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9화 (361/427)

덤으로 구해줬더니

한율은 길우성을 옆으로 치우곤 안으로 들어갔다.

“왜 양평으로 안 가고 여기 왔어?”

“너 오늘 여기에서 잔다는 소리 듣고. 그리고 양평보단 여기가 연습실이랑 더 가깝잖아. 공군의 괴물 몰이 기술도 부쩍 좋아져서, 이제 여기까지 뭐가 날아오는 일도 줄었다더라.”

기이잉. 전투기 소음이 가깝게 들린다.

“조금 시끄럽긴 하지만.”

“네 차 끌고 왔냐?”

“당연히 내 차 끌고 왔지? 밥은?”

거실 소파엔 유호의 가방이 놓여 있다.

“저녁 약속 있어. 호 형은?”

“2층에서 통화 중. 그런데 누구랑?”

“JE 선배님이랑 선배님 지인.”

“그렇구먼. 그럼 이건.”

길우성이 냉장고에서 한우고기 팩을 꺼냈다.

“호 형이랑 오붓하게 둘이서 해치워야겠구먼.”

“내일 먹을 건 남겨놔.”

“야, 써한.”

길우성이 계단 쪽을 힐끗하더니 물었다.

“예전에 네가 미랑이 누나 스토커 직접 잡았었잖아. 그때도 초능력 써서 잡은 거였냐?”

“전혀. 범법적인 방법 동원해서 그놈 집 알아낸 후에 경찰에다 강력범죄 일어난 것 같다고 신고한 게 다야. 그런데 정말로 잡혀가서 나도 조금 놀랐고.”

“…….”

그러나 길우성은 눈을 가늘게 뜨며 대놓고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율은 일부러 살짝 발끈했다.

“그때 네가 날 스토커로 몬 게 억울해서 돈으로 사람 좀 썼다, 새끼야.”

“크.”

길우성이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마터면 섭섭할 뻔?”

“섭섭할 것도 많다.”

유호가 2층에서 내려왔다.

“한율아, 왔어?”

“네. 그런데 이제 다시 나가봐야 해요.”

“응, 지은이랑 약속 있다는 거 들었어. …저기, 우성아.”

“엉?”

유호가 길우성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지금 급히 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 저녁은 혼자 먹어야겠다. 미안해.”

“왓?!”

길우성이 충격받은 얼굴로 비틀거렸다.

“그럼 나 혼자 이 넓은 집에서 쓸쓸히 한우를 구워 먹으란 소리야? 큰형,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미안해. 팀장님이나 유찬이 형한테 연락할까?”

길우성은 잔뜩 삐쳐선 유호를 바라보다가 고기 팩을 냉장고에 넣었다.

“됐어. 그냥 내 방에 처박혀서 잘 거야. 바쁜 두 사람은 나 신경 쓰지 말고 각자 갈 길 가쇼.”

한율은 시간을 확인하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어. 다음부턴 연락하고 움직여.”

“저, 저 하나밖에 없는 친구란 놈이 이렇게 매정할 수가…! 이프림한테 고자질할 테다! 서프라이즈로 한우 챙겨서 기다렸는데 나 버리고 가버렸다고!”

“해, 고자질.”

방 안쪽 드레스룸에서 검은색 모자를 챙겨서 나왔다. 모자를 눌러쓰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럼 전 먼저 나가요. 길우성, 문단속 잘해라.”

“응. 운전 조심히 해.”

“올 때 맛있는 거 사 오면 용서한다.”

한율은 차고로 통하는 문을 열면서 한쪽 입가를 올렸다.

“애초에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왜.”

타악.

닫은 문 너머에서 길우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써한 한 대 때리고 싶다, 큰형!”

“왜 별것도 아닌 일에 싸우려고 그래, 친구끼리.”

JE의 집에선 JE와 계나리, 구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나리에게 오늘 게이트 방어선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는지, JE가 한율에게 말했다.

