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다는 소리 지겨워
제주도에 있는 길우성의 본가.
“평화롭구나, 삐약아.”
길우성은 고양이 ‘삐약’과 테라스 테이블 의자에 앉아, 처마 너머로 쏟아지는 비를 구경하고 있었다.
“써한 말대로 단독주택 사기를 정말 잘했어. 돈 번 보람이 있다. 조용하고, 남의 시선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역시 단독주택이 최고야.”
삐약은 달냥처럼 일일이 대답해주진 않았지만, 길우성은 삐약의 귀가 쫑긋하는 걸 보곤 계속 떠들었다.
“네가 우리 가족이랑 처음 만난 집도 단독주택이었지만, 거긴 마당이 딱딱한 시멘트였잖아. 위험하게 깨진 곳도 있었고. 여긴 잔디가 푹신해서 좋지?”
휙휙. 삐약의 꼬리가 좌우로 세차게 흔들렸다.
“응, 조용히 할게.”
우웅.
길우성은 작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오오, 지은이 형. 웬일이야?”
-[전화 받기 곤란한 상황이야?]
“우리 집 고양이가 조용히 하라고 해서 작게 말하는 중.”
-[…나 제주도다.]
“헐. 어쩐 일로?”
-[만날 사람이 있어서 왔다가, 너도 제주도에 있다길래 겸사겸사. 그나저나 숙소 잡기가 너무 힘든데, 너희 집에서 신세 좀 져도 되냐?]
현재 제주도 숙박시설 대부분은 국내 게이트 피난민들이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무료로 운영되는 대피소와 달리, 정부가 요금 절반만 지원해주는 터라 어느 정도 금액을 부담해야 한다. 여기에 개별 서비스 요금 또한 따로.
하지만 오히려 빈방이 없어서 난리였다. 물가가 다른 지역보다 굉장히 비싸지만, 그래도 게이트와 멀어서 안전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톡으로 주소 보낼게. 집에 남는 방 많아.”
-[어, 고맙다.]
통화를 끊은 길우성은 삐약을 살며시 안았다.
“지은 씨가 온대, 삐약아.”
삐약이 앞발로 길우성의 얼굴을 밀었다.
뺘악.
한편, JE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서한율처럼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스킬이 늘었다며.
‘만날 사람이 바로 너다, 길우성.’
JE가 제주도로 내려온 건 다름 아닌 서한율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지만, 갑자기 미니 게이트가 열릴 수도 있고, 정신이상자 같은 광팬이 서한율과 같은 팀 멤버인 그를 노릴지도 모르니 지켜봐달라고.
‘마법 가르쳐준 지 얼마나 됐다고 일부터 시키네. 그러고 보니 해원이 녀석도 마법 배운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은근히 제자들을 자연스럽게 부려 먹는 스승이었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지만.’
렌터카는 불편할 것 같고, 비행기는 기내로 토끼 반입이 안 된다고 해서 목포까지 차를 몰았다. 목포항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한 게 오늘 새벽. 너무 이른 시간에 연락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여기저기 드라이브 겸 돌아다니다가 바닷가가 보이는 주차장에다 차를 세웠다.
초코. JE는 길우성이 보낸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그리고 출발 전, 비 내리는 방파제에서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즐겁게 사진 찍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서울이랑 달리 완전히 딴 세상 같네.’
가끔 순찰하듯 날아다니는 정찰기와 헬기만 아니면 말이다.
길우성의 본가는 타운하우스 단지가 세워진 한적한 마을 한쪽에 자리한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상당히 넓은 부지에 담 너머론 잘 가꿔진 정원수가 보이고, 개폐식으로 된 차고지 옆엔 외부 차량을 위한 주차 공간도 마련되었다.
상당히 비싸 보이는 집이었으나, JE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어스래빗이 작년 월드투어로 만난 관객이 수십만 명.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정산받았을 정도로 평탄 가도를 달린 팀이니, 사람들의 예상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을 것이다.
물론 JE도 엇비슷하게 성공했기에 딱히 부러움은 없었다.
딩동. 차를 세운 뒤 초인종을 누르자, 카메라가 반짝거리더니 바로 대문이 열렸다.
길우성이 우산을 들고 달려 나왔다.
“어서 오시오, 형님! 엇, 구동이도 데리고 왔네?”
“어. 너희 고양이 사납냐?”
“사납진 않지만, 글쎄? 고양이 속을 한낱 집사가 어찌 알겠어. 일단 들어와, 들어와.”
