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체가 필요해
본래 의식이 있는 사람에게서 마나를 빼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위험하기도 하고. 그래서 한율은 마일스의 한쪽 눈에서 날카로운 무기가 불쑥 나오는 순간, 주변의 마나를 휘감아보았다.
“……!”
쐐엑! 아슬아슬하게 날카로운 끝을 피하곤, 다시 자신을 노리고 휘는 그것을 잘라냈다.
서걱.
…끄으으윽!
마일스가 재갈을 있는 힘껏 물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신경이 연결되었던 건가?’
한율은 고통스러워하는 마일스를 그대로 두곤, 잘라낸 부분을 살피며 마나를 뽑아보았다.
‘흐음.’
1130 이전, 평범한 인간에게서 뽑아냈던 마나의 질보다 훨씬 좋다. 내친김에 마나를 정제해 마력을 만들어보니, 자연에서 얻은 마나, 평범한 인간의 마나로 정제한 마력과는 조금 이질적인 기운이 풍겼다.
한율의 눈이 반짝거렸다.
‘연구가 필요할 것 같은데?’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놀라 안으로 들어온 팀이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한율?]
한율은 마일스에게서 잘라낸 무기를 내밀었다. 점점 빛을 잃으며 피비린내 비슷한 냄새가 짙어진다.
[궁금해서 잘라봤어요. 그런데 많이 아파하면서도 더 공격하지 않는 걸 보면, 이런 무기를 만들 힘이 사라졌든가 아니면 회복 시간이 필요하든가. 둘 중 하나로 보이네요.]
[아…. 이리 주십시오. 연구소에 넘겨서 성분을 조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팀이 가방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마일스의 몸에서 튀어나왔던 무기를 조심스레 담아 밀봉했다. 그동안에도 마일스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을 하실 땐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한율은 고개를 기울였다.
[수잔이, 죽이지만 않으면 밧줄에 매달아 절벽 끝에서 빙빙 돌려도 된다고 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만약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그만.]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갈까요?]
벌써? 팀이 이렇게 묻는 얼굴로 두 눈을 끔뻑거렸다.
[용무는 다 끝난 겁니까?]
한율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가람과 수잔이 기다리는 사무실로 향하는 동안, 한율은 후회의 한숨을 뱉었다. 스위스에서 죽인 위고는 차치하고, 루크 네빌을 포함한 다른 각성자는 괜히 일찍 처리했다고.
‘살려뒀다가 실험에 썼었다면 좋았을 텐데. 뭐, 그래도 쓸 만한 실험체는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문제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어떻게 그들을 잡냐는 건데. …아니. 일부러 복잡하게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벌컥.
“왔냐, 서한율아. 일은 잘 끝났어?”
교도관이 사무실 문을 열기도 전, 박가람이 먼저 복도로 나와 한율을 맞이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으로 보아, 잠깐 떨어졌던 동안 안 좋은 거라도 본 모양.
“네. 그리고 지금 다음 장소로 이동했으면 하는데. 형 생각은 어때요? 피곤하면 하루 푹 쉬었다가 가고요.”
박가람이 고개를 저었다.
“나야 당장 이 교도소를 벗어나기만 한다면 뭐든 상관없다, 동생아. 네 뜻대로 하렴. 휴식이야 이동 중에 실컷 취할 수 있잖니.”
“네.”
9월 3일, 저녁 7시 55분.
박가람과 서한율을 제외한 어스래빗 멤버들은 강보배의 생일파티 라이브 방송을 준비했다.
서한율이 아이돌을, 어스래빗을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한 뒤로 어스래빗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 역시 자연스럽게 많아졌다. 그러나 멤버들은 마냥 기쁘지 않았다.
정말로 어스래빗이란 아이돌그룹을, 어스래빗의 노래와 무대를 좋아하는 팬들이 아닌 까닭이었다. 관심이 팬심으로 변할 수도 있으나, 당장은 거품이었다. 이프림이 새로 대거 유입된 ‘서한율 악개’로 인해 불편해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기도 하고.
며칠 전 ‘서한율 없는 서한율 생일파티’ 라이브 방송을 진행할 때도, 이후 멤버가 개인 라방을 진행했을 때도 이런 일이 벌어졌었다.
-[오늘 한율 안 나오나요?]
-[한율한율한율]
-[한율 보고 싶어, 사랑해]
-오늘은 멤버 개인 라방입니다. 율톢 해외 가서 안 나오니 그만 물어보세요. 다른 멤버들에게 실례입니다ㅜㅜ
-[한율한테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한율에게서 연락 왔나요?]