“나도 가까이에서 결계 만드는 거 보고 싶었는데. 다음엔 나도 데려가.”

“인원이 많아질수록 정체 들킬 가능성도 커져서 안 돼요. 대신, 오늘부터 마법 가르쳐드릴게요. 어차피 일요일까진 스케줄 때문에 한국에 있을 거니까.”

“오.”

저녁을 먹은 뒤, 두 사람의 마나 유동을 봐주었다. JE에게 마법을 가르쳐줄 땐 계나리도 복습하겠다면서 옆에 앉았다.

띠링. 중간에 길우성이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다는 그린라이브 알림이 떴으나, 무시하고 넘겼다.

마법 수업을 마친 건 새벽 1시가 될 무렵.

“제가 괜찮다고 할 때까진 절대 혼자 연습하지 마세요.”

“알았어. 마나 유동만 열심히 하고 있을게.”

“나리한테도 허튼짓하지 마시고요. 미성년자예요.”

계나리는 오늘 밤 JE의 집에서 자기로 했다. 내일 아침 일찍 한율과 다시 게이트 방어선에 가기로 한 까닭이었다.

JE가 진심으로 울컥했다.

“내가 미성년자나 건드는 변태로 보여?”

“저기, 저 열아홉 살이기는 해도 정신 연령은.”

한율은 계나리의 말을 여지없이 싹둑 잘랐다.

“그럼 둘 다 내일 봐요.”

“조심히 들어가.”

“…내일 봐용.”

어스래빗 숙소는 조용했다.

한율은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산 비싼 수박을 냉장고에다 집어넣었다. 그리고 2층에 있는 길우성의 방부터 살폈다. 길우성은 한껏 자유로운 포즈로 침대에 널브러진 채 자고 있었다.

“고양이…. 흐….”

잠꼬대까지 하며.

유호도 자신의 방 침대에서 자고 있었는데, 미약하게 술 냄새가 났다.

한율은 조용히 문을 닫고선 3층을 훑어본 뒤, 1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자기 전, 숙소에 보호 결계를 발동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새벽. 일찍 눈이 떠진 한율은 이불 속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포털사이트 연예 뉴스란 메인에 어스래빗 기사가 떴다.

[어스래빗, 팬들 강력 요청에 취소된 팬 미팅 재개]

[인기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이 게이트 사태로 취소되었던 [Magic Bullet] 앨범 발매 기념 팬 미팅을 오는 7일과 8일, 서울과 부산에서 재개한다.

소속사인 WB래빗 엔터테인먼트는 기존 팬 미팅 당첨자들을 대상으로 지난달 말부터 팬 미팅 재개를 알렸으며, 사정상 불참하는 당첨자들에게는 멤버들의 친필 사인이 담긴 한정판 굿즈와 다음 팬 미팅 우선권을 주기로 했다.

또한 현장에서 당첨자 본인 확인을 위한 검사가 철저히 이뤄질 예정이며, 타인에게 양도한 게 발각될 시 앞으로 모든 팬 이벤트 참여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양도받은 사람 또한 강제 퇴장된다고 경고했다.]

-팬미팅 입장권 못 사요???

ㄴ네. 기존에 당첨된 본인 아니면 못 들어가요. 신분증이랑 멤버십 시리얼넘버, 당첨 코드 일치하는지 다 확인해요.

-중고거래 플랫폼에 당첨권 천만 원에 판다는 글 올라왔던데. 신분증이랑 핸드폰까지 빌려준다고.

ㄴ이 시국에 어떤 미친ㄴ이 아이돌 팬미팅에 천만 원을 태우냐?

ㄴ잘 태울 것 같은데?

ㄴ재개 공지 뜨자마자 3천만 원에 판 사람도 있음. (링크) 인증 박제글

ㄴ주작을 믿는 능지 수준

ㄴ아이돌 팬미팅 당첨되려면 보통 몇백씩 지르지 않나? 여기에 서한율도 만날 수 있으니까 주작 아닐 것 같은데?

