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2화 (364/427)

선을 지키는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이건 대박이다!’

아무리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은 아이돌이라고 해도 대본이나 리허설도 없이 인터뷰하다니. 걱정되어 뉴스 스튜디오까지 내려온 보도본부장은 그 자리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인터뷰를 진행해야 할 앵커까지 굳어버려 영락없는 방송 사고로 이어졌으나 상관없었다. 벌써 전국, 아니 전 세계 사람들이 이 뉴스를 주목하는 게 눈에 선했다.

보도본부장은 프롬프터 옆으로 가서 앵커에게 크게 손을 흔들었다. 이만 정신 차리고 진행하라고.

“아….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너무 놀라서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시청자분들께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러니까, 각성자 제임스 씨가… 한율 씨였단 말씀이시죠?”

“네. 제임스는 서한율의 인생을 단번에 바꿔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제가 만든 가면입니다. 하지만 얼마 전.”

다시 푸른색을 띤 고운 빛이 한율을 감쌌다가 사라졌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한율은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조용한 분노를 담아.

“제임스의 지인이라 속여 돈을 갈취한 사기꾼이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더는 숨겨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나와 밝히게 되었습니다. 제임스는 6월 14일에 처음 만든 가상의 인물입니다.”

한 호흡 쉰 뒤,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당연히 과거도, 가족도, 지인도 없습니다.”

KBC 뉴스 프로그램 톡창과 게시판은 마비되었다.

인터넷 커뮤니티.

-ㅅㅂ지렸다..

-서한율이 제임스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와웃음밖에안나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전세계사람들아놀랐쥬?약오르쥬?제임스한국인이었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희나라엔서한율없쥬?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에 서한율로 둔갑한 놈 있었잖아. 그놈이랑 같은 능력 아님?

ㄴ하.. 지능 수준..

ㄴ게이트 결계 만들어보라고 하면 금세 들통날 짓을 한다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서한율이?

-진짜 미쳤다.

-그럼 서한율이 게이트 초반에 괴물들 못 나오게 결계 만든 장본인이란 소리잖아. 와...

ㄴ육눈박이 괴물도 기절시켰음

ㄴ이탈리아에서도 괴물들이 원전으로 못 가게 막음

ㄴ지금까지 수십만 명이 머야 수백만 명은 구했을걸

ㄴ5만 명 모인 부산 K-POP 콘서트 덮치려던 괴물도 낚아채서 처리함

ㄴ그래서 콘서트에 나중에 합류했구나 진심 소름ㄷㄷㄷ

-어쩐지 서한율 차 타고 다니고 서한율이랑 동선 자꾸 겹친다 했더니 그런 이유였어

-이 시간부로 서한율을 공격하는 자는 나를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제임스랑 무슨 사이냐 밝히라고 떠들었을 때 왜 아무 말도 안 했는지 알았다ㅋㅋㅋㅋ

-지금까지 지구 곳곳에서 제임스 가족이다, 아는 사이라고 썰 풀던 놈들 다 사기꾼이었던 거네?

ㄴㅇㅇ

ㄴ그래서 밝혀야겠다 결심했다잖아. 하도 구라치는 놈들이 많아서

-서한율보유국 국뽕지린다

-같은 남잔데 반할 뻔ㅋ

-(링크)미국 제임스 팬클럽 반응ㅋㅋㅋㅋㅋㅋㅋㅋ

ㄴㅋㅋㅋㅋㅋㅋㅋㅋ

ㄴ단체로 다 굳었엌ㅋㅋㅋㅋㅋ

ㄴ야이씨 저기서 약 올리면서 국격 떨어뜨리는 놈 누구냐ㅋㅋㅋㅋㅋ

-앵커가 증명해줄 수 있냐니까 바로 결계 미니 버전 만들어주네ㅎㅎ 사랑합니다 형님

“이게 게이트를 막았던 결계군요. 한번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네.”

앵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율이 만든 푸른빛 구체에 조심스레 손을 댔다.

“시청자 여러분, 아주… 단단합니다. 그렇다면 가족들도 한율 씨가 제임스란 사실을 알고 있나요?”

“네. 부모님께는 어제 사실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어스래빗 멤버들에게는 오늘 아침에 알려주었고요.”

“그럼 그 전에 알고 있던 사람은.”

“현재 게이트 방어 지휘부 각성자 부대에 있는 이해원 이병. 그분뿐입니다. 처음 제임스를 만들었을 때부터 함께 있었거든요.”

“아아….”

약속한 인터뷰 시간은 5분 남짓. 앵커는 빠르게 남은 시간을 확인한 후 막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 제임스가 미스터리 해커 집단 소속이다, 관련이 있을 거란 추측도 많았는데요. 그 점에 관해서도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곤 담담히 대답했다.