쿵. 대문이 닫혔다.
“…….”
조금 떨어진 골목길에 주차된 차 안.
찰칵, 찰칵. JE가 길우성의 본가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찍은 기자는 결과물을 확인하며 한숨 쉬었다.
“누가 오나 했더니…. 이것들은 잘나가는 아이돌이 왜 이렇게 재미없게 살아? 나가서 술도 좀 마시고 여자도 만나라~. 우리도 먹고 좀 살자, 응?”
우웅, 우웅.
“그래, 후배야. 나 뭐 하는지 뻔히 알면서 톡이 아닌 전화를 걸었다는 건 어지간히 긴급….”
후배가 빽 소리를 질렀다.
-[지난번 부산에서 서한율 객실 훔쳐본 놈 있잖아요? 그놈이 동영상 올렸어요!]
“뭐?”
기자는 후배가 보내준 링크를 클릭했다.
외국의 언론사 사이트에 올라온 동영상은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일단 욕실에서 씻고 나온 듯한 서한율은 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다. 길우성과 함께 룸서비스로 시킨 음식에다 와인을 마시면서 TV를 보고, 침대에 편히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자는 게 전부였다.
영상에선 잘 들리지 않는 대화도 모두 영어 자막으로 넣어주었는데, 대화 내용도 평범했다.
[해외 공연 딱 열었는데, 온통 네 개인 팬뿐이면 좀 슬플 것 같다.]
[…나도 싫어. 멤버들이 내 들러리 취급받는 거.]
그러나 문제는 해당 동영상이 올라온 기사 조회 수가 엄청나다는 것.
기자는 배가 부글부글 끓는 기분을 느꼈다. 아직 후배와의 통화가 끊기지 않았단 걸 잊고 중얼거렸다.
“와, 씨발…. 변태 관음증 스토커가 아니라 파파라치 각성자였어? 부럽다….”
-[소문으론 그 파파라치, 여기 언론사에 원본 팔아서 몇천만 원 챙겼대요.]
“미쳤구나, 미쳤어…. 그 파파라치 분명히 외국인일 거다. 그러니 우리가 엄두도 못 낼 짓을 하지.”
후배가 낮게 웃었다.
-[우리는 선 한번 잘못 넘으면 대한민국 국민을 적으로 돌리게 되니까요. 어쨌든 외국인 짓인 것 같다고 저격 기사 작성 중입니다.]
“그래, 수고해.”
통화를 끊은 기자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는 동영상 조회 수를 보다가, 다시 아무도 없는 조용한 길우성의 본가를 바라보았다.
‘같은 팀인데도 아주 극과 극이네.’
서한율은 훨씬 이전부터 전조증상을 겪다가 지구 최강의 각성자로. 길우성은 각성하지 못한 1130 증상자로 그쳤다. 듣기론 각성자 연구소까지 가서 여러 가지 테스트를 받았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고.
‘무슨 빛과 그림자도 아니고.’
* * *
[충격! 서한율 호텔 몰카범은 외국인 각성자 파파라치?!]
[지난 21일 밤, 부산의 한 호텔에서…(중략).
일각에서는 범인이 국내 각성자가 아닌, 서한율을 취재하기 위해 온 외국인 각성자 파파라치가 아니냐는 추론에 힘이 실리고 있다.]
“…….”
힐끗. 박가람이 기사를 보는 한율의 눈치를 살폈다. 한율은 덤덤한 얼굴로 다른 기사를 클릭했다.
[어스래빗 차남석·라이언 공익 광고 CF, 하루 만에 천만 뷰 돌파!]
“이거 CF 풀 버전 봤어요?”
“엉, 어제 떴다고 했을 때. 라이언 연기 많이 늘었더라. 그런데… 화 안 나냐? 변태 스토커가 아니라 파파라치였잖아. 둘 다 징그럽긴 마찬가지지만, 몰래 촬영해서 돈 받고 팔았다는 게 너무 괘씸하지 않아?”
“그것도 그렇지만, 이상해서요.”
“뭐가?”
한율은 사과패드를 집어서 부산 호텔에서 찍힌 영상을 재생했다. 영상은 이미 너튜브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카메라로 찍은 것 같지 않아서요. 초점이 마치 사람 시선처럼 움직이지 않아요?”
“듣고 보니….”
