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쉬는 느낌
늦은 오후.
양평으로 돌아온 한율은 비관에 빠진 계나리와 마주했다.
“난 틀렸어….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어요….”
“CCTV에 찍힌 사람들 옷이랑 차 보니까 통신사 직원 같던데. 단순히 점검하러 왔던 거 아닐까?”
“서울 통신망 복구로 정신없는 이 와중에 한가롭게 양평까지요?”
계나리가 울먹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히 해킹 기기를 연결해서 내 노트북 화면을 봤을 거야…. 인터넷이 안 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녀석이 난데 가장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었다니….”
“내가 그런 기술 쪽은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별일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설마하니 환한 대낮에 사람들 눈에 다 띄도록 허튼짓했겠어? 어쨌든 이우그룹 통해서 누가 무슨 목적으로 왔었는지 알아볼게.”
“단자함을 통한 해킹이면 통신사에서 모를 리가 없거든요. 그쪽에서 다 감지되니까. 그러니까….”
정말로 해킹 시도라면 범인은 국가일 수 있다.
“오빠가 접촉 빈도가 늘수록 꼬리 밟힐 가능성도 커지니까 조심하라고 주의까지 줬는데…. 죄송해요….”
한율은 계나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렇게 잔뜩 풀이 죽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니야.”
“……헉.”
“……?”
가만히 손길을 느끼던 계나리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의아한 얼굴로 손을 떼는 한율을 향해 우물쭈물하더니 돌연 화 난 표정을 짓는다.
“오빠 이러면 안 돼요.”
“뭐가?”
“오빠는 아아무우 감정 없어도 상대방은 안 그럴 수 있거든요? 홀리지 말아 주시겠어요?”
“…….”
“오빠는 왜 자신한테 오다리 루머가 생겼는지, 물론 헛소문을 만드는 녀석들이 더 나쁘지만, 그래도 가끔은 스스로 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이상, 이프림의 의견이었습니다.”
“어, 그래….”
계나리와 헤어진 후엔 박가람과 이건우가 사용하는 객실을 찾았다. 이건우는 강아지 찐빵을 데리고 계곡으로 산책하러 가서 없고, 스타믹스의 JE가 놀러 왔다.
한율은 오래간만에 박가람의 마나 유동을 봐주었다.
“어떠냐. 이 정도면 나도 해원이 형처럼 멋있게 마법을 샥샥!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냐?”
“음….”
그동안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기술과 집중력이 좋아졌다. 마력도 미세 먼지만큼이지만 늘긴 늘어, 이해원에게 가벼운 마법을 가르칠 때와 비슷한 수준.
하지만.
“더 수련하세요.”
“왜?!”
“더 해야 하니까요. 이 정도론 부족해요.”
박가람은 이해원보다 감정적이고 마음이 약해, 지금 그에게 강한 힘을 쥐여주면 안 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가르쳐 주려면 몇 날 며칠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데 그럴 여유도 없고.
“흑….”
박가람이 충격받은 얼굴로 비틀거리다 소파에 주저앉았다. 털썩.
“열심히 수련했는데….”
JE가 손을 들었다.
“교장. 나도 테스트.”
“합격해도 바로 가르쳐주지 못하니까 패스요.”
“와. 답정너였네.”
정지호가 제임스를 붙잡아두기 위해 저지른 일, 이해원이 죽을 뻔한 일은 다른 학생들에겐 비밀로 하기로 했다. 괜히 알려서 걱정 끼치기 싫다는 이해원의 부탁이었다.
“그나저나 너 이번엔 달냥이랑 구동이 한국에 두고 간다며. 달냥이야 너희 부모님 댁이 편하겠지만, 구동인 여기로 데려오는 게 낫지 않아? 너희 부모님, 구동이가 마물인 건 모르실 거 아냐.”
듣고 보니.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산책도 JE가 잘 시킬 테니.
“지금 가서 데려올게요.”
“같이 가도 돼?”
“네.”
“나도 갈래.”
“형은 수련하고 있어요.”
“싸우자, 서한율!”
결국 박가람까지 셋이 함께 차에 탔다. 본가로 가는 동안 박가람은 한율이 없었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잘도 떠들었다. 덕분에 심심하진 않았으나, 라디오 뉴스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본가에 도착했을 땐 푸짐하게 차려진 저녁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손지은이라고 합니다.”
“방송으로 자주 봤어요. 역시 실물이 훨씬 낫네요.”
“예전 <뮤직뮤직> MC! 만나서 반가워요.”
깍듯하게 예의를 갖춰 인사하는 JE와 달리, 박가람은 뻔뻔하게 두 사람과 포옹했다. 흡사 길우성을 보는 듯했다.
“밥 먹으러 왔어요, 어무니, 아부지.”
“어서 와, 가람아.”
“어서 와요.”
