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0화 (372/427)

나도 같이 갈래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커튼이 답답해서 살짝 걷어 밖엘 봤고, 그리고 침대로 돌아와 눕는 순간에 창문에 찰싹 달라붙은 사람이랑 눈이 마주쳤단 거지?”

아침. 유호가 길우성의 말을 정리했다. 새벽에 놀란 마음이 여태 진정되지 않는지 길우성이 흥분한 얼굴로 끄덕였다.

“어! 진짜 무서웠어….”

“제가 바로 나가서 살펴봤는데, 창문 여기저기에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더라고요. 그리고 맨손이 아니라 장갑을 끼고 올라왔던 것 같았어요.”

“흔적이 선명하다는 건 사람이란 소린데.”

라이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객실 창문을 곁눈질했다.

“아냐, 힘센 귀신일 수도 있어….”

박가람이 단호히 부정했다.

“귀신은 아닐 거야. 서한율이 있던 객실이라.”

예전, 한율이 지방 촬영으로 숙소를 비웠을 때 박가람이 한율의 포카를 머리맡에 두고 잤던 걸 떠올린 걸까. 강보배가 박가람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가람이 형, 아직도 한율이를 인간 부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서한율을 스토킹하는 각성자가 아닐까 하는 거지. 그래서, 경찰에 신고는 했냐? 호텔 측엔?”

“다 알렸죠. 하지만 고층 외벽을 타고 오를 수 있는 각성자를 추리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 각성자 관리과에도 도움을 청했어요.”

길우성이 제 두 팔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무서운 세상이야, 무서운 세상….”

오후. 부산 팬 미팅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갈 때, 한율은 개인 SNS에 호텔 객실 창문을 찍었던 사진과 글을 올렸다.

[어젯밤 부산 호텔 창문에 매달려 객실 훔쳐본 변태 범죄자, 너 꼭 내가 찾아낸다^^ #선지키라고했지]

해당 SNS는 곧바로 포털사이트 메인에 기사로 뜨고, 실검에도 올랐다.

[서한율 스토커, 하다 하다 한밤중 호텔 올라 훔쳐봐?]

[(중략) 호텔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서한율이 주변 객실 이용객들의 동의를 구해 직접 호텔 외벽과 창을 살폈으며, 3층부터 서한율이 묵었던 객실 창문까지 쭉 더듬어서 올라온 듯한 손자국을 발견했다고 한다.]

-스파○더○이야 뭐야

-어제 모 호텔 앞에 사람들 우글거려서 뭔 일인가 했더니 서한율 왔었구나

-뭐 잡을 만한 것도 없는데 어떻게 올라간 거??? 거미나 바퀴벌레냐?

-30층 넘는 객실에서 자다가 창문 봤더니 아이컨택ㄷㄷㄷ 게이트 전이었으면 귀신 소행이라고 넘겼겠지만,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무섭다.

-각성자 범죄는 일반인이 저지른 범죄보다 더 무겁게 처벌해야 한다.

-서한율이 진짜 목적이 아닐지도 모름.. 으 변태 관음증

-3층부터 올라갔으면 당한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란 소리네

-진짜 스토커면 서한율도 진심 소름 돋겠다. 나 같으면 없던 인간 혐오도 생길 듯

ㄴ지금까지 안 생긴 것도 용한 수준이었습니다..

* * *

<2022 어스래빗 시즌그리팅> 화보 촬영이 진행 중인 실내 스튜디오 세트장.

-[그런 일이 가능한 각성자를 살펴보고 조심스럽게 조사해봤습니다만, 알리바이가 있거나 호텔 외부 CCTV에 찍힌 체형과 맞지 않더라고요. 미등록 혹은 외국인 각성자가 아닐까 추측됩니다.]

“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중위님.”

정상욱과 통화를 끝낸 한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초반에 게이트를 너무 잘 막은 게 문제였을까.

예전에도 들었던 생각을 다시 하며 임시 휴게실을 나왔다. 어스래빗 노래가 흘러나오는 스튜디오에선 차남석의 개인 촬영이 한창이었다. 이젠 제법 프로답게 포토그래퍼가 원하는 것 이상의 포즈와 분위기를 척척 보여주고 있었다.

‘잘 막지 않았다면 지금 이런 시간도 오지 않았을 테지만.’

유호가 한율에게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내일 바로 출국하는 거지?”

“네. 저 없는 동안에도 숙소 결계 잘 켜두고, 늘 조심하세요. 절 따라다니는 집요한 스토커가 늘면서 자연스럽게 정신이상자도 늘었거든요.”

어제 오 팀장이 심각한 얼굴로 들려주었다.

