길우성이 그쪽을 향해 손을 들었다.
“갑니다아!”
나기혁은 길우성의 팔을 툭 쳤다.
“수고해.”
“네엡.”
그리고 멀어지는 길우성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왕 입대할 거 각성자 전형으로 들어가면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박히겠지만, 능력을 밝히고 싶지도 않고 영 쓸모 있는 것 같지도 않으니까 포기하자. 그런데 조금 전에 길우성이 말한 각성자, 설마하니 어떤 능력을 각성했는지까지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그 시각, 육군훈련소.
이해원은 게방부에서 나온 정상욱 중위와 면담 중이었다.
“내일 바로 말입니까?”
“네. 게이트 방어 지휘부 각성자 부대 소속 이해원 이병에게 주는 첫 번째 임무입니다.”
정상욱이 누군가의 신상 파일을 건넸다.
“이해원 이병과 같은 각성자로, 이름은 권한정. 테스트를 받지 않은 각성자를 찾아가 테스트 및 등록을 설득하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그의 업무 보조와 경호를 해주었으면 합니다.”
권한정은 유호가 길우성에게 듣고 알려준 인물이었다. 만나면 각성자가 아니란 사실을 단번에 들킬 테니 조심하라고.
“…거절은.”
“거절이 아니라 명령 거부가 되겠죠? 해원 씨, 군인입니다.”
이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부산이요. 권한정이 꼭 설득하고 싶은 인물이 <부산 K-POP 콘서트> 출연자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누구….”
길우성과 진은수는 이미 각성자 등록이 된 상태. 이해원은 고개를 기울이다가 물었다.
“나기혁 말입니까?”
정상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해원이 아는 나기혁의 능력은 꿈으로 게이트 괴물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각성자 등록을 꼭 설득하고 싶은 인물이라고?
조금 의아했지만, 자세한 건 권한정을 만나면 들을 수 있을 터다.
“네. 권한정 씨와는 어디에서 만나면 됩니까?”
다음 날인 17일 새벽.
이해원은 군복 대신 사복을 입고 조용히 훈련소를 나왔다. 3주 전에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차에 오르는데, 기분이 묘했다.
‘각성자 부대는 일반 군인과 아주 다를 거라더니.’
시동을 걸고 서한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훈련받느라 고생했어요. 몸은 괜찮아요?]
“응. 이제 부산으로 내려갈 거야. 권한정은 어제 미리 부산으로 내려갔다더라고.”
-[형이 알아서 잘하겠지만, 권한정이 무슨 말을 하든 당황하지 말고 뻔뻔하게 대처하세요. 각성자들도 이제 막 눈을 뜬 신생아 단계나 다름없어서, 본인 능력을 100% 자신하진 못할 테니까. 하지만… 다른 부분이 조금 걱정이네요.]
“다른 부분?”
서한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서 다른 아이돌, 그리고 방송국 관계자들이랑 마주칠 수 있는데. 괜찮겠어요?]
이해원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뭘요. 그래도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요.]
“그럴게.”
-[그러고 보니 나리 씨한테 들었는데. 드미트리, 결국 러시아 송환 결정됐다면서요?]
핸드폰이 차량 블루투스와 연결됐다. 이해원은 서서히 차를 움직이며 대답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바로 두 시간 전에 김대현이 거의 피떡이 된 상태로 발견됐대. 생명엔 지장이 없어서 게방부 내 임시 수용소로 옮겼다더라.”
-[그럼 도망친 놈들 행방은요?]
“김대현이 의식을 차리자마자 물어봤는데, 내내 갇혀서 고문이랑 실험만 당한 터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하더래.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상하네요. 사람을 셋이나 죽이면서까지 빼돌릴 땐 언제고. 어쨌든 이대로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으니까, 형도 만약을 위해서 조심해요.]
“명심할게.”
약 4시간을 달려 부산에 도착했을 땐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그리고 서울 시민이 가장 많이 대피한 도시라 그런지, 어딜 봐도 차와 사람들로 가득했다.
권한정과 만나기로 한 5성급 호텔 앞도 마찬가지.
물가가 굉장히 올라 1박 요금이 백만 원 단위가 되었는데도, 호텔 출입 이용객이 참 많았다.
명품을 걸치고 여유롭게 웃으며 고가의 차를 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게이트 방어선에서 본 광경이 환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권한정은 호텔 근처 벤치에 멍하니 앉아서 지나다니는 사람을 보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옆에 놓인 플라스틱 컵엔 얼음이 녹은 흔적만 남았다.
“안녕하십니까, 권한정 씨.”
화들짝. 다가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걸까. 권한정이 어깨를 떨면서 고개를 돌렸다.
“어….”
이해원은 푹 눌러썼던 모자를 살며시 들어 보이곤 손을 내밀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게이트 방어 지휘부 각성자 부대 소속 이병 이해원입니다. 반갑습니다.”
“아…. 네.”
권한정이 주춤거리며 일어나 악수에 응했다. 회색으로 물든 그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움직였다. 이해원에게서 각성자의 아우라가 보이지 않아 퍽 당황한 눈치였다.
“권한정… 이라고 합니다. 이해원 씨…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네…. 아, 죄송해요. 그,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능력이 다른 각성자를 알아보는 거거든요. 그런데 해원 씨한테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해원 씨도 각성자라고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렇습니까.”
“네.”
여전히 이해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권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원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표정, 그래서 어쩌라는 얼굴로 화제를 전환했다.
“나기혁과는 만났습니까?”
“아니요. 그분 연락처랑 연락할 수 있는 번호를 받아서 전화를 걸어봤는데 둘 다 안 받더라고요. 호텔 측도 따로 언질 받은 게 없으니 연결해줄 수 없다고 하고요. 오히려 절 수상한 사람으로 보고 내쫓을 기세라, 여기 나와서 해원 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권한정은 이런저런 말을 떠들며 컵을 집었다.
“전 군인도 아니고, 각성자 연구소도 어떤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기관이 아니거든요.”
“설득 대상은 나기혁 한 명뿐입니까?”
“아니요.”
본래대로 돌아가던 권한정의 눈동자가 다시 회색으로 물들었다. 그가 가방에서 <부산 K-POP 콘서트> 티켓 두 장을 꺼냈다.
“보이는 사람 전부요.”
“…….”
어째 만만치 않은 임무가 될 것 같은 예감.
이해원은 속으로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