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이 두 번째네
“2층 거실이 어질러져 있던데. 누구 짓이에요?”
한율은 손이 가지 않는 치킨 대신, 사이드 메뉴로 산 떡꼬치에서 소시지를 빼며 물었다. 맛있게 치킨을 뜯던 멤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길우성을 향했다.
길우성이 닭날개를 든 채 씩 웃었다.
“이쯤 되면 네 집이 내 집이고, 우리 집도 네 집처럼 편하게 쓰는 사이 아니냐?”
입가에 양념을 묻히고 웃는 모습이 참 꼴 보기 싫다. 한율은 계단을 가리켰다.
“10분 준다. 정리해.”
“10분 후에. 치킨 식잖아. 요즘 이렇게, 어? 맛있게 튀겨진 따끈따끈한 치킨 먹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런데 이것도 가격 많이 오르지 않았나?”
“한 마리에 거의 4만 원씩 받더라. 그리고 카드 결제는 대금 안 들어올 수 있다면서 현금으로 달라던데.”
“히익.”
“물가가 진짜 미쳤구나. 치킨 3만 원 시대 오는 거 아니냐 우스갯소리로 떠들던 게 엊그젠데, 훌쩍 뛰어넘었네.”
“그러니 모두 감사하며 먹도록.”
“사 온 건 한율인데 왜 생색은 우성이 네가 내냐.”
쿵쿵. 계단에서 박가람이 등장했다.
“내 치킨!”
“형 왜 거기에서 내려와?”
“옥상에 있었으니까! 내 치킨은? 의리 없이 내 것까지 다 먹은 거 아니지?!”
“아오, 시끄러워. 네 치킨 여기 있다.”
이건우가 아직 개봉하지 않은 치킨 상자를 넘겼다. 박가람이 활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고맙다, 이건우.”
차남석이 박가람에게 물었다.
“옥상에서 뭐 했어요?”
“인생을 고찰하며 밤하늘 구경.”
“아아, 고찰.”
고개를 끄덕이는 차남석과 한율의 시선이 마주쳤다.
“……?”
강보배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다음 무대는 언제 설 수 있을까?”
“회사에서 상황 주시하면서 방안을 찾는 중이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리고 나도 내일부터 출근해야 해서 자주 자리 비우게 될 거야.”
“회사 이사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아직도 논의 중.”
라이언이 양념이 된 것과 안 된 닭다리를 양손에 든 채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게이트 자체를 없앨 수는 없을까?”
“그게 가능했으면 벌써 없앴겠지.”
“게이트를 꽁꽁 감쌌던 푸른색 장막, 제임스한테 어떻게 만드는지 가르쳐달라고 하면 안 돼?”
의견은 라이언이 냈으나, 차남석은 한율 쪽을 보며 말했다.
“가르쳐줄 수 있는 거였으면 진작 가르쳐줬을 것 같은데? 그래야 본인도 덜 바쁠 거고.”
“그런가.”
“…….”
어째 아까부터 따로 할 말이 있단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한율은 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배부르네요. 잠깐 나가서 밤공기 좀 쐬고 올게요.”
“같이 가.”
예상대로 차남석도 일어났다. 한율은 그와 함께 관리동을 나갔다.
펜션 정원 돌길을 걸으며 차남석이 운을 뗐다.
“서한율 네가 제임스도 명상센터 멤버라고 말해줄 때 나한테 그랬잖아. 게이트 괴물들은 죽으면 다시 생성되는 게임 속 몬스터가 아니니까, 언젠가는 인간이 역전할 날이 올 거라고. 넌 그날이 언제 올 것 같냐?”
계나리의 말에 따르면 육눈박이 등장 이후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던 괴물의 수는 차츰 줄어들다, 5년이 지날 무렵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초반에 서울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터라, 대한민국 국호만 간신히 유지할 뿐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글쎄요. 어림잡아 2년?”
“2년? 그렇게 빨리?”
“지금 페이스대로만 가면요. 육눈박이 정도의 괴물이 또 나오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부산에 나타났던 괴물도 위험한 수준 아니었나? 제임스가 때맞춰 나타나지만 않았으면… 상상도 하기 싫다. 그놈, 몇 킬로미터씩 순간 이동도 했다며.”
“그래도 지금 입대는 안 됩니다.”
차남석이 한숨을 쉬곤 한율을 째려보았다.
“나 대체 언제까지 그걸로 잔소리 들어야 하냐?”
“정말로 입대하기 전까진 듣게 될걸요?”
“나리 씨가 미스터리 해커지?”
“…….”
