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임스다
“웬일이냐, 네가 날 먼저 찾아오고?”
찾아온 사람이 한율이란 걸 확인한 길우성이 퉁명스레 물었다. 얼굴엔 ‘나 진심 삐침’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었다.
“받아.”
“나 지금 피곤해서 잘 거거든? 중요한 용건 아니면 내일…. 야.”
한율은 아랑곳없이 길우성의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에 차를 놓곤 의자를 빼서 앉았다.
“나 분명히 피곤하다고 했…. 아니, 문이 왜 저절로 닫히는 거야?”
어설프게 화가 난 표정을 짓던 길우성이 저 혼자 닫히는 문을 보며 움찔 놀란다. 그리고 다시 한율을 쳐다보았다가.
“아잇, 깜짝이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어….”
길우성이 멍해진 얼굴로 두 눈을 끔뻑거렸다.
“제… 제임스? 아니, 서한율은 어디에 가고…. 어…?”
“나야.”
한율은 편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사아. 마법으로 만든 로건 워커의 젊은 시절 모습이 사라지고 다시 서한율로 돌아왔다.
“……?!”
입을 떡 벌린 채 경악하는 길우성을 향해 담담히 고백했다.
“내가 제임스야.”
“…….”
“그러잖아도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 숨기는 것도 답답하던 차였는데 잘 됐지. 우선 ‘친구’인 너한테 먼저 알려주려고 왔다.”
“…….”
“듣고 있냐?”
“…….”
한율은 멍청하게 굳어버린 길우성을 바라보다가 후련하단 얼굴로 짧은 한숨,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 피곤하니까 잔다고 했지? 간다.”
“……야.”
나가려고 하자 그제야 반응을 보인다.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삐걱, 길우성이 한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써한 네가, 제임스 형님… 이었다는 소리야?”
“어.”
“네가… 그, 뭐냐. 게이트 막는 미스터리 장막도 만들고, 사람들 많이 구한… 제임스? 지구에서 가장 강한 각성자?”
“…….”
사아. 한율은 다시 한번 제임스의 모습으로 변했다. 길우성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뚜왓씨!”
“아무리 게이트가 열렸다곤 해도 진짜 내 모습으로 다니면 여러모로 불편하고, 활동에도 지장 생길 게 뻔하잖아. 멤버들이랑 가족들한테도 피해 가고. 그래서 만든 가짜 신분이 제임스야. 이제야 알겠냐? 왜 그동안 내가 한국에 있을 때만 제임스가 나타났는지?”
“……어.”
길우성이 놀란 자세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네 차를 끌고 다녔는지도 다. 그럼… 해원 선배님도 네가 제임스란 거 아는 거야? 아니, 잠깐만. 그런데 제임스… 미스터리 해커 집단 소속이라던데. 그러면 정말로 네가….”
“소속은 아니고 아는 사이.”
“……아, 머리 아파.”
길우성이 제 머리를 부여잡고 흔들었다.
“아, 복잡해. 아, 나 머리 나쁘다고.”
“알아, 너 머리 나쁜 거.”
“야잇.”
한율은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도로 의자에 앉으며 길우성에게도 앉으라고 손짓했다.
“남석이 형한테 들었어. 다들 나리 씨가 미스터리 해커가 아닐까 의심한다고.”
길우성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 그럼 정말로 나리 씨가 미스터리 해커 맞아?”
“어.”
“나리 씨가 리더?”
“아니. 미스터리 해커 집단 같은 건 없어. 미스터리 해커는 오직 나리 씨 단 한 사람이고, 나나 해원이 형은 조력자에 가까워. 어쨌든.”
한율은 이마를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다. 일부러 힘을 숨기려고 제임스란 인물까지 만들었는데, 인터넷 방송으로 까발려졌으니.”
“으음….”
길우성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단 얼굴로 고민하다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아주 당황스러운데 넌 오죽하겠냐.”
“이번엔 안 섭섭하냐? 네가 제임스 형님 찾을 때마다 시치미 뚝 떼고 있었는데?”
“야, 나 그렇게 속 좁고 이해심 없는 놈 아니거든? 그냥… 뭔가 자꾸 숨기고, 또 왠지 나만 따돌리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던 거지…. 이렇게 진짜 큰 비밀인 줄 알았으면 안 그랬다고.”
꿍얼꿍얼하던 길우성이 돌연 고개를 흔들었다.
“어우, 복잡해. 진짜 피곤해졌다. 너 가. 오늘은 뇌용량 초과야. 더는 무슨 말 들어도 못 알아먹을 것 같다.”
표정을 보아하니, 한율이 감추고 있던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라 그간의 섭섭함이 다 날아간 듯했다.
