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6화 (348/427)

세상일이 참 묘해

한율은 세키구치 쇼고에 관해 들려준 뒤 가볍게 웃었다.

“한 명은 우리가 각성자가 아니란 걸 알 수 있고, 또 다른 한 명은 마력을 차단하는 능력이고. 참 재밌지 않아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던 이해원이 물었다.

“그럼 괴물 중에 마법을 쓰는 놈들이 있다는 거야?”

“아니요. 마법이 아니라 순수한 마력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거예요. 마법은 최소 인간 정도의 지능을 갖추지 않는 한 힘드니까. 구동이 같은 마물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가끔 특이한 힘을 쓰는 놈들이 있어서 의심하긴 했지만, 세키구치의 이야기를 듣고 확신했죠.”

“이 괴물도 10㎞가 넘는 거리를 단숨에 이동했다던데. 그럼.”

“마력을 에너지 삼아 발동한 고유 능력이 아닐까 추측 중이에요.”

한율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환영 마법을 전개했다. 그리고 괴물에게 기댔던 몸을 떼어내고 대신 손끝을 가볍게 얹었다.

크륵. 괴물이 움찔 몸을 떨었다. 한율의 마력이 멋대로 제 몸속 구석구석을 훑는 걸 느낀 것.

“형, 지난번에 별장에서 가르쳐준 거. 그 뒤로 해본 적 없죠?”

괴물의 마나 추출.

이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동안 훈련소에 있었잖아.”

“내가 이놈을 잡고 있을 테니까, 지금 한번 해봐요.”

“……!”

한편 그 시각, 부산의 한 호텔.

곯아떨어진 척 침대에 축 늘어졌던 권한정은 번쩍 눈을 떴다. 바깥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일어난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현관엔 권한정의 신발, 그리고 밤에 이해원과 경호 업무를 교대하는 군인의 신발만 놓여 있었다.

‘교대하고 바로 나간 건가? 제임스를 만나러?’

이틀 동안 권한정은 제임스와 만나고 싶다고 직간접적으로 표현했다. 그때마다 이해원은 ‘그렇습니까’라며 선을 그었고.

조금 전 <부산 K-POP 콘서트>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엔 대놓고 제임스와 만나게 해줄 수 없냐 물어도 봤지만.

『싫습니다.』

단호히 거절당했다.

‘아니면 혹시 서한율을 만나러 갔나?’

권한정은 침대에 걸터앉아 사과패드를 집었다. 이틀 동안 각성자들을 만나 기록한 파일을 살폈다.

<부산 K-POP 콘서트> 관객은 하루 5만여 명. 공연장 입장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살피다가 마주친 각성자는 수십 명이었다. 그중엔 벌써 각성자 테스트를 받았던 사람도 있었고, 1130 증상자이자 각성자란 사실 자체를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 아니거든요?! 각성자 연구손지 뭔지…. 이렇게 불쑥 와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함부로 해도 되는 거예요?』

그래서 원망스러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솔직히 권한정은 각성자란 사실을 숨기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본인이 가진 능력을 정확히 알아야, 나중에 필요할 때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아무런 초능력 없는 군인들도 군인이란 이유로 방어선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데, 각성자라고 당장 게이트 방어선으로 달려가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이기적이라고 해야 할지.’

그래도 다른 사람 앞에서 개인 정보를 까발린 건 살짝 반성 중이었다.

‘그나저나…. 서한율은 대체 뭐지?’

공연장엔 마지막 즈음에 입장한 터라, 무대와 멀리 떨어진 외진 구석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어스래빗 무대 도중 깜짝 등장한 서한율을 보았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래도 같이 있던 우성이 형은 흐릿하게나마 아우라가 보였는데, 서한율은 ‘이번에도’ 안 보였어.’

이해원과 나기혁은 권한정의 능력을 의심했었다. 그러나 권한정 또한 오늘 서한율을 다시 보곤 되레 의혹을 품었다.

‘해원이 형과 서한율. 미스터리 해커 소속 각성자들은 뭔가 다른 건가?’

그래서 더 제임스를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제임스가 부산에서 잡은 괴물이….’

검색.

바로 정보가 떴다.

‘영도 부두에 있구나.’

권한정은 외출 채비를 하고 살금살금 방을 나왔다. 열린 다른 방 안을 살핀 뒤, 현관으로 나가 신발을 신었다.

