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8화 (380/427)

이 이상 무뎌지면 안 돼

“요즘 들어 각성자 범죄는… 잘 모르겠어.”

유호가 고개를 저었다.

“가끔 뉴스에 뜨기는 하는데, 그보다 일반인들의 강력범죄 사건이 더 심각하거든. 더구나 국내 각성자는 대부분 국가에 등록된 상태잖아. 여기에 한 번이라도 범죄를 저지르면 전자발찌를 착용해야 해서, 오히려 몸을 사리는 느낌이야. 자세한 건 해원이가 알겠지만 말이야.”

한율은 아쉬운 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네.”

서울의 어스래빗 숙소.

므아앙!

“늦게 와서 미안해, 달냥.”

한율은 냉큼 달려와 안기는 달냥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달랬다. 그러다 곧 불쾌하게 인상을 구겼다. 2층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길우성의 몰골을 보곤.

“어떠냐.”

상의를 벗은 길우성이 이두박근을 자랑한다. 불끈.

“나의 노오력이 담긴.”

이번엔 몸을 돌려 등 근육을 불끈.

“이 멋진 육체가.”

한율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험한 말을 뱉었다.

“쌍욕 나올 뻔했다, 새끼야. 남의 눈 더럽히지 말고 올라가서 옷 입어, 새끼야.”

“오랜만에 보는 친구에게 새끼, 새끼 남발이라니. 너무하는구먼.”

불끈.

“빨리 안 꺼져?”

사아아. 거실에 서늘한 바람이 휘몰아치자, 그제야 길우성이 후다닥 2층으로 도망쳤다. 크하핫! 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며.박가람이 별 해괴한 꼴을 다 보겠다는 얼굴로 유호를 돌아보았다.

“막내 상태 왜 저래?”

“다이어트가 좀 힘들었었나 봐. 우성이, 어릴 때부터 안무 연습하느라 살찔 틈도 없었고 살도 잘 안 찌는 체질이라, 다이어트도 빡세게 해본 적 없었잖아.”

“그만큼 살이 쪘었다는 거지? 쯧쯧. 혼자만 뭘 그렇게 맛있는 걸 먹었길래.”

하아. 한숨을 내쉰 한율은 다시 달냥을 쓰다듬으며 안구를 정화했다.

“우리 달냥인 더 예뻐졌네?”

므앙.

한율의 방은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청소해 준 터라 여전히 깨끗했다. 짐 정리를 마친 한율은 말끔하게 씻은 뒤 외출 준비를 했다.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피곤했지만, 할 일이 많았다.

편한 옷을 입고 거실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길우성이 물었다.

“어디 가?”

“회사에 들렀다가 부모님 댁, 별장, 펜션까지 둘러본 후에 게이트 방어선에 가보려고.”

“밤늦게나 돌아오겠네.”

“해원이 형이 지내는 곳에서 자고 올 수도 있어.”

그동안 이해원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도 해야 하므로.

“남석 씨가 오늘 너 온다고 맛있는 거 해준다고 그랬는데. 연락해야겠당.”

“형이 뭐 먹고 싶냐고 톡으로 물어봐서, 이미 대답했어.”

“쳇. 오래간만에 네 핑계 대고 맛있는 것 좀 먹나 했더니. 그나저나 너, 우리 00즈 모임 완전히 잊은 건 아니지? 애들이 너한테 부담 줄까 봐, 이런저런 오해 같은 거 살까 봐 연락 자주 못 하는 거지, 둘 다 너 보고 싶어 한다.”

“다음 주 화요일. 그날이 광고 촬영 다음 날이라 마음껏 먹을 수 있어.”

“OK, 그럼 네가 단톡방에 톡 올려.”

“어.”

아직 한율의 입국 소식이 안 알려진 덕분인지, 숙소 앞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한율은 큰 어려움 없이 자신의 차를 끌고 회사로 향했다. 한율의 차는 평소에 차남석이나 이건우가 몰고 다녔는데, 바로 어제 세차했는지 안에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고 연료도 가득했다.

‘온종일 돌아다녀도 되겠네.’

WB래빗 엔터테인먼트.

로비 직원이 알려준 걸까. 계단을 올라가는데 3층에서 좌기훈 대표가 뛰다시피 내려오며 한율을 반겼다.

“한율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표님.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냈지. 아니, 그런데.”

와락 끌어안고선 어깨를 두드린 좌 대표가 휙 떨어지더니, 한율을 이리저리 살폈다.

“우리 서한율 씨, 날이 갈수록 너무 멋있어지는 거 아니야? 전 세계 여성분들 심장 놀라게 말이야.”

