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9화 (351/427)

러시아어로 미끼란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 봐, 조카.”

한율의 외숙, 최은후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미스터리 해커랑 무슨 사이야?”

거실에선 쌍둥이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토끼 너무 귀여워! 토끼 이름 뭐에요? 구동이? 꺄르륵, 촌스럽고 귀여워! 한 번만 만져보고 싶은데, 내려오게 하면 안 돼요? 혹시 못 내려오는 거 아니에요?! 구동이 어떡해?

한율은 캐리어에 마저 옷가지를 정리하며 대답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이요.”

“서울에 열린 게이트랑 이 집에 생겨나는 보호막 같은 거. 정말로 제임스가 만든 거야?”

부산에 나타난 괴물이 공연장을 덮치려 들 때, 푸른색 장막이 그물처럼 괴물을 낚고선 사라졌다. 제임스를 봤다는 목격담도 이어져, 그가 푸른색 장막을 만든 장본인이란 추론에 힘이 실리는 중.

“글쎄요. 제가 부탁하기는 했지만 제임스가 직접 만든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대박 쩐다, 조카.”

“변호사 선생님, 말투가 왜 그러세요.”

“애들한테서 옮았나 봐. 하아…. 요즘 아이들 키우기 참 어렵다. 가뜩이나 인터넷이랑 떼려야 뗄 수 없는 시대에, 게이트 괴물에, 삭막해지는 사회 분위기에. 애들 교육 문제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희 엄마한테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최은후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 집이 다른 어떤 곳보다 안전한 것 같아서, 애들 종종 맡기고 있어. 괜찮지?”

“저야 당연히 괜찮지만, 오히려 이상한 사람들의 눈에 띌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미스터리 해커 추적자들? 세상이 이미 난리가 난 마당에 아직도 미스터리 해커를 쫓아다니는 거 보면 참… 저렇게 한가한가 싶다. 그 시간에 본인과 가족 안위부터 챙기는 게 좋을 텐데. 그런데 한율이 넌 또 어디 가려고 여권까지 챙기는 거야?”

한율은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저 없는 동안 부모님 잘 부탁드릴게요. 이상한 사람들 꼬이지 않게 잘 봐주시고요.”

최은후의 가족은 바로 이 동네에 있는 외조부모 댁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래, 알았어. 가기 전에 애들이랑 셀카 좀 찍어줘.”

“네.”

비행기를 탈 청주 국제공항까지는 부친이 태워다주었다.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 절대 무모한 짓 하지 마라. 너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희 엄마도 쓰러진다는 거 명심하고.”

“네. 도착하면 연락드릴게요.”

“그래. 가라.”

부친이 한율의 어깨를 가볍게 안고선 두드렸다. 한율은 부친에게 꾸벅 인사하곤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들어갔다.

공항엔 이용객이 가득했다.

김포국제공항이 폐쇄되고, 그와 가까운 인천국제공항 역시 안전상의 이유로 운항 횟수가 줄어들면서 지방 공항으로 이용객이 분산되었다. 여기에 전 세계에 게이트가 열리자 하루에도 수많은 항공기 운항이 취소되거나 지연되며, 공항에 상주하다시피 하는 이용객이 부쩍 늘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었다.

노숙자도.

“안녀엉하세요?”

절차를 마치고 출국장으로 가는데, 한 외국인 꼬마가 앞을 막았다. 어설픈 한국어를 내뱉으며 손바닥을 펼친다.

“형아, 과자 이써?”

“…….”

이탈리아 공항에서도 경찰과 공항 직원들의 눈을 피해 구걸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렇게 아이를 내세우는 경우도.

한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의 부모로 추정되는 외국인 남녀가 기둥 뒤에서 훔쳐보고 있었다. 큼지막한 선글라스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터라, 자신이 누군지 알아보고 일부러 보낸 것 같진 않았다.

한율은 몸을 낮춰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부모님 어디에 계셔?]

“…….”

입을 다물고 딴청을 피우는 걸 보면 영어를 알아듣는 눈치. 한율은 아이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편의점에 들어갔다. 아이는 졸졸 따라오더니 편의점 입구 옆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곧 한율이 안겨주는 큼지막한 봉투를 받고선 활짝 웃었다.

[고마워, 형아!]

너무 기쁜 나머지 불과 몇 분 전,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했단 사실을 잊은 걸까. 아이는 곧장 기둥 뒤에 숨어있던 부모에게 달려갔다.

한 여성이 커피를 든 채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쪽지 한 장도 써서 봉투에 넣던데. 뭐라고 썼어요?”

한국에 파견된 미국 게이트 조사위원회의 김민지였다. 본가에서 나올 때부터 졸졸 쫓아오는 차를 봤기에 그리 놀라진 않았다.