박가람은 유심히 영상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확실히 이상하다. 쓸데없는 움직임이 너무 많아. 카메라치곤 확대 기능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도 이상하고. 사생활 침해 영상을 거리낌 없이 찾아볼 법한 사람들이 어떤 걸 가장 원하는지 잘 알 텐데 말이지. 네 얼굴이나 핸드폰도 전혀 클로즈업 안 하고, 마시는 와인 상표도 주의 깊게 안 찍고.”
“우리가 발견했을 때도 카메라 렌즈가 아닌 사람이 찰싹 달라붙어 눈알만 굴리고 있었고요.”
“자신이 보고 들은 걸 그대로 영상에다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인가? 하지만 호텔 창문도 기어 올라갔잖아. 그렇다면 능력이 두 개?”
“공범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한율은 방금 한 추측을 정리해서 정상욱 중위에게 보냈다. 그동안 박가람은 다른 한율의 기사를 훑다가 미간을 구겼다.
“세상의 너를 향한 관심이 점점 더 도를 넘을 것 같단 예감이 드는데. 정체 밝힌 거, 후회 안 되겠냐?”
“꾸준한 능력 낭비가 더 후회될 것 같아서요. 그럼 슬슬 나가볼까요?”
“밖에 비바람 치는데?”
쏴아아. 덜컹덜컹.
박가람이 거센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율은 활짝 웃곤, 빠르게 글자를 친 핸드폰을 내밀었다.
[원래 이런 날이, 마나 유동하기에 최고거든요. 질 좋은 마나가 사방에서 휘몰아치니까.]
박가람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우비는 줄 거지?”
박가람의 수련은 그의 고소공포증을 배려해, 까마득한 아래가 잘 보이지 않는 숨겨진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론 접근이 힘든 곳이라 일일이 한율이 데려다주곤 했다. 핸드폰 연결이 안 되어서 의사소통은 무전기로.
오늘은 비 맞지 말라며, 결계로 둥근 지붕도 만들어주고 푹신한 방석도 깔아주었다.
“집중하면 안 추울 거예요.”
박가람은 얼굴에 들러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웃었다.
“아주 고오맙다, 선생님아.”
“전 근처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부르거나 무전 쳐요.”
“엉.”
휙. 한율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박가람은 크게 심호흡한 뒤 방석에 편히 자세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차분히 마나 유동을 하려 했으나.
『끼에에엑…!』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하.”
바로 어제, 자신이 날린 바람의 마법을 맞고서 괴로워하던 괴물의 비명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고통스러워하는 괴물의 눈은 이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갇혀서 아무 짓도 못 하고 가만히 있던 나를, 왜 끄집어내서 이렇게 괴롭히고 죽이려는 거냐고.
『저놈들도 본래 살던 세상에서 살기 위해 도망친 것일지도 모르는데요?』
…훌쩍. 아무리 실전 훈련을 위해서라지만, 무방비하게 있던 괴물을 일방적으로 죽이는 건 심적으로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게이트 괴물들에게 희생당한 사람이 아주 많다. 결계에 갇혔던 동안 힘과 공격 의지가 수그러들지 않았다면, 자신을 물어뜯고자 순식간에 달려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율에게 차마 ‘난 할 수 없다’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이프림도, 남석이랑 라이언도 괴물 때문에 큰일 날 뻔했잖아. 당장 불쌍하다고 눈 감았다가 나중에 사람들이 위험해지면 그땐 어쩌려고 그래. 멍청히 손도 못 쓰고 있다가 후회할 거야?’
박가람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면서 괴물의 비명을 밀어냈다. 얼굴에 번진 눈물과 빗물을 벅벅 문질러 닦고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정신 차리자, 박가람. 철없다는 소리 듣는 것도 지겹지 않냐? 집중하자.’
후우. 재차 심호흡한 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박가람의 몸 주위로 은은한 푸른빛 마나가 천천히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율은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그날 밤. 산장으로 돌아가면서 한율은 박가람에게 고했다.
“형한테 공격 마법은 맞지 않는 것 같으니, 보호 마법과 결계를 중점으로 가르쳐드릴게요. 아직 해원 선배님이랑 JE 선배님도 안 배운 거예요.”
박가람이 반색을 표했다.
“정말?”
“하지만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란 거 아시죠?”
“어….”
한 마디로 다 배워야 한다는 소리였다.
박가람의 눈과 목소리가 작아졌다.
“엉, 열심히 할게….”
어떻게 굴리면서 가르치는 게 좋을까.
한율은 미소 지으며 박가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박가람이 울컥했다.
“…야, 그래도 내가 형이거든? 나보다 키 크면 다냐?! 싸우자, 서한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