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4화 (346/427)

닻에 묶어두세요

“……!”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정상욱 중위는 놀라 망원경을 집어 던졌다. 황급히 제임스가 떨어진 곳으로 차를 몰았다.

정상욱은 제임스가 이탈리아로 떠난 뒤에도 그의 활약을 계속 찾아봤다. 지금처럼 도중에 무력하게 힘을 잃는 건 처음 있는 일. 하물며 수십 미터 상공에서 날카롭게 박살 난 여러 파편 위로 떨어지다니.

도중에 그의 머리카락 색이나 인상이 변한 것 같았으나,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제발 무사하기를!’

한국과 무슨 인연인지는 몰라도, 이번에도 위험한 괴물이 나타난다고 하자 멀리 이탈리아에서 달려와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이런 곳에서 잃을 순 없었다.

“제임스! 내 말 들립니까? 제임스!”

크륵, 크르륵…. 하늘에서 쏟아진 파편을 얻어맞은 괴물이 꿈틀거렸다. 해군의 공격으로 벌어진 상처에 큼지막한 닻이 깊게 꽂혀 아픈 모양이었다.

겁이 덜컥 났지만, 정상욱은 차에서 뛰어내렸다. 사방에 나뒹구는 위험천만한 파편을 지나치거나 밟고 올라가며 제임스를 애타게 불렀다.

“제임스!”

-[중위님, 물러나십시오! 지금 괴물을 잡아야 합니다!]

“제임스가 떨어졌다고, 새끼들아! 그 사람까지 같이 날릴 참이야?! …제임스!”

무전기에 대고 버럭 외친 정상욱은 주위를 다급히 살폈다. 그 순간 피로 얼룩진 녹슨 닻 하나가 보였다. 닻에는 제임스가 입었던 옷과 똑같은 색의 천이 찢긴 채 걸려 있었다.

그 너머로 부들거리는 팔을 세우며 일어나는 한 사람.

“제임스!”

그때였다.

크어어엉! 괴물이 제 몸 위로 쏟아진 파편을 부르르 털어냈다. 정상욱은 몸을 웅크린 채 호흡을 참았다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어느새 괴물이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제임스! 괜찮으십….”

정상욱은 우뚝 멈췄다. 피가 흘러내리는 상처를 감싼 채 일어나는 사람은 제임스가 아니었다.

“하….”

한율은 깊은숨을 내뱉으며 짜증이 난 얼굴을 들었다.

이렇게 다치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그러나 이딴 아픔보다도, 자신을 노리고 능력을 전개한 것 같은 타이밍과 뒤처리 걱정에 벌써 귀찮음이 밀려왔다.

“서한율 씨…? 그럼 제임스는….”

멍한 얼굴이 된 정상욱 중위를 향해 한율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본래 세상. 마력 차단 능력을 가진 각성자에게 처음 당했을 때 느꼈던 더러운 기분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때와 똑같았다.

“이 근방에 대피하지 않은 일본인 각성자가 있을 겁니다. 그 새끼 잡아다 이 닻에 묶어두세요. 제가 올 때까지.”

“네…?”

한율은 저 멀리 고층 건물을 퉁퉁 밟으며 달아나는 괴물을 노려보았다. 하필이면 <부산 K-POP 콘서트>가 열리는 공연장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차는 제가 사용하겠습니다.”

마력 차단은 말 그대로 마법을 이루는 마력을 차단해 수식을 흩어지게 할 뿐, 마력 자체를 사라지게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체내 마력에까진 영향을 끼치진 못해, 한율은 가까스로 전신의 마력을 돌려 주변 마나를 응축, 쿠션 삼아 몸을 보호해 치명상을 피할 수 있었다.

만약 아직 마법사로서 미숙한 아이들이었다면 그대로 닻에 찔려 즉사했을 것이다.

‘설마하니 한국에 왔을 줄은.’

“저기….”

한율은 당황해하는 정상욱을 지나쳐 차에 탔다. 한 손으로 거침없이 핸들을 잡고 돌리며 괴물이 향한 곳으로 달렸다. 그리고 그곳을 어느 정도 벗어났을 때, 나머지 손으로 옆구리에 난 상처를 치료했다.

마력 차단 범위를 벗어나자마자 마법이 제대로 발동돼 다행이지만, 화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진작 그자를 찾아내 처리하지 않은 자신의 안이함에.

그러나 솔직히 외국인인 그자가 뜬금없이, 하필이면 이곳에 있을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넌 내 손에 또 죽어줘야겠다.’