“멀쩡한 사지육신 두고 아이한테 또 구걸시키면 죽여버리겠다고요.”

“멋져라. 팬들도 알아요? 이런 과격한 면도 있다는 거?”

“글쎄요. 하지만 스토커한테 아주 자비 없다는 건 아주 잘 알아요. 경찰 부를까요?”

“안타깝지만 입증은 힘들 거예요. 오늘 여기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일주일 전에 예매했거든요. 우연히 동선이 겹쳤다고 우기면 그만이지 않을까요?”

“해원이 형 스토킹은 그만두셨나 봐요.”

김민지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달 이후로 한 번도 찾아간 적 없거든요? 그리고 스토킹이 아니라 업무상 방문이었어요.”

“네에.”

한율이 걸음을 옮기자, 김민지도 잰걸음으로 나란히 쫓아왔다.

“유명인이라 참 피곤하겠어요. 어제는 웬 각성자가 인터넷 방송을 켠 채 펜션에 들어갔다면서요?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펜션 내부를 간접 구경할 수 있었는데…. 그 여자분이요.”

이어지는 말이 한율을 잡았다.

“서울 ○○고등학교 3학년 계나리.”

우뚝.

한율을 향해 김민지가 빙긋 웃었다.

“그 학생이 미스터리 해커죠?”

“…….”

한율은 멀뚱히 김민지를 바라보다가 지나가던 공항 경찰을 불렀다.

“선생님들, 이 여성분이 절 스토킹해요.”

“네? 스토킹 말입니까?”

공항 경찰은 무슨 뚱딴지같은 얼굴로 돌아보았으나, 한율이 선글라스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자 부리나케 다가왔다.

“서한율 씨…?!”

“거기 여성분, 잠깐 뒤로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김민지의 웃는 낯이 당황한 기색으로 얼룩졌다.

“저기요, 한율 씨? 이러다 나중에 후회해요? 제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할 줄 알고….”

“사생 스토커들이 자주 하는 말까지.”

한율은 다시 선글라스를 쓰며 김민지와 거리를 뒀다.

“내가 무슨 댓글을 쓸 줄 알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퍼뜨릴 줄 알고. …이런 협박이 먹힐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에요, 스토커 씨.”

“잠깐 사무실로 함께 가실까요?”

“아뇨, 전 스토커가 아니라 미국 대사관 직원으로 한율 씨와는 잘 아는 사이고요.”

“이야기는 사무실에 가서 듣겠습니다.”

“정말 아니라니까요?”

우웅. 한율은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서한율’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핸드폰에 걸려온 정상욱 중위의 전화.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네.”

* * *

10분 전. 흡사 전쟁을 겪은 듯 엉망이 된 주택가.

노을이 지는 하늘을 살핀 이해원은 맞은편 상가건물로 고개를 돌렸다.

게이트 괴물 연구소에서 그들이 생포해야 하는 괴물을 두고 지은 개체명은 ‘청독각룡’.

지금까지 관찰된 청독각룡 중 가장 큰 놈은 2m 남짓. 두 발로 서서 달리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뿔과 발톱은 셔터에 구멍을 내고 찢어버릴 정도로 단단하고 날카롭다.

앞서 청독각룡을 추적하고 관찰한 군인들의 보고에 따르면 놈들은 대여섯 마리씩 무리를 짓는다. 더위에 취약한지 기온이 높은 낮엔 음습한 지하실에 숨다가, 해가 지거나 비가 내리면 슬슬 나와서 먹이를 찾아 돌아다닌다고.

청독각룡 새끼 생포 작전팀장이 말했다.

“바로 어제 탐지 로봇 카메라에 새끼 세 마리가 잡힌 뒤 이동 모습이 포착되지 않았으니, 아직도 저 건물 지하에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한 마리만 생포해도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는 거예요?”

“미스터리 해커의 말에 따르면 그렇습니다만, 도중에 불상사가 생길 수 있으므로 최소한 두 마리는 확보해야 합니다. 은수 씨, 6명을 감쌀 수 있는 카모플라쥬 최대 유지 시간이?”

“6분 25초입니다.”

강준식이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전 5분 12초입니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은 단순했다. 청독각룡 성체들이 먹이를 찾으러 나가면, 진은수의 위장 능력에 강준식의 소리 차단 능력을 함께 사용해서 잠입, 새끼들을 마취시키고 이동장에 넣어서 나오면 끝이었다.

위험 요소는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 남는 성체 한 마리.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새끼들의 마취가 우선입니다. 성체 처리는 그 후고.”

“네.”

“놈들이 나옵니다.”

작전팀은 숨을 죽인 채 청독각룡 성체 다섯 마리가 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조용해진 골목. 작전팀은 1층까지 조용히 내려왔다. 팀장이 진은수와 강준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수는 훈련소에서 수없이 연습한 카모플라쥬 능력을 전개했다.

