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누굴 사칭해
정상욱 중위와는 악수로 안부 인사를 대신 나눴다. 중위가 안내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쪽으로.”
한율은 시간을 확인하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부산 K-POP 콘서트> 이틀째 공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한율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공연장 주변엔 이미 아이돌 팬 몇만 명이 운집해 있을 거란 걸.
5만 명이 모이는 대규모 콘서트에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지만, 아이돌 팬들은 지금이 아니면 다신 좋아하는 아이돌의 무대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있으므로, 더더욱 기대를 품고서 일찍 달려왔을 터다.
“서두르죠.”
한율이 탄 차는 공항을 벗어나 곧장 부산 영도로 향했다.
이탈리아에 있던 그가 갑자기 돌아온 건, 바로 어제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바다에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게이트가 많이 열렸다는 사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며칠 전, 전 세계에 게이트가 열린 날.
일본 대마도 인근은 풍랑이 거세 여객선이나 어선이 출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해상자위대는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수면으로 하나둘 떠 오르는 괴물의 사체를 발견했다.
즉각 출동한 잠수함은 해당 구역 심해에 열린 레드 게이트를 포착, 해저 밑바닥을 빠르게 달려가는 거대한 괴물을 향해 수중 미사일을 발사했다.
『당시 촬영된 영상을 보냈으니 확인해 주십시오.』
미사일을 맞은 괴물은 BB탄에 맞은 것처럼 몸을 움찔 떨더니 땅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놈이 지나간 자리엔 뿌연 먼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새카만 연기만 가득 피어오르다 감쪽같이 사라졌다.
『일본 측 연락을 받은 우리나라 해군이 각종 첨단 장비를 동원해 놈의 위치를 추적했고, 이미 영해로 들어와 부산 쪽으로 접근 중인 걸 알아냈습니다. 중간에 경로를 틀면 모를까, 이동속도를 계산하면 며칠 안에 당도할 가능성이 큽니다.』
연안에 대피령을 내리는 건 어떠냐고 했으나, 대피 명령을 내릴 정도의 근거는 부실해 그건 어렵다고 했다.
이우그룹 부회장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당신이 확인해주었으면 합니다. 곧 친구들도 부산에서 큰 공연을 하지 않습니까.』
사실상 괴물을 찾아내 처리해달란 소리였다.
‘하필이면.’
솔직히 부산만 아니었다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고, 이렇게 달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마법 학교 인원에겐 귀국 사실도, 정체불명의 위험한 괴물이 부산으로 달려온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괜히 신경 쓰느라 무대에 집중하지 못할 테니까.
‘후딱 해치우고 이탈리아로 돌아가자.’
한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정상욱에게 말했다.
“제가 일하는 동안 이 녀석들을 부탁합니다.”
“이 고양이는… 서한율 씨네 고양이 아닙니까?”
므앙.
“네, 맞습니다. 아주 중요한 녀석들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정상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달냥’이란 이름을 가진 이 고양이가 까마귀들을 집합시켰던 놀라운 기억을 떠올리며.
“간식 줘도 됩니까?”
“안 됩니다. 오늘은 이미 줬거든요.”
달냥이 시무룩한 울음소리를 냈다.
믕….
* * *
분명히 서한율인데, 서한율 같지 않다.
계나리는 펜션에 온 서한율을 보자마자 그렇게 생각했다.
서한율을 만나면 늘 그 특유의 청량한 바람 향기가 나곤 했다. 지금 이 후덥지근하고 답답한 공기가 조금이나마 날아갔을 텐데 그런 느낌은커녕 이것저것 허전했다. 자신과 계마루의 시선을 피하는 것도 수상하고.
“오빠, 달냥이는?”
“달냥이? 아…. 잠깐 다른 곳에 맡겼어. 해외 다녀오느라 많이 피곤한 것 같아서. 나도 금방 가 봐야 하고.”
계나리는 씨익 웃었다.
“그렇구나아. 연락도 없이 와서 깜짝 놀랐네.”
대화 한 마디에 바로 확신했다.
눈앞의 서한율은 가짜다.
‘율이 오빠는 다른 사람들 앞에선 나한테 존댓말 쓰거든? 보아하니 다른 사람의 외형과 목소리까지 똑같이 따라 할 수 있는 각성자 같은데….’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지난 시간대에서도 이렇게 돈 많은 유명인으로 위장해서 각종 범죄를 저질렀던 각성자, 황재은.
기억에 따르면 그가 이렇게 남으로 변신할 수 있는 건 단 10분. 다시 능력을 사용하려면 12시간이 지나야 한다.
서울에 있는 숙소나 별장, 지방에 있는 본가엔 키도 없고 비밀번호도 모르니, 누군가 문을 대신 열어줄 수 있는 펜션으로 온 게 아닐까? 그러다 박현우와 마주쳐서 뻔뻔히 안까지 들어온 거고.
