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활동 재개?
‘고민이구나. 고민이야.’
계나리는 의자에서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자세로 축 늘어졌다.
어제 그녀를 놀라게 한 인터넷 사건은 단순 해프닝으로 지나갔다. 그러나 인터넷이 끊겼을 때 다가온 무력감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나, 이대로 계속 방구석에 처박혀서 컴 앞에만 앉아있는 게 정답인가? 그게 맞아?’
계나리의 시선이 게이트 방어선 뉴스를 향했다. 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괴물을 잡기 위해 달리고 총을 쏘는 군인들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이해원이, 이전 시간대의 계마루가 떠오른다.
어떤 생각도.
‘나도 해원 씨나 은수 언니처럼….’
주변의 마나를 끌어당겨 가벼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못 해. 무서워.’
PC와 모니터로 둘러싸인 좁은 공간.
계나리는 몸을 움츠렸다. 마나로 일으킨 바람 역시 사라졌다.
‘차라리 혼자 괴물을 때려잡으면 때려잡았지, 사람이 바로 눈앞에서 죽어가는 걸 또 본다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이전의 끔찍하고도 슬픈 기억들. 벌써 손이 떨리고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띠링.
“……?”
계나리는 우울한 얼굴을 들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진은수의 SNS에 새 글이 올라왔다.
[(사진) 헤헷 #운전면허홧팅 #1종보통도전 #필기합격자랑]
운전면허 필기시험 합격 인증 사진.
남들도 다 따는 면허증, 필기 정도야 우습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계나리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 강한 사람이었는데.’
지나온 시간대에선 게이트 사태를 예고하고 경고한 단체도, 게이트를 잠시나마 막아주며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 대마법사도 없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국민이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었고, 생존자들 또한 살아도 죽은 것과 다름없는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사람들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지고 짙은 불안과 우울, 의심과 경계심만 삐죽삐죽 섰다. 살아남기 위해 범죄를 합리화하며, 그렇게 모두 변해갔다.
이전 시간대의 진은수는, 각성자이자 아이돌이면서 감히 세상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며,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 사람을 죽게 했다며 사람들의 거센 비난을 받은 뒤 조용히 사라졌다.
그래서 지금 모습이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지는 걸까.
‘아직 첫 임무 때 느낀 온갖 경험이 머리와 가슴에 둥둥 떠서 힘들 텐데. 왜 내가 다 뿌듯하냐.’
계나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진은수에게 톡을 보냈다. 지난번 만나서 번호를 교환한 뒤 처음 하는 연락이었다.
[언니, 안녕하세요! 조금 전에 SNS 봤는데, 괜찮으면 같이 면허시험 연습하실래요?]
이전 시간대에서 1종 대형 면허까지 따 본 몸. 계나리는 자신 있게 덧붙였다.
[저 아직 면허는 없지만, 어릴 때부터 아빠한테 배워서 운전 진짜 잘하거든요ㅎㅎ 트럭도 몰 수 있어욥!]
곧 진은수로부터 답장이 왔다.
꾸벅 인사하는 귀여운 캐릭터 이모티콘과 함께.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잠시 후. 계나리는 최대한 예쁘게 차려입고선 PC로 가득한 방을 나왔다. 1층으로 신나게 뛰어 내려가면서 외쳤다.
“아빠! 나 송파까지 태워다 줘!”
“송파엔 왜?”
“친한 언니 만나러 가려고!”
펜션에서 빌려온 양궁 장비를 정성껏 닦던 계마루가 물었다.
“그 언니 예쁘냐?”
“어! 엄청!”
“동생아, 이 험악한 세상에 어디를 쏘다니려고. 걱정되니 이 오빠도 같이 가주…. 풉.”
계나리는 쿠션으로 계마루를 제압했다.
“집이나 잘 지키셔.”
“아빠 금방 준비하고 나올 테니까 기다려.”
“네에.”
계나리는 퍼플아워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서한율에게 톡을 보냈다.
한편, 언덕 아래에선 고기 파티가 끝났다.
길우성은 수재와 함께 차량등록사업소로 향했다. 자동차 직거래하는 건 처음 본다며 박가람과 라이언도 따라갔다.
한율은 소화도 시킬 겸, 민준에게 펜션을 구경시켜주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여기가 시선 끌어당기더라.”
민준이 가장 흥미를 보인 곳은 야외 풀장 옆에 만든 양궁 연습장.
“원래 이 펜션에 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지난달에 양궁 장비 구한 김에 겸사겸사 설치했어요.”
“오…. 나 한 번 쏴봐도 돼?”
“물론이죠.”
