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스타도 힘들구나
8월 9일 새벽, 어스래빗 숙소 앞.
KBC 마이크를 든 기자가 카메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는 바로 어제, 자신이 제임스라고 고백한 서한율 씨의 어스래빗 숙소 앞에 와 있습니다. 현재 건물은 푸른색을 띤 결계가 견고하게 보호하고 있으며, 서한율 씨는 어제 KBC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귀가 후 아직 숙소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기자가 거리를 빼곡하게 채운 인파를 넓게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이곳엔 서한율 씨를 취재하러 온 사람들과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들, 팬들로 북적이고 있습니다. 경찰은….”
숙소 안. 일찍 잠에서 깬 길우성은 졸린 눈을 끔뻑거리면서 TV를 보고 있었다. 불과 몇 미터를 사이에 두고 숙소 앞 상황을 중계하는 걸 보고 있노라니 조금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론 신기하기도 했다.
‘역시 나는 대책 없는 관종은 아니야. 이 상황이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면.’
인근에 살던 주민들이 게이트 사태 이후 집을 비워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두면 나중엔 정말 동네 민폐 덩어리가 될 터.
길우성은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생각을 그만두었다.
‘써한이 알아서 하겠지, 뭐.’
우웅. 어스래빗 단톡방에 서한율이 톡을 올렸다.
-[부모님 댁에 다녀옵니다.]
저 포위를 뚫고 나가겠다고?
길우성은 부스스 일어났다. 1층으로 내려가 보니 서한율은 이미 말끔하게 외출 채비를 마치고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야, 써한.”
“……?”
서한율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올 때 달냥이.”
“…….”
“바쁘면 내가 데리러 갈까?”
“누나 걱정은 안 되냐?”
양평으로 갈 생각은 없냐고 에둘러 묻는 걸 알았으나, 길우성은 생글생글 웃었다.
“네가 서울을 지켜줄 거라 믿는다, 친구!”
“…….”
“야. 우리 활동 재개나 컴백 준비 걱정은 안 하냐? 슬슬 회사에도 출근해야지. 그러려면 여기에서 지내는 게 더 좋고. 음, 이참에 곰순이 집도 이 근처로 알아봐야겠어. 아니, 취직이 먼전가? 그런데 요즘 같은 시국에 사람 뽑는 회사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서한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음대로 해. 운전할 때 애먼 사람 잡지 않게 조심하고.”
“알았다아. 그런데 언제 오냐?”
“몰라. 게방부에도 들러야 하거든.”
“알았다아.”
잘 다녀오란 뜻으로 손을 흔든 길우성은, 뒤늦게 떠오른 호기심에 후다닥 서한율을 쫓아 차고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갔다. 서한율이 거리를 가득 채운 인파를 어떻게 헤치고 나갈지 궁금해서.
밖에 모인 사람들에게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힐까, 티셔츠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모퉁이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서한율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서서히 올라가는 차고 문. 사람들이 차고 앞으로 우르르 몰려왔지만, 결계에 막혀 안으로 들어오진 못했다. 대신 카메라나 피켓을 들었다.
서한율! 서한율 씨! 잠깐 인사 좀 해주세요! 서한율, 사랑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거리.
“위험합니다, 비켜주세요! 당분간 따로 인터뷰 요청은 받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비켜주세요!”
대체 언제 불렀는지, 어스래빗과 오래 일한 경호원들이 사람들을 통제했다. 그래도 차에 치일 각오까지 하며 몸을 던지는 사생 스토커들보단 순해, 서한율의 차는 곧 완전히 차고를 빠져나갔다. 차고 문도 스르륵 닫혔다.
길우성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계적인 스타도 힘들구나. 쯧쯧.’
* * *
[[순간포착] 세계적인 영웅이 된 친구의 외출을 걱정하는 길우성]
[(사진=앗싸일보)
오늘 이른 새벽, 차를 타고 숙소를 나서는 서한율을 걱정스레 지켜보는 길우성의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심령사진인 줄ㅋㅋㅋ
-귀여워(진지)
-스물두 살 남자가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건가
-후드 줄 꼭 조여서 눈코입만 드러내고 잠옷 바지도 토끼 무닄ㅋㅋㅋㅋㅋ 귀엽네
ㄴ백퍼 팬이 준 선물일 겁니다ㅎㅎ
ㄴ팬이 준 선물 맞아요ㅋㅋ
-결계 안으로 아무도 못 들어간다던데, 안에 있던 차는 잘 나오네요?
