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6화 (358/427)

부작용도 생각해야 한다

“8월 7일이요?”

이탈리아로 온 지 며칠. 한율은 조유찬의 전화를 받았다.

-[응. 네가 올 수 있다는 전제하에.]

핸드폰 달력을 확인했다. 고개를 돌려 시커멓게 일렁거리는 작은 게이트도 살폈다. 다른 곳에서 생포해 온 게이트 괴물도.

철창 구석에 처박혀 떨고 있던 괴물은 한율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푹 숙였다.

“음….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슬슬 서울의 게이트도 다시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조유찬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정말?]

“네. 늦어도 5일 전까진 들어갈게요. 그래야 공연 연습도 할 수 있을 테니.”

-[그럼 그렇게 알고 추진한다? 아, 도중에 일 생기면 편히 말해도 돼. 괜찮아.]

자신이 가야지만 팬 미팅을 열 수 있다 해놓곤.

“네.”

통화를 끊은 한율은 철창으로 다가갔다. 벌벌 떠는 괴물을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

“넌 좀 오래 버텨주라.”

잔뜩 몸을 낮춘 괴물의 눈이 공포로 질렸다.

크르….

* * *

[서한율의 소름 돋는 이야기, 사실이었다!]

[25일 방송된 <스타학교>에서 서한율이 털어놓은 소름 돋는 이야기와 비슷한 범죄가 실제 당시 인근에서 벌어졌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서한율이 초등학생 시절…(중략).

범인은 고가의 자전거를 타거나 옷을 걸친 초등학생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으나, 다행히 11년 전 경찰서에 스스로 찾아가 자수했다고 알려졌다.

한편, 서한율은 지난 18일 <부산 K-POP 콘서트>에 깜짝 등장한 이후 제임스, 미스터리 해커와의 연관성 의혹에 침묵 중이다.]

-자수했다니 다행이네요.

-서한율 다시 이탈리아 갔다던데.

ㄴ제임스도 같이요?

ㄴ제임스는 모르겠고, 같은 비행기에 탄 사람이 서한율 목격담 올렸음. 폰케이스가 이상한 토끼가 산만하게 그려진 이상한 거라 시선이 갔는데, 쓰는 사람 얼굴 보니까 서한율이었다고

ㄴㅋㅋㅋㅋ 그 폰케이스 아마 팬이 직접 만든 선물일 겁니다. 팬이 준 선물이면 아무리 디자인 이상해도 다 사용하더라고요ㅎㅎ

ㄴ아무리 이상해도 그렇지 이상하다고 두 번씩이나 강조할 필욘 없잖아요ㅠㅠ

-방송 보면서 진짜 무섭다고 느꼈는데 실제로; 저런 인간들은 제발 게이트 괴물한테 참교육 당했으면 좋겠다

-제목만 보고 미스터리 해커 관련 의혹인 줄

“한율이 형은 대체 정체가 뭘까.”

WB래빗 엔터가 강동구에 마련한 어스래빗과 SPRabbit의 안무 연습실.

변지욱이 핸드폰을 보며 중얼거렸다.

“우성이 형이 방송에서 한 얘기가 정말로 한율이 형 때문이었다면, 한율이 형은 몇 년 전부터 신기한 힘을 갖고 있었단 거잖아. 그런데 ‘파랑 요정’ 영상에 이어서 이 기사까지 보니까.”

함께 기사를 보던 현강희가 변지욱을 바라보았다. 변지욱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초딩 서한율을 차로 치려고 했던 범죄자가 자수한 게 과연 우연일까? 이런 의심이 든단 말이지?”

“그러면 뭐 어때. 어린아이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던 나쁜 놈이잖아.”

변지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율이 형이 선한 사람이라 참 다행이라고.”

짝짝. 시간을 확인한 임승준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휴식 끝났다. 다들 일어나.”

“이옙.”

변지욱이 활발하게 대답하며 일어났다. 다른 멤버들도 하나둘 일어나 몸을 풀었다.

딱 한 사람, 김권만 빼고.

“우리.”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소파에 앉아있던 그가 멤버들에게 물었다.

“정말로 컴백할 수 있을까?”

“권. 그 얘긴 전에 다 끝냈잖아. 컴백 일정이 날아가기는 했지만, 녹음이랑 앨범 재킷, M/V 촬영까지 다 마쳤으니까….”

“질문을 바꿀게.”

김권이 우울한 얼굴로 임승준에게 물었다.

