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차별 반대
“야, 서한율.”
늦은 밤. 서울에 있는 어스래빗 숙소로 돌아오자, 거실에서 박가람이 앞을 가로막았다. 허리에 두 손을 올린 채 껄렁거리듯 고개를 들어 눈을 치켜뜬다.
“너 왜 학생 차별하냐?”
“……?”
박가람이 부담스럽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면서 낮은 목소리로 따졌다.
“왜 나보다 늦게 입문한 지은이 형이 더 빨리 배우는데? 엉? 이러면 내가 섭섭해요, 안 섭섭해요? 응? 가까이 있는 날 두고, 엉? 너무한 거 아니야? 학생 차별 반대!”
“그걸 배우려면 가장 필요한 게 차분함과 인내심인데.”
한율은 웃으며 말했다.
“형은 아직 부족해 보이네요.”
“……!”
“왜 보채고 그러세요. 마이너스 10점.”
“으아아…!”
박가람이 제 머리를 부여잡은 채 괴로워하며 한 걸음, 두 걸음 비틀비틀 물러났다. 한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그의 옆을 지나쳤다.
한율이 통제 구역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했다고 알려지자, 어스래빗 숙소 앞에 모이던 인원 역시 차츰 줄어들었다. 대신 WB래빗 엔터로 몰려드는 사람이 많아졌으나, 원래 그 앞을 자주 찾던 팬들이 한율이 옥상으로 출퇴근한다고 알려주자 힘없이 돌아섰다.
포털사이트 메인에 뜬 기사.
[경고하고 거처를 옮겨도 여전히 서한율을 스토킹하는 사람들]
-서한율, 진은수처럼 본인 모습도 감출 수 있지 않음? 제임스로 변한 것처럼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으니 아무리 집 포위하고 쫓아다녀도 일반인은 절대 못 잡는 게 당연한 건데ㅋㅋ 바보들인가?
16일 아침. 한율은 수잔 리드와의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 자리엔 미국 게이트 조사위원회의 조쉬도 나와 있었다.
인사를 나눈 뒤, 두 사람은 거두절미하고 사과패드를 내밀었다.
[이탈리아 게이트 대책위원회 일을 도운 적이 있으니 잘 아실 겁니다. 인간의 무기는 주로 방어가 아닌 타격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걸요. 방어 역시 방공호 아니면 날아오는 미사일을 격추하는 방법이 주. 아무리 적대관계에 놓인 나라라고 해도 원자력 발전소처럼 위험한 장소는 건들지 않는 게 불문율이니까요.]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괴물들은 그런 식별 자체를 못 하죠.]
[네. 현재 미국의 몇몇 지역이, 한율 씨가 해체 작업 중인 원전을 지켰을 때와 비슷한 상황에 직면해있습니다.]
다시 거액을 들이밀며 계약서에 사인을 유도하기보다는, 한율이 라방에서 말한 것처럼 ‘꼭 필요한 곳’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형식으로 전략을 바꾼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한율의 힘이 얼마나 필요한지, 준비한 자료와 각종 계획, 미치는 영향 등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내내 농담과 웃음기 없는 진지한 태도로. 한율도 주의 깊게 경청하며 가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제가 지금 잡힌 일정,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했던 일도 마무리 지어야 하는 데다가 둘러볼 곳도 있어서요. 빨라도 다음 주에나 확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힘도 회복되길 기다려야 하고요.]
[네. 사실 지금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불안합니다만… 최선을 다해 버텨봐야죠.]
[그런데 한율, 이거 물어봐도 될까 모르겠는데… 이탈리아에서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일이 혹시 게이트 조사인가요? 아, 대답하기 곤란하면 하지 않으셔도 돼요.]
한율은 수잔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조사 비슷하긴 해요. 궁금하잖아요. 각성자의 능력이 정말 게이트에서 나왔는지, 아니면 지구가 이 위기를 극복해보라며 나눠준 힘인지. 미국에서도 비슷한 조사와 실험이 진행 중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아직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에요. 나중에 이 부분과 관련해서 정보 공유 요청이나 상담을 드려도 될까요?]
수잔이 살짝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물론 그땐 제가 아니라, 관련 연구 기관의 전문가가 직접 나설 거예요.]
[네.]
조쉬와 수잔은 이외에도 이런 질문을 던졌다.
최근 증가하는 각성자 범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특히 위험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를 어떻게 관리 감독해야 하는지, 골치가 아프다며 푸념 비슷하게 늘어놓았다.