ㄴ서한율이라 자유롭게 통행 가능한 거 아닐까요?
ㄴ그럼 숙소에 있는 멤버들 다 갇힌 거예요?
ㄴ어?
ㄴ나가려면 서한율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듯ㅋㅋㅋ
-얘가 걔였나? 어릴 때 학폭 피해자였던 아이돌?
ㄴㅇㅇ
-서한율 어스래빗 그만두지 마 서한율 아이돌 그만두지 마
한율은 경기도의 별장에 들렀다가 본가로 향했다. 본가에는 사촌인 서한림이 새 핸드폰을 가지고 먼저 와 있었다.
인터넷 기사를 보던 서한림이 웃었다.
“우성이 되게 귀엽다. 너 무사히 나가는지 걱정돼서 따라 나온 거야?”
한율은 새 핸드폰을 살피며 대답했다.
“걱정은요, 심심해서 구경하러 나온 거죠. 그런데 누나는 딱히 안 놀란 눈치네요?”
“안 놀라기는. 어제 뉴스 보다가 놀라서 먹던 수박 떨어뜨렸거든? 그래도 네가 어릴 적부터 워낙….”
서한림이 말을 흐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그래서, 음.”
“네. 이거 얼마 주고 샀어요? 계좌 번호도 안 보냈던데.”
“큰아버지가 대신 주셨어. 용돈이랑 같이.”
“누나, 회사에서 잘렸어요?”
순간 울컥한 서한림이 한율의 다리를 걷어찼다. 퍽.
“야.”
“죄송.”
“…아.”
그러자 서한림이 잠시 멍해지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우리나라를 구한 제임스를 걷어차다니.”
“아니에요. 평소처럼 편하게 대해요. 그게 나도 편하거든요.”
“그럼 제임스랑 셀카 한 장만.”
“…….”
찰칵.
“그나저나 어스래빗 팬들 분위기 보니까 환호 반, 걱정 반이더라. 널 막 자랑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론 너 이대로 어스래빗 활동 그만두는 거 아니냐고. 대부분 사람이야 나라의 안위가 우선 아니냐고 뭐라고 하겠지만, 나도 한때 아이돌 덕질해 본 입장으로서 그렇게 걱정하는 것도 이해되더라.”
“누구 팬이었는데요?”
와옹. 서한림이 고양이 퓨마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루트랑 스타믹스.”
“진작 말하죠. 루트는 몰라도 스타믹스엔.”
“알아. 지헌이랑 같이 드라마 찍었었잖아. JE랑은 해외여행 같이 갈 정도로 친하고.”
“지헌 선배님, 누나보다 세 살 윈데요. JE 선배님도 한 살 위고.”
서한림이 부질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너한텐 가까운 사람이지만, 나한테는 TV 속 연예인이거든? 아이돌 덕질도 학생 때나 열심히 할 수 있었지, 점점 현실에 치이면서 그럴 에너지랑 덕심도 사그라지더라. 그래도 좋아할 때만큼은 진심이니까, 팬들한테 잘해줘. 걱정하지 않게.”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율은 본가로 올 때 따라오는 차들이 목적지를 알 수 없도록 따돌리고, 집에 들어올 때도 앞에 진을 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담을 넘었다. 그래서 갈 때도 비슷한 방법을 사용해, 이번엔 게이트 방어선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게이트 방어선으로 들어가기 전. 통제 구역을 지키는 경찰에게 얼굴을 보여주고 게이트 방어선 출입증을 내밀었더니 그들은 환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확인되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더는 환영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돼서 편하기는 하네.’
단순히 연예인이었을 때보다 더 많은 시선이 따라붙게 되었지만, 최근 마력을 너무 낭비한 게 더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과감하게 실험을 진행해야겠어. 게이트의 강한 기운만 아니면 보완점을 찾는 게 더 수월해질 텐데….’
그러나 이미 머릿속엔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 게이트가 열린 처음부터 떠올렸으나,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길우성의 게이트 코팅 능력.’
길우성의 코팅 능력이 만약 게이트가 내뿜는 기운을 막아줄 수 있다면, 괴물의 생명력으로 만들어진 결계를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물론 서울의 게이트는 본래 세상과 연결된 게이트가 아니다. 시도한다고 꼭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거부감이 들었다.
‘길우성의 각성 능력은 죽을 때까지 꽁꽁 감춰야 해.’