“그래, 쉬어라. 오늘 수고했다.”
“어, 너도. …야, 잠깐만.”
멋쩍게 웃던 길우성이 한율을 다급하게 잡았다.
“너 아까 나한테만 우선, 먼저, 알려주는 거라고 했잖아. 그 말은….”
한율은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다음 날 이른 아침.
한율은 어젯밤 부모와 통화 이후 꺼뒀던 핸드폰 전원을 켰다.
띠링, 띠링. 켜자마자 그동안 들어왔던 부재중 전화와 톡, 메시지 등이 몰려왔다. 지인들의 연락도 많았지만, 저장되지 않은 번호도 많았다.
-[안녕하세요, 한율 씨. MBS 김 PD입니다. 우선 회사를 거치지 않고 무례하게 직접 연락을 드린 점 정말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일보 기자입니다. 인터뷰 요청을….]
-[♡서한율 사랑해♡서한율 사랑해♡서한율 사랑해♡서한율 사랑해♡서한율 사랑해♡서한율 사랑해♡서한율 사랑해♡….]
부스스 몸을 일으킨 한율은 노트북을 켰다. 통신사 홈페이지에 접속, 번호를 바꾼 뒤 사촌인 서한림에게 연락했다.
“누나. 누나 명의로 핸드폰 하나 개통해줄 수 있어요?”
예전에 외숙인 최은후가 만들어준 핸드폰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일단 두기로 했다.
“카메라 성능이 아주 좋은 최신 모델로요. 계좌 번호도 이 번호로 보내주세요. 필요한 금액 입금해 드릴게요.”
-[됐어. …라고 쿨하게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얼마 전에 가족 강도단한테 돈 뺏겼다는 얘기 들었어요. 그때 그 범인들은 잡았어요?”
-[잡긴 잡았는데.]
서한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다 써버리고 없다고, 차라리 감옥 보내달라더라. 어이가 없어서 진짜. 아무튼 폰은 내일 아침에 바로 개통해서 보내줄게. 어디로 보내면 돼?]
“내가 직접 가지러 갈게요.”
-[응, 알았어.]
통화를 마친 뒤엔 정상욱 중위에게 전화를 걸었다. 팬 미팅을 엉망으로 만든 놈들이 괴물을 손에 넣은 경위를 비롯해 수사 진척 상황을 들었다.
-[이런 시국에도 괴물을 생포해서 사고파는 미친놈들이 있더군요. 마치 희귀 야생동물을 불법 매매하던 것처럼요. 현재 괴물들을 잡은 밀렵꾼들과 브로커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미션을 준 놈은요?”
-[BJ가 미션을 받았던 인터넷 방송 플랫폼이 해외에 기반을 둔 곳인데다, 방송 중단 직후 바로 탈퇴해서 추적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네….”
계나리도 눈에 불을 켜고 추적 중이니, 조만간 단서라도 잡히지 않을까.
-[그런데 말입니다…. 괜찮으십니까? 같은 그룹 동료도 영상에 찍혔던데.]
“……?”
같은 장소에 있었으니 영상에 함께 찍히는 것도 당연한 일. 그러나 그걸 모르고 한 소리 같진 않아, 한율은 잠자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영상을 보니 박가람 씨 눈도 파랗게 물들었던데요. 혹시 그분도….]
똑똑. …달칵.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고, 노크하자마자 문틈 사이로 박가람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울상을 짓는 박가람. ‘나 어떡하냐?!’ 대충 이런 표정이었다.
“죄송합니다, 중위님. 나중에 다시 걸게요.”
한율이 통화를 끊자 박가람이 후다닥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덮은 채 핸드폰을 불쑥 내밀었다.
“교장 쌤, 나 어떡하냐?”
핸드폰에는 기사가 떠 있었다.
[어스래빗 박가람, 서한율처럼 파랗게 물든 눈]
[어제 7일 서울에서 열린 어스래빗 팬 미팅에…(중략).
한편 영상에는 어스래빗 멤버 박가람이 서한율처럼 파랗게 변한 눈으로 괴물들을 가둔 구체를 노려보는 장면이 찍혀, 그 역시 각성자가 아니냐는 네티즌들의 추측이 이어지고 있다.
만약 박가람 역시 각성자라면 어스래빗은 수천 명에 한 명꼴인 각성자를 세 명이나 보유한 국내 최초 아이돌그룹이 된다.]
-어스래빗 자체가 미스터리 해커가 만든 아이돌일지도 모름.
ㄴ그럼 WB래빗 대표가 미스터리 해커임?
ㄴ그 아저씨 아직도 독수리 타법이라고 들었는데
ㄴ독수리 타법 쓰는 해컼ㅋㅋㅋㅋㅋㅋㅋ
-두 명 있는 팀도 없지 않나?