[현재 미국에선 각성자의 능력을 제한할 방법을 물색 중입니다. 하지만 각성자의 능력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했는지, 한율 씨와 같은 조사가 우선일 것 같네요. 정체부터 알아야죠.]
[인도에, 각성자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각성자가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네. 우리도 그 소문을 듣고 추적해봤는데, 한 철없는 소년의 허언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정말 그런 각성자가 있다곤 해도, 다른 각성자의 능력을 훔치거나 어딘가에 저장, 복사해서 양산하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아니, 아직 방법을 못 찾은 건지도 모르지만….]
한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러 각성자의 마나를 추출해서 조사해보면 무언가 특이점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역시 게이트가 열리기 전부터 떠올린 궁금증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마땅한 실험체가 없어 실험하지 못했다. 생명이 지장이 가지 않을 만큼 가볍게 뽑은 마나론 제대로 실험할 수 없을 테니.
‘하지만 죽어 마땅한 범죄자라면.’
한율은 각성자 부대에서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치는 각성자를 추적하게 된다면, 거기에 은근슬쩍 끼어서 몰래 생포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율은 자신의 의견을 기다리는 두 사람에게 대충 맞장구쳐주었다.
[어려운 문제네요.]
* * *
20일 금요일.
대형 포털사이트 메인.
[[단독] 어스래빗 팬 미팅 테러 주모자 美에서 송환]
-BJ 일당이랑 같이 살인미수로 처넣어라
-정신 나간 거 아님? 이 시국에 게이트 괴물을 사고파는 놈들이 있다고?? 대체 왜???
-얼마 전에 서한율이 라방에서 미국에서 사주한 범인 찾아줬다더니
-미국 왠지 주모자 미국인인 거 알고 존나 쌍욕했을 것 같다ㅋㅋㅋ
ㄴ바로 조사하라고 보내준 것만 봐도ㅋㅋ
오후 6시 정각. 너튜브 서한율의 개인 채널엔 15분가량의 영상 하나가 올라왔다. 일전에 WB래빗에서 촬영한 브이로그였다.
[보이세요? 환기를 위해, 결계 군데군데에 구멍을 만들어뒀어요. 이것 때문에 전체적으로 모양이 흐트러져서 영 안 예쁘네요. 그리고 새들이 날아오다가 부딪칠 수 있잖아요. 그래서 매랑 독수리 모양 연을 띄워뒀습니다.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요.]
-[05:48] 세심한 배려 보소
브이로그에서 서한율은 능력 발현에 관해서도 자연스럽게 언급했다. 체력과 능력 사용에 필요한 에너지가 다르다는 것도.
-능력에 필요한 에너지가 MP면 그 MP가 차는 동안 아이돌 활동하겠다는 소리였는데 각알못 ㅅㄲ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아이돌 그만두라고 명령질에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느라 바빴지ㅋㅋㅋ
[그래도 회사에 왔으니, 그동안 게으름 피웠던 안무랑 노래 연습을 할 생각입니다.]
다시 지하에 있는 어스래빗 연습실로 돌아간 서한율은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며 잠깐 카메라를 껐다가 다시 켰다. 길우성, 차남석, 강보배와 어떤 안무부터 연습할지 의논하곤 가볍게 몸을 풀었다.
-[11:13] 왜 잘 춤?
ㄴ아이돌이니까 잘 추죠ㅎㅎㅎ
ㄴ이래 봬도 5년 차 아이돌입니당
ㄴ8명 전부 있었으면 칼군무에 베이셨을 겁니다ㅋㅋ
-제임스 진짜 정체라고 했을 때 연예인에게 관심이 없어서 누군지 몰랐는데 이렇게 영상 보니까 아이돌이란 본인 직업에 자부심을 가진 순수하고 착한 20대 초반 친구였네요^^
-아니 다 쌩얼인데 다 잘 생기고 피부도 다 좋아
-이래놓고 능력 회복되면 게이트 방어선으로 가서 해맑게 괴물 수십 마리 회오리에 가둬놓고 몰살시키는 거잖음? 갭 차이 존나 좋다
-난 서한율도 서한율인데, 같은 팀 멤버들도 대단한 것 같음. 나였으면 아무리 몇 년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해도 함부로 대하기 힘들 것 같은데 동작 약간 삐끗했다고 바로 구박하네ㅋㅋ
ㄴ괜히 멤버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게 아니죠. :)
다음 날인 21일엔 BJ의 테러로 도중에 중단되었던 서울 팬 미팅이 다시 열렸다. 당시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몇 명은 불참하리라 생각했으나, 놀랍게도 결원은 한 명도 없었다.
