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대접하기 싫어
이해원은 속으로 살짝 놀랐으나, 담담히 물었다.
“형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인천 쪽에 배치됐다고 알고 있는데.”
“놀랍네. 아직도 날 형이라 불러주는 데다가 어디에 갔는지까지 알고.”
이해원은 입을 다물고 안인섭을 바라보았다.
안인섭의 입장에서 이해원은 배신자나 다름없었다. VEL 엔터와 함께 그가 저질렀던 범죄, 부도덕한 사생활까지 낱낱이 까발려 사회적으로 매장해버렸으니.
“재판은 어떻게 됐어요?”
“…….”
이번엔 안인섭이 입을 다물었다. 이해원은 주위를 둘러보곤 처음 질문을 다시 했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섭섭하네. 정말로 평생 나 안 보려고 그런 식으로 숨어서 뒤통수친 거야? 그래도 우리가 함께 고생한 시간이 얼만데. 내가 너 힘들어할 때….”
“지금 부대로 들어가 봐야 해서 말입니다. 중요한 용건 아니면 다음으로 미루시죠.”
“야, 이해원.”
안인섭이 돌아서려는 이해원의 팔을 잡았다. 위이잉. 가까운 하늘을 나는 전투기 소리에 일순 멍해진 귀. 안인섭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스터리 해커, 서한율이지?”
이해원은 황당한 얼굴로 안인섭을 바라보았다. 안인섭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남들은 ‘미스터리 해커와 관련 있는 거 아니냐’ 의심하는 정도지만, 난 서한율 그 새끼한테 여러 번 당해서 그런지 딱 알겠던데? 그놈이 미스터리 해커 본인이거나 그 패거리 수뇌부인 거?”
“그러잖아도 예전부터 이 얘기 하고 싶었는데.”
탁. 이해원은 거칠게 안인섭의 손을 뿌리쳤다.
“형. 한율이한테 그만 집착해요. 형이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 거, 한율이 때문이 아니라 모두 형이 자초한 일이에요. 이젠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어요?”
“논점 흐리지 마. 지금 난 서한율이 아주 오래전부터 이상한 힘을 갖고 있었단….”
“좋아요, 만약 그렇다고 쳐요. 그게 뭐요.”
“너…!”
안인섭이 울컥 화나는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바짝 다가왔다.
“내가 당한 이야기 몽땅 풀면 사람들도 ‘아아,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뭐?’ 이렇게 너처럼 넘어갈까? 서한율이 가진 진짜 능력, 살랑살랑 바람 일으키는 게 아니라.”
툭툭. 안인섭이 제 머리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사람 머리 헤집고 조종하는 거잖아.”
이해원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정말이면 어떡할 건데. 4년 전 <락뮤닷> 어스래빗 미니 팬미팅에서 분탕질하던 미친년이 갑자기 술술 주절댄 것도, 내가 서한율 그놈이랑 단둘이만 마주쳤다 하면 이상하게 정신을 잃거나 기억을 잃었던 것도 모두 그놈 짓이라면?”
안인섭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내가 갖고 있던 파일을 모조리 빼돌려서 내 숨통을 조이고, 널 이용해 폭로한 게 그놈 짓이면!”
이해원은 서한율이 사람의 정신에도 간섭할 수 있단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예전, 양평으로 정 기자가 찾아온 후 본인에게 직접 들었다.
『강상지, 정말 네가 그렇게 만든 거야?』
『네. …실망했어요? 사람 한 명의 정신을 망가뜨려서?』
그때 이해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율이 네가 그럴 만했으니까 그랬겠지. 난 다만… 인섭이 형이 생각나서. 그 형, 자꾸 본인도 기억 못 하는 일들이 벌어져서 한동안 쩔쩔맸었잖아.』
“형.”
이해원은 안인섭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끝까지 시치미 뗐다.
“원망하고 싶은 대상이 필요할 만큼 지금 많이 힘들다는 거, 다 이해해요.”
“야, 이해원!”
안인섭이 답답한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이해원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금 형한테 필요한 건 피해의식으로 만든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아니라 휴식 같네요. 조심히 가세요.”
그리고 안인섭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치지 말고요.”
“…야!”
“이해원 이병?”
“이병 이해원.”
그때 소위 계급장을 단 군인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이해원은 경례하며 대답했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끊긴 안인섭도 뒤에서 경례했다.
“제임스가 부산에 있단 게 사실입니까?”
“제가 부산에서 출발하기 전까진 있었습니다.”
“와, 둘이 친한 사이란 게 사실이었나 봅니다.”
“…….”
소위가 이해원을 붙잡고 떠들기 시작하자 안인섭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 이해원은 그의 뒷모습을 일별하곤, 오늘 처음 보는 소위와 대화를 나누었다.