한율은 과한 농담에 한 번 웃어주곤 화제를 돌렸다.

“대표님 이사하셨다면서요. 나중에 주소 알려주세요. 결계 만들어드릴게요.”

“수고스럽게 뭘 그런 걸 다. 그 힘 아껴뒀다가 더 좋은 일에 써야지. 지금 우리 집 주소가 어떻게 되냐면….”

지난달, 좌 대표의 집에 침입해 가족들을 인질 삼아 ‘서한율의 정보를 모두 넘겨라’ 협박했던 무리 모두 구속됐다. 범죄의 중심에 있었던 미성년자 각성자 또한.

미성년자 각성자는 자신 또한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했으나, 전 세계 서한율 팬들의 성난 여론을 의식한 것인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밤중에 고층 아파트에 몰래 들어갈 수 있는 각성자가, 일반인의 협박에 못 이겨 가담했다는 게 말이 안 된다며 말이다.

“그 뒤로 별일 없으시죠?”

“음. 오히려 그 사건 이후로 우리 회사를 좋게 봐주는 사람이 아주 많아졌지 뭐냐. 얼마나 좋은 소속사면 천하의 서한율이 애정을 갖고 지켜주냐고, 투자하고 싶다는 연락도 많이 와. 섣부른 판단으로 실수하게 될까 봐 일단 다 정중히 거절하곤 있지만 말이다.”

당시 받았던 정신적 충격도 많이 가라앉은 모양. 한율은 싱글벙글 웃는 좌 대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니 다행이네요.”

한율은 2층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오 팀장과 회의실로 들어갔다. 메일로 받아보았던 피자 광고 콘티를 확인하고 간단히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네가 말한 대로 다른 광고 제안 모두 거절하고 있어. 계약 연장 요청도.”

“감사합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제 모든 게… 본의 아니게 상당한 파급력을 주는 것 같더라고요.”

오 팀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율이 입었던 옷, 신발, 모자, 선글라스, 자주 가지고 다니는 가방 등. 최근에 노출된 제품일수록 품절 대란을 빚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달 이탈리아에서 안토니오 소령에게 받았던 케이크. 해당 케이크를 만든 파티시에가 이런 SNS를 올렸다. 케이크 사진과 함께.

[한율이 먹을 케이크란 걸 알았다면 더 멋있게 꾸몄을 텐데!]

한율은 거기에다 하트를 누르고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답변을 달았다. 그러자 그 파티시에는 순식간에 SNS 인기 스타로 등극, 가게 역시 한율이 먹었던 케이크를 주문하기 위한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게 되었다.

SNS 실검에는 한율이 생일 음식이라며 먹은 소고기미역국 레시피도 올라왔다. 한국 식품도 인기가 너무 많아져, 한인타운에서도 구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고.

미국에선 엉뚱하게 ‘서한율처럼 멋있게 텍사스 영어 사용하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이런 지경이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은 앞다퉈 한율을 광고 모델로 기용하고 싶다며 러브콜을 던지는 중이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모자라는데, 신경 쓰기 힘든 상황이니까. 그래도 어스래빗을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맙다.”

진심이 담긴 오 팀장의 미소. 한율은 광고 콘티로 시선을 내리며 대답했다.

“제 고집이자 자기만족인데요. 그러니까 괜히 저한테 부담될까 봐 걱정하거나 눈치 보지 마세요.”

오 팀장이 눈을 빛냈다.

“그럼 새로 들어온 대본….”

한율은 두 손을 들어 사양했다.

“그건 아직 좀.”

“하하. 농담이야.”

오래간만에 회사에 온 김에 한율은 결계를 살펴보고, 그가 왔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옥상까지 뛰어 올라온 SPRabbit 멤버들과 다정하게 셀카도 찍었다.

슬쩍 아래를 내다본 현강희가 말했다.

“선배님, 이대로 더 있다가는 차 못 끌고 가실 것 같은데요?”

그새 한율이 왔다는 소문이 퍼진 것일까. 카메라나 서한율의 슬로건을 든 사람들이 WB래빗 엔터 사옥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가봐야겠다. 다들 다치지 않게 연습 잘하고, 다음에 또 봐요.”

“네, 선배님!”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선배님!”

“그런데 형, 미국에서 선물 안 사 왔어?”

“아, 변지욱. 쫌.”

본가로 내려갔다가 경기도의 별장과 펜션을 모두 둘러보고, 다시 서울의 게이트 방어선으로 향할 땐 이미 해가 완전히 저문 밤이었다.