이해원과 교대로 온 경호원은 권한정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일을 맡은 게 아니다. 그러니 이렇게 몰래 움직일 필요는 없지만, 지금 경호원이 이해원에게 연락이라도 한다면 제임스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천천히.’

철컥.

“후우….”

몰래 객실을 빠져나오는 데에 성공. 권한정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곤, 입가를 올리며 몸을 돌렸다.

‘부두에 제임스가 없다 하더라도, 그를 본 군인들이 많을 거야.’

그 순간이었다.

권한정의 뒤로 새카만 그림자가 훅 다가와 그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

놀란 권한정의 머릿속에 나기혁이 한 말이 스쳤다.

『한정 씨 능력, 이렇게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다가 나쁜 놈들한테 납치당해서 사기 행위에 가담하라고 협박받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설마. 권한정은 몸부림치며 저항했지만, 코를 덮은 천에 약품이 묻어있었는지 곧 눈을 까뒤집으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복도에 나지막한 러시아어가 흘렀다.

[스스로 나와주니 참 고마운걸?]

이해원이 권한정의 납치 사실을 알아차린 건 그로부터 3시간이 지난 후였다.

* * *

[게이트 피해 성금 마련 <부산 K-POP 콘서트> 성료!]

[<부산 K-POP 콘서트> 출연자들의 빛나는 기부 행렬]

[인기 아이돌그룹 어스래빗, 게이트 피해 성금 3억 원 쾌척!]

[부산 덮쳤던 괴물, 밤사이 죽음]

[10km 이동 능력 괴물 출현에 전 세계 놀라]

[[속보] 각성자 연구소 소속 각성자, 호텔에서 괴한에 의해 납치]

[어젯밤 18일 각성자 A(19) 씨가 호텔에서 납치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A씨는 각성자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의 각성자로, 연구소에서 각성자 테스트를 돕는 일을 하며 부산에 출장을 왔다가 납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호텔 CCTV에 찍힌 범인들의 모습)

국내 각성자를 관리하는 게이트 방어 지휘부는 A씨의 능력을 노린 납치 사건으로 보고, 경찰과 함께 수사에 총력을 기울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각성자를 구별할 수 있는 각성자는 현재 A씨를 포함해 전 세계에 5명도 되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어…? 어어…?!”

19일 아침. 이불 속에서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살피던 길우성은 놀라 벌떡 일어났다. 각성자 납치 사건 피해자 A씨의 특징이 권한정과 딱 들어맞은 까닭이었다.

덜컥 걱정되는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정말로 한정이가 납치된 거야?!’

길우성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서한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왠지 서한율이라면 게방부에 아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통화연결음으로 설정된 보이그룹 풀썸의 노래가 흘러나오다 끊겼다.

-[어, 왜.]

“너 아직 한국이지? 인터넷에 뜬 기사 봤냐? 부산에 있던 각성자 실종 사건! 그 사건 피해자가… 왠지 내가 아는 애 같거든?”

-[…권한정?]

“어, 맞아! 걔 정말로 납치된 거야? 너 뭐 들은 거 있어? 대체 어떤 놈들이….”

아주 작게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해원이 형한테 들어보니까 그저께부터 공연장 쪽 둘러보면서 마주치는 각성자들이랑 이야기를 나눴다던데. 그러면서 눈에 띈 거겠지.]

“누구한테?”

-[누구긴. 권한정의 능력을 탐낸 놈들이겠지.]

“해원 선배님도 부산에 있어? 훈련소는?”

-[바빠. 끊어.]

뚝. 길우성은 황당한 얼굴로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보다가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긁었다.

“아오, 써한 진짜.”

길우성과 통화를 끝낸 한율은 고개를 돌렸다.

권한정이 묵었던 객실. 정상욱 중위와 이해원이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놈들이 찍힌 CCTV 모두 살펴봤는데, 체격이나 몸놀림을 봐선 그놈들로 추정됩니다. 드미트리 동료들이요.”

“용케도 잘 다니네요. 수배까지 내려졌는데 부산 호텔까지 와서 납치라니.”

“한 가지 의문은, 권한정 씨가 왜 그 시간에 몰래 객실을 나갔냐는 겁니다. 해원 씨와 교대한 병사 말에 따르면 현관문 체인을 이중으로 걸어둬서, 만약 그대로 객실에만 있었다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납치되진 않았을 거라던데.”

이해원과 한율의 시선이 마주쳤다.

