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돼?
“권한정을요?”
게이트 방어 지휘부.
정상욱 중위가 이해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1130 증상자 협회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많아, 국내 각성자도 대부분 수월하게 등록되었잖습니까. 그래서 각성자 연구소에서 아르바이트하던 권한정을 관리과로 데려오기로 했습니다.”
“아직 훈련소에 있죠?”
“네.”
지난달 부산에서 권한정이 납치당했다. 권한정은 금세 발견되었지만, 그가 돈을 받고 한 거짓 진술로 인해 수사에 혼선이 빚어졌고, 모든 사실이 드러나자 권한정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입대했다.
“해원 씨도 알다시피 요즘 범죄를 저지르는 각성자 뉴스가 심심찮게 뜨지 않습니까. 그래서 각성자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의 능력이 크게 도움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와서요.”
서한율과 비슷하게 바람 계열 각성 능력자라고 알려진 이해원은, 게이트 방어선에서 주로 총기 사용이 어려운 작전에 투입되고 있었다. 가끔 각성 범죄자의 수송 작전에도 참여했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으로 안전하게 제압이 가능한 까닭이었다.
정상욱이 면목 없는 얼굴로 이해원의 눈치를 살폈다.
“자꾸 해원 씨에게 아량을 강요하게 되네요. 지난번 강준식 때처럼.”
강준식은 소리 차단 능력 각성자로, 러시아 용병들의 의뢰로 이해원의 집에 침입하려다 잡힌 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 뒤 청독각룡 새끼 생포 작전에 그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판단, 이해원은 그의 합류를 긍정했다.
“아닙니다. 제 생각에도 권한정의 능력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아무리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감춰도, 권한정의 눈엔 각성자 특유의 아우라가 보일 테니까요.”
‘바로 곁에 두어야, 권한정의 허튼소리를 감시하기에도 수월하겠지.’
이런 이해원의 속내를 모른 채, 정상욱은 정말 고마운 표정을 지었다.
“새삼스럽지만, 해원 씨가 게방부로 와주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그나저나 내일 모처럼 휴일인데, 혼자 방어선을 둘러보고 싶다고요?”
“네. 안 될까요?”
“음…. 해원 씨가 처음 한율 씨와 둘러봤을 때와 달리 지금은 부대별로 작전 구역이 나뉘어 있어서 말입니다. 일일이 부대에 연락을 넣어서 허락을 구해야 하는데, 그냥 둘러보러 가는 거라고 하면….”
“독자적으로 괴물을 수색하고 처리한다면요?”
“아. 혹시 각성 능력 훈련입니까?”
이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가진 힘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실전 경험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대령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시 해원 씨, 각성자 부대의 에이스답네요.”
사실은 괴물 마나 추출 기술 수련이 목적이라, 이해원은 양심이 따끔거리는 걸 미소로 감췄다.
“별말씀을요.”
* * *
[과도한 스토킹 때문? 서한율, 통제 구역에서 지내기로]
[지구 최강의 각성자로 알려진 서한율이 결국 전 세계의 관심에 부담을 느끼고 통제 구역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제임스’란 가면으로 서울 게이트에 결계를 만들어 수많은… (중략).
한편 서한율은 너튜브에 개인 채널을 생성, 아이돌로서의 일상 및 각성자로서의 활약을 궁금해하는 팬들을 위해 브이로그를 올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민간인은 통제 구역 출입 금지 아니에요? 각성자면 그냥 드나들어도 되는 거?
ㄴㄴㄴ각성자라도 게방부에서 게이트 방어선 출입 허가받아야 가능한데, 이미 서한율은 제임스로 활동할 때 받았다고 함ㅇㅇ
-어스래빗 8월 21일 서울 팬 미팅 재개최/22일 부산 팬 미팅 재개최
14일 오후.
간단히 짐을 정리하는데, 라이언이 한율의 방으로 찾아왔다.
“숙소 근처로 얻는다면서….”
“통제 구역에 집을 얻었다고 해야 여기로 오는 사람이 줄 것 같아서요. 짐 갖다 놓는 시늉만 하고 거의 여기에서 지낼 테니까, 서운해하지 않아도 돼요.”
시무룩했던 라이언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정말?”
“네. 달냥이도 계속 여기에 둘 거고.”
“응.”
라이언이 달냥을 번쩍 안아 들었다.
“우리 달냥, 나가서 오빠랑 놀자.”
뫙.