속으로 살벌한 선언을 하고선 차를 세웠다. 도시는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괴물의 등장에 패닉에 빠진 상태. 한율은 제임스의 모습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거센 바람 마법에 몸을 실었다.

한편, <부산 K-POP 콘서트>가 열리는 공연장.

거대한 괴물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으나,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른 채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십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하는 괴물은 전혀 보고된 바가 없었다. 이곳과 한참 떨어진 연안에 대피령이 울린 것도 5분 전인데다, 괴물이 영도 앞바다 상공에 등장한 건 불과 2분 전.

당국이 급하게 긴급 재난 문자, 대피 안내 문자를 보내고, 괴물을 목격하거나 소식을 들은 이들 또한 공연장에 간 가족과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을 테지만, 5만여 명의 기척과 큰 음악 소리는 그 모든 걸 묻어버렸다.

콘서트 주최 측이 사실을 알고 공연을 중단하려 했을 땐 이미, 괴물의 그림자가 공연장 하늘을 침범하고 있었다.

관객 대피 지시를 받은 총연출은 사색이 된 얼굴로 무전기를 들었다.

“모, 모두 머리…!”

공연장 지붕은 반 개방된 돔 형태였다. 그러나 해가 지는 저녁인데다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화사하고 화려한 인기 걸그룹, IOMU의 무대로 향한 상황.

막 IOMU의 소개를 끝내고 큐카드를 살피려던 JE와 진은수, 방송인 정태현은 인이어에서 들리는 PD의 목소리에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인이어에서 PD의 목소리가 쩌렁 터져 나왔다.

[관객들 머리 숙이라고 해! 당장!]

“……?!”

세 사람은 놀라서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와 함께 키울 열 가지 미래를 그려.]

IOMU의 발랄한 노랫소리가 크게 울리는 공연장 하늘 위.

은은한 푸른색을 띤 거대한 보호 결계가 펼쳐졌다. 그리고 공연장에 침입하려던 괴물을 그물처럼 휙 감싸듯 순식간에 낚아채곤 사라졌다.

“……?”

남은 건 마법사들의 눈에만 보이는 마나의 흔적.

반짝반짝. 눈처럼 예쁘게 흩날린다.

정태현이 얼떨떨한 얼굴로 PD에게 물었다.

“방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PD님?”

당황한 PD의 목소리.

-[어, 그…. 방금까지 괴물이 있었, 는데…?]

“선배님.”

진은수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JE를 불렀다.

“조금 전 하늘에 뜬 푸른색 장막…. 저만 본 거 아니죠?”

심각한 얼굴로 보호 결계가 사라진 하늘을 올려다보던 JE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마법의 기운은 분명히 서한율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 있어야 할 녀석이 어떻게?’

서한율의 마법을 보고 느낀 건 객석에 있던 이해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장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전화로 물어보고 싶었지만, 옆에서 신나게 IOMU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권한정을 보곤 잠시 미루기로 했다.

‘나중에 무슨 일인지 말해주겠지.’

실내에 있는 어스래빗의 대기실.

유호와 박가람은 마법의 기운을 느끼진 못했지만, 대신 TV를 보곤 고개를 기울였다. <부산 K-POP 콘서트> 생중계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카메라가 풀샷을 잡았을 때 하늘에 수상한 그림자가 꿈틀거린 것 같았다.

‘조명 그림잔가?’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도 잠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강보배가 불쑥 핸드폰을 내밀었다.

“조금 전 공연장 위에 푸른색 장막이 넓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대. 바다에서 올라와 이쪽으로 돌진하던 큰 괴물도.”

“…뭐?!”

불쑥 나타나 부산 시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괴물이 돌연 사라졌다. 공연장을 덮치려던 괴물을 낚아채고 사라진 푸른색 장막을 본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우연히 그 장면을 촬영한 영상도 금세 인터넷에 퍼지기 시작했다.

총연출은 1분도 안 되어 뒤바뀐 지시를 받았다.

[공연 계속 진행하세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

IOMU의 무대가 끝나고, MC들은 다급히 작성된 새로운 큐카드를 차분히 읽었다.

[IOMU의 멋진 무대 도중, 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잠깐 괴물이 콘서트 관람을 위해 왔었는데요.]

이 대본 누가 쓴 거야.

JE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멘트를 이어나갔다.

[다행히 각성자 제임스가 괴물 불청객을 잡아 아주 멀리 데려갔다고 하니, 관객 여러분은 안심하고 다음 무대를 즐겨주세요.]