한율은 팬들에게 사과했다.
“내가 진작 제임스라고 밝혔다면 감히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 미안해요, 이프림.”
아니야아! 미안해하지 마! 네 잘못 아냐, 서한율! 사랑해, 한율아악!
팬 미팅은 서비스 코너까지 더해져 더 길어졌으나 무사히 끝났다. 어스래빗은 차를 타고 이번엔 부산으로 향했다.
호텔에 도착한 건 밤이 되었을 무렵.
부드럽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창 너머로 펼쳐진 부산의 야경은 서울과 달리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여기 오니까 지난달에 열렸던 <부산 K-POP 콘서트> 생각난다. 그때 한율이 네가 잡은 괴물은 어떻게 됐어?”
“뇌를 비롯한 장기 일부는 연구소로, 나머지는 옮기기 좋게 토막 내고 괴물 처리장으로 옮겨서 소각했을 거예요.”
“으음…. 알고는 있었지만, 관계자 입으로 들으니까 너무 생생하게 와 닿는다….”
“너희들 객실 들어가면 절대 나오지 마. 룸서비스나 필요한 거 있으면….”
박가람이 조유찬의 잔소리를 가로챘다.
“형들한테 전화하란 말이죠? 알겠습니당.”
“그래, 그래.”
객실은 두 사람씩 사용하기로 했다. 한율이 먼저 준비된 객실 중 아무 곳에 들어가자, 길우성이 졸졸 따라오며 문을 닫았다. 그러곤 침대로 다이빙.
풀썩.
“흐아아…. 남이 준비해준 깨끗하고 푹신한 이불, 너무 좋다….”
“화장품 묻히지 말고 씻고 자.”
“알았드아. 나 먼저 씻는드아.”
“어. 저녁은 알아서 시킨다.”
길우성이 흐느적흐느적 침대에서 일어났다.
“알았드아.”
한율은 클렌징 워터로 대충 메이크업을 지운 뒤 호텔 룸서비스 메뉴를 살폈다. 길우성이 먹을 메뉴도 멋대로 정한 뒤 조유찬에게 초코톡을 보냈다.
룸서비스가 온 건 한율도 말끔하게 씻고 나왔을 때. 조유찬이 호텔 직원과 함께 방문했다.
“너희들, 술 마실 거면 아주 가볍게 한 잔까지만이다.”
“네에.”
객실에는 와인과 위스키, 맥주와 음료수가 비치되어 있었다. 한율은 와인과 잔을 집어 들었다.
“웬일이냐, 네가 술을 다 마시고? 나도 잔 줘.”
“딱 한 잔만 마셔. 주정 부리면 바로 쫓아낸다.”
“알았드아.”
TV에선 예능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TV를 보며 식사에다 와인을 가볍게 곁들이고, 대충 정리하고선 침대에 편히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길우성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스케줄 마치고 이렇게 배부르고 등 따시게 호텔에 누워있으니까, 해외 투어 다닐 때 생각난다. 우리 다시 투어 다닐 수 있겠지?”
“글쎄.”
“해외 공연 딱 열었는데, 온통 네 개인 팬뿐이면 좀 슬플 것 같다.”
“…….”
다른 멤버라면 꺼내기 조심스러울 법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한율은 길우성을 힐끗했다. 진심으로 걱정되는지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살짝 취기가 도는 모양.
한율은 길우성이 듣고 싶어 할 법한 말을 들려주었다.
“나도 싫어. 멤버들이 내 들러리 취급받는 거.”
“크. 의리의 써한율.”
길우성은 금세 잠이 들었고, 한율은 TV 볼륨을 낮춘 채 핸드폰으로 세계의 게이트 관련 뉴스를 살폈다.
스탠드를 제외한 조명과 TV를 끈 건 밤 11시가 될 무렵. 왠지 신경이 쓰여서, 창문의 커튼을 모두 치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고요해진 객실. 한율은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흐아악!”
“……?!”
깜짝.
한율은 길우성의 비명에 놀라서 깼다.
“저, 저기…!”
잔뜩 눈을 찡그린 채 건너편 침대에서 주춤거리는 길우성을 봤다가,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쳐놓은 커튼 틈 사이.
창에 찰싹 달라붙어서 객실을 훔쳐보던 한 쌍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움직이더니 휙 사라졌다.
길우성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외쳤다.
“여기 30층 넘잖아…!”
한율은 미간을 구겼다.
각성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