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6화 (368/427)

아이돌 계속할 거예요

쏴아아. 결계 위로 빗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진다.

한율은 옥상 한가운데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무릎 위 달냥을 쓰다듬으며 비 내리는 도심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괴물로 추정되는 그림자를 쫓는 전투기가 보였다.

위이잉. 큰 소음이 하늘에 진동했으나, 이젠 익숙해져서 그런지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혼자 여기에서 뭐 해?”

유호가 다가오며 물었다.

“잠깐 생각 정리요.”

“애들이 많이 걱정해.”

유호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한율이 너 이대로 아이돌 그만두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부담될까 봐 쉽게 물어보지 못하겠다더라. 네가 계속 우리와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큰 욕심이라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조금 후회 중이에요. 적당히 활약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지금 이런 시간도 없지 않았을까?”

“그렇겠네요.”

잠시 대화가 끊겼다. 두 사람의 시선이 격추당해서 떨어지는 괴물의 그림자를 따라 움직였다.

한율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어스래빗 안 그만둬요. ‘개인 사정’으로 바빠서 잠깐 활동은 빠질 수 있지만, 탈퇴는 안 할 거예요.”

애초에 그가 지구로 온 목적은 지구를 구하는 게 아니라, 지구인들이 그의 세상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게이트 코팅 능력을 지닌 길우성을 쉽게 통제하고자 친구인 척, 곁에서 감시하는 거고.

“믿기진 않겠지만, 솔직히 저한텐 지구의 평화보다 어스래빗이 더 중요하거든요.”

“명색이 지구 토낀데?”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바꿨다.

“어스래빗이란 이름, 대체 누가 지은 걸까요? 그때 사내 공모전으로 이름 모집했었잖아요. 채택 시 상품이 4인 가족 동반 유럽 여행이었는데, 누가 갔는지 소문으로도 들은 적이 없어서요.”

“신인 개발 강 팀장님께 슬쩍 들었는데, 여자 연습생 중 한 명이었대. 정확히 누군지까지는 안 알려주시더라.”

“그래요?”

“응. 본인은 한가하게 유럽 여행 갈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가족들만 보내줬대.”

“그 당시 연습생이었으면 지금 드림래빗 멤버일까요?”

“글쎄.”

유호는 살며시 웃었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한율이 너랑 이렇게 소소하게 이야기 나누는 거 오래간만인 것 같다.”

“최근엔 만나면 늘 게이트나 수련 이야기만 했으니까요.”

따라 가볍게 웃은 한율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게이트에만 신경 써서 그런지, 오래간만에 이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지나간, 평범하면서도 별일이었던 것들에 관해서.”

“…….”

한율은 담담했으나, 그를 바라보는 유호의 시선엔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유호는 잠시 머뭇거리다, 한율의 어깨에 툭 손을 올렸다.

“네가 고생 많았지. 미안하다, 큰 힘이 못 되어줘서.”

한율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멤버들이 그대로 있어 주는 게 저한텐 큰 힘이거든요.”

전투기와 헬기 소음, 괴물의 울부짖음이 뒤섞인 빗소리. 눈앞엔 SF나 전쟁 영화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으나, 두 사람은 마치 스크린 밖 관객처럼 잡담을 나누었다.

잠시 후, 한율은 달냥을 안은 채 일어났다.

“오래간만에 라방이나 해야겠어요.”

“그린라이브? 너튜브?”

“너튜브요. 그린라이브에서 하면 왠지 서버가 마비될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잘난 척이 아니라 타당한 예측이었다. 현재 온 세상의 관심이 그에게 쏠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유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방으로 돌아온 한율은 우선 수잔 리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안, 거절할게요.]

-[네? 잠깐만요, 한율. 한 번 더 잘 생각해봐요. 오늘 드린 건 계약서가 아니라 계약 제안서예요. 당연히 세부적인 계약 조항과 금액 모두 협상할 여지가 있다고요.]

[10조를 주신다고 해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아요. 그렇게 전달해주세요, 수잔.]

-[하지만 한율!]

수잔의 목소리가 간절해졌다.

-[미국도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당신은 이 나라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잖아요. 미국의 붕괴는 곧 세계의 붕괴나 다름없다고요!]

[내일 다시 연락할게요. 잘 자요, 수잔.]

-[하아….]

