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오늘 못 온다며
<부산 K-POP 콘서트>는 부산시와 이우그룹, FJ그룹이 함께 주최하는 공연이었다.
일찍이 이우그룹 관계자는 공연 총연출에 ‘불참한다고 했던 서한율이 깜짝 등장할 수도 있지 않나’라며 슬쩍 말한 적이 있었다. 총연출은 어스래빗의 무대를 특히 신경 썼다. 서한율이 제임스, 미스터리 해커와 연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기, PD님.”
그래서 어스래빗 매니저 조유찬이 다가왔을 때, 그는 1부 초반에 벌어진 사건으로 뚝 떨어졌던 심장을 부여잡으며 아무렇지 않게, 친절하게 웃었다.
“네, 무슨 일입니까?”
“갑작스럽지만 드릴 말씀이 있는데….”
조유찬이 조심스럽게 하는 말에도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태프들에게 전달해 준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총연출과의 대화를 마친 조유찬은 부리나케 어스래빗 대기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누가 안을 볼까, 문을 아주 조금만 열어서 쏙 들어간 뒤 재빨리 닫았다.
“허락받았어.”
“그럴 줄 알고 이미 준비 중이에요.”
대기실에는 한율이 거울 앞에 앉아 단장을 받고 있었다. 이곳까지 출장 온 샵 직원들은 손을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피부랑 머릿결이 너무 좋아서 금방 끝날 것 같아요.”
“우리 한율 씨, 관리 꾸준히 잘해줘서 너무 기특하다.”
“어떻게 시간이 갈수록 더 잘생겨져. 꼭 귀공자 같아. 잠깐 눈 감아볼까?”
다른 어스래빗 멤버들은 이프림을 깜짝 놀라게 할 생각에 잔뜩 들떴다.
“흐. 이프림 진짜 놀라겠다.”
“스타일리스트 누나가 서한율 무대의상까지 챙겨서 천만다행이었지. 누나 선구안, 크!”
“이상하게 한율이 것도 챙겨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막 들더라고.”
“누나 각성자 테스트받으러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너희들은 슬슬 백스테이지로 이동하자. 한율인 세 번째 곡 시작할 때 올라갈 거야.”
“네엡!”
한율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건 멤버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이유를 묻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무대 동선부터 점검했다. 한율 없이 동선과 파트를 수정하고 연습한 게 허사가 되었지만, 모두 귀찮아하는 기색은 없었다.
세 번째로 부를 <일상화>는 2018년 12월에 발매한 앨범 수록곡이었다. 그러나 작년 월드투어 세트리스트에 포함됐었고, 올해 봄 미국 영어 앨범에도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하면서 미국 쇼케이스 투어 당시에도 불렀었다.
“동선이랑 파트 원래대로 할 거니까 다들 절대 헷갈리지 마. 틀리면 한 달 동안 바보라고 부른다.”
“이미 바보라고 부르면서 뭘 새삼스레.”
라이언은 한율에게 <일상화> 무대 영상을 띄운 사과패드를 건넸다.
“벼락치기 복습해, 하뉼.”
“고마워요, 형.”
안무가 그리 어렵지 않은 곡이었다. 헤어 스타일링과 메이크업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한율은 눈을 내리깐 채 영상을 보면서 복습했다. 그리고 단장이 끝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백스테이지로 향했다.
사실 오늘 공연에 불참한다고 미리 공지했으니, 박가람의 하찮은 협박이야 가볍게 무시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꼭 거절해야 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오래간만에 무대에 서고 싶었다.
오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과 위기를 맞을 뻔해, 어지러워진 기분을 전환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헐. 서한율?!”
“한율아!”
백스테이지엔 어스래빗 다음 차례인 보이그룹 스카이러너가 대기 중이었다. 한율을 발견한 하신과 용맹이 반갑고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용맹은 와락 한율의 어깨를 끌어안았다가 떨어졌다. 음악 소리가 아주 커, 그가 크게 외치듯 말했다.
“너 오늘 못 온다며!”
한율도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됐어요!”
하신과는 주먹을 가볍게 맞부딪히며 인사했다. 다른 스카이러너 멤버들에겐 묵례로. 스태프들이 다가와 인이어와 마이크 상태를 확인해주었고, 한율은 무대 구조물 아래 통로를 통해 돌출 무대 쪽으로 이동했다.
어스래빗에게 주어진 무대 시간은 8분 남짓. 2.5 곡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여름에 걸맞은 리믹스 버전으로 분위기를 띄우며 무대를 열고, 이어서 이번 컴백 타이틀곡이었던 을 불렀다.