-[한율 그만 찾으라고!!! 무례하다, 진짜]
서한율은 SNS에다 영어로 이런 글을 올리기도 했다.
[적절하지 못한 무례한 애정 과시로 어스래빗 멤버들, 내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한다면, 당신은 결코 나를 존중하지 않는 최악의 팬입니다.]
서한율의 SNS는 전 세계 SNS 팔로우 TOP 5였다. 수많은 사람이 그의 말에 하트를 누르고 공유했다.
“과연 이번엔…?!”
8시 정각. 강보배의 생일파티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다.
멤버들은 활발하게 인사했다. 채팅은 차남석이 핸드폰으로 살폈는데, 서한율의 따끔한 충고가 먹힌 건지 이번엔 서한율을 찾거나 그에 관해 질문하는 글이 이전보다 훨씬 줄었다.
“그럼 이제 보배 씨를 위한 선물 증정식이 있겠습니다. BGM 깔아주세요.”
“둥둥, 두두둥둥.”
“아니, 폰으로 음악을 켜달라고요.”
“음악을 켜기 전까지 자체 BGM입니다.”
서한율과 박가람에게서 영상 통화가 걸려온 건 선물 증정식이 끝날 때 즈음.
“라이브 보고 있었어? 타이밍 딱 맞춰서 전화했네?”
“먼저 이프림한테 인사해.”
강보배가 카메라 쪽을 향해 핸드폰 화면을 돌렸다. 박가람과 서한율이 합을 맞췄다.
-[하나, 둘.]
-[안녕하세요, 이프림~. 박가람!]
-[서한율입니다! 안녕~. 보배 형, 생일 축하해요!]
-[생일 축하한다, 보배야. 사랑한다!]
강보배가 웃으면서 준비된 거치대에 핸드폰을 세웠다.
“고맙습니다, 두 분.”
“어이고, 두 분 활약 잘 봤어요. 필라델피아에서 크게 한 건 하셨던데요?”
-[우리 한율이가 고생 많았지.]
“우리 한율이?”
길우성이 일부러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이 아주 친해지셨나 봐요?”
-[걱정하지 마, 우리 막내. 아직 너보단 덜 친해.]
“그렇지?”
-[보배 형한테 줄 선물을 준비했는데요, 여기.]
서한율이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카메라에 들이댔다.
-[택배는 언제 도착할지 모르니까, 나중에 한국 돌아가면 그때 직접 줄게요. 기대하세요.]
-[우리 진짜 고심해서 골랐다, 보배야.]
“감사합니다. 흐.”
서한율과 박가람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멤버들과 함께 강보배에 관한 재밌는 에피소드를 떠들며 놀았다. 서한율이 라이브에 통화로나마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접속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나, 다른 멤버들도 서한율 악개에 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두 사람, 한국엔 언제 와?”
-[조만간 들어갑니당.]
-[힘도 다 썼고, 슬슬 본업 복귀해야죠. 부모님이랑 고양이, 이프림도 보고 싶고.]
“숙소에서 라방할 걸 그랬다. 그럼 달냥이 바로 보여줬을 텐데.”
“하뉼, 나중에 숙소 들어가서 달냥이랑 영상 통화시켜줄게.”
-[네. 그럼 이만 끊을게요. 슬슬 나가봐야 해서.]
-[나중에 봐요, 이프림~.]
영상 통화는 서한율의 굿나잇 인사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오늘은 채팅 분위기 괜찮았지?”
강보배의 생일파티 라방이 끝난 뒤. 차남석이 유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서한율이 SNS로 충고한 게 먹힌 것 같아요. 그런데요, 형. 괜찮아요?”
“뭐가?”
“다음 주에 형수 형 입대한다는 기사 떴던데요. ACCOM 멤버 중 한 명이 중환자실에 있다는 내용도.”
“아….”
유호는 테이블을 정리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번에 너랑 보배만 펜션에 두고 급히 갔던 날. 그날 김형수랑 만나서 얘기 나눴어. 이미 입대 결심을 굳힌 뒤라서 말리진 못하겠더라.”
“그럼 ACCOM 멤버는…. 아니에요.”
차남석은 하려던 질문을 삼켰다.
현재 인터넷에선 중환자실에 입원한 ACCOM 멤버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다 그렇게 된 게 아니냐는 추측이 사실처럼 번지고 있었다. ACCOM의 소속사 대표가 직원들 월급과 거래처에 지급해야 각종 대금과 공과금, ACCOM에게 정산금도 주지 않고 잠적했다는 이야기도 더해져서.