ㄴ개소리ㄴㄴ 고작 서한율 만나는데 몇천을 쏟는다고?ㅋㅋㅋ

ㄴ고작이래ㅋㅋㅋㅋㅋㅋ

-다들 집 잃고 물가까지 올라서 힘든 마당에 팬미팅ㅋ 이래서 있는 것들이 더한다더니. 역겹다. 퉤.

ㄴ나 이런 댓글 달릴 줄 알았음.

ㄴ님 댓글이 더 역겨워요^^

ㄴ???? 취소된 거 재개하는 거라고 제목이랑 본문에 적힌 거 안 보이냐? 눈깔 제대로 굴릴 줄 모름?

ㄴ이런 사람 특: 선행 기부 기사는 이 악물고 무시함.

-팬 미팅에 깜짝 게스트로 게이트 괴물 등장하면 재밌겠다ㅎ

-정신 나간 빠순이들.

ㄴ요즘 부산 해수욕장에 피서객 존나 많은 건 아냐?

-미니 게이트가 열릴지도 모르는데 사람이 많이 모이는 건 위험하지 않나요?

ㄴ부산 K-POP 콘서트 관객 5만 명. 어스래빗 팬 미팅 당첨자 4백 명

ㄴ여차하면 제임스가 지켜주겠죠. 서한율 부모님 집에도 결계 만들어줬던데ㅎㅎ

댓글 분위기가 좀 삭막하네.

한율은 졸린 눈을 끔뻑거리면서 다른 기사를 클릭했다. 한 배우가 키우는 강아지의 동물병원 진료를 걱정한 것을 두고 비아냥거리는 댓글이 많았다.

-네 개보다 못한 처지인 사람이 더 많아요ㅋㅋ

-의료보험 혜택 못 받는 개보다 병원을 못 가는 내가 레전드

또 다른 기사. 어떤 연예인이 ‘강원도 호텔에서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셀카 한 장을 SNS에 올렸다. 그러자 힘든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거냐, 박탈감을 준다며 비난받자 SNS를 삭제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기사 댓글에서도 비난받을 만했다, 스스로 찔리는 게 있으니 삭제한 거 아니냐며 부정적인 말을 내뱉는 사람이 많았다.

이번엔 포털사이트 메인을 훑었다.

[가정집에 미니 게이트 열렸다 허위 신고, 사이 안 좋은 지인 짓]

[10대 사이 괴물 인증 놀이 확산… 안전 교육 필요]

[현금 노리는 흉악 범죄 급증]

[또다시 일어난 각성자 범죄, 대책은 없나?]

[“제임스 소개해준다” 지인 행세하며 30억 가로챈 일당 붙잡혀]

마지막 기사를 클릭했더니, 여기도 댓글이 가관이었다.

-본인 정체를 제대로 밝히지 않은 제임스 잘못도 있다고 본다. 신비주의가 악용될 줄 정말 몰랐을까?

-그 정도로 강하고 나댔으면 공인이나 다름없는데 제임스도 좀 생각 없이 행동하는 듯ㅇㅇ

길우성을 보호하는 김에 덤으로 구해줬더니, 잘들 논다.

한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부스스 일어났다.

* * *

8월 7일. 서울시 노원구의 한 공연장 앞에 수백 명이 길게 줄을 섰다. 모두 어스래빗 팬미팅에 참석하기 위해 온 팬들이었다.

입구에선 작은 소란이 일었다.

“저 맞다니까요?”

“신분증 사진이랑 너무 다르셔서요.”

“성형도 하고 다이어트도 해서 그렇다니까요?”

“그럼 정확한 확인을 위해 경찰에 협조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어스래빗이 공권력에다 갑질했다는 얘기 듣게 하고 싶으세요? 안티예요?”

“나가주세요.”