달냥은 한율의 다리에 박치기하며 반갑게 울었다. 므아앙. 한율은 달냥을 안아주었다.
“구동인 어디에 있어요?”
“어? 구동이?”
부친의 표정이 살짝 경직되었다. 모친이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다.
“들어올 때 못 봤니?”
“네?”
조심성 없이 동물을 함부로 밖에다 내치는 사람들이 아닌데. 한율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부친이 대신 덧붙였다.
“고양이 야외 놀이터. 거기 캣타워에서 놀고 있을 거야.”
“네.”
한율은 야외 놀이터와 이어진 고양이 방으로 들어갔다. 고양이들의 안전을 위해 꼼꼼하게 둘린 펜스 내부. 대형 캣타워 기둥 선반에 구동이 앉아있었다. 새카맣고 커다란 눈망울로 한율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끼웅?
“아….”
참 귀여웠으나, 한율은 왜 모친이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구동이 가느다란 난꽃 줄기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다 떨어지고 한 장만 남은 꽃잎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애써 피운 난꽃일 텐데. 하루 만에 대형 사고를 쳤구나.
“내려와, 인마.”
뀽.
시간이 늦어서 그들은 이곳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저녁을 먹은 뒤. 박가람이 편히 입을 옷을 빌린다는 핑계로 한율의 옷장을 벌컥 열어, 한밤중에 패션쇼를 벌였다.
“어떠냐, 고양이들아. 잘 어울리지?”
찰칵, 찰칵. 심드렁한 얼굴로 구경하는 고양이들과 함께 셀카도 찍는다.
JE는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쟨 어떻게 남의 집에서 저렇게 잘 노냐. 너희 팀 멤버 전부 다 저래?”
“가람이 형이랑 길우성만요.”
“그나저나 여기 진짜 조용하다.”
JE가 박가람을 지나쳐 발코니로 나갔다. 서울과 멀리 떨어져 전투기나 헬기 소음, 포격음이 들리지 않아 고요했다. 밤하늘에도 조명탄 불빛 대신 별이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JE는 한참 동안 말없이 바깥 경치를 바라보았다.
“여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JE가 운을 뗐다.
“잡것들 진짜 안 보인다.”
“어쩐지!”
본인이 어질러놓은 옷을 정리하던 박가람이 크게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최종 선택한 옷은, 예전에 한율이 멤버들에게 생일 선물로 받았던 토끼 후드 잠옷이었다.
“서한율 때문에 무서워서 접근 못 하는 그런 거랑은 다른 느낌이더라니. 여기 터가 진짜 좋은가 보다.”
“오래간만에 쉬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 양평에선 간혹 전투기 소리나 포격음이 들려서 자는 도중에도 여러 번 깼었는데, 오늘 밤은 잘 잘 수 있을 것 같아.”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우웅. 이우그룹 부회장이 톡을 보냈다.
톡을 확인한 한율은 계나리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오늘 아침 인터넷 단자함을 살핀 사람들은 정말로 통신사 직원들로, 불량 신호가 잡혀서 단순히 점검을 나왔던 거라고.
이우그룹 부회장이 덧붙인 톡.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오늘은 걱정으로 그쳐도 내일은 현실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미국 게이트 조사위원회가 계나리를 주목, 미스터리 해커로 의심 중이었다. 김민지 개인이 가볍게 떠본 말일지도 모르지만, 어제와 오늘 잠잠한 걸로 봐선 신중하게 감시 중일지도.
‘미국도 자국에 열린 게이트에 더 신경 써야 할 테니. 하지만….’
다시 펜션 주변을 기웃거리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었다. 이번엔 무턱대고 신세 지러 온 사람들이 아닌, 황재은의 정체를 밝혀낸 계나리에 관한 소문 진위를 확인하러 온 기자와 너튜버, 사생 스토커와 관종 등등이었다.
‘부회장의 말처럼 이대로 계나리를 두는 건 위험하겠지.’
박가람이 한율에게 달냥을 들이밀었다.
“누구 톡인데 갑자기 심각해?”
므앙.
“그게.”
우웅.
길우성의 전화.
“어. 왜.”
길우성의 목소리가 쩌렁 새어 나왔다.
-[섭섭하다, 써한?! 가람이 형이랑 부모님 댁에 갔다며? 나도 너희 부모님이랑 달냥이 보고 싶은데! 구동이도!]
“잘 거야. 끊어.”
뚝.
박가람이 본인 일처럼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제일 친한 친구라도 너무 쌀쌀맞은 거 아니냐? 내가 우성이였으면 상처받았어.”
므앙.
“서한율 너 솔직히 말해. 길우성 말고 친구 없지?”
“있는데요.”
“친구 소중히 대해. 너무 편하다고 막 대했다간 나중에 후회한다, 너?”
우웅, 우웅.