“네. 미스터리 해커에겐 지금껏 도와달란 연락을 몇 번 받았을 뿐, 그 사람과 같은 단체에 속해 있거나 하진 않습니다.”

생방송 뉴스가 끝난 뒤. KBC에는 각종 언론사와 너튜버 등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그러나 한율은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유유히 차를 타고 떠난 지 오래였다.

소속사인 WB래빗은 오늘 아침 미리 한율에게 들은 대로 ‘WB래빗 엔터테인먼트 단체 휴가 기간 안내 08/08~08/15’ 공지를 띄워놓고선 전화선을 죄다 뽑아놓았다.

어스래빗 숙소와 파란달 펜션, 서한율의 본가엔 보란 듯이 푸른빛을 띤 결계가 건물을 감쌌다.

KBC를 제외한 방송국은 속보 자막을 띄웠다. 외신들도 속보로 떠들었다.

[지구에서 가장 강한 각성자 제임스의 정체가, 대한민국 K-POP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의 멤버이자 배우인 서한율로 밝혀졌습니다.]

미국 게이트 조사위원회의 수잔 리드는 아예 말을 잃은 채 한참 동안 멍청히 섰고, 이탈리아 패션쇼에서 처음 한율과 만났던 안토니오 소령은 커피를 쏟았다가 스스로 놀라 책상에 정강이를 부딪쳤다.

대형 포털사이트 메인도 온통 한율의 기사로 도배되었다.

[[속보] KBC 생방송 뉴스에 나타난 제임스! 그 정체는]

[각성자 제임스, 서한율이었다!]

[제임스 지인 사칭 사기 사건에 분노한 서한율의 고백 “내가 제임스”]

[서한율 “인생이 바뀔 것 같단 두려움에 제임스 만들어”]

[드디어 드러난 제임스의 정체에 국내 네티즌 환호]

[제임스 서한율, “미스터리 해커 집단 소속 아니야”]

“…….”

인기 걸그룹 퍼플아워 진은수의 본가.

플랭크 자세로 뉴스를 보던 진은수는, 서한율의 인터뷰를 보고 너무 놀라 바닥에 널브러진 채 멍하니 있었다.

‘선배님이… 제임스였다고?’

며칠 전, 게방부 각성자 관리과 사무실에서 제임스와 마주쳤을 때가 떠올랐다. 계나리가 장난스럽게 물었던 질문도.

『제임스, 직접 보니까 어땠어?』

나 그때 뭐라고 대답했지? 아니, 제임스로 변한 선배님을 어떻게 대했더라? 평소에 내가 선배님 앞에서 했던 행동 전부 내숭이었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제임스가 했던 일 모두 선배님이 했다는 거니까, 게이트가 열렸을 때 그걸 막은 것도 선배님이면….

“은수야, 괜찮아?”

옆에서 시시각각 얼굴빛이 변하는 동생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언니, 호수가 물었다. 빙글, 툭. 진은수는 소파 위 쿠션을 집어와 그 위로 얼굴을 묻었다.

정말 너무 멋있고 너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좋아지면서도, 한편으론 더 슬퍼졌다.

“응… 괜찮아. 안 괜찮을 이유가 없잖아. 조금 많이 놀란 것뿐이야….”

“…….”

속마음과 반대로 말하는 걸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호수는 가만히 진은수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잠시 후, 포털사이트 메인엔 새로운 기사가 하나 더 떴다.

[[속보] 제임스 서한율, SNS 통해 경고?]

[오늘 오후, 자신이 각성자 제임스라고 깜짝 고백한 서한율이 개인 SNS에 경고로 추정되는 사진과 글 한 줄을 올렸다.

(사진 출처=서한율 개인 SNS)]

서한율이 SNS에 올린 사진은 지하철이나 신호등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란색 안전선이었다.

[선을 지키는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

-선 안 지키면 다 ㅈ될 거란 살벌한 경고

ㄴ그러하다ㄷㄷㄷ

-이게 속보로 뜰 일?은 맞구나ㅋㅋㅋ 암요ㅋㅋㅋ 우리나라 구한 영웅 중의 영웅인데 당연하죠 넵넵ㅎㅎ

-서한율 장갑차 우그러뜨리는 괴물도 가볍게 해치우잖음. 그 말인즉슨, 삐딱선 한 번 잘못 타거나 빡돌면 오히려 지구 멸망시킬 수도 있단 소리 아님?

ㄴㄷㄷㄷㄷ

ㄴ히익

ㄴ일단 서한율한테 악플달던 찌질이들부터 벌벌 떨고 있을 듯

-존나 무서워ㅠㅠ

-제임스가 제임스일 땐 조용했는데 서한율이라고 정체 드러나니까 다들 벌벌 떠는 거 개웃기네ㅋㅋㅋ 뭐 죄지었음?

