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2화 (354/427)

보살이세요?

게이트 방어선과 가까운 곳에 마련된 각성자 부대 숙소.

막 잠자리에 들려던 이해원은 이우그룹 이채욱의 전화를 받았다.

“그렇습니까.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아. 통화를 끊자마자 절로 깊은 한숨이 나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내막이었다. 드미트리의 동료였던 러시아 용병들의 소행인 줄만 알았는데, 정원그룹 3세 정지호의 짓이었을 줄이야.

이해원은 이채현이 데리고 갔던 파티마다 늘 주변을 알짱거렸던 못생긴 남자를 떠올렸다. 분노보단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작년에 저지른 짓도 모자라서.’

당시 교통사고를 유발한 자가 정지호란 사실을 안 이채현은 그를 찾아가 비싼 아파트를 뜯어냈다. 하지만 이해원은 그걸 거절, 이채현에게도 관계를 끊고 싶다고 통보했다.

이후엔 많은 일,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에 신경 쓰느라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단 한율이한테도 알려줘야지.’

서한율에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출국을 미루게 된 게 결국 자신 때문이었단 생각에.

이야기를 들은 서한율의 반응은 담담했다.

-[피해자인 형이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정신 나간 짓을 저지른 건 그놈이니까. 아무튼 최 상병을 조종한 각성자를 찾는 게 급선무겠네요. 당시 근처에 있었다면 지금도 형이랑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고, 또 허튼짓할 수 있잖아요.]

“권한정이라면 바로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이해원은 권한정이 틈만 나면 제임스 타령했던 걸 떠올렸다.

“그 녀석도 공범이 아니란 보장이 없어.”

-[괜찮아요. 정지호 본인한테 물어보면 되거든요.]

그때 핸드폰 너머에서 누군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제, 제, 제임스…?!]

이 목소린 설마.

“벌써 찾아간 거야? 어떻게?”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누군가가 형을 죽이려고 든 거 이번이 두 번째 아니냐고. 우연치곤 찝찝해서 확인차 와 봤는데 정답이었던 거죠.]

한율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실렸다.

-[사적인 감정에 휘둘려 집안 말아먹는 멍청이들을 자주 겪어보기도 했고.]

“아….”

-[형 몫은 남겨둘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이만 푹 쉬어요. 끊을게요.]

오해예요, 제임스! 오해라고! …야! 경호원! 경호원! 왜 아무도 안 와! …흐아악!

뚝.

통화가 끊기고, 희미하게 들리던 정지호의 한심한 목소리 역시 사라졌다.

‘웃곤 있었지만, 꽤 화가 난 것 같았는데. …죽이지는 않겠지?’

이해원은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총알이 스쳤던 왼쪽 눈가가 따끔거리고 몸도 천근만근 무거웠다. 서한율의 말처럼 이만 푹 쉬고 싶었다.

그렇게 긴 하루를 끝내려 했으나.

“…….”

이해원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권한정이 납치당했던 부산 호텔 CCTV엔 납치범들의 얼굴이 찍히지 않았다. 그러나 정상욱 중위는 이렇게 말했다.

『체격이나 몸놀림을 봐선 그놈들로 추정됩니다. 드미트리 동료들이요.』

그땐 여러 정황상 그놈들일 가능성이 커 보이고, 정상욱이 놈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으니 의심 없이 동조했다. 하지만 한번 마음에 걸린 이상, 확인해야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이해원은 정상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중위님.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정상욱도 각성자 부대와 같은 건물에 머물고 있었다. 객실로 직접 찾아가자, 무장을 해제한 잠옷 차림의 정상욱이 나왔다. 동네에서 흔히 마주치는 아저씨처럼 편한 인상이었다.

그가 이해원을 안으로 들이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오늘 벌어진 일에 관해 새롭게 신경 쓰이거나 생각나는 거라도 있는 겁니까?”

“중위님.”

이해원은 현관 앞에 서서 바로 본론을 꺼냈다.

“권한정을 납치한 놈들, 드미트리의 동료인 러시아 용병들이 아니라 정원그룹에서 고용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네?! 그게 무슨….”

서한율에게 전화로 알려준 내용을 재차 말하면서 정상욱의 반응을 살폈다. 정말 놀랐는지 멍해졌던 표정이나 눈빛이 점차 또렷해지는데, 연기하는 것 같진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럼 해원 씨를 죽이려 한 각성자도?”

“네. 지금 제임스가 주모자인 정지호를 만나고 있으니, 곧 그 각성자에 대한 정보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정상욱이 화가 난 목소리로 대신 말을 이었다.