한율은 수잔의 한숨을 듣곤 전화를 끊었다. 이번엔 정상욱 중위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결정을 알리곤 노트북을 켰다. 연결된 카메라를 대충 조정한 뒤 너튜브 어스래빗 채널 계정으로 접속했다.

‘많이 올랐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보다 수십 배 늘어난 너튜브 구독자 수를 확인. 1초 정도 고민 후 제목을 지었다.

[[실시간 방송] 혼자 수다 떨러 온 서한율]

라이브 방송 시작. 실시간 시청자 수가 무서운 속도로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서한율입니다.”

한율은 카메라를 향해 약간 나른하면서도 편한 얼굴로 인사했다.

“너튜브 라방은 정말 오래간만에 하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이프림? 오늘은 모처럼… 쉬는 날? 비슷해서, 이프림이 보고 싶기도 하고, 이프림이 무척 궁금해하는 게 많을 것 같아 수다도 떨 겸 들어왔어요.”

실시간 시청자 수는 순식간에 천만 단위를 돌파했다. 이중 진짜 어스래빗 서한율 팬은 소수, 제임스에 관한 호기심으로 몰려온 사람이 대부분일 터다. 그러나 한율은 이프림에게 들려주듯 말했다.

“우선 알려드릴 게 있는데요. 얼마 전에 우리 팬 미팅에서 안 좋은 일이 벌어졌잖아요.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미국에서 그 나쁜 짓을 사주한 범인을 찾았대요. 정말 그 사람이 범인인지는 더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약속드릴게요. 범인이 누구든, 우리 이프림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 꼭 죗값을 물게 할 거라고.”

채팅창은 마비되었다가 내용이 통째로 바뀌기를 반복했다. 대부분 외국어였으나 종종 한국어도 보였다.

“오늘은 뭐 하면서 시간 보냈냐고요? 음…. 뉴스를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회사에 결계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사실 큰 힘을 한번 사용하면 한동안은 맥을 못 춰요.”

한율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우리 회사라서, 열심히 결계를 만들었어요. 회사에서 강동구에 임시로 마련해준 연습실이 있는데, 몇 년 동안 지냈던 익숙한 공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연습이 잘 안 되는 느낌? 그런 게 있더라고요.”

마침 마비된 채팅창에 딱 이런 글이 올라와 멈췄다.

-계속 어스래빗에 있을 거지? ㅠㅠㅠㅠㅠ

한율은 안심하란 얼굴로 웃음기를 띤 채 대답했다.

“그럼요. 저 아이돌 활동 계속할 거예요. 우리 이프림 두고, 우리 어스래빗 형제들 두고 제가 어디를 가겠어요. 가끔 내 힘이 꼭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러 가기는 하겠지만, 원래 내 자리가 그 자리인걸요.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내 자리.”

므앙. 달냥이 누구와 얘기하냐는 듯 책상 위로 올라왔다. 한율은 카메라를 가린 달냥을 자연스럽게 쓰다듬으며 옆으로 치우곤, 고개를 갸웃한 채 웃었다.

“저 어디 안 가요, 이프림.”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숙소 앞 상황에 관해서도 에둘러 말했다.

“저 조만간 숙소에서 독립하려고요. 저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은 감사한데, 많이 걱정되더라고요. 주민분들께도 죄송스럽고, 번번이 출동하는 경찰분들께도 죄송스럽고. 솔직히 저야 바람 타고 날아서 다닐 순 있는데, 멤버들은 안 되잖아요. 필요할 땐 차도 이용해야 하는데 위험하기도 하고.”

한율은 평범한 20대 초반처럼 약간 투정 부리는 톤,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다들 괜찮다곤 해도 나 때문에 피해 보는 게 싫어서요. 이참에 깊은 산속에 혼자 집 짓고 살아야 할까 봐요.”

그 시각. 수잔 리드가 지내는 호텔 객실.

통역가와 함께 서한율의 라이브 방송을 본 수잔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완전히 차였네요.”

그래도 분한 마음이 덜 드는 건, 서한율이 ‘가끔 내 힘이 꼭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러 갈 수 있다’란 여지 때문이었다.

‘그렇게 안 보였는데 가까운 사람, 자신의 영역에만 인정이 넘치는 타입인가?’

한율이 라이브 방송에서 한 발언은 금세 포털사이트 메인에 기사로 도배되었다.