가짜 서한율, 황재은이 박현우와 길미현 쪽을 보며 말했다.
“그럼 난 잠깐 들어가 볼게요, 찾을 게 좀 있어서. 아, 서프라이즈로 놀라게 해주고 싶으니까 멤버들한텐 제가 온 거 비밀로 해주세요.”
계나리는 터지려는 웃음과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진짜 율이 오빠라면, 그 말은 조유찬 씨 부인인 진희 씨를 향해서 해야 했거든? 조사라도 꼼꼼히 하든가.’
황재은이 서한율이 아니란 사실을 눈치챈 건 계나리만이 아니었다. 킁킁. 그의 주위를 맴돌며 냄새를 맡던 찐빵이 돌연 크게 짖었다. 왕, 왕!
“왜 그래. 착하지, 찐빵아?”
황재은이 찐빵을 달래며 급히 관리동으로 걸어갔다. 왕! 찐빵이 바짝 따라가며 짖어대자 점점 더 빨라지는 걸음.
박현우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가 이상한데…. 평소보다 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은 이 위화감은 대체 뭘까?”
가짜 서한율이 관리동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급기야 찐빵이 그의 옷자락을 물고 잡아당겼다. 그래도 워낙 성격이 순해서 그런지 직접 물지는 않았다.
계나리는 관리동으로 향하며 찐빵을 불렀다.
“찐빵아, 이리 와!”
끙. 가짜의 옷자락을 문 채 계나리를 보며 갈등하는 찐빵. 그러나 곧 주둥이를 풀곤 계나리에게 달려왔다.
계나리는 최대한 귀여운 척 웃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게 성량을 낮췄다.
“안 그래도 오빠 언제 오나 정말로 보고 싶었는데. 오빠는 안 그랬어요?”
“어… 어, 나도 물론… 보고 싶었지?”
“헤헷.”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웃으며 관리동으로 들어갔다. 계나리는 품에 안은 양궁 장비를 살피는 척하면서 다시 말을 걸었다.
“제임스는 여전히 이탈리아에?”
“…그렇지?”
황재은이 눈동자를 굴리더니, 제법 서한율처럼 미소 지었다.
“내가 지금 좀 급해서, 나중에 얘기하면….”
쐐엑, 퍽!
계나리가 쏜 화살이 황재은을 지나쳐 벽에 걸린 다트판에 꽂혔다. 덜그럭. 다트판이 반으로 쪼개져 떨어졌다.
“……!”
얼어붙은 그를 향해 계나리는 환하게 웃었다. 다음 사격을 준비하며.
“감히 누굴 사칭해, 이 사기꾼 새끼가.”
그러나.
굳었던 가짜 서한율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그려졌다.
“지금 라이브 방송 중인데, 괜찮겠어? 이 거리에서 날 화살로 쏘면 폭행, 살인 미수까지 갈 수 있는 거 모르나?”
“……!”
계나리는 눈을 크게 떴다가, 당겼던 시위를 놨다. 퍽. 황재은의 어깨에 걸려 있던 가방이 날아갔다. 가방에 뚫은 구멍에다 카메라 렌즈를 맞춰놨는지, 안에서 카메라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쓰읍.”
가방끈에 쓸려 엄살을 부리는 황재은. 그러나 곧 그의 얼굴이 낭패한 기색으로 얼룩졌다. 그의 외형 복제 능력을 깨뜨리는 방법은 한 가지. 일정 수준 이상의 신체적 고통이었다.
계나리의 눈이 은은한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 범죄자 새끼야.”
퍽.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박
-서한율 여친 카리스마 쩌네ㄷㄷㄷ
-[ahtskstoRl 님이 10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예뻤음? 아까 카메라에 잘 안 잡혀서
-가짜란 거 알자마자 걍 활로 쏴 버리쥬?
-여친인지 아닌지는 모름ㅇㅇ 떠보느라 코맹맹이 소리 냈던 것 가튼데?
-서한율 소유 부동산부터 가자니까 굳이 펜션으로 가선
-근데 BJ 계속 서한율 행세할 수 있음? 한 시간만이라도 서한율로 살면
-눈나아!!!!!!!!!!!!
-바로 짭인 거 알아차린 거 보면 여친 아님?
-최대 10분. 그 이상 되면 걍 풀린다고 했음.
-경찰은 머하냐 이 ㅅㄲ 안 잡아가고ㅋㅋㅋ
-이 플랫폼 해외 거고 실명이랑 진짜 얼굴 안 깐 게 신의 한 수인 것처럼 나댔는데 이대로 두들겨 맞고 잡힐 기세
-그래서 어쩌라고 이 범죄자 ㅅㄲ야 <<<눈나아아!!!!!!!!!!!
-???
-갑자기 조용해졌는데?