“각성자에게서 뽑아낸 마나가?”

“네.”

본부에 들렀다가 온 이해원의 숙소.

진지한 얼굴로 한율의 이야기를 들은 이해원은 노트북으로 시선을 내렸다. 모니터엔 현재까지 파악된 국내 각성자 리스트가 떠 있었다.

“그래서 강력범죄를 저지른 각성자가 있는지 물었구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는 실험이니, 죽어 마땅한 범죄자를 실험체로 삼자는 직접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원은 괴물의 마나를 추출하는 기술을 익혔다. 당연히 인간을 상대로 실험했을 때의 위험성을 잘 안다.

윤리적인 문제로 거부감을 드러내진 않을까. 한율은 이해원의 눈빛을 비롯한 표정을 살폈다.

“한국보다는.”

이해원이 한율을 바라보았다.

“중국에서 찾는 게 낫지 않을까?”

“…….”

생각보다 담담한 반응. 오히려 그는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우리나라는 리스트가 있어서 사람 찾기야 편하지만, 실험에 동원할 수 있는 각성자 수 자체가 적잖아. 그리고 실험 참가자의 생명에 지장이 생길 수 있단 사실이 알려지면 비난하는 목소리도 크게 나올 거고.”

“그래서 폐쇄적이고 인구가 많은 나라로?”

“응. 그리고… 요즘 중국에서 우리나라에선 상상할 수 없는 상당히 흉악한 범죄 빈도가 늘고 있대. 먹을 게 없어서 괴물도 모자라 같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까지 돌고.”

한율은 중국의 한 지역에 한국인을 포함한 많은 외국인이 레드 게이트와 함께 고립되었다는 기사를 떠올렸다.

“마침 그곳에 갈 만한 적당한 핑곗거리도 있고?”

이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형.”

“응?”

한율은 가만히 이해원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잘생긴 얼굴이지만, 몇 달 동안 게이트 방어선에서 겪은 경험이 녹아 있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거 우습겠지만, 이 이상 무뎌지면 안 돼요.”

의아하게 한율을 바라보던 이해원의 얼굴이 멍해졌다.

“어…?”

한율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벌써 이러면 안 돼요, 형.”

“…….”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르는 건지는 말하지 않았으나, 이해원은 눈치가 빨랐다. 한율은 점차 어두워지는, 깊은 생각에 잠기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솔직히 이해원이 제시한 대안에 솔깃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여러모로 리스크가 너무 컸다. 오히려 음지에서 실험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현재 지구인들은 내가 살던 세상을 몰라. 내 진짜 목적은 더더욱.’

다음 날. 한율은 게이트 방어선 본부의 김관식 소장을 찾아, 국내 각성자 연구소장과 함께 논의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말했다.

“무슨 논의 말입니까?”

“게이트 결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실험에 관해서요.”

한율은 태연히 거짓말했다. 아니, 덤으로 정말 실험해볼 생각이니 완전히 거짓도 아니었다.

물론 처음부터 실험체의 생명에 지장이 갈 만큼 위험하게 진행하지도 않을 거고.

소장이 눈을 크게 뜨며 상체를 내밀었다.

“가능한 겁니까?”

“그 가능성 유무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입니다. 그리고 이 실험을 위해선 많은 각성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가 하려는 실험이 지구인의 생존을 위한 훌륭한 희생으로 비칠 수 있도록 여론을 만들 생각이었다. 만약 이 실험에서 희망이 엿보인다면, 지구인들 스스로 기꺼이 희생자를 바치는 악당이 되어줄 것이다.

한율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하지만 제가 내일과 모레는 스케줄이 있어서 힘들고, 오늘 잠깐이라도 각성자 연구소에 찾아가 구체적인 계획부터 말씀드리고 싶은데. 연락 부탁드려도 될까요?”

소장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바로 전화 넣겠습니다.”

그날 저녁. 국가에 등록된 국내 각성자의 핸드폰이나 메일로 각성자 연구소가 보낸 알림이 도착했다. 포털사이트 메인에도 기사가 떴다.

[각성자 연구소, 게이트 결계 실험 도전 “많은 각성자 참여 부탁”]

[각성자 연구소가 각성자의 힘으로 게이트 결계를 만들 수 있는지에 관한 실험을 위해 국내 각성자에게 실험 참여 협조를 부탁했다. 연구소 관계자 말에 따르면, 이 실험엔 대규모 게이트 결계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최강의 각성자 서한율이 참여하며…(중략).]

-서한율이 참여하면 무조건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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