한율이 없는 동안 강보배가 관리동에다 양궁 장비 정리함을 만들어 놓았다. 정리함 앞으로 가자, 민준은 자신에게 맞는 장비를 알아서 척척 챙겼다. 원카운트의 나기혁처럼 그 역시 <아이돌 스포츠대회> 양궁 출전 경험이 있었다.
“오래간만인데다 과녁이 멀어서 잘 맞힐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간제한 있는 연습장이나 경기장이 아니니까 편히 하세요.”
“그나저나 누나가 걱정하더라, 한율아. 너 이대로 배우 관두는 거 아니냐고.”
민준이 말하는 누나는 그의 연인, 배우 이희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미스터리 해커 집단, 제임스와의 관계를 몹시 궁금해하던데, 이희우는 게이트가 열려도 여전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이제 연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래도 아이돌은 계속할 거지?”
“상황 봐서요.”
배우 일은 힘들어도 아이돌 일엔 여지를 두었다는 게 마음에 든 걸까. 민준이 한율을 보며 씩 웃었다.
“역시 내 후배.”
민준은 양궁이 재밌는지, 차량등록사업소에 갔던 인원이 돌아올 동안 활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에도 맛있는 걸 갖고 놀러 오겠다면서 수재와 함께 펜션을 떠났다.
“써한. 너도 차 고사란 거 지내봤냐?”
“전혀.”
“영화나 드라마 촬영 시작하기 전에 고사 지내는 거랑 비슷한 건데.”
중고차를 사기로 했을 때부터 관련 영상을 봤는지, 길우성은 막걸리가 어쩌고 돈이 어쩌고 신나게 떠들었다. 한율은 대충 들어주는 척하면서 딴생각을 했다.
본인 차가 생겼으니 이젠 마음껏 돌아다닐 테고, 그럼 교통사고 위험률도 올라가지 않을까.
“멤버들.”
펜션 관리동.
“잠깐 팀 반지 점검 좀 해도 될까요? 길우성 너도.”
“……?”
한율은 저녁을 먹기 위해 모인 멤버들에게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멤버들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팀 반지를 넘겼다.
“무슨 점검?”
한율은 대답 없이 반지를 하나씩 살피곤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다 이건우의 반지를 보자마자 미간을 찡그렸다. 반지에 새겨둔 보호 마법이 사라졌다.
“건우 형. 혹시 최근에 크게 다칠 뻔한 적 있었어요?”
“응. 어떻게 알았어?”
“반지에 흠집이 있어서요.”
“아아. 그때 긁혔나 보다. 운동하다가 실수로 기구 놓쳐서 큰일 날 뻔했거든.”
“…….”
살며시 가라앉는 한율의 표정. 이건우가 당황한 얼굴로 유호를 돌아보았다.
“나… 크게 잘못한 거야?”
“어. 한율이한테 사과해.”
박가람도 옆에서 이건우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바보 같은 이건우. 그깟 운동 때문에 소중한 팀 반지에 흠집을 내?”
“…미안하다, 한율아.”
“네. 하루 동안 압수할게요.”
“어?”
다음 날, 대형 포털사이트 메인.
[서한율, 게이트 이전 마지막 예능 <스타학교> 25일 방송]
[J본부 대표 예능 <스타학교>가 게이트 사태로 미방영된 ‘어스래빗 편’을 오는 7월 25일 방송하기로 했다.
(사진=어스래빗 앨범 [Magic Bullet] 재킷)
(사진=<스타학교> 어스래빗 편 예고)
25일 방송되는 <스타학교>엔 인기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이 완전체로 출연하며 기대를 모았으나, 방송 하루 전날인 게이트가 열려 한 달 넘게 방송이 미뤄졌다.
한편, 어스래빗의 멤버 서한율은 미스터리 해커 집단 관련 의혹을 받고 있다.]
-왜 기사를 대충 쓰다만 듯한 느낌이 들까.
-이게 왜 연예 뉴스란이 아니라 일반 뉴스 메인에?
-드디어ㅠㅠ
-하루아침에 살던 곳에서 쫓겨나 대피소에서 지내면서 우울해지는 마음을 우리 지구토끼 영상으로 달래고 있었는데 새로운 양식이ㅠㅠ 감사합니다ㅠㅠ
-정신 나간 빠순이들. 게이트 방어선에선 지들 대신 군인이 죽어 나가는데 화장한 오빠들 티비에 나온다고 좋단다ㅋㅋㅋㅋ
ㄴ안녕하세요. 괴물한테 공격당하는 경찰 구하려고 용감하게 맞서 싸운 아이돌을 좋아하는 정신 나간 빠순이 1입니다.
ㄴ2입니다.