잠깐 바깥 상황을 살피기 위해 나온 허진영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고향에 내려가서 부모님 식당을 돕던 그는, 바로 그제부터 매니저로 복직했다.

“벌써 세 명 나왔어요.”

대기실. 헤어와 메이크업 단장을 다 받고 나서 쉬던 멤버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렇게 본인 확인 철저히 할 거라고 여러 번 경고했는데 셋씩이나.”

“그나저나.”

후우. 강보배가 크게 심호흡했다.

“오래간만에 이프림하고 가까이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니까 설렌다. 긴장도 되고.”

“나도.”

TV에선 게이트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게이트 방어선 군인들 사이로 퍼지던 푸른 반점 바이러스 치료제가, 미스터리 해커가 건네준 정보를 토대로 이해원, 진은수의 활약 덕분에 개발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 작전엔 이해원 씨의 집에 침입하려다 미수에 그쳐 잡혔던 각성자도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게이트 방어 지휘부는 피해자였던 이해원 씨가 그를 용서하여….]

한율 옆에서 TV를 보던 라이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리, 진짜 미래에서 왔어?”

“…네?”

“응?”

“…….”

“…아.”

라이언은 허진영이 조금 전 이야기를 듣지 못한 걸 확인하곤 한율을 향해 씩 웃었다.

“미안. 실수.”

차남석으로부터 다들 계나리가 미스터리 해커란 사실을 눈치챘다곤 들었지만, 이 정도면 확신하는 단계가 아닐까.

TV에선 청독각룡 새끼 생포 작전 당시 군이 촬영한 영상 일부가 나왔다. 라이언이 감탄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런 위험한 거리에서 괴물 소굴까지 들어가다니. 다들 대단하다. 존경해.”

앵커의 설명이 끝나고 이해원의 인터뷰 영상이 이어졌다. 웬만하면 카메라 앞에 다시 서고 싶지 않았을 텐데, 게방부에서 특별히 부탁한 걸까.

[은수 씨와 또 다른 각성자, 그리고 게이트 방어선에서 고생하는 동료들과 국민 여러분의 성원과 지지가 없었다면 이번 작전은 힘들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박가람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뉘 집 아들인지 참 잘 생겼네.”

뉴스 프로그램 톡창에도 난리가 났다.

-방금 인터뷰한 잘생긴 밤톨이 누군가요?

-전엔 그냥 기생오라비 같았는데 군인 되니까 무게감까지 잡히고 또 눈썹 위 흉터는 뭐임 존나으른섹시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생긴 밤톨잌ㅋㅋㄱㅋㅋㄱㅋㅋ

-이해원이라고, 이우그룹 회장 손녀랑 읍읍

-제임스 친구

-이해원 입대할 때 게방부에서 현수막 걸고 대환영 파티했다는 썰이 있음

-저 머리를 해도 잘생길 수 있다고? ㅅㅂ

-다들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 우리나라 은근히 게이트 잘 막고, 미스터리 해커도 도와주고 제임스도 있고 든든하다ㅠㅠ

-은수 인터뷰는 없나요ㅜㅜ

“얘들아, 팬분들 입장 끝났다니까 슬슬 준비하자. 화장실도 미리 다녀오고.”

“네엡.”

잠시 후, 팬 미팅이 시작되었다.

꺄아아악! 오프닝 VCR이 끝나고 어스래빗이 등장하자, 객석에 앉은 팬들이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보고 싶었어, 얘들아! 어스래빗 사랑해!

멤버들 또한 반갑고 기쁜 얼굴로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한율 역시 환하게 웃어주었다.

“이프림!”

한편 그 시각, 공연장 뒤편 주차장에 세워진 새카만 승합차.

모자와 마스크를 쓴 수상한 자들이 긴장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후…. 진짜 하는 거지?”

“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리야. 해야지. 걸린 돈이 얼만데.”

“얼굴 안 들키게 조심해라. 장갑도 쓰고.”

트렁크에선 커다란 캐리어 두 개가 저절로 들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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