-어제 팬 미팅에 참석한 어스래빗 팬이 인터넷에 인증하면서 그랬음. 그때 파란색 조명 1도 없었는데 괴물 보자마자 서한율이랑 박가람 눈 파랗게 변하는 거 똑똑히 봤다고
-남돌은 군대나 가라. 너희들은 꼭 가라 어스래빗
ㄴ이 ㅅㄲ 뒷말 붙이는 거 처음 본다.
ㄴ진심이 담긴 덧붙임ㅋㅋㅋ
박가람이 얼굴을 덮은 손가락 틈새로 한율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 생기면 나라도 대응해야겠단 마음 딱 먹었는데, 눈에서 티가 나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죠. 다른 일도 아니고 팬들 보호하려다 들킨 건데.”
“…정말 괜찮아?”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형은 본인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고 시치미 떼세요.”
“잉? 그렇게 쉽게 넘어갈까?”
“나 때문이라고 하면 돼요. 형, 아직 배운 마법 없어서 각성자 행세하기도 힘들잖아요.”
“엉…. 그럼 넌 어떡할 셈이야? 괴물들 가볍게 처치하는 거 모두가 봐버렸잖아.”
“글쎄요.”
한율은 남 일처럼 가볍게 웃었다.
“어떻게 할까요?”
“어….”
다른 멤버들이 일어났는지, 문 너머로 돌아다니는 기척이 느껴졌다. ‘취사를 시작합니다’ 압력밥솥이 내는 소리도.
박가람이 여기저기 뻗친 까치집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밥부터 먹을까?”
“네.”
아침 식사는 어제 멤버들의 가족이 보내준 반찬으로 차려졌다. 외부 CCTV 모니터엔 숙소 앞에 잔뜩 모인 취재진의 모습이 잡혔지만, 초인종을 아예 꺼놔서 조용했다.
한율은 길우성에게 했던 것처럼 멤버들에게도 담담히 고백했다.
차남석이 미간을 깊게 찡그렸다.
“넌 무슨 그런 충격적인 고백을 밥 먹으면서 하냐?”
“어릴 때부터 신기한 힘을 느꼈다니.”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던 강보배가 조심스레 말했다.
“다른 1130 증상자보다 약한 증상을 보였던 것도, 남들보다 일찍 각성해서 그랬던 걸까?”
“그럴지도요. 하지만 능력이 갑자기 강해진 건 다른 각성자들이랑 비슷해요. 돔구장에 회색 게이트가 열린 날이요. 하지만 강한 힘을 가진 게 알려지면 움직이거나 활동하는 데에 지장이 생기고, 주변에도 피해가 갈까 봐 일부러 숨겼어요.”
라이언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멋지다, 하뉼. 진짜 히어로잖아.”
“한율아.”
이건우도 수저를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고맙다. 지금이라도 다 말해줘서.”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더 고맙죠. 지금까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넘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다들 날 믿고 기다려줬잖아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인터뷰하려고요.”
“인터뷰? 어디에서?”
슥. 한율은 TV를 가리켰다.
“뉴스요.”
오후 4시 55분.
한율은 단정하게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고, 정장까지 갖춰 입고선 KBC 방송국 뉴스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대본이나 리허설 없이 인터뷰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던 터라, 모든 스태프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칫하면 방송 사고가 터질 수 있는 까닭이었다.
몇몇 스태프들은 불안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어제 사건이 조금 놀랄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방송으로 인터뷰할 만큼 큰일이야?”
“그러게. 전직 국장이었던 아빠 빽을 이렇게 써먹는 건가?”
“사장님 지시라던데요?”
“제임스나 미스터리 해커 빽이 아니고?”
“대체 얼마나 대단한 내용을 말하려고 리허설도 안 된다고 한 건지, 두고 보면 알겠죠.”
오후 5시 정각. 생방송 뉴스가 시작되었다.
한율이 데스크 앞에 앉은 건 20여 분이 지났을 때.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엔 특별한 손님이 자리해주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서한율 씨. 시청자분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십니까.”
한율은 우선 앵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보이그룹 어스래빗의 멤버이자 배우. 그리고.”
은은한 푸른색을 띤 고운 빛이 한율을 감싸듯 휘몰아쳤다. 앵커와 카메라 감독, 수많은 스태프가 입을 쩍 벌리며 굳었다.
……!
푸른빛이 사라졌다.
한율이 있던 자리엔 밝은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을 지닌 젊은 백인 남성이 나타났다.
제임스의 모습이 된 한율은 카메라를 향해 살며시 미소 지었다.
“각성자 제임스로 활동했던 아이돌 서한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