한율은 구조물 아래에 쭈그리고 앉은 채 노래를 감상했다.
‘잘하네.’
이 끝나고 조명이 꺼진 사이, 대형 전광판에 짧은 VCR이 흘러나왔다. 파스텔 색감에 꽃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도시가 그려지며 유려하게 적히는 곡명 <일상화>.
<일상화>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던 멤버들이 갈라지고, 길우성이 센터로 나가며 노래가 시작된다. 그리고 길우성이 파트를 끝내고 빙글 몸을 돌리면, 한율의 파트.
그러나 한율은 노래가 시작되어도 바로 무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톡 튀어 오른 꽃씨 하나, 네 일기 속 꽃잎 될까.]
길우성은 3년 전 컴백 쇼케이스에서 <일상화>를 불렀을 때보다 여유롭게 춤을 추며 센터로 나갔다. 연속 라이브 중이라 힘들 법도 한데, 호흡과 딕션도 많이 성장했다.
[내 일상의 너, 적막을 빛으로 물들여, 화(花).]
[여름에도 불러줘서 고마워.]
본래 가사에선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지만, 계절에 맞춰 바꿔 부른다. 그러고선 본래와 달리, 뒤를 휙 돌아보며 신나게 외치는 길우성.
[소소한 이벤트야!]
동시에 대형 전광판에 잡히는 한율.
꺄아아악!! 객석에서 놀라 크게 지르는 환호성이 인이어를 뚫고 들어왔다.
이렇게 깜짝 등장이 가능했던 건, 돌출 무대 바로 뒤에 숨겨진 리프트 덕분이었다. 한율은 무대 구조물 아래에 숨어있다가 리프트를 타고 올라왔다.
[같은 바람을 맞으며 밴 향기, 사라져도 괜찮아.]
앞으로 나아가며 환호성이 가장 크게 들린 방향을 향해 노래를 불렀다. 지구의 빛을 품은 토끼 모양 응원봉이 아름답게 물결친다.
[1년, 2년, 일상이 계속되는 한 지지 않아.]
[언젠가 마른 책갈피가 된대도.]
한율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난 너의 일상 속 화(花), IDOL.]
너튜브 <부산 K-POP 콘서트> 생중계 채널.
그러잖아도 글 한 줄 제대로 못 읽을 정도로 아주 빠르게 올라가던 채팅창은, 한율이 깜짝 등장하자 아예 폭주 상태가 되고 말았다.
-OMG
-HanyulHanyulHanyulHanyulHanyulHanyul
-못 온다며ㅠㅠㅠㅠㅠ 이 사랑스러운 거짓말쟁이
-어디에서 튀어나온겨
-[올 거라고 믿고 있었어 한율♡♡♡]
-부산에 나타난 괴물을 제임스가 때려잡았다더니 같이 왔나?
-[눈물 날 것 같아]
-왔다아아아아아아아아
TV나 인터넷을 통해 콘서트를 보던 이프림도 SNS 등에 한율의 짤을 올리며 기뻐했다. 대형 포털사이트 실검엔 [부산 서한율]이 올라왔다.
[서한율 제임스]도.
잠시 후, 무대를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
무대에선 괜찮았지만, 평범한 새하얀 조명 아래에선 참 부담스러울 정도로 꾸민 길우성이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내 친구지만 넌 참 신기한 녀석이로구나, 써한. 어떻게….”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걸그룹 IOMU 멤버들이 낭랑한 목소리로 한율을 향해 인사했다. 꼭 인사하려고 일부러 나와 있었던 것 같아, 한율도 웃으며 받아주었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 공연 잘 봤어요.”
결계를 펼치고 괴물을 잡느라 2초 정도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이거 드세요, 선배님!”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IOMU 멤버들이 크게 고개를 숙이곤 후다닥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중 마지막으로 들어가던 김서우는 다시 한번 한율을 향해 꾸벅이곤 문을 닫았다. 김서우는 그들과 같은 WB래빗 엔터 소속이었다.
길우성이 한율이 받은 꿀 유자차를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우리도 공연 시작 전에 다 받았으니 오해는 금물이다, 친구야.”
“안 해.”
툭툭. 차남석이 한율의 어깨를 두드리며 지나가듯 물었다.
“이제 눈치 게임은 끝내도 되는 거지?”
“무슨 눈치 게임이요? 아, 그리고 저 지금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
“뭐? 또 어디로.”
“어딘지 말하기는 좀 곤란하고, 어쨌든 하다 만 일이 많아서요.”
덥석. 라이언이 한율의 옷을 잡았다.