다시 길우성의 전화. 박가람이 가늘게 뜬 눈으로 한율을 주시한다.
“…또 왜.”
-[나 내일 차 산다!]
“무슨 차를 어디에서.”
-[으흐흐.]
뚝.
이번엔 길우성이 전화를 끊었다. 해괴한 웃음소리만 남기고.
“…….”
박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엉. 이런 친구 사이도 있는 거지, 뭐. 잠이나 자자.”
다음 날 아침. 세 사람은 구동에 달냥까지 데리고 양평 펜션으로 돌아왔다. 구동만 데려가려는 걸 보고 달냥이 아주 대성통곡을 해서 어쩔 수 없었다.
차를 주차장에다 세우는데, 길우성이 방정맞게 달려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달냥아아! 우리 달냥이!”
한율은 차에서 내리며 달냥이 든 이동장을 넘겼다.
“차 사러 몇 시에 어디로 갈 거야?”
길우성이 냉큼 받아서 이동장 문을 열고 달냥을 안았다. 달냥이 부담스럽다는 듯 길우성의 얼굴을 앞발로 밀었다. 므오옭.
“엉? 차주가 여기까지 오기로 했는데.”
“딜러 말고 차주? 중고차 직거래야?”
길우성이 씨익 웃었다.
“다들 아는 사람임.”
“……?”
잠시 후. 선배 아이돌인 보이그룹 블랙블러드의 멤버 민준과 수재가 펜션에 도착했다. 차 두 대를 끌고.
“다들 직접 얼굴 보는 게 얼마 만이냐.”
“그동안 잘 지냈어?”
민준과는 종종 톡과 전화를 나누었었지만, 오늘 온다는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한율도 반가운 얼굴로 그들과 가볍게 포옹했다.
“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진 않았어요?”
“중간에 길을 좀 헤매긴 했지만, 괜찮았어. 그리고 빈손으로 오기 조금 그래서.”
민준이 차 뒷좌석에서 큼지막한 아이스박스와 종이 가방 여러 개를 꺼냈다.
“고기랑 술 좀 챙겨왔지?”
인사하러 나왔던 라이언이 재차 예의를 갖췄다.
“파란달 펜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선배님들. 고기 주세요.”
“길우성한테 넘길 차는 둘 중….”
차남석은 질문을 하다가 말았다. 찰칵찰칵. 이미 길우성이 은은한 푸른색을 띤 SUV 옆에 찰싹 붙어서 셀카를 찍고 있었다.
“뭔지 알겠네요. 보아하니 뽑은 지 얼마 안 된 새 차 같은데.”
“몇 번 안 타서 새 차처럼 보이지, 1년 넘었어. 앞으로도 잘 안 타게 될 것 같아서 팔려고 했는데, 마침 우성이가 중고차 사고 싶다고 해서.”
쯧쯧. 박가람이 혀를 찼다.
“흠집 하나 없는 예쁜 찬데 초보 운전자 손에 들어갔으니, 하루도 안 가 망가지겠네요. 넌 미리 차한테 사과해라, 우성아.”
“미안해, 버리야!”
“그새 이름까지 지었냐.”
“아니, 그렇게 선언하듯이 사과하면 넘길 마음이 좀.”
“시승해봐도 되지, 형?”
“그래, 그래.”
길우성이 수재와 함께 주차장에서 차를 시승하는 동안, 남은 사람들은 바비큐장에서 고기 구울 준비를 했다.
“게이트 열리고 나서 우리 연예인 생명도 끝이구나 했는데. 정규 프로그램이 하나둘 정상화되는 거 보니까 이상하게 소름이 돋더라.”
“다음 주부턴 예능도 방송된다더라고요.”
“정말? 한쪽에선 군인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데, 그런 거 볼 정신이 어디 있냐고 비판하는 여론 만만치 않았잖아.”
“그 군인들이 쉴 땐 게이트 이전 시대처럼 평화롭게 쉬고 싶다고 의견 모은 거래.”
“아….”
치익.
달궈진 그릴에 생고기가 놓였다.
“정규 방송이 재개되면 그것도 나오겠네요. 우리가 컴백 시즌에 맞춰 촬영한 <스타학교>.”
아. 강보배가 탄식했다.
“맞아. 처음으로 완전체로 출연한 거였는데 하필 방송 전날에 게이트가 열리는 바람에.”
“남석이가 촬영한 <너의 집>도 있잖아. 그런데 그거 프로그램 내용이 집 소개하는 거라…. 방송이 될까 모르겠다.”
“그러게요.”
“야, 써한.”
“……?”
조금 전까지 주차장 부지에서 차를 몰던 길우성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 뒤에선 수재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먼 산을 바라본다.
길우성이 목 뒤를 긁으며 헤헤 웃었다.
“미안. 네 차에 문콕 했당.”
“집게로 맞아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