“권한정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겠군요.”

이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게이트 방어선 내에 있는 경찰서.

지난달 제임스가 드미트리와 만났던 조사실 테이블 앞에는, 새벽에 경찰에게 잡혀 온 권한정이 사색이 된 얼굴로 앉아있었다.

매직미러 뒤. 정상욱이 제임스 모습을 한 한율을 향해 말했다.

“정지호의 비서가 한 진술과 일치합니다. 사람을 조종하는 각성자가 있는 것 같다. 거액을 받고 이 이야기를 흘렸을 뿐, 자신을 납치한 자들이 가짜인 줄 꿈에도 모르는 눈치던데요. 정원그룹이 정말로 그런 각성자를 매수해 해원 씨를 죽이려 한 건 더더욱.”

한율은 권한정 앞에 놓인 빈 종이컵을 보며 대답했다. 그가 마신 커피에다 살짝 자백 마법을 부려놓았다.

“네. 이번엔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더군요.”

“하지만….”

정상욱이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에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권한정의 능력은 아직 대한민국에 필요합니다. 그래서….”

“괜찮습니다. 이해하는 바입니다.”

이해원을 따라 한율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감시는 필요해 보입니다. ‘우리나라에 도움 되는 강한 각성자를 붙잡는 거니까’라는 자기 합리화로 수사에 혼선을 준 것 아닙니까. 또 비슷한 짓을 저지르지 말란 법이 없을 것 같네요. 아직 어리기도 하고.”

“네.”

정지호가 고용한 각성자는 중국인 불법체류자 ‘한타오’란 남자로, 정지호가 자주 가던 클럽의 관계자를 통해 소개받아 거액을 주고 고용했다고 했다.

한타오의 각성 능력은 자신의 손톱으로 만든 ‘벌레’를 날려, 그 벌레가 파고든 사람의 시야를 보며 조종하는 것.

이해원이 청독각룡 새끼 생포 작전에 투입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홀로 방어선으로 숨어들어와, 청독각룡 소굴과 멀지 않은 곳에 숨어있었다고.

현재는 김대현처럼 캄캄한 지하 수용소에 홀로 갇혔다.

정원그룹에 매수당해 이해원의 임무 장소와 시간을 발설한 각성자 관리과 직원 또한 군사경찰에 넘겨진 상태. 권한정을 납치했던 자들 또한 모두 잡혔다.

이들의 처벌은 모두 법에 맡기기로 했다.

“그럼 오늘 떠나시는 겁니까?”

“아니요. 또 무슨 멍청한 짓을 벌일지 모르니, 당분간 지켜보다가 가려고요.”

“네. 아, 당신 ‘친구’로 둔갑해 허튼짓하려다 잡힌 황재은이 이곳 임시 수용소에 있는데. 만나보시겠습니까?”

“아니요. 계속 감옥에서 썩게 해주세요.”

정상욱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 권한을 넘어선 일이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농담 아닙니다.”

“앗….”

게이트 방어 지휘부 본부로 돌아가는 길.

이해원이 한율에게 말했다.

“정지호, 당분간 가만히 둘 거야.”

“이유는요?”

“아직은 정원그룹 같은 대기업의 힘이 나라에 꼭 필요하잖아.”

이해원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전투기를 바라보았다. 정원그룹의 기술이 들어간 최첨단 기체였다.

“그거야….”

“협박하든 윽박지르든. 당장은 무슨 말이든 따르겠지. 하지만 속에 품는 반감은 더욱 커질 거야. 사람이란 게 원래 절벽에서 떨어져 죽다 살아나도, 잠깐 정신이 나갈 뿐 쉽게 본성이 고쳐지진 않잖아. 그리고 이미 한율이 네가 실컷 혼내주기도 했고.”

“하지만 죽을 뻔한 건 형이잖아요. 그것도 형을 두 번씩이나 죽이려 했던 놈인데.”

이해원이 오해하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바보 같이 용서하겠다는 건 아니야. 잠깐 처벌을 유예하겠단 거지. 어쩌면 정지호로선 그편이 더 피 말릴걸? 본인이 저지른 짓 때문에 언제든 그룹 전체가 날아갈 수 있다는 불안감이 불쑥불쑥 들 테니까.”

그러나 한율은 이해원을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바라보았다.

“형. 보살이세요?”

“오히려 난 조금 안심했어.”

“네?”

이해원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정말로 러시아 용병들이 범인이었다면, 날 미끼 삼아 널 끌어내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나 다음엔 누구를 타깃으로 삼았겠어.”