한율이 통제 구역에서 구한 집은 한강 앞 고층 아파트의 꼭대기 층이었다. 이젠 사람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어서 그곳을 골랐다.
낮에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만난 집주인은 울면서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하루아침에 살 곳과 직장을 잃은 것도 서러운데, 그 아파트를 사느라 받은 은행 대출금과 치솟은 물가로 절벽 끄트머리에 선 상황이었다고. 그러나 한율 덕에 숨통이 트였다며, 두고 온 살림살이 전부 가져도 된다고 덧붙였다.
‘일단 가서 청소부터 하고, 필요한 물건을 사야지.’
통제 구역이 아니었다면 청소업체에 의뢰했을 테지만, 어차피 오늘까지는 쉴 생각이었으니 시간은 많다.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말이다.
작은 캐리어를 들고나오자 거실에 있던 유호가 물었다.
“해원이 오늘 휴일이라던데, 도와달라고 하면 어때?”
“해원이 형도 휴일엔 쉬어야죠. 그럼 다녀올게요. 오늘 밤에 올 수도 있고, 내일 올 수도 있어요.”
“응, 조심히 다녀와.”
라이언도 한마디 했다.
“괴물 조심해, 하뉼. 날아다닐 때 헬기나 드론에 치이지 않게 조심하고.”
“네.”
이해원에게 연락이 온 건, 새로운 집의 청소를 모두 끝냈을 때 즈음이었다.
-[이제야 호 형이 보낸 톡 봤어. 미리 연락하지, 그럼 나도 가서 정리하는 거 도왔을 텐데.]
“아니에요. 전에 살던 가족이 급히 도망치느라 제대로 치우지 못한 쓰레기랑 냉장고 음식물 정리하는 데에 조금 애를 먹기는 했지만, 그 외엔 깨끗했거든요.”
-[아…. 혹시 바퀴벌레는 안 나왔어? 사람들이 버리고 간 집들이 여름 내내 방치되다 보니, 여기 숙소도 온갖 벌레로 난리거든.]
“다행히 바퀴벌레는 보이지 않았어요. 형 지금 어디예요?”
핸드폰 너머에서 게이트 방어선 특유의 소음이 크게 들린다.
-[게이트 방어선. 대령님께 허가받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 수련 좀 하고 있었어. 그런데 혼자 하려니까 집중이 잘 안 돼서 힘들더라.]
기특하네.
“아무래도 어디에서 어떤 괴물이 불쑥 튀어나올지 모르고, 무전에도 신경 써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천천히 침착하게 해요.”
-[응. 요즘 지은이 형한테도 마법 가르쳐준다고 들었는데. 형은 어때?]
“내일 양평에서 실전 연습해보기로 했어요. 거기가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연습하기에 좋잖아요.”
-[지은이 형, 승부욕 있고 센스도 좋아서 나보다 잘할 것 같다.]
“형은 거기에 노력이랑 집중력도 뛰어나니까 자신감 가져요.”
이해원이 쑥스럽게 웃었다.
-[고마워. 그럼 나중에 봐, 한율아.]
“네.”
한율은 라이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괜히 날아다니다가 드론에 치이지 않도록 조심하고요.”
이해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응.]
통화를 끊은 후엔 청소하는 동안 쌓인 메시지를 확인했다. 눈길을 끈 건 수잔 리드의 메시지였다. 양 로이가 접한 루머를 언급하고 있었다.
-[당신에게 ‘사람 머리를 헤집고 조종하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루머를 봤다고 했어요.]
참 공교롭게도 얼마 전, 이해원이 본부 앞에서 만난 안인섭의 말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일치한다.
루머 작성자가 그 녀석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가만히 두기로 했다. 일일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아서. 현재 한율을 둘러싼 루머 중엔 이보다 더 심한 것들이 천지였다.
다른 중요한 이야기도 나누고 싶으니 언제 시간이 되냐는 수잔의 물음에, 한율은 모레 아침은 어떠냐고 답장을 보냈다. 곧바로 괜찮다는 답변이 왔다.
‘이탈리아엔 다음 주에나 갈 수 있겠네.’
내일은 JE의 마법 수련, 주말엔 팬 미팅, 월요일과 화요일엔 시즌그리팅 화보 촬영 일정이 잡혔다.