한율과 한 번이라도 열애설이 났던 여자 아이돌, 그리고 같은 소속사인 크리스탈 래빗과 드림래빗 멤버들에게 한율과 가까이 지내면 가족을 해코지하겠다, 죽여버리겠다는 등의 협박이 심상치 않게 오고 있다고.

“응, 조심할게.”

“그런데 써한.”

불쑥. 길우성이 뒤에서 끼어들었다.

“이탈리아엔 왜 자꾸 가는 거냐?”

“관찰하던 게이트가 있었거든. 가서 마저 살피고 오려고.”

“난 또, 우리나라 두고 다른 나라 괴물 잡아주러 가는 줄. 위험하지 않으면 나도 같이 가도 돼?”

큰일 날 소릴.

“달냥이 너한테 맡길 생각이었는데. 싫으면 말고.”

“아니?! 아니다! 한국에서 달냥이랑 같이 있을 거다! 잠도 같이 잘 거다!”

“그러든가.”

“그런데 나 곰순이랑 같이 제주도 내려갈 계획인데. 달냥이도 같이 데리고 가도 돼?”

“안 돼, 인마.”

“그럼 나는?”

이번엔 박가람이 와서 끼어들었다.

“제주도?”

“아니, 이탈리아.”

박가람이 한율을 향해 씨익 웃었다.

“스스로 차별의 굴레를 타파해보겠다.”

“…….”

“써한이 형 차별했어? 언제? 무슨 일로?”

“참 분하게도, 내가 아직 철이 덜 들었다면서 차별하더구나.”

“응? 철이 덜 든 건 맞는 말….”

“뭐? 철로 맞고 싶다고, 막내야?”

“형, 이탈리아어 잘해요?”

한율의 질문에 박가람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럼 영어는요?”

이번엔 갸웃.

“네가 하면 되잖니?”

“마이너스 20점.”

“으아아…!”

이틀간의 시즌그리팅 촬영이 끝난 다음 날.

한율은 시모나와 공항에서 만나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박가람도 함께.

[서한율, 미모의 여성과 이탈리아行]

[(사진)

대한민국 최고의 각성자인 서한율이 같은 어스래빗 멤버 박가람과 함께 미모의 이탈리아 외교부 직원과 이야기 나누며 비행기에 탑승했다.]

-기레기 제목 어그로ㅋㅋㅋㅋ

-박다람이 너 어디 가!!!!!!

-난 또 스캔들인가 했는데 같은 팀 멤버도 같이 가네. 휴

-우리나라 각성자면 우리나라를 지켜야지 또 어디 싸돌아다님

-서한율 정체 드러냈을 때 바로 입대시켰어야 했다.

-박다람 씨, 지금 어디를 따라가시는 거죠..? 아무리 봐도 율톢 각성자로 일하러 가는 건데 님이 왜 따라가요, 걱정되게ㅠㅠ

파란달 펜션으로 향하는 길우성의 차 안. 인터넷 기사를 보던 길우성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가람이 형, 진짜 괜찮을까?”

차남석은 할아버지를 뵙기 위해, 길우성은 오늘 길미현을 데리고 제주도로 가기로 했다. 유호와 강보배는 곡 작업에 필요한 장비를 회사로 도로 가져갈 겸 동행했다.

운전대를 잡은 차남석이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서한율이 잘 챙겨주겠지. 그럴 자신이 있으니까 데려간 걸 테고. 넌 오늘 가면 언제 올라올 거냐?”

“일단 싸랑하는 부모님이랑 실컷 회포 풀고 난 뒤에 결정하려고. 오래 있진 않을 거야. 다음 활동 준비해야지. 그동안 내 차, 버리를 잘 부탁하오.”

“어. 너 대신 실컷 타 줄게.”

“으음…. 슬프지만, 형님이니 허락하겠소. 대신, 나중에 형님 차도 내 거.”

“…….”

파란달 펜션 앞은 조용했다.

이젠 아무리 기다려도 서한율을 만나거나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이곳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뜸해졌다. 고은훤의 말에 따르면 가끔 결계를 보러 오거나, 관광지처럼 겉만 둘러보고 가는 서한율의 팬만 있다고.

그러나 네 사람은 펜션 꼬락서니를 보곤 눈을 크게 떴다.

“히익. 이 낙서들 다 어쩔.”

“나중에 한율이가 보면 화내겠다.”

펜션 담이 온갖 낙서로 지저분했다. 대부분 서한율을 향한 애정 담긴 문구나 그림이었으나, 간간이 불쾌한 것도 보였다.

“며칠 사이에 더 심해졌네.”

“써한은 결계를 담 바깥쪽으로 넓게 만들었어야 했어. 우리 숙소처럼.”

