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5화 (367/427)

너보다 더 세

5조. 정상욱이 입을 쩍 벌린 채 굳었다.

미국이 한율을 데려가려 회유할 걸 충분히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큰 금액을 제시할 거라곤 상상도 못 한 얼굴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한율을 살폈다.

“…….”

반면에 한율은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미국이 어떤 조건을 제시하든, 그를 얽어맬 게 뻔하므로 애초부터 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김에 잠깐 도와주는 거면 모를까.

[명쾌한 한 줄 요약 감사합니다. 집에 가서 천천히 읽어보고 고민해본 뒤에 연락드릴게요.]

수잔이 미소 지었다.

[네, 긍정적인 답변 기대할게요.]

옆에 앉은 애니도 어마어마한 금액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으나, 뒤늦게 따라 웃었다.

[그럼 이제 주제를 바꿔도 될까요? 지구 최강의 각성자에게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질문지까지 만들어 왔거든요.]

애니의 열정적인 질문 세례에 대답해주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수잔도 가끔 능력 발현 방식에 관해 진지하게 물었다. 들어보니 애니는 물체 투시 능력을, 수잔은 가벼운 염력을 각성했다.

한율은 아는 선에서 적당히 맞장구치며 대답해주었다.

만난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한율은 그들과 카페를 나오며 인사를 나눴다.

[바쁘고 피곤한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은 것 같네요. 당분간 한국에 머물 예정이니, 언제든 편하게 연락해요.]

수잔이 한율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는 척, 살며시 매만졌다.

[술 한잔하자는 연락이면 더 좋고.]

이젠 노골적인 유혹이 아니라, 유혹인 척 장난치는 것에 가까웠다. 한율도 농담하듯 대답했다.

[그럴 여유가 생기길 바라야겠네요.]

그때였다.

“제임스!”

카페 주차장에서 한 여성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한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모나?”

이탈리아에서 ‘제임스’에게 통역사로 붙여주었던, 이탈리아 게이트 대책위원회 소속이자 외교부 직원 시모나였다.

“연락도 없이 여기까진 어쩐 일이에요?”

한율이 알은체하며 다가가자, 그녀의 접근을 막으려던 경호원들이 조용히 물러났다. 시모나는 탐스럽게 물결치듯 늘어뜨린 새카만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미소 지었다. 늘씬하고 긴 다리가 부각 되는 세련된 정장 차림이었다.

“금방 돌아온다고 해놓고선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직접 잡으러 왔죠?”

한율처럼 한국어로 대답한 시모나는, 반가움의 표시로 한율과 가볍게 포옹했다가 쪽, 뺨 가까이에서 입술로 소리 냈다. 닿진 않았다.

“사람을 놀라게 한 벌이에요, 제임스.”

“두 번 놀라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네요.”

[…어머.]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던 수잔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수잔의 시선이 한율의 팔을 친근하게 잡은 시모나의 손을 향했다가 올라갔다.

[이 아름다운 여성분은 누구예요, 한율?]

그러고선 환한 금발을 넘기며 새하얗고 우아한 목선을 드러낸다. 자신에게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과시하듯이.

[저한테도 소개해줄 수 있어요?]

[…누구예요, 제임스?]

서로 시선이 마주친 두 미녀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찌릿찌릿 벌어지는 것만 같다. 정상욱과 애니는 약속이나 한 듯, 살며시 물러나서 흥미진진한 얼굴로 관전 태세를 취했다.

한율은 잠시 하늘을 살폈다.

‘오후에 비 오겠네.’

한편 그 시각, 게이트 방어선.

이해원은 게이트 방어 지휘부의 김관식 소장에게 불려갔다. 김관식은 조금 전, 정상욱이 메시지로 보낸 짤막하고 충격적인 내용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1년에 5조요?”

“음. 자네 생각은 어떤가? 서한율이, 계약서에 사인하고 미국으로 넘어갈 것 같나?”

“글쎄요….”

이해원은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제임스라고 유일하게 정체를 밝혔던 사이니,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고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겠지만… 솔직히 이해원은 서한율의 생각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매사에 신중한 것 같으면서도, 어쩔 땐 ‘대체 어쩌려고 저러나.’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 행동하는 게 서한율이므로.

그리고 계나리가 들려준 이야기만 생각해도 그랬다. 계나리가 겪은 ‘이전’ 시간대에서 서한율은 게이트에 대한 대비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요르카로 잠적했다. 각성자 행세까지 하며 각종 활약을 펼치는 지금과는 아주 정반대였다.