예고 없이 훅 들어오는 질문. 한율은 오늘 공항에서 만난 김민지를 떠올리며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가족까지 여기서 보호한 것부터가 상당히 수상쩍었거든? 이해원이 살던 집까지 통째로 내어주는 거 보니까 아주 확신이 들던데. 계마루도 나한테 조용히 그러더라. ‘형님, 아무래도 내 동생이 미스터리 해커 같아요. 어쩌죠?’라고. 그리고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차남석이 관리동 쪽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나만 눈치챈 거 아닐걸? 너희들이 숨기려는 게 보여서 그냥 입 다물어주는 거지.”
“네. 알려줘서 고마워요, 형.”
“그럼 말해. 오늘 갑자기 출국하려다 만 이유, 따로 있는 거지? 무슨 일이야?”
다른 멤버들과 조유찬에겐 소유 부동산 문제 때문에 출국 일정을 늦췄다고 둘러댔었다.
한율은 불안해 보이는 차남석의 얼굴을 보며 대답했다.
“누군가 게이트 방어선에서 해원이 형을 죽이려고 했는데,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서요.”
차남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해원을? 왜?”
“아직 범인이 각성자 같다는 것 외엔 밝혀진 게 없어요. 이제 조사해봐야죠.”
“뉴스 보니까 방어선 내에 아직 작동하는 CCTV도 많고, 카메라를 단 탐지 로봇, 드론도 많이 돌아다니던데 간도 크네. 그것도 하필 이해원을…. 그러고 보니 이해원도 참.”
한율이 멈췄던 걸음을 옮기자 차남석도 따라 걸었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는 말.
“누군가가 걔 죽이려고 한 거, 이번이 두 번째 아냐?”
우뚝.
차남석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왜?”
작년 1월. 정원그룹 3세 정지호가 한밤중 도로를 달리던 이해원의 차 앞을 연신 막아서며 사고를 유도했다. 당시 이해원은 갓길에다 차를 세우려다 블랙아이스에 미끄러져 가드레일과 충돌했고, 정지호는 사고 현장을 유유히 떠났다.
“…그러게요. 이번이 두 번째네요.”
차남석도 기억을 더듬는 얼굴로 말했다.
“VEL 엔터랑 관계된 깡패들 때문에 한동안 이우그룹도 이해원 어머니 입원 병실도 지켰었고. 어쨌든, 관련 없는 일이겠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아무리 원수지간이라 하더라도 제임스 친구를 죽이려 들어? 이 시국에?”
“그렇겠죠?”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한율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정말로 관련이 없으면 좋겠네요.”
* * *
끼익!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집 정문 앞에 멈췄다. 운전자가 그대로 차를 세워두고 내리자 경비원이 나와서 말렸다.
“여기에 차를 대시면 안 됩니다.”
이우그룹 부회장의 차남, 이채욱은 경비원에게 차 키를 던지듯 넘기곤 반쯤 열린 대문을 활짝 열었다.
“걸리적거리면 알아서 치우세요. 정지호, 안에 있죠?”
“네? 아…. 선생님! 그렇게 막 들어가시면!”
그 소리를 들은 다른 경비원, 경호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러나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곤 섣불리 몸에 손대지 않았다.
“연락하고 오신 겁니까? 확인하는 동안 잠깐 기다려주시면….”
“비키세요. 험한 말 쏟아내기 전에.”
“이 시간에 웬일이야, 채욱이 형?”
마침 정원에서 담배를 피우던 정지호가 다가왔다. 이채욱은 앞을 막은 경호원을 밀치곤 곧장 정지호에게 다가갔다.
퍽.
“악!”
털썩. 정지호의 몸뚱이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채욱은 욱신거리는 손을 털었다. 사람을 때려본 게 처음이라 그런지 주먹이 아팠다.
정지호가 얻어맞은 뺨을 감싸며 소릴 질렀다.
“왜 때려, 씨발!”
“왜? 이유를 몰라서 물어?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해줘?”
이채욱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경호원들을 둘러보며 묻자, 정지호는 입을 다문 채 눈알을 굴리다가 주섬주섬 일어났다.
“무… 슨 오해를 하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형. 지금 크게 실수하는 거야. 알아?”
“하. 오해?”
저벅. 이채욱이 한 걸음 다가가자, 정지호가 움찔거리더니 경호원 뒤에 숨었다.
“제임스를 한국에 붙잡아두겠다더니, 그게 제임스의 최측근인 이해원을 죽이는 거였어?”
“……!”