초인종을 누르자 고은훤이 응답, 곧 대문이 열렸다.

“응?”

주차장으로 가는데, 길우성이 눈을 가늘게 뜨며 한 차량을 노려보았다.

“뭐지? 왜 저 차가 여기에 있지?”

“누구 찬데?”

“현우 차 아니야?”

“우성이 또 커플 사이에 끼어서 제주도 가게 생겼네.”

끼익. 차남석이 차를 세우자마자 길우성이 뛰쳐나갔다. 마침 박현우가 길미현이 지내는 객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가만두지 않겠다, 박현우!”

그러나 박현우는 제주도까지 동행할 생각이 없었다.

“내일부터 영화 촬영 재개되거든. 그래서 얼굴 볼 겸 온 거야.”

“촬영이 재개된다고?”

유호가 놀란 얼굴로 묻자 박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다 얌전해지는 길우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리뿐만이 아니야. 대형 스튜디오 단지에 촬영하러 오는 팀이 많아졌다더라.”

“하지만 지금 작품을 찍어도….”

조심스럽게 의문을 표하던 강보배는 입을 다물었다. 박현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인건비나 건지면 다행이겠지만, 씬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 그래서 일단 끝까지 찍어두려는 것 같아. 편집하는 동안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정 뭐하면 서한율한테 홍보 부탁하면 되겠지. 뉴스 보니까 걔 요즘 인기랑 영향력 장난 아니던데.”

“부작용도 만만찮게 따라와서 문제지.”

길우성은 길미현과 함께 박현우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차남석은 펜션 부지에 가꾸던 텃밭에서 잡초를 뽑고, 찐빵을 데리고 계곡 산책에 나섰다.

유호와 강보배는 유호의 가족이 지내던 객실에 설치했던 장비를 차에다 옮겨 실었다.

“다시 여기로 옮길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러게.”

툭툭. 손을 턴 유호는 언덕 위 집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까지 온 김에 나리 씨 얼굴이나 보고 갈까?’

우웅.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사생이나 기자의 전화일까 싶어 가볍게 무시했다.

“보배야, 나 잠깐 주변 좀 둘러보고 올게.”

“응. 그럼 난 관리동에 가 있을게.”

우웅, 우웅.

다시 또 걸려온 전화. 이어서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형, 저 정민솔이에요.]

아.

유호는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민솔아. 번호 바꿨어?”

-[네. 잘 지내셨어요?]

정민솔은 본래 어스래빗 멤버들처럼 WB래빗 엔터 연습생이었다. 그러나 멤버들과 갈등을 겪은 뒤 데뷔조에서 완전히 탈락, 콩콩 엔터로 옮긴 후 출연한 뮤닷 을 통해 원제로로 데뷔했다.

현재는 다른 소속사에서 솔로 가수로 활동 중.

예전에 안 좋았던 일들이나 감정은 미국에서 만났을 때 허심탄회하게 다 풀었다.

“응. 그런데 왜 갑자기 존댓말이야, 예전처럼 편하게 해.”

-[네. …아니, 응.]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가끔 SNS 보기는 했는데, ‘좋아요’만 누르곤 제대로 연락을 못 했다.”

-[나야 그럭저럭. …형.]

“응?”

정민솔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 형수 형이랑 연락한 적 있어?]

김형수 역시 WB래빗 연습생 출신으로, 유호와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친구였다. 그리고 아이돌그룹 ACCOM의 보컬.

ACCOM은 어스래빗과 같은 해인 2017년에 데뷔했으나, 그리 빛을 보지 못하고 소위 망돌 루트를 걷고 있었다.

그러다 작년, 유호와 강보배가 만든 곡 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한 시상식에서 상까지 받으며 점차 활기를 띠었다. 이후 ACCOM 멤버들은 유호와 강보배를 만나면 은인,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김형수는 진심으로 고맙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응. 얼마 전에 만나서 같이 술 마셨는데?”

-[그게 언제였어?]

“그게….”

유호는 기억을 더듬었다. 서한율이 귀국해서, 길우성과 함께 한우를 사 들고 어스래빗 숙소에 간 날이었다.

“8월 4일. 왜? 형수한테 무슨 일 있어?”

-[아…. 그럼 형은 모르겠구나. ACCOM 멤버 중 한 명이 지금 중환자실에 있거든. 그래서 형수 형 멘탈도 많이 나간 것 같아. 전화를 걸었는데 제대로 대답도 안 하고, 횡설수설하기도 하고….]

정민솔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러다가 형수 형도 안 좋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걱정돼서…. 이젠 전화도 잘 안 받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어….]

형수 형‘도’.

그 말뜻을 깨달은 유호는 손끝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내가 연락…. 아니, 내가 찾아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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