-워 깜짝야;
-[공지][라이브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잘 가시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영도에 도착한 한율은 계나리가 보낸 영상을 보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해당 라이브 방송은 인터넷 방송 플랫폼에서 삭제된 상태. 그러나 이미 인터넷 여기저기에 퍼졌을 게 뻔했다.
‘펜션에 계나리가 남아 있어 다행이었지.’
이런 시국에도 가십거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 그리고 팬들은 왜 펜션에 어스래빗 관계자나 가족이 아닌 여자가 있냐 온갖 의혹을 제기하고 말을 쏟아내겠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제 능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놈이 수면 가까이 올라오지 않는 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네,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수심이 얼마나 깊던 바닷속에 들어가 살피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제임스’에겐 불가능한 일이므로 약한 소리를 한번 해준 뒤, 대기하던 헬기에 옮겨 탔다.
오후 6시.
<부산 K-POP 콘서트> 이틀째 공연이 시작되던 그 시각.
위이이잉! 부산 연안에 대피 사이렌이 울렸다. 게이트 괴물과의 전투 여파가 미칠 수 있으니, 반경 2km 내에 있는 시민 모두 대피하라는 안내 방송도 반복되었다.
[높은 파도와 해일이 밀려들 수 있으니 부산 시민분들은 안전하게 질서를 지키며 대피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부산 영도 앞바다.
한율은 헬기에서 저 멀리 벌어지는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뭍으로 올라오는 게 목적이었는지, 괴물은 부산과 가까워질수록 심해 땅속을 파고들었던 몸뚱이를 드러내며 이동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여지없이 해군의 공격을 받았다. 괴물도 거대한 망둥이처럼 펄떡거리며 저항 중이었다.
‘몸집이 아주 큰데도, 제법 빠르네.’
몸길이는 어림잡아 백 미터. 본래 수중 괴물이 아닌 것 같은데 며칠 동안 심해에서 버틴 것도 그렇고, 굉장히 강한 개체로 보였다.
‘그만큼 숨통도 질길 테니, 바다에 가라앉으면 체내 마나를 흡수하는 게 좋겠어.’
서울의 게이트를 막고, 제임스로 활약하는 동안 사용한 마력을 조금이나마 보충하고 싶었다.
양질의 마나를 얼마나 얻을 수 있을까.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고 전투가 이대로 끝나기를 바라던 그때였다.
크어어어엉!
여기저기 상처가 난 괴물이 돌연 크게 울부짖었다.
“……?!”
괴물의 몸에서 검은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괴물을 포함해 주변까지 가릴 정도로 굉장히 짙었다. 독인가? 한율은 바람 장막을 만들어 그것들이 이쪽으로 날아오지 않도록 대비했다.
헤드셋에서 경악한 외침이 들렸다.
[타깃이 사라졌습니다!]
오싹. 한율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헬기를 비롯해 주변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
십수 킬로미터 너머에 있던 괴물이 어느새 헬기 위에 떠 있었다.
‘공간 이동 능력?!’
[흐아악!]
뒤늦게 괴물이 머리 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헬기 조종사와 군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한율은 조금 전 생성한 장막에 힘을 더 실었다.
쿠웅! 괴물의 육중한 몸체가 헬기를 감싼 바람 장막에 한 번 부딪치곤 그대로 추락했다. …크허엉!
추락 예상 지점은 영도 연안과 바다 사이. 한율도 망설임 없이 헬기 밖으로 몸을 날렸다. 콰콰앙! 그리고 괴물이 지면과 구조물, 정박한 어선과 충돌하며 발생한 파편을 모조리 거센 회오리에 가두었다.
크릉, 크르륵…. 파괴된 부두에 걸쳐진 괴물은 낙하 충격으로 부들부들 떨며 거친 숨과 바닷물을 뱉어냈다. 곧 비틀비틀 뭍으로 기어 올라간다.
편히 마나 추출하기는 힘들겠구나. 한율은 속으로 한숨을 쉬곤, 온갖 파편을 가둔 회오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괴물의 머리 위로 떨어뜨리기 위해.
전혀 예상치 못한, 조금 전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발생한 건 그때였다.
“어…?”
한율은 저도 모르게 당황한 소리를 냈다.
회오리를 이룬 마나. 그걸 잇는 마력의 힘이 느슨해지더니 저절로 스륵 스륵 풀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허공에 띄웠던 마법까지도 흩어져, 중력이 그를 지상으로 잡아끌었다.
“……!”
쿵, 쿠웅! 회오리에 갇혔던 파편이 속절없이 떨어졌다. 한율의 몸도 추락했다.
‘설마.’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마력 차단.
그 능력을 지닌 각성자가 이 근처에 있는 게 분명했다.
껍데기로 위장한 제임스의 환영이 사라졌다. 선명한 푸른색으로 물든 그의 눈에, 파편 사이로 비스듬히 선 날카로운 닻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빌어먹을.’
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