김형수는 멤버에 관한 루머를 정면 반박하듯, 라이브 방송을 통해 씩씩하게 입대 사실을 알렸다.
『저도, 그 녀석도 건강하게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럼 호 형 친구 중에 호 형이 제일 늦게 입대하는 거야?”
길우성이 남은 케이크를 포크로 크게 푹 뜨면서 물었다. 라이언이 길우성의 눈치를 보다가, 거기에 꽂힌 딸기를 슬쩍 가져간다.
“음…. 그렇게 되나? 아냐, 지은이가 남았어.”
“어쨌든 호 형 입대할 땐 친구들한테 조언 빙자한 잔소리 진짜 많이 듣겠다. 그런데 형수 형은 어디로 자원할 거래? 설마 게이트 방어선은 아니지?”
“맞아. 거기로 가려고 한대.”
“와…. 지금 제발 거기만 뽑히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사람 천지라던데, 형수 형 상남자였네. 다시 봤…. 여기 있던 내 딸기 어디 갔어.”
라이언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내가 대신 먹어줬어. 우성, 요즘 볼 통통해져서.”
“잉?”
유호가 길우성을 유심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우성이 너 제주도 다녀온 뒤로 묘하게 살찐 것 같다?”
“아이돌이란 놈이. 관리 안 하냐?”
강보배도 길우성을 살폈다.
“턱선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마지막으로 이건우가 길우성에게 어깨동무했다.
“내일부터 같이 운동하자, 막내야. 먼 타국에서 고생하면서도 본업 얘기 꺼낸 친구가 널 보며 실망하는 모습, 보고 싶진 않잖니?”
길우성은 울상을 지으며 힘없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응….”
일주일 후인 9월 10일 금요일.
한율과 박가람은 미국이 준비해준 비행기를 타고 인천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공항 측의 배려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VIP 통로를 이용, 입국 절차를 거쳐 공항을 빠져나왔다.
두 사람을 마중 나온 유호의 차를 타고 서울 숙소로 가는 길.
“잠시나마 지구 대스타가 된 기분이었다. 네 덕에 여러모로 호강하는구나. 우리 가족한테 줄 선물도 다 사주고.”
“나랑 다니면서 형도 고생 많이 했으니까요.”
“응. 고생….”
박가람이 차창 밖 풍경을 보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많이 했지. 정말로. 흐하하. 설마하니 괴물들한테 날 밀어놓고선 다짜고짜 보호 마법을 전개해서 버티라고 할 줄이야. 흐하하.”
유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랬어, 한율아?”
“한 대만 툭 쳐도 날아가는 약한 괴물들이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래도 난 무서웠다고! 괴물들이 막 라마처럼 침을 찍찍 뱉으면서 건들건들 다가오는데, 막!”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듯 박가람이 질색하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영상도 찍었으니까, 나중에 형이 봐. 그리고 서한율의 무자비한 교육 방식에 대해 잔소리 좀 해 줘.”
“으음. 보고 판단할게.”
“멤버들은 다 뭐 해?”
“보배랑 라이언은 다음 트레리안 앨범 준비로 회사에 있고, 남석이는 프로그램 미팅 갔어. 건우는 우성이 데리고 운동.”
박가람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슬슬 일상을 찾아가려 노력하는 모습이 참 기특하구먼.”
“다 한율이 덕분이지. 한율이 너도 도레미 피자 광고 새로 찍어야 한다고 들었는데.”
“네. 원래는 7월부터 새 광고가 나가기로 했는데, 게이트 사태가 벌어지는 바람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못 내보내게 됐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새로 다시 찍기로 했어요.”
“그거 계약 올해 12월까지 아니었나?”
“모델이 한율이니까, 계약 기간이 조금만 남았어도 광고 효과를 보고 싶은 거겠지. 아 참, 그 소식 들었지? 게이트 방어선 범위, 안쪽으로 다시 재조정될 거라는 거. 한율이 네가 제임스란 거 밝히고, 미국이 무기 지원해주겠다 약속한 뒤로 게이트 방어선에 자원하는 사람이 많아졌대.”
한율은 말없이 입가를 올리곤 창밖을 보았다. 육눈박이 출현 뒤로 게이트에서 나오는 괴물의 수가 점점 감소하고 있다더니, 하늘을 날아다니던 전투기나 헬기 역시 지난번보다 줄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율은 말을 꺼냈다.
“각성자 범죄는요?”
죽는 게 더 이로운 실험체가 필요하다.
될 수 있는 한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