“우리, 아이돌로 먹고살 수 있을까?”

“…….”

연습실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형이나 지욱이, 강희는 원제로 활동으로 이미 정산받고 있어서 여유롭겠지만, 난 솔직히 하루하루가 숨 막혀. 대표님이 빚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해주셨지만,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데… 어떡해.”

“형….”

변지욱은 김권에게 다가갔다.

김권은 2016년 WB래빗에 연습생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보다 몇 달 늦게 들어온 길우성, 서한율이 먼저 어스래빗으로 데뷔하는 걸 지켜봤다. 3년 전엔 임승준, 변지욱과 함께 뮤닷 에 나갔으나, 막판에 아쉽게 탈락했다.

SPRabbit는 그가 연습생 생활 5년 만에 데뷔한 그룹이었다. 하지만 데뷔의 기쁨도 잠시. 4개월도 지나지 않아 게이트가 열렸다.

“미안해. 그런데 너무 불안해서….”

김권이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

“가족들도 다 나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한 달 넘게 아무것도 못 하고 있으니까….”

다른 멤버들도 김권에게 다가가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얼마 전에 <부산 K-POP 콘서트> 무대에도 섰잖아. 예전보다 활동이 어려워지기는 했지만, 회사에서도 최대한 우리 길을 찾아주려 노력 중이고.”

“그래, 권 형. 아직 포기하기엔 일러.”

탁탁. 변지욱이 김권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

“우리한텐 누가 있다? 든든한 선배님들이 있다! 정 힘들면, 한율이 형 바짓가랑이 붙들고 도와달라고 하자.”

“지욱아….”

“자존심 챙길 게 뭐 있어. 우리 데뷔 앨범에 들어간 자금이 다 어디에서 나왔는데. 그리고 같은 회사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다 도와주는 거지. 같이 지하 연습실에서 땀 흘리면서 고생한 시간이 얼만데.”

“그래. 우리랑 비슷하게 데뷔한 애들이 다 우리 부럽다고 하더라. 부산 공연도 솔직히 어스래빗 동생 그룹이라 나갈 수 있었던 거고.”

“아무리 그래도 상황 더 안 좋은 사람들이랑 비교하면서 위안 얻는 건 조금 그렇다.”

“그런가?”

현강희도 김권에게 조용히 말했다.

“형. 금전적으로 힘들면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지 말해요. 우리, 같은 팀 식구잖아요.”

훌쩍. 김권이 재차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강희야. 그리고 다들 미안. 분위기 흐려지게 해서….”

“괜찮아. 불안하면 그럴 수도 있지. 불안한 게 당연한 세상이고.”

그때였다.

벌컥.

“왜 안무 연습실이 이렇게 조용한가, 후배들이여!”

박가람이 노크 없이 문을 열며 등장했다. 그 뒤론 길우성이 쯧쯧 혀를 차면서 머리 위로 피자 박스를 흔들었다.

“이 싸람들이 빠져가지곤!”

함께 온 유호도 치킨 상자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다들 밥 먹고 해.”

“그런데 권이 누가 울렸냐. 왜 눈이 빨개. 어떤 놈이야. 데려와, 이 형님이 대신 혼내줄 테니.”

“…….”

“…….”

꼭 알고서 등장한 것 같은 타이밍이라, SPRabbit 멤버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변지욱이 두 팔을 활짝 벌려 환영하면서 고자질했다.

“게이트 새끼요!”

길우성이 손바닥을 세우며 정색했다.

“아, 그 새낀 좀 벅차다. 미안.”

함께 치킨과 피자를 먹는 동안, 임승준은 조금 전 김권이 했던 고민과 걱정을 슬며시 털어놓았다. 게이트 때문에 활동이 중단된 건 어스래빗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유호가 회사 사정을 잘 알기도 하고.

“어스래빗 팬들이 팬 미팅 다시 열어달라고 성명서까지 냈잖아. 그건 어떻게 하기로 했어?”

변지욱의 말처럼 자존심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 누군가 이대로 가라앉는 아이돌 시장의 물꼬를 터줬으면 하는 바람, 어스래빗이라면 왠지 그게 가능할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서한율이 있으므로.

유호가 SPRabbit 멤버들을 살피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팬미팅, 다시 진행하기로 했어.”

후배들은 컴백 일정이 날아가 불안함에 연습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스케줄을 잡았다고 자랑하는 것 같이 들릴까 조심스러워하는 게 눈에 보였다.