‘집중, 집중.’

이번 임무에 성공하면 청독각룡 독에 감염되어 고생 중인 장병들을 구할 수 있다. 게이트 방어선 출입 허가도 받을 수 있고.

‘아냐, 진은수.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 내가 제대로 못 하면 다 엉망이 될 거야. 정신 차려.’

강준식도 능력을 전개했는지, 양쪽으로 쭉 뻗은 그의 손바닥에 희미한 녹색 빛이 아른거렸다. 이해원 또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손끝에 마력을 싣고선 팀원들과 함께 이동했다.

청독각룡이 보금자리로 튼 곳은 상가건물 지하에 있는 기계실. 비상등만 드문드문 켜진 지하 복도는 상당히 어두웠다. 팀장이 랜턴을 켰다. 수도관이 터졌거나 하수도가 역류했었는지, 발등 높이까지 찬 시커먼 물에선 지독한 악취가 올라왔다.

크훅, 크훅. 끼후우욱, 끼훅.

문짝이 처참하게 반쯤 뜯긴 채 덜렁거리는 기계실 안쪽. 청독각룡의 기척이 느껴졌다. 철벅거리며 접근하는 작전팀의 소리가 정말 들리지 않는 건지, 경계하는 낌새가 전혀 없었다.

기계실 진입. 카모플라쥬 능력으로 인해 물속에 들어온 듯 얕게 일렁거리는 시야 너머, 청독각룡 성체의 모습이 잡혔다.

진은수는 저도 모르게 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들어가자마자 본래 감돌던 악취에 생전 처음 맡아보는 이상한 비린내까지 더해져 욕지기가 올라올 것 같았다.

크훅? 청독각룡은 돌연 나타난 랜턴 불빛에 어리둥절한 것 같았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새끼들은 총 세 마리로, 죽은 동물의 뼈를 까득까득 물면서 노는 중.

진은수와 강준식이 능력을 전개한 지 벌써 2분 10초가 지났다. 작전팀은 과감하게 성체 앞을 지나쳐 새끼들에게 접근했다. 팀장과 함께 공중방역 수의사가 마취제가 담긴 주사를 새끼들에게 재빨리 찔러넣었다.

끼훅…? 얇은 주삿바늘에 따끔 찔리는 정도는 괜찮은지, 새끼들은 놀란 기색 없이 눈을 끔뻑거리다가 서서히 비틀거렸다. 두 사람은 의식을 잃는 새끼들을 미리 준비한 이동 가방에 집어넣었다.

첨벙. 새끼들이 물고 놀던 동물의 뼈가 떨어지고, 성체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여기로!”

크훅, 크훅. 성체가 코를 벌름거리면서 새끼들이 사라진 곳으로 움직였다. 작전팀은 커다란 기계 뒤쪽을 돌아, 무사히 기계실을 빠져나왔다.

곧 청독각룡의 분노 가득한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키하아아악! 캬하아악!

“무리를 부르는 소립니다! 서두릅시다!”

청독각룡이 쿵쿵거리며 기계실에서 뛰쳐나왔다. 키하악!

복도는 좁고 청독각룡은 굉장히 빠르기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 작전대로 이해원과 베테랑 군인이 총을 들고 나섰다.

“곧 뵙겠습니다.”

“선배님, 꼭…!”

청독각룡이 금세 코앞까지 당도해, 진은수는 이해원에게 말을 끝까지 전하지 못한 채 팀장에게 끌려 그곳을 빠져나갔다.

카모플라쥬 범위를 벗어나 또렷해진 시야. 이해원과 남은 군인은 망설임 없이 소총을 장전, 비상 조명에 비친 괴물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콰앙, 콰앙! 음습한 지하 복도 가득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키하악! 괴물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러나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인간들이 새끼들을 빼돌렸다는 확신에 찬 분노 때문일까. 끼아아악! 괴물은 반 이상 찢긴 목을 크게 돌리며 재차 달려들었다.

촤악. 푸른색 마력이 실린 날카로운 바람이 그어졌다.

흐릿한 비상 조명 불빛 아래. 목이 완전히 잘린 괴물의 머리가 뚝 떨어졌다.

“가시죠.”

“…네.”

이해원은 순간 멍해진 군인과 건물을 벗어났다.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또 다른 괴물들을 경계하며 작전팀 합류 지점을 향해 달렸다.

두두두. 합류 지점 건물 위로 헬기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그때였다.

철컥. 군인이 돌연 걸음을 멈추며 소총을 장전했다. 괴물이 나타난 건가? 고개를 돌리는 이해원의 몸에 총구가 닿았다.

“……?!”

이해원은 놀라 멈췄다.

군인이 초점이 흐릿해진 눈으로 총을 겨눈 채 중얼거렸다.

“Приманка….”

타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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