“그럼 가기 전에 영상이랑 사진 찍어. 그 정도 시간은 있잖아. 이프림, 우리랑 같이 있는 하뉼 더 많이 보고 싶어 해.”
한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대형 포털사이트 메인.
[각성자 제임스, 미스터리 해커 집단 결정적 증거?!]
[오늘 18일 오후, 대마도 인근 심해에 생성된 레드 게이트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괴물이 부산 앞바다까지 접근해 해군과 전투를 벌였다. 괴물은…(중략).
(영상=순식간에 나타난 괴물을 잡아가는 푸른색 장막)
사상 초유의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할 뻔했으나 <부산 K-POP 콘서트>의 진행자는 ‘다행히 각성자 제임스가 괴물 불청객을 잡아 아주 멀리 데려갔다’라고 차분하게 말했다.
많은 네티즌은 이 발언을 두고 ‘제임스가 단순히 강한 각성자가 아니라, 서울 게이트에 푸른색 장막을 만든 장본인이란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거 아니냐’라고 추측했으나 <부산 K-POP 콘서트> 관계자는 ‘MC는 주어진 대본을 읽었을 뿐이며 이는 작가가 대본을 급히 수정하다 벌인 실수’라고 일축했다.
한편, 해군과 게이트 방어 위원회 각성자 관리과는 제임스가 부산을 덮친 괴물을 물리쳤냐는 질문에 침묵 중이다.]
-왜 서한율이 때마침 나타났단 사실은 기사에 없지?
ㄴ서한율이 왜요?
ㄴ원래 오늘 부산 콘서트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불참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마지막 곡 같이 불렀어요. 그리고 엔딩 무대 때 또 사라짐. 안 나옴;
-서한율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둘이 차도 빌려주고 이탈리아도 같이 가고 귀국도 같이 한 거 보면 절친 같던데
-제임스가 괴물 물리친 거 맞음. 너튜브에 [부산 제임스] 검색ㄱㄱ
-제임스가 서울 게이트 막았던 일등 공신이면 당장 모셔와야지
-좀 이상하지 않나요? 제임스만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각성했지? 왜 그렇게 세?
ㄴ미스터리 해커 집단 미래인 썰 모름?
-그래서 결정적인 증거가 어디 있는데 기자야
이틀 동안 열린 <부산 K-POP 콘서트>가 무사히 끝났다.
어느새 깊은 밤. 한율은 제임스의 모습을 한 채 영도로 향했다. 영도 부두엔 몇 시간 전, 그가 공연장 하늘에서 잡아 온 괴물이 숨만 쉬며 누워있었다. 온몸이 보이지 않는 결계로 꽁꽁 묶인 채.
주변엔 군이 괴물을 향해 무기를 겨눈 채 경계 중이었다.
“한율아.”
“왔어요?”
이해원이 정상욱 중위의 차를 타고 도착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서로의 어깨나 팔을 두드리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곤 걸음을 옮겼다. 정상욱은 눈치껏 빠져주었다.
한율은 대화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방음 마법을 펼쳤다.
“권한정은요?”
“호텔에. 어제랑 오늘 내내 많은 사람을 보고, 그중에서 각성자를 찾아내 설득하느라 진이 다 빠졌는지 바로 곯아지더라. 지금은 다른 군인이 객실을 지키고 있어.”
이해원은 그동안 권한정에게 들은 이야기, 그리고 직접 관찰하며 느낀 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
한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희귀 등급…. 네, 들어보니 위험도보단 그걸 판별하는 것 같네요.”
“일부러 길우성한테 접근한 것도, 아직 각성하지 않은 각성자인데 아우라까지 드문 색이라 그런 것 같아. 대체 어떤 능력을 각성할까 궁금해서.”
그래도 길우성 가까이에 두기엔 위험하다.
한율은 길우성이 게이트 내로 들어간 뒤 각성했다고 알고 있지만, 권한정에겐 게이트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부터 달리 보이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바로 죽여버리기엔.’
게이트 사태 초반. 아직 한국엔 각성자 판별 능력이 필요하다.
“수고스럽겠지만, 형이 계속 잘 지켜봐 주세요.”
“응.”
“그리고 마법 학교 학생들에게 꼭 전달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요.”
두 사람은 괴물의 머리 옆에서 멈췄다.
크릉. 크륵…. 괴물이 눈동자를 굴려 두 사람을 바라봤지만, 한율은 개의치 않고 괴물의 눈가 옆에 몸을 편히 기댔다. 저 멀리서 군인이 놀란 얼굴로 입을 쩍 벌리는 게 보였다.
“마력 차단 능력을 가진 각성자가 있어요.”
이해원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