“다음 달 7일에. 한율이도 그전에 귀국하기로 했고.”

“한율이 형도 와? 좋았어, 결전의 날이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는군.”

“……?”

SPRabbit 멤버들을 포함한 모두가 의아한 얼굴로 변지욱을 바라보았다.

변지욱이 씨익 웃었다.

“한율이 형 좀 이용해야겠어.”

유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부작용도 생각해야 한다, 지욱아.”

8월 4일 수요일 아침, 인천국제공항.

한율은 장거리 비행에 굳었던 몸을 쭉쭉 풀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조심히.

기이잉! 저 멀리 다른 활주로에서 공군 전투기가 이륙하는 게 보였다. 안전상의 이유로 일반 여객기 운항이 줄어든 대신에 공군이 그 빈자리를 사용한다더니. 곧 다른 정찰기도 이륙을 준비하는 게 보였다.

우웅.

계나리로부터 전화.

“응, 지금 막 비행기에서 내렸어.”

-[후후후.]

계나리가 목소리를 잔뜩 내리깔고 웃었다.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말로 양평에서 여기까지 운전해서 온 거야?”

-[후. 제가 겉으론 평범한 고3 수험생이지만, 운전 경력 6년입니다. 이 정돈 괜찮아요.]

“아니, 여기저기 거칠어진 도로를 오래 달렸을 내 차 상태가 걱정돼서.”

-[오빠?]

한율은 농담이었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늦었지만 면허 딴 거 축하해. 금방 나갈게.”

-[넹.]

계나리는 한율의 픽업트럭을 주차장에 세워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먼 길 운전하느라 고생했어. 이제 운전은 내가 할…. 사이드미러에 못 보던 흠집이 생겼는데?”

“어제 가람이 오빠한테 차 키 받았을 때부터 있었습니다. 제 짓이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누명 쓸까 봐 출발 전에 미리 사진도 찍어뒀지욥!”

계나리가 핸드폰에 사진을 띄워 내밀었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키를 받았다.

“그래, 그래.”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영종대교를 달렸다. 계나리가 노트북을 꺼내 서울 지도를 크게 띄웠다.

“해원 씨랑 은수 언니가 고생한 보람이 있었어요. 아직 임상 단계이기는 하지만, 청독각룡 새끼 뿔로 개발한 치료제를 쓴 군인들이 차도를 보이고 있대요.”

“다행이네. 다른 일은? 아직도 펜션이랑 집 근처에 기자들 알짱거려?”

“아니요. 오빠 말대로 시간 지나니까 잠잠해지더라고요. 하지만 팬 미팅 땐 각오하셔야 할걸요? …그런데요, 오빠.”

한율을 바라보는 계나리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 말.

“나흘 전에 통화할 때 웬 외국인 여성분이 아주 친근한 목소리로 제임스를 부르던데. 누구예요?”

“아아. 시모나라고, 이탈리아에서 통역사로 붙여준 외교부 직원.”

“예뻐요?”

“이탈리아에서 무슨 실험 했는지는 안 물어봐?”

계나리가 입을 삐죽거렸다.

“어차피 안 알려줄 거면서.”

“알려주려고 오늘 여기까지 오라고 한 건데?”

계나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정말요? 뭔데요? 오늘 서울 게이트 살펴보는 거랑 관련 있는 거예요?”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탈리아 게이트 중, 규모가 작은 곳에서 실험 하나를 진행했어.”

툭. 계나리가 노트북을 덮으며 집중했다. 한율은 전방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게이트 괴물에게서 흡수한 생명력으로, 게이트 보호막을 유지하는 마법 개발 실험.”

“……!”

“그런데 게이트 자체가 내뿜는 기운이 너무 강하고, 보호막을 유지할 만큼 꾸준히 힘을 흡수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얼마 못 버티고 자꾸 허물어지더라.”

“그럼 게이트의 힘을 역이용하는 건요? 이것도 물론 생각해 보셨겠지만.”

“게이트가 마법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내가 다룰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야. 섣불리 건드렸다가.”

한율은 오른손을 가볍게 털었다.

“오히려 내 손이 날아갈 뻔했어.”

“으아…. 어쨌든, 왠지 두근두근하네요. 성공만 하면 게이트를 완전히 막아내는 거랑 다름없잖아요.”

힐끗. 한율은 벌써 성공한 것처럼 기뻐하는 계나리를 살폈다.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성공하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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