“…글쎄요. 어쨌든 권한정이 가진 능력을 노리고 납치한 거면, 쉽게 죽이진 않을 것 같네요.”

“그러기를 바라야죠.”

정상욱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쨌든, 놈들이 여전히 대한민국 땅을 멋대로 돌아다닌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두 분도 조심하십시오.”

“네.”

“세키구치는 오전 내에 일본으로 돌려보낼 예정으로, 그가 저지른 일로 발생한 피해 모두 법적 검토 후 따로 손해 배상 청구할 예정입니다. 법무부 출입국에도 이름을 전달했으니 앞으로 한국에 입국하는 것도 힘들어질 거고요. 밀항이라도 하지 않는 한 말이죠.”

“그렇게까지 하진 않으셔도 되는데.”

정상욱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당신에게 큰일이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마음 같아서는… 후우. 말을 아끼겠습니다.”

한율은 걱정해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해원 씨, 5분 후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상욱이 자리를 비켜주어, 객실엔 한율과 이해원만 남았다.

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일이 참 묘하네요.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던 두 사람이 한꺼번에.”

“둘을 만나게 하려던 계획은 어그러졌지만 말이야.”

어젯밤, 한율은 세키구치와 권한정을 서로 마주치게 하는 건 어떠냐는 의견을 냈다. 권한정의 눈에 세키구치가 어떻게 보이는지, 그가 가진 마력 차단 능력이 얼마나 희귀한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사이 권한정이 납치당할 줄은.

“뒷맛이 쓰겠지만, 그래도 형 잘못은 없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형이 다른 사람과 교대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잖아요.”

“응. 하지만….”

이해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철이 없기는 해도 나쁜 애 같지는 않았거든. 무사히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 한율이 넌 이제 다시 이탈리아로 가는 거야?”

“네. 여러 가지 실험 중에 갑자기 온 거라.”

“무슨 실험인지 물어봐도 돼?”

“나중에요.”

“그래. 그럼 조심히 가.”

“네. 형도 항상 몸조심해요.”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나누곤 함께 객실을 나왔다.

몇 시간 후.

SNS와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부산에서 납치된 권한정의 신상, 그가 그제와 어제 이해원과 함께 <부산 K-POP 콘서트> 공연장 주변을 다니는 걸 봤다는 목격담이 쏟아졌다.

-처음엔 사이비 종교 포교인가? 옆에서 가만히 들어보니까 각성자 연구소 테스트받아보라는 설득이었음. 그래서 돌아봤더니 이해원도 같이 있었음. 그제야 왜 여자애가 ‘테스트 꼭 받아야 해요? 의무 아니잖아요.’ 틱틱거리면서도 끝까지 얌전히 들어줬는지 깨달았다.

ㄴ스폰 이슈든 뭐든 떠나서 나도 실제로 한번 보고 싶다 이해원ㅋㅋㅋ

-이해원 국방부 게이트 방어 지휘부 각성자 부대 소속이라고 소개하는 거 직접 들은 사람 있으면 1. 나부터 11111111

ㄴ부럽

-이해원 같이 있었는데 납치당한 거?

ㄴA씨가 밤중에 몰래 호텔 객실 나가다가 납치된 거라고 함.

-이해원도 각성자란 게 사실이네?

ㄴ이해원 각성자 전형으로 입대해서 훈련소도 3주 만에 나왔잖아

ㄴ??????? 입대한 거였음?

ㄴㅇㅇ

ㄴ와 각성자면 입대해도 그냥 사회 돌아다녀도 되는구나 개부럽다

-왜 아무도 납치 피해자 걱정은 안 하냐 지구상에 5명도 안 되는 각성자 판별기 하나가 사라졌는데ㅜㅜ

ㄴ네가 더 나빠

“이해원 이병?”

“네, 이병 이해원.”

서울의 게이트 방어선 본부. 김관식 소장에게 인사 및 보고 후 나오는데, 마주친 상급자가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밖에서 자넬 찾는 사람이 있던데?”

누가?

군대는 계급 사회다. 그렇기에 호기심 많은 상급자가 부른 건가 생각하며, 이해원은 대답했다.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건물을 나왔다가 누군가를 보곤 멈칫했다. 다른 군인들처럼 짧은 머리카락에 군복을 입었으나, 뒷모습이 상당히 낯익었다.

남자가 서성거리다가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안인섭이 씩 웃었다.

“야,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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