“서한율의 부동산 재산만 수백억대라지. 하지만 조 단위는 차원이 다르지 않나. 서울시 한 해 예산이 약 40조인데 개인이 5조라니…. 물론 그 이상의 경제 가치를 지킬 수 있단 계산 하에 그 금액으로 결정하고 세금도 왕창 뜯어가겠지만….”

미국이 서한율에게 5조를 제시했단 소리를 들었을 때, 소장은 곧바로 ‘우리나라도 그만한 돈으로 서한율을 붙잡을 수 있나?’ 이 생각부터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곧 고개를 저었을 터다.

5조를 마련하는 것도 힘들고, 그 사실이 알려지면 국민 여론부터 험악해질 게 뻔했다. 다들 힘든데 아무리 강한 각성자라도 그만한 돈을 주는 게 맞는 거냐고. 서한율을 향한 비난도 거세질 것이다.

“일단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제가 아는 서한율은 돈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그마치 5조인데?”

“네.”

“그의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 모두 미국에서 보호해준다고 해도?”

“지금도 한율이가 잘 보호하고 있는걸요. 그리고 애초부터 돈을 원했다면, 이탈리아에서부터 금전 문제와 관련된 이야기가 돌지 않았겠습니까?”

“음…. 듣고 보니.”

이해원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본인의 답을 기다려야겠지만, 저는 서한율을 믿습니다. 대한민국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요.”

* * *

[세계 최강 아이돌 각성자 서한율, 후배에게 따뜻한 충고]

[서한율이 같은 소속사 후배 아이돌그룹 SPRabbit의 멤버 변지욱에게 엄하면서도 따뜻한 충고를 건네는 영상이 오늘 12일 WB래빗 엔터테인먼트 공식 너튜브 채널에 올라왔다.

깜짝 카메라인 줄 몰랐던 서한율은…(중략).]

-‘수작 부리지 말고 진짜 용건’ 할 때부터 빵 터졌닼ㅋㅋㅋ 평소에도 친한 사이란 게 느껴지네ㅎㅎ

ㄴ떠비 소속 아이돌이 서로 사이좋기로 유명해요ㅎㅎ

-소문처럼 서한율이 정말 싸가지 없는 성격이었으면 후배랑 저런 케미 자연스럽게 안 나오지ㅎㅎ

-팬들이 불편해질 테니까 라방은 안 된다는 배려심도 그렇고, 멤버들이랑 진지하게 논의하면 도와준다는 말도 너무 따뜻하네요♡

-서한율 이상형 아직도 등산 좋아하는 힘세고 강한 여성인가요?

ㄴ제가 직접 물어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ㄴ님이 먼데여?

-이 영상 촬영 날짜가 8월 4일임. 게이트에 다시 한번 결계 만든 후라 상당히 피곤할 텐데도 동생 떼쓰는 거에 귀찮은 내색 한 번도 안 함ㅠㅠ 이 남자 인성 어쩔

-어스래빗 숙소까지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우는 사람 완전히 개무시했다던데

ㄴ그런 도움은 경찰한테 청해야지 왜 서한율한테?

ㄴㅋㅋㅋㅋㅋㅋ 카더라 말고 직접 겪은 걸 말하세요. 누가 보면 한두 사람만 찾아갔는데 냉정하게 무시한 줄 알겠네^^

ㄴ처음 보는 낯선 사람 수백 명이 집 앞에 우글거리는 마당에, 운다고 무슨 말이든 다 들어주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ㄴ서한율 공무원도 아니고 군인도 아닙니다. 강한 힘을 각성했지만 원래 평범한 20대 초반 아이돌인데 뭘 바라세요..

ㄴ법적 대응이 취미인 소속사라 손가락 조심했었는데 이젠 서한율 팬들 무서워서 입까지 다물게 생김ㄷㄷ

ㄴ단순히 연예인 팬으로 보려고 하니까 그렇게 느껴지죠. 우리나라와 수많은 사람을 구해준 은인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ㄴ아줌마 무서웡

ㄴ50대 아저씨입니다ㅡㅡ

“하뉼 있잖아.”

톡, 토독. 라이언은 인터넷 기사에다가 ‘서한율 정말 속 깊고 따뜻한 친구예요.’ 댓글을 적으며 입을 열었다.