[지구 최강 각성자가 팬들에게 털어놓은 속마음]

[서한율, “제임스로 활동할 때 외로웠다”]

[서한율, “나 때문에 다들 피해, 혼자 살아야 할 듯”]

[서한율, “저 어디 안 가요”]

[서한율, “아이돌은 노력으로 이룬 자리, 그만둘 생각 없어”]

인터넷에선 한율이 아이돌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아무리 본인이 좋아하는 일이라도 그게 세상보다 중요한 것이냐, 이기적이다, 큰 힘을 가지면 그에 따른 의무가 따른다, 지구든 게이트든 하늘이 준 힘이니까 사람들을 위해서 써야 마땅한 도리 아니냐, 무슨 소리냐 그딴 의무를 누가 정했냐, 서한율은 할 만큼 잘하고 있다, 정작 이래라저래라할 권리도 없는 사람들이 없는 의무를 있는 것처럼 강요한다 등등.

그러나 이 갑론을박은 다음 날 아침에 뜬 기사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단독] 서한율, 美 ‘1년에 5조’ 영입 제안 거절]

-5조? 5조요? 5천억도 아니고 5조?

-역시 미국ㅋ 클라스가 남다르다ㅋㅋㅋ 이거 거절한 서한율은 레전드고

-캬ㅋㅋㅋㅋㅋㅋㅋㅋ

-차라리 보내서 5조 벌어오게 하고 그 돈을 나라를 위해 쓰는 게 낫지 않음?

ㄴ세금 다 떼서 5조면 모를까 글쎄

ㄴ5조를 벌든 10조를 벌든 일한 본인이 먹어야지 왜 나라가 꿀꺽함?

ㄴ지금도 공짜로 실컷 부려 먹고 있는데 다른 나라 파병까지 보내면 존나 양아치 아니냨ㅋㅋㅋㅋ 야 서한율 군인도 아냐 인맠ㅋㅋㅋㅋ

-어제 라방에서 ‘저 어디 안 가요’라고 말한 게 이런 뜻이었나 보네요ㅎㅎ

-현실적으로 한국은 5조보다 더 높은 금액 제시 못 함. 그런데도 남겠다고 한 거 보면 서한율 레알 진국임ㅠㅠ

-서한율 낭만 합격.

-좋은 의미로 육성으로 쌍욕 나오긴 처음이네. 진짜 든든하다. 사랑한다, 서한율.

-그래, 서한율.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아이돌도 하고 배우도 하고, 가끔 골치 아픈 괴물 좀 때려 잡아주기만 하면 된다^^

“와, 5조면… 치킨 몇 마리지?”

“그 돈이면 우리나라 치킨 브랜드 전부 인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모든 브랜드에 오븐구이 치킨이 강제로 들어가는 거지. 왜? 서한율이 기름에 튀긴 닭을 안 좋아하니까.”

“횡포다.”

아침밥을 먹는 중. 한율은 신나게 떠드는 박가람과 길우성을 바라보았다.

“인수할 생각도 없고, 애초에 그 돈 받고 미국 갈 생각도 없다니까요.”

박가람과 길우성이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흐.

라이언이 고기반찬을 한율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하뉼, 정말로 깊은 산 속으로 독립할 거야?”

“아니요. 여기랑 가까운 곳으로 알아보려고요. 그래야 쉽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잖아요.”

“어차피 바람 타고 날아다닐 수 있으니까?”

모두 어젯밤 한율의 라방을 본 모양이었다. 한율은 차남석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죠?”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강보배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 집, 한율이가 주인이잖아. 그러니 우리가 나가는 게 맞지 않아?”

“숙소 포위한 사람들이 우리 보려고 온 게 아니잖아, 바보야.”

“아, 그렇지.”

“보배 바보.”

“내 생각엔 어디를 가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은데? 저 사람들 잘 달래서 못 오게 하면 굳이 독립할 필요도 없어지지 않을까?”

“좋게 달래서 물러갈 사람들이었으면, 애초에 본인들 행동이 민폐란 걸 인지하고 오지도 않았을걸.”

“오, 그럴싸한 논리군.”

“그래서 오늘.”

떠들던 멤버들의 시선이 한율을 향했다.

“집 보러 다닐 생각인데, 같이 가실 분?”

어스래빗 멤버 전원이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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