게이트 방어 지휘부.
본부로 사용되는 구청 앞엔 정상욱 중위가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제임스… 아니, 서한율 님.”
“님이라뇨. 평소처럼 편하게 불러주세요, 중위님.”
정상욱은 씨익 웃고는, 친근하게 한율의 어깨를 감싸듯 두드렸다.
“스스로 밝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한율 씨. 덕분에 병사들이 더는 당신의 정체를 밝혀달라는 문의, 당신의 가족을 사칭하고 헛소리 늘어놓는 사기꾼들의 전화를 깨끗하게 무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동안 불편함을 끼친 대가는 수고비 안 받은 걸로 대신해도 되겠죠?”
“아이고, 그랬다가는 우리가 날강도 양아치라고 더 욕먹습니다. 이제 당신의 진짜 이름을 알았으니, 적절한 포상 논의가 이뤄질 겁니다.”
“우리나라 경제 사정이 굉장히 안 좋아진 걸 잘 아는데 포상은요. 그것보다, 지금 게이트랑 방어선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정상욱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부로부터 한율의 요구사항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란 언질을 들은 모양이었다.
“네. 이미 헬기 대기시켜뒀습니다.”
서한율이 게이트 방어선으로 간 것, 그리고 헬기를 타고 게이트와 주변을 살펴보고 있다는 사실은 몇 분 지나지 않아 뉴스로 보도됐다.
한국 정부에 제임스와 연락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던 미국은, 제임스의 정체가 밝혀지자마자 한국에 있는 미국 게이트 조사위원회 인원에게 특명을 내렸다.
서한율을 설득해 미국으로 데려오라고.
조쉬가 말했다.
“최대한 심기 거스르지 않게 잘해봅시다.”
“그가 절 스토커로 모는 바람에 공항 경찰에게 조사받았었던 일. 잊은 건 아니겠죠, 조쉬?”
“곧 서한율과 개인적으로 잘 아는 FBI 요원과 각성자가 도착할 겁니다. 그때까지 손 놓고 놀고 있을 순 없잖아요.”
“알았어요.”
김민지는 항복 제스처를 취하곤 가방을 챙겼다.
“당장 어스래빗 숙소 앞으로 가서 진 치고 있을게요. 제 차례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면서요. 됐죠?”
“전 공식 초청 방법을 물색하다가, 나중에 두 사람이 좋아하는 버거랑 커피 사 들고 합류할게요.”
“네에, 네에. 가요, 찰리.”
그렇게 김민지와 찰리는 일단 어스래빗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숙소 앞 거리를 빼곡하게 채운 인파를 보곤 막막함을 느꼈다. 도저히 저 인파를 헤치며 대문 앞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핸드폰 카메라의 확대 기능을 사용한 김민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결계가 초인종까지 감싸고 있네요.”
“계속 이 지경이면 함께 지내는 같은 팀 멤버들도 상당히 불편하겠군요. 가벼운 외출도 쉽게 못 하잖아요.”
“조만간 서한율 혼자 나와서 살지 않을까요?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요. 그리고 경호원만 수십 명을 거느리겠죠. 그가 가장 강하지만,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해줄 사람들이 필요할 테니…. 응?”
김민지는 핸드폰을 위로 들었다. 사람들도 웅성웅성 어스래빗 숙소 옥상을 올려다보았다. 옥상 난간 밖으로 어스래빗 멤버 박가람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사람들에게 꾸벅 인사한 그가 커다란 스케치북을 펼쳤다.
[서한율 게이트 방어선에서 자고 온대요!!]
펄럭.
그가 스케치북을 한 장 더 넘겼다.
[빨라도 모레 나온대요!!]
펄럭.
[거짓말 아님! 절대 아님!]
펄럭.
[모두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
김민지는 다시 헛웃음을 흘렸다.
“친절도 하셔라….”
몇 시간 후.
뉴스에서도 서한율이 당분간 게이트를 살펴보기로 했다며 떠들자, 어스래빗 숙소 앞을 지키던 사람들이 슬슬 빠졌다.
“지금이다!”
길우성은 유호와 함께 차를 몰고 숙소를 나왔다.
‘어스래빗 숙소 앞 실황’ 제목으로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던 BJ는 그 모습을 잽싸게 담았다.
“응? 어스래빗 멤버들도 결계 그냥 통과하네요? 저분들, 갇힌 게 아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