“멀리 안 갔으면 좋겠어.”

건조기에서 꺼내 온 수건을 정리하던 박가람이 돌아보았다.

“이탈리아?”

“아니. 다른 거리.”

“……?”

라이언이 한숨을 내쉬면서 힘없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어스래빗에 계속, 하뉼 있었으면 좋겠어.”

“난 또.”

박가람은 웃으며 수건을 개켰다.

“무슨 당연한 소릴 하고 그래. 안 그런 척해도 서한율, 은근히 정 많고 우리 얼마나 잘 챙기는지 라이언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어허, 달냥. 이거 네 방석 아니야. 썩 비켜라, 고양이.”

므앙.

“그렇겠지? 하뉼, 어스래빗 안 그만두겠지?”

“그럼. 나중에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 세상 모든 게이트랑 괴물을 서한율이 전부 처리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만에 하나 그만둔다고 하면, 그땐 같이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자고.”

박가람의 진심 어린 표정과 말에, 라이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서한율에게 톡을 보냈다.

[회사엔 몇 시에 가?]

-[지금 가는 중이요. 30분 후면 도착할 것 같아요.]

30분. 라이언은 시계를 보고선 후다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빠르게 외출 채비를 한 뒤 다시 나왔다.

“라이언, 어디 가?”

“회사. 하뉼이 결계 만드는 거 보고 싶어. 30분 후에 회사 도착한대.”

“회사까지 어떻게 가려고?”

“택시?”

“응.”

박가람은 빙긋 웃었다가 라이언의 앞을 막았다.

“위험하니까 안 돼.”

“왜? 차남석이랑 리더도 갔잖아.”

“응, 호 형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갔지. 하지만 택시는 안 돼. 내가 더 강했더라면 함께 가줬을 테지만, 미안하다.”

라이언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야. 가람보다 내가 더 센데.”

“싸우자, 라이… 아니. 어쨌든 안 돼.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 있는데 택시가 대문 앞에 제대로 설 수 있을 리 없잖아. 택시에 탈 때 만약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엉뚱하게 서한율만 욕먹을 거야.”

서한율이 욕을 먹는다는 소리에, 라이언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체념했다.

“응…. 얌전히 숙소에 있을게.”

박가람은 라이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곤, 서한율에게 따로 톡을 보냈다.

[올 때 라이언이 좋아하는 맛있는 거 아무거나ㅇㅇ]

-[네.]

늦은 오후.

한율은 라이언이 좋아하는 순두부찌개와 간식거리를 포장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TV에선 WB래빗 엔터테인먼트 건물에 결계가 생겼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마워, 하뉼!”

“순두부는 일부러 비조리 포장으로 샀어요. 냄비에 옮겨 담고 끓이기만 하면 돼요.”

“응! 얼마야?”

“됐어요. 나 때문에 불편해진 것 대신이에요.”

그러나 라이언은 정말 고맙다는 얼굴로 한율을 와락 끌어안았다가, 포장된 순두부찌개를 들고 웃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순두부두부두부, 순두부~.”

“그나저나 정말 대책 좀 세워야 하지 않겠냐?”

차남석이 외부 CCTV와 연결된 모니터를 살피며 말했다.

“경찰 부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근처에 살던 주민들도 슬슬 돌아오는 것 같던데.”

밖에 모인 인파 중 일부가 마치 공연장에 온 것처럼 어스래빗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잘못된 팬심 표출은 여러모로 민폐나 다름없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건지.

“주민들이랑 저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생각만 해도 싫다. 결국 우리한테 책임 물을 거 아니야.”

“네. 그래서 말인데… 저 혼자 따로 독립하는 게 어떨까 생각 중이에요. 이대로라면 형들 모두 지내기 불편하잖아요.”

오자마자 달냥과 장난감 낚싯대로 놀아주던 길우성이 휙 돌아보았다.

“안 돼! 그럼 또 달냥이랑 떨어져 지내야 하잖아!”

차남석이 한심한 눈으로 길우성을 바라보았다.

“넌 친구보다 고양이가 더 중요하냐?”

“중요 순위가 아니라 걱정 순위요, 형님! 써한은 무인도로 간다고 해도 아아무우 걱정이 안 되지만, 우리 달냥인 연약한 고양이란 말이요!”

박가람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막내야, 그 연약한 고양이가 너보다 더 세단다.”

므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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