* * *

부산의 한 고층 건물 사무실.

이제 1부가 끝난 걸까. 펑. 퍼엉. 저 멀리 공연장에서 쏘아 올린 불꽃이 그새 어둑해진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한율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에는 더벅머리에 안경을 쓴 청년이 죄인처럼 두 손을 모은 채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세키구치 쇼고.

부산 영도 부두 근처에 대피하지 않고 숨어있던 걸, 정상욱 중위가 정말로 잡아 왔다.

한율이 본래 세상, 그의 손으로 직접 죽였던 그 남자였다.

[정말로…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손을 이렇게 펼쳤을 때 공기가 위이잉 떨리면서 괴물의 공격이 멈춘 경험이 몇 번 있었거든요. 그래서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했을 뿐인데, 제임스 씨의 힘까지 사라질 줄은….]

세키구치는 본인의 각성 능력이 정확히 ‘마력’을 차단하는 거란 걸 모르고 있었다.

그가 제임스로 변장한 한율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한국에 입국한 건 그제. 바로 어제 열린 <부산 K-POP 콘서트> 1일 차 공연에 출연하는 인기 걸그룹, 히아신스의 무대를 보기 위해서였다.

[정말 어떻게 사죄를 드려야 할지….]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놓게 하는 자백 마법을 뿌려 놓았으니, 지금 그가 말하는 건 모두 진실이었다. 정말로 한율, 즉 제임스를 노리고 능력을 사용한 게 아니란 소리.

한율은 일본어로 대답했다.

[내 힘이 당신 능력에 의해 사라졌었단 사실을 비밀로 해준다면, 내가 죽을 뻔했던 건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그런데 몇몇 괴물의 공격이 멈춘 적이 있었다고 했죠?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세키구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우웅, 우웅. 그 와중에도 한율의 핸드폰은 끊임없이 울렸다. 분명히 마법 학교 아이들일 것이다.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요.]

[네!]

세키구치를 가둔 사무실을 나오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정상욱 중위가 다가왔다.

“이야기는 잘 끝났습니까?”

“아직이요. 그리고 이번 일로 한국군과 부산시가 받은 피해도 있잖아요.”

정상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한율은 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공연장을 덮치려던 괴물을 부산 영도 부두에다 패대기친 뒤. 한율은 정상욱에게 정체가 들킨 김에 이것저것 이야기해주었다. 자신이 바로 서울 게이트를 막았던 미스터리 해커 집단의 일원이라고.

가장 큰 비밀이자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었다는 데에 감동한 건지, 아니면 서울 시민 몇만 명을 구한 영웅이라서 그런 건지, 정상욱이 가장 먼저 한 말은 ‘감사합니다’였다.

“그런데 저놈, 왜 닻에다 안 묶으셨어요?”

“홧김에 한 말 아니었습니까?”

“진담이었는데요.”

“펜션에 침입했던 각성자 황재은. 게이트 방어선 내 임시 수용소에 가뒀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간 저지른 범죄를 면밀하게 조사한 뒤 처벌할 예정입니다. 그런 신비로운 힘을 얻어놓고 한다는 게 고작 범죄라니. 참 한심한 노릇입니다.”

“벌써 그러시면 안 되죠. 이제 시작인데요.”

“그래서 말인데.”

정상욱이 천천히 걸음을 멈추더니 한율을 바라보았다.

“제임스 씨.”

한율은 손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바빠서요.”

“아니, 들어보지도 않으시고….”

우웅, 우웅.

다시 울리는 핸드폰을 꺼냈다. 박가람의 전화.

“네.”

-[너 어디야! 왜 왔어! 괴물 처리했으면 바로 공연장으로 와야지 뭐 하는 거야!]

귀청 떨어지겠네.

한율은 핸드폰을 살며시 귀에서 떨어뜨렸다가 대답했다.

“갑자기 제가 나타나면. 그리고 저 연습도 전혀 안 했잖아요.”

-[20분 안으로 와. 마지막 곡에라도 참여해.]

막무가내로 떼를 쓰던 박가람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네가 작사한 <일상화> 부를 거니까.]

“…저 무대의상이랑 메이크업도.”

-[그러니까 20분 안으로 튀어와야지. 빨리 와! 안 그러면 나 수련 안 해!]

뚝. 통화가 끊겼다.

왜 본인 수련을 협박 수단으로 사용하는 건지.

한율은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돌렸다. 정상욱이 흐뭇한 웃음을 참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보셨죠? 저 정말로 바빠요.”

“네.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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