ㄴ어제 어스래빗 팬 미팅 테러 사건 모름? 돈에 눈먼 ㅂㅅ BJ 때문에 눈앞에서 팬들이 괴물한테 죽을 뻔했는데 서한율이 지금 제정신이겠냐고

ㄴ아까 뉴스에서도 서한율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내내 안 웃고 살벌 그 자체였음ㅇㅇ

-ㅅ1ㅂ 진짜 다들 선 잘 지켜라. 서한율 수틀리면 대한민국 바로 멸망 노선 탄다ㅋ

한편 그 시각, 큰 고백 폭탄을 날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한율은 숙소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다.

숙소 밖에는 한율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건물은 요새처럼 정원을 둘러싼 형태. 결계가 옥상까지 감싸고 있고, 2층부터 외부로 난 창 또한 모두 커튼으로 가려서 누구도 침입은커녕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달그락. 한율은 먹기 좋게 익은 고기를 접시에 담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미안해요, 멤버들. 이렇게까지 파장이 클 줄 몰랐어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놀라네요.”

한율 때문에 덩달아 숙소에 갇히게 된 멤버들은 하하 웃었다.

“호 형이 다급히 생필품이랑 식량부터 잔뜩 쌓아둬야 한다고 발로 뛸 때부터 각오했다.”

“먹을 거 많아서 괜찮아.”

“펜션 쪽은 괜찮대요?”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펜션은 조유찬의 아내와 길미현, 고은훤, 차남석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이 네가 여기에 있는 거 알아서 그런지, 그렇게 많이 몰려오진 않았대. 가끔 카메라 단 드론이 날았지만, 까마귀들이 단체로 공격하니까 물러갔다더라. 결계도 있고. 그런데 그건 네가 없는데 어떻게 생겨난 거야?”

방송국으로 가기 전, 한율은 차남석에게 따로 사과했다. 지난번 제임스도 명상센터 멤버였다며 구체적으로 거짓말한 것에 관해서. 차남석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주겠다고 약속했었으니 됐다며 쿨하게 받아주었다.

“나리 씨가 작동시켰어요.”

“작동? 어떻게?”

“나중에 형들도 작동시킬 수 있게끔 스위치 만들어 둘게요.”

이건우와 강보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스위치?! 아니, 결계가 무슨 가전제품도 아니고….”

“진짜 쩐다, 한율아.”

“에너지를 배터리처럼 충전시키는 거야?”

라이언의 질문에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충격 강도에 따라 결계의 힘이 깎여요. 시간이 지나도 자연스럽게 약해지고요.”

“으응, 꼭 필요할 때만 작동시켜야 하는 거구나. 전기처럼. 그럼 이 숙소 결계에도 스위치 만들 수 있어?”

“TV 뒤쪽에 만들어뒀어요. 지금은 밖에 사람들 많이 몰려왔으니까, 나중에 한산해지면 그때 작동시켜봐요.”

“응.”

“나도 눌러볼래.”

“나도.”

“지금 미리 순서 정하자.”

“애들이에요? 결계가 무슨 장난감도 아니고.”

“야, 차남석. 너도 방금 눈 반짝거리는 거 내가 다 봤거든?”

팀에서 가장 시끄러운 박가람과 길우성이 미리 알고 있어서 그럴까. 세상이 한율로 인해 난리 났으나, 숙소 분위기는 호들갑과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하뉼. 하뉼이 제임스라고 밝혔잖아. 그럼 이제 게방부로 끌려가는 거야?”

오히려 한율을 걱정했다.

“사람들, 지금도 각성자들한테 게방부 안 가고 뭐 하냐 무작정 등 떠밀잖아. 하뉼한테도 그럴 것 같아서 걱정이야.”

“그래. 전에 제임스 고소하겠다던 사람들도 있었잖아.”

“서한율 이제 고소당함?”

“힘을 무한정으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잘 설명해야죠, 뭐.”

“내가 볼 땐, 돈 많고 권력 있다고 재는 인간들이 접근해서 너도나도 결계 만들어달라고 할 것 같아.”

“인질 잡고 협박이나 안 하면 다행일 것 같은데요?”

차남석이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예시를 들었다.

“만약에 소말리아 해적이 우리나라 선박 납치한 후에, 서한율이 게이트 괴물들을 처리해주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리겠다. 이렇게 협박하면?”

박가람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정답. 해적을 몰살시키고 인질을 구출한다.”

“형.”

“아니, 서한율이면 가능할걸? 응, 가능할 것 같아서.”

“…….”

치익. 한율은 새로운 고기를 그릴에다 올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보며 실실 웃는 길우성에게 말했다.

“길우성, 폰 그만 보고 밥이나 퍼.”

“알았당. 히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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