안인섭은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이를 갈았다.
‘후회할 거다, 이해원. 그놈의 실체를 알고도 감싸주는 거면 더더욱.’
그때였다.
“……?”
여러 전투 소음이 들리는 와중에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주변 군인들이 하나 같이 한곳을 쳐다봐, 안인섭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조심히 내리십시오.”
인기 걸그룹 퍼플아워의 멤버이자 각성자로도 잘 알려진 진은수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오셨을 때처럼 본관으로 가시면 됩니다.”
운전석에서 내린 여군이 진은수를 향해 본관을 가리켰고, 그쪽에서 오던 안인섭과 진은수의 눈이 마주쳤다.
“어….”
안인섭을 알아봤는지 진은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그러나 안인섭은 모르는 사람인 척, 모자를 깊게 눌러쓰면서 다른 방향으로 황급히 몸을 돌리고 걸었다. 이해원은 더러운 시궁창을 함께 굴렀던 사이라 아무렇지 않았지만, 진은수는 자신과 태생부터 결이 다른 아이돌 후배였다.
그래서일까. 지금 이런 꼬락서니로 마주친 것 자체가 쪽팔렸다.
‘씨발, 되는 일이 없어.’
진은수 또한 예상치 못한 만남에 당황해하다가, 안인섭을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한때 방송국에서 마주치면 깍듯하게 인사했던 아이돌 선배지만, 지금은 선배 대접은커녕 알은체도 하기 싫은 범죄자였으므로.
“안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네!”
진은수는 군인에게 씩씩하게 대답하고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번엔 이해원과 마주쳤다. 안인섭을 봤을 땐 내뱉기 싫었던 인사말이 반갑게 흘러나왔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헉. 이해원과 함께 있던 소위가 입을 틀어막으며 주춤거렸다. 이해원도 반갑게 화답했다. 진은수가 훈련소를 나간 뒤 첫 만남이었다.
“어서 와요, 은수 씨. 각성자 관리과에?”
“네!”
“저도 마침 부대로 가던 참입니다. 함께 이동하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진은수를 각성자 관리과까지 안내해준 이해원은, 가까이에 있는 각성자 부대 사무실로 들어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각성자 부대는 군 소속 각성자들을 모아놓은 특수부대라 당연히 모두 군인이었고, 신설된 지 얼마 안 된데다 특수성 때문에 대원 수 또한 적었다. 그리고 군대 특유의 딱딱하고 위압적인 분위기 또한 덜했다.
“복무 중 각성한 상병이 있다고 들었지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 부대원 중 가장 고참이라고 들었습니다.”
“진은수 님이 오늘 본부로 오신다던데 사실입니까?”
“이해원 이병, 어제 부산에서 제임스와 만났다던데. 혹시 오늘 함께 왔습니까?”
“훈련소에서 뵀을 때보다 더 잘생겨진 것 같지 말입니다? 비결이 뭡니까?”
“이해원 이병, 인사 다 나눴으면 관리과로.”
정상욱 중위의 부름을 받고 각성자 관리과로 간 이해원은 다시 진은수와 마주쳤다.
각성자 관리과는 국내 각성자를 관리하는 기관이었다. 진은수처럼 게방부의 일을 돕기로 한 각성자들을 특수 용병 형태로 고용, 적재적소 임무를 주는 곳이기도.
관리과 총책임자, 신승민 대령이 이해원과 진은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두 분에게 맡기고 싶은 임무가 있습니다. 은수 씨에겐 게이트 방어선 출입 테스트가 되겠군요.”
* * *
대형 포털사이트 메인.
[각성자 BJ, 서한율로 둔갑해 펜션 침입 영상 확산]
[어제 18일 한 해외 기반 인터넷 방송 플랫폼에서 둔갑 능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각성자 BJ A씨가 인기 아이돌이자 배우 서한율로 둔갑한 채 인터넷 방송을 켜고 서한율 소유 양평 펜션에 침입해 논란이다.
펜션 근처를 서성거리던 A씨는 마침 펜션으로 가던 서한율의 지인 배우 박현우와 만나 함께 차를 타고 펜션으로 침입했으나, 펜션에서 지내던 B양에 의해 결국 정체가 발각되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잡혀 게방부로 인계되었다고 한다.]
(사진=현재는 삭제된 A씨의 라이브 방송 중 한 장면)
해당 라이브 방송은 플랫폼에서 삭제됐으나, 영상과 캡처 파일이 인터넷에 퍼지며 네티즌들은 ‘A씨가 가짜란 걸 알아차린 B양이 누구냐’, ‘어스래빗 멤버들과 가족들만 지낸다고 알려진 펜션에 왜 일반인 여성이 있는 거냐’라며 B양의 정체에 관심을 두고 있다.