ㄴ3입니다.
ㄴ98242입니다.
ㄴ게이트 피해 성금 3억 기부한 아이돌을 좋아하는 정신 나간 빠순이가 나다^^
-남돌은 군대나 가라.
-편집하지 말고 풀버전 내놔.
-어스래빗 <스타학교> 완전체 출연! 기대합니다! :D
-게이트 열리기 직전에 촬영된 거라, 보면 왠지 기분 되게 이상할 것 같다.
파란달 펜션엔 오동식 팀장이 방문했다.
“공익 광고 출연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누구에게? 차남석과 라이언에게.”
오오. 멤버들이 두 사람을 보며 손뼉을 쳤다.
“축하한다.”
“너희들, 촬영장 가서 싸우면 안 된다.”
“무슨 공익 광고예요?”
“게이트 괴물 및 미니 게이트 발견 시 대처 요령을 알리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남석 씨한텐 소화기 소품 주려나?”
“축하해요, 형들.”
“고마워.”
“찐빵이는요?”
“아쉽지만 찐빵이는 제외됐네요. 어쨌든.”
오 팀장이 차남석을 보며 말했다.
“다들 당분간 군대 갈 생각은 접어요. 슬슬 여기저기에서 다시 섭외 논의가 이뤄지고 있으니까.”
“…팀장님까지 놀리시기입니까?”
“한율이 넌 오늘 몇 시 비행기랬지?”
“오후 4시요. 이제 공항 갈 준비 해야겠네요.”
정원그룹 3세 정지호가 이해원을 죽이려 한 사건은 공론화되지 않았지만, 당연히 그룹 총수와 VIP의 귀에 들어갔다.
제임스로 변한 한율은 “다시 이와 같은 일이 또 발생한다면 그땐….” 매듭짓지 않은 경고를 그들에게 던졌다. 이에 정원그룹 회장은 정지호를 외딴 섬으로 유배 보냈다.
정말 처벌을 위한 유배인 건지, 보복당할까 걱정되어 보호하려고 일부러 먼 곳에 보낸 건지.
‘아마 후자겠지.’
라이언이 아쉬운 얼굴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지금 가면 또 언제 와?”
“글쎄요. 빨리 올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고. 아직은 장담하기가 힘드네요.”
“같이 <스타학교> 본방 보면 좋을 텐데….”
“더 미루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미안해요.”
“이탈리아에 꿀이라도 발라놨냐? 아니면.”
길우성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우리도 같이 가는 거 어때? 이탈리아에서 하는 본방 사수. 음, 근사하다.”
그게 뭐가 근사하단 건지.
한율은 길우성을 무시하곤 오 팀장에게 말했다.
“저 없는 동안 멤버들 허튼짓 못 하게 감시 잘 부탁드려요.”
오 팀장은 유호에게 패스했다.
“호, 믿는다.”
“네.”
잠시 후. 공항까진 오 팀장이 직접 태워다주었다.
“아직 애들한테 말하진 않았지만, 회사에서 너희 컴백 활동 재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야.”
“벌써요? 다른 분야는 몰라도 아이돌그룹의 활동은 한참 시기상조인 것 같은데요.”
“이전과 비슷한 분위기, 포맷으론 아무래도 힘들겠지. 세상이 완전히 변했으니. 그래서 활동을 재개한다 해도 이전과는 결이 달라질 거야. 그 맞는 결을 열심히 찾는 중이고.”
“한다면 지금처럼 팬들만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조금 더 공익적인 측면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방향이 되겠네요.”
오 팀장이 놀란 눈으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대표님이랑 똑같은 말을.”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어서요. 게이트에 관한 불안도 그렇고, 물가도 굉장히 올랐잖아요. 이런 와중에 만약 평소처럼 팬 사인회를 연다?”
한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당첨되기 위해 팬들이 앨범을 사재기하고 큰돈 쏟아붓는 거, 알만한 사람은 다 알잖아요. 반가워하는 팬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부담스러워하는 걸 넘어서 ‘저렇게 속물적인 아이돌이었나’ 실망하지 않을까요.”
남자 아이돌그룹은 팬덤 장사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지금과 같은 시기엔 더 조심해야 한다. 팬들의 주머니를 털고자 눈에 불을 켜는 이미지가 조금이라도 박히면 바로 비호감으로 전락할 테니.
오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아무튼, 가면 핸드폰 끄지 마. 연락 안 되면 바로 이탈리아까지 직접 찾으러 갈 거야. 너 광고 모델 활동하는 것 중, 행사 참여 의무 횟수 남은 거 몇 건 있다.”
한율은 희미하게 웃었다.
“네, 주의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