경호원들이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중에 정지호에게 책잡힐까 걱정됐는지, 오히려 정지호와 이채욱 쪽으로 시선을 던지지 않고 물러났다. 정지호가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경호원만 잔뜩 굳었다.
“나, 난 죽이라고 한 적 없거든? 그냥 러시아 놈들 소행으로 착각하게끔 위협만 하라고 했는데 그 멍청한 각성자 새끼가…. 그리고 이해원 안 죽었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때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정원그룹 회장의 장남이자 정지호의 아버지가 나왔다.
이채욱은 그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장님.”
“아무리 세상이 뒤집혀도 그렇지! 명색이 이우그룹 부회장 차남이나 되는 놈이, 경우 없이 한밤중에 쳐들어온 것도 모자라서 남의 집 귀한 아들을 윽박질러!”
노기가 잔뜩 실린 호통이었으나, 화가 난 건 이채욱도 마찬가지였다. 정지호가 모든 일을 다 망쳐버릴 뻔했으므로.
“그 남의 집 귀한 아드님이! 미스터리 해커가 아예 대한민국을 버리도록 만들려 했으니까요. 그것도 고작 질투랑 복수에 눈이 멀어서. 대답이 됐습니까, 사장님?”
“……!”
정 사장이 놀란 얼굴로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정지호가 경호원의 팔을 세게 잡은 채 반박했다.
“난 죽이라고 한 적 없다니까? 형이 오해한 거라고!”
“그럼 그 각성자, 당장 내 앞에 데려와. 직접 얘기를 들어야겠으니까.”
“무슨 큰일 날 소릴. 그놈, 사람 조종해. …어, 그래. 그놈이 날 조종해서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몰라. 형도 당할 수 있다고. 아니, 이미 당한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평소에 차분하기로 소문난 형이 이렇게 흥분해서 날 찾아와?”
이 새끼가 대체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이채욱은 황당했으나, 여기에서 더 떠들어봤자 입만 아파질 것 같아서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어쨌든 경고한다, 정지호. 두 번 다시 이해원 건드리지 마. 또 이해원 건드리면, 그땐 내가 가만히 안 둬.”
“…왜 그렇게까지 화내는 건데?”
“뭐?”
돌아서려던 이채욱은 정지호를 바라보았다. 정지호가 당최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이해원이 미스터리 해커나 제임스와 같은 패밀리라고 해도, 형은 아니잖아. 이해원이 뭐, 이우그룹 사위라도 돼? 이채현도 없는데?”
“…됐다.”
이채욱은 뭐라 반박하려다,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그래도 조언 하나는 해줄게. 만약에 네가 한 짓이 들키잖아? 그땐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 아니, 당장 찾아가서 빌어.”
“내가 죽이라고 시킨 거 아니라니까!”
“밤중에 소란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채욱은 정 사장에게 꾸벅 인사한 후 대문을 나섰다. 쫓아온 경비원에게 키를 도로 돌려받고선 차에 탔다. 그리고 운전대에 머리를 박았다.
쿵. 갈등이 일었다.
‘지금 당장 이해원에게 우리는 아무 상관 없다고 이실직고하는 게 낫지 않을까?’
중요 참고인으로 써먹으려 권한정을 납치한 것부터, 제임스를 한국에 붙잡아두려는 정지호의 수작이었다.
제임스와 미스터리 해커는 유독 한국에 신경을 썼다. 가까워 보이는 이들의 안전에도 예민해 보였다.
『그 점을 이용해서 붙잡아두면 되겠네. 제임스가 다시 한국에 온 지금이 절호의 기회 아냐?』
재벌 3, 4세들이 모인 작은 술자리.
이대로라면 돈과 권력을 모두 잃게 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가운데, 정지호가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그때 그 러시아 놈들이 각성자까지 섭외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또 접근하는 척 일을 꾸미는 거지. 그럼 당분간 그 사람들이 걱정돼서라도 한국에 있지 않겠어? 제임스가 있는 나라, 안전한 나라! 우리의 재산은? 영원히! 제임스가 지켜주겠지!』
세상이 이 지경이 된 상황에서도 술과 약을 하는 정신 나간 녀석들이 모인 자리라 이채욱은 끼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렇게 말하며 낄낄거렸다고 했다.
『이해원 그 새끼가 왜 하필 제임스 친구냐고! 씨발…. 야, 그 새끼 이채현 만나러 미국에도 갔었단다? 하…. 징글징글한 새끼. 그때 확실히 죽였어야 했는데.』
이런 주정도 했었다던가.
“후우….”
이채욱은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 이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원그룹엔 미안하지만, 우리 이우그룹은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