한편 진짜 서한율은 같은 날 18일, 개인 사정으로 불참한다던 <부산 K-POP 콘서트> 어스래빗 무대에 깜짝 등장해 전 세계 팬들을 놀라게 했다.]
-서한율 여친이 아니라 다른 멤버 여친일 수도 있지
-얘네도 별수 없구나.. 술담배여자 스캔들 하나 없다고 좋아했더니
ㄴ스캔들이 없었다고? 서한율만 해도 오다리 루머에다가 박가람도 히아신스 호수랑 뭐 있지 않았나?
ㄴ남자 8명 지내는 펜션에 여자애 한 명ㅋㅋㅋ
ㄴ여자애 한 명 아님. 영상 풀로 보면 길우성네 누나도 있고 매니저 부인도 있음
ㄴ어쨌든 성비 보면 역하렘이지ㅋㅋㅋ 어스래빗 팬들 눈 뒤집히는 소리 들린다
ㄴ길우성 누나 박현우 여친임
ㄴ박가람 호수 스캔들은 사이버렉카가 망상으로 짜깁기해 만든 루머란 거 밝혀진 지 오래입니다.
ㄴ얼마나 친한 사이인지는 몰라도 남자 아이돌들이 지내는 고립된 펜션에 여자애가 있다는 게 너무 어이 없음ㅋㅋㅋ
-서한율로 둔갑한 놈한테 오빠나안보고싶었쪄? 하는 거 보니까 서한율 여친 맞는 것 같은데?
어제 <부산 K-POP 콘서트> 때 서한율이 깜짝 등장하며 환호하고 기뻐했던 이프림의 분위기는 기사가 뜨자 슬며시 가라앉았다. 일부 과격한 팬들은 영상에 등장한 B양이 대체 누구이며, 떳떳하다면 펜션에서 지내는 이들을 전부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이건 율톢이 해명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아무리 게이트 사태로 온 나라가 난리라지만, 떠비라면 진작 입장문 내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조용한 거 보면ㅋ
-난 솔직히 우성이 누나도 같이 지낸다는 게 좀 걸리긴 했음..
-아무리 외프림이 이성 스캔들에 관대한 편이라도 그렇지, 개실망이다
-차라리 멤버 누군가의 사촌 동생이라고 해 줘
이동 중인 어스래빗 차 안.
기사를 보던 이건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어제까진 분위기 좋았잖아, 이프림…. 그나마 나리 씨랑 마루 얼굴이 제대로 찍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네요. 한 사람이라도 찍혔다면 바로 신상까지 다 털렸을 거 아녜요.”
“어쨌든 한율이를 포함해서 너희가 피해자인 사건이니까, 시간 지나면 가라앉을 거야.”
라이언도 속상한 얼굴로 한숨 쉬었다.
“나리가 내 다트판 부쉈어.”
“넌 지금 그게 중요하냐?”
“이프림이 준 선물이야.”
“…미안하다.”
“남석 씨가 철이 많이 들었네. 라욘 형한테 바로 사과도 다 하고.”
“닥쳐.”
“그럼 형, 대응은 어떻게 할 거예요?”
“한율이가 팀장님이랑 상의한 후에 결정될 거야. 그리고 한율이, 부모님 댁에 있다가 오늘 저녁에 출국한다던데. 들었어?”
“펜션엔 안 들르고요?”
“응.”
조유찬의 목소리가 쓸쓸해졌다.
“정말 아주 바쁜가 봐….”
길우성이 박가람에게 속닥거렸다.
“써한, 유찬이 형 삐친 거 아직 안 풀어줬나 봐. 이탈리아에서 유찬이 형만 전세기에 태워서 한국으로 보내버렸잖아.”
“나 안 삐쳤거든? 다 들린다, 우성아.”
“어?”
조수석에 앉아있던 강보배가 돌연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뉴스 진행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젯밤 부산의 한 호텔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던 각성자 A씨가 부산 화명역 인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각성자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의 각성자라 알려진 A씨는 약간의 타박상을 입은 상태였으며 경찰은….]
“방금까지 폰 꺼져 있었는데?!”
길우성은 놀라 권한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 전원이 꺼져 있다는 차가운 음성 메시지 대신, 걸그룹 퍼플아워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어?!”
한편 그 시각, 본가에 간 한율은 캣타워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캣타워 꼭대기 자리에 앉은 달냥이 한율을 향해 항의하듯 길게 울었다. 므와아오올옭.
뀽. 달냥의 품에는 한율의 핸드폰을 꾹 끌어안은 구동도 있었다.
달냥이 한율의 핸드폰을 챙긴 구동을 물고 위로 올라간 것.
“달냥아, 착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