‘그쪽 실험을 마무리 지은 뒤에, 마요르카에 들렀다가….’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하며 집을 나섰다. 삐릭. 전자자물쇠 소리가 텅 빈 건물에 울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고층 아파트 건물에 저 혼자 있다는 생각에 오싹 소름이 끼치겠지만, 한율은 덤덤하게 계단을 올라가 옥상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보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이동하는 게 더 빠르므로.
그렇게 막 옥상 난간에 올라섰을 때였다.
“……?”
맞은편 동. 한 창문에서 흐릿한 불빛이 나타났다가 휙 가려졌다. 마치 급히 커튼을 친 것처럼.
이곳은 통제 구역인데다, 고층 건물은 붕괴의 위험이 있어서 군부대 숙소로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가라는 지시를 어기고 숨어지내는 사람일까.
한율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다음 날, 경기도 양평.
한율은 품에 구동을 안고선 JE의 마법 수련을 봐주었다.
“아침 안 먹었죠?”
“어. 그런데 왜 물만 마시고 오라고 한 거야? 배고프게.”
“정말 마법이 필요한 순간, 집중이 잘 되고 힘이 넘쳐나는 좋은 컨디션일 가능성이 아주 낮거든요.”
“엄하네.”
수련은 진행했는데, JE는 처음 가르쳐줬을 때와 다르게 능숙하게 마나를 다루며 바람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한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솔직히 말해봐요, 선배님. 집에서 혼자 해봤죠?”
JE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위험하니까 아직은 절대 혼자 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니, 구동이 녀석이 오래간만에 발랄하게 뛰어다니다가 식탁에 있는 컵을 엉덩이로 친 거야. 그래서 엉겁결에.”
“컵은 무사히 잡았어요?”
JE가 목 뒤를 긁적였다.
“아니. 통제가 뜻대로 안 돼서 허공에서 중심 못 잡고 휘청휘청하다가 결국 다 쏟았어. 어렵더라.”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게 날아가는 새를 쳐서 기절시키기보다 더 어려워요. 한 방울이라도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마나를 다뤄야 하니까.”
“너도 비슷한 일 겪어봤어?”
“그것도 수련 방법의 하나였어요. 가파른 산 초입에서 물이 가득 찬 그릇을 머리 위에 띄워,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정상까지 지정 시간 안에 도달하는 것.”
“오오. 머리 위는 보이지 않아서 더 컨트롤이 힘들었을 텐데. 넌 얼마 만에 성공했어?”
오래전 일이었지만 딱히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한번에요.”
“…….”
수련을 지켜보던 계나리가 두 눈을 찡긋하며 양쪽 엄지를 세웠다.
“역시 스승님! 클래스가 다르죠!”
“내가 너랑 같이 마법 배우는 동료였으면, 너 진짜 재수 없었을 것 같다.”
“그런 말 많이 듣긴 했어요. 그럼 다시 해볼까요?”
수련은 JE가 ‘더는 배고파서 못 해. 배 째.’라고 항복하고 나서야 끝났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계나리는 맛있는 된장찌개 냄새가 풍기는 집으로 들어간 뒤였다.
한율은 바닥에 드러누운 JE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고했어요.”
턱. JE가 그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요즘 운동하면서 체력이랑 근육 만드는 중인데. 근 손실 오면 네 책임이다.”
“건우 형이 그러던데요. 한번 생긴 근육은 고작 몇 끼 굶는다고 쉽게 안 사라진다고.”
“아오, 이건우. 그 녀석, 요즘도 운동 열심히 하냐?”
“네. 숙소에 웬만한 운동기구가 다 있으니까요.”
“이런 얘기 나누면 참.”
JE가 한숨을 푹 내쉬며 조용하고 평화로운 계곡을 둘러보았다.
“게이트 열리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분명히 큰일이 벌어졌는데, 사람들이 너무 적응을 잘해서 ‘원래 이랬었나?’ 생각이 들 정도야. …야, 배고프니까 내가 무슨 말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선배님도 데뷔 초반이나 컴백 때마다 다이어트 하지 않았어요?”
“너도 내 나이 돼 봐.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한 끼 굶는 거랑 지금 한 끼 굶었을 때랑 몸이랑 멘탈에 미치는 파장이 달라.”
한율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고작 스물일곱 살밖에 안 됐으면서 무슨 소리예요.”
JE가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선생님, 솔직히 말씀해 주시죠. 총 몇 년 사셨습니까?”
“노코멘트할게요.”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돼?”
“…….”
“미안. 내가 오래 굶으면 버릇이 좀 없어지거든.”
“아,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