“…….”

한율은 가만히 이해원을 바라보다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 * *

[서한율, 이례적인 침묵 ing]

[지금까지 자신을 둘러싼 루머에 곧바로 시원시원하게 해명하거나 법적으로 정면 돌파했던 서한율이 이례적인 침묵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8일, 둔갑 능력을 지닌 각성자 A씨가…(중략).

서한율은 여전히 펜션에 연인을 숨겨두었던 의혹에 침묵하고 있으며, 제임스와의 친분, 더 나아가 미스터리 해커 집단과의 관계에 관한 각종 의혹에도 침묵 중이다.

지난달 유명 명품 패션쇼에 초대될 정도로 세계적인 셀럽이 된 서한율. 그가 감추는 진실은 무엇일까.]

-나 아는 떠비 관계자가 그러던데. 가까운 곳에 사는 여자앤데 멤버들 전부 부산 가서 편히 놀러 갔다가 외국에 있다고 알려진 서한율이 대뜸 반말까지 하고 데려갔던 고양이도 안 보이니까 의심해서 떠본 거라고

ㄴ이게 사실이면 그 덕에 사기꾼 잡은 건데 뭘 더 바라는 거임?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해야 하는 거 아냐?

ㄴ믿고 싶은 소문이 진짜가 아닌 게 싫으니까 진짜여야 한다고 빽빽 우기고 논란 만드는 거지ㅋㅋㅋ 이런 놈들 지구가 멸망해도 끝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끔찍하다

ㄴ가짜라는 의심 들자마자 그 자리에서 정체 밝혀내는 거 보고 진심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난?

ㄴ떠비 알바생 푼 거 처음 본다ㅋㅋㅋ

ㄴ보통 여자애가 의심된다고 바로 활로 쏴버리냐? 차라리 걔도 미스터리 해커 일당이란 게 더 신빙성 있겠다ㅋㅋㅋ

-숨겨둔 여친이 있든 말든, 제임스랑 대체 무슨 사이냐 난 그게 더 궁금하다

“에휴.”

인터넷 기사 댓글을 훑던 계나리는 핸드폰을 내팽개치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지구토끼 오빠들도 눈치채고, 미국 게이트 조사위원회 인간들도 의심하고. 이젠 사람들까지 ‘뭐가 있는 게 분명해!’라는 눈으로 보기 시작하겠지….’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이곳으로 온 게 실수였을까.

솔직히 가족과 함께 이곳에 오면서 전혀 의심받지 않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장 안전한 곳이기에 왔다. 가족을 위해.

‘차라리 당당하게 내가 미스터리 해커라고 밝혀? 아니야. 그랬다간 우리 가족이 더 위험해질 수 있어. 세상에 상상을 초월하는 나쁜 놈과 미친놈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율이 오빠처럼 엄청나게 강한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초콜릿으로 손을 뻗었다. 서한율이 이탈리아에서 사 온 선물로, 어제 유호를 통해 전달받았다.

‘그나저나.’

달곰쌉쌀한 초콜릿을 음미하다, 다시 일어나서 노트북을 열었다.

‘치료제 연구는 잘 진행되고 있나?’

계나리는 청독각룡 새끼들이 간 연구소 서버에 접속했다. 기억나는 정보를 정리해 넘겨주기는 했지만, 조금 걱정이 됐다. 이해원이 죽을 뻔하고, 진은수 역시 적잖이 고생했을 임무의 성과이므로.

“…응? 이거 왜 이래?”

연구소 서버에 저장된 자료에 접근하는데, 돌연 인터넷이 끊겼다.

계나리는 방 밖으로 나갔다. 1층 TV와 연결된 모뎀 역시 인터넷 연결이 끊겨 있었다. 소파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던 계마루가 투덜거렸다.

“뭐야. 와이파이 안 돼.”

계나리는 유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덕 아래 펜션도 같은 인터넷 회사를 사용 중이므로.

“호 님, 혹시 펜션 인터넷 잘 돼요?”

-[네. 잘 되는데요?]

“네….”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계나리는 후다닥 다시 2층에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 노트북에 뜨다 만 연구소 파일이 주르륵 떠 있었다. 인터넷이 다시 연결된 것.

“…….”

하지만 계나리는 PC에 연결된 인터넷 선을 모조리 빼고선 다시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계마루가 하품을 쩌억 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와이파이 다시 된다으아.”

집 외부 CCTV를 확인했다. 아주 멀리, 인터넷 단자함이 설치된 전봇대 아래에서 차를 타고 급히 떠나는 사람들이 보였다.

계나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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