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진은수가 체육관에 도착한 건 오후 1시가 조금 지날 무렵이었다. 본래라면 각성자 연구소부터 들렀다가 다른 각성자들과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지만, 연구소 측에서 그녀의 유명세를 고려해 따로 와도 된다며 편의를 봐주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보니 점심시간이라, 직원들이 자리를 비웠으니 밖에서 기다리라는 경비원의 이야기를 듣곤 차에 얌전히 앉았다. 운전석에.
조수석에 앉은 매니저가 웃으며 물었다.
“뒷자리에 편히 앉는 게 어때요, 은수 씨? 운전석은 불편하지 않아요?”
면허 취득 2개월 차. 아직 운전하는 게 무섭기는 하지만 재미가 더 커, 진은수는 종종 게이트 방어선까지 차를 몰고 다녔다. 오늘도 매니저 대신 운전대를 잡았다. 매니저는 불안한 얼굴로 손잡이를 잡았고.
진은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돌아갈 땐 내가 운전할게요.”
“으음, 피곤하면 그때 부탁드릴게요.”
“네, 그렇게 해요….”
진은수는 핸드폰으로 각성자 커뮤니티를 살폈다. 마침 궁금한 사항이 담긴 게시글이 올라왔다.
[오늘 오전 실험 참여한 사람들 후기 좀]
-서한율이 만든 결계로 능력 전개했더니 힘이 슉 빨려 들어가는 느낌임. 왜 사전에 한동안 각성 능력 못 쓸 수 있다고 경고했는지 알겠더라.
ㄴ정말 못 씀?
ㄴ나는 안 됨.
ㄴ나도.
ㄴ난 되긴 하는데 위력이 확 줄었음.
-서한율 실물 개존잘
-60만 원 받았다ㅋㅋㅋ
ㄴ교통비10 수고비20 아님?
ㄴ결계 색+다음 실험에도 참여하는 조건으로 추가금 더 받을 수 있음. 흰(기본)<초<파<빨 순.
ㄴ헐.. 능력 개쎈 사람이 유리한 거 맞네
ㄴ공격계 아닌데 빨간색 나온 사람 있었어요.
‘색? 한정 씨가 말하는 각성자 특유의 아우라랑 다른 건가?’
진은수는 의아했으나, 곧 알게 되리라 생각하면서 다른 글을 클릭했다.
[서한율 계속 있나요?]
-네.
-아마도. 서한율 본인 입으로 실험 주도하게 되었다고 말했음
진은수는 매니저를 돌아보았다.
“저 뒷자리로 갈게요.”
“아깐 괜찮다더니…. 네.”
뒷자리로 옮긴 진은수는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을 점검했다. 머리카락도 단정하게 빗었다.
“……하.”
그러다 곧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쁘게 보여서 뭐 할 건데. 어차피 선배님은 나한테 아무 관심도 없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만약 서한율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제임스란 사실을 고백한 후 따로 연락했을 것이다. 게이트 방어선에서 마주쳤을 때 모른 척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지금껏 개인 톡은 커녕 단톡방에서도 그는 조용했다.
그리고.
-서한율 제임스로 이탈리아에 있을 때 같이 비행기 탔던 이탈리아 여자랑 동거했다던데ㅋㅋ
ㄴ동거는 아니지만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었다고 들었음.
ㄴ그게 그거 아님?
ㄴ그분 사진 있음?
ㄴ(사진)
ㄴ모든 게 은혜롭다.
ㄴㅋㅋㅋㅋㅋㅋ
ㄴ독일어, 한국어, 영어, 모국어까지 4개 국어 능력자에 외교부 직원.
ㄴ다음 생엔 서한율로 태어나겠다.
ㄴ연예인들 보면 본인 머린 텅텅해서 그런지 결혼은 꼭 학력 좋은 사람이랑 하려는 경향 있더라ㅋㅋㅋ 아 서한율 얘기는 아니고
이외에도 서한율이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여러 여자를 만나고 다닌다는 둥의 루머가 많았으나, 이탈리아 여성처럼 신빙성이 높아 보이는 이야긴 없었다.
“매니저님.”
“네?”
진은수는 주섬주섬 거울을 가방에 넣었다.
“예전에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나서 어떻게 극복했는지, 물어봐도 돼요?”
“음….”
매니저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그냥, 매일 정신없이 일하고 피곤해서 쓰러지듯 잠자는 생활 반복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잊히던데요? 바쁜 게 최고예요.”
진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실험 참여하면 당분간 능력 못 쓰게 될 수 있다더라고요. 그렇게 되면 한동안 게방부 일 못 도우니까, 저 스케줄 잔뜩 잡아주세요.”
실연당했었나? 순간 매니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으나, 그는 곧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나만 믿어요, 은수 씨. 실장님이 굉장히 좋아하시겠다.”
오후 2시.
한율은 오전에도 그랬듯이, 오후 실험 참여 각성자들 앞에 서서 인사하고 진행할 실험에 관해 간단히 설명했다. 그 옆에는 오전에 만들어 놓은 결계가 여전히 세워져 있었다.
도중에 가장 뒤쪽에 있던 진은수와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으나, 진은수가 휙 고개를 돌리며 피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알은체하고 싶진 않은 건가 싶어, 한율도 그쪽으로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다. 그와 진은수 사이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살피는 사람도 많고.
“능력과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으신 분은 이쪽에 따로 서주세요.”
진은수는 가리는 걸 선택해, 마지막 즈음이 되어서야 결계 앞에 섰다. 사방에 더 큰 새카만 결계가 쳐지고 그 안에 한율과 연구소 직원까지, 단 셋만 있게 될 줄 몰랐다는 당황한 얼굴로.
“오랜만이에요, 은수 씨. 잘 지냈어요?”
“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번 실험에 참여하면 한동안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수 있는데. 괜찮아요?”
바로 어제, 한율은 미국의 교도소에 있는 연쇄 살인마 ‘마일스’가 다시 각성 능력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설마하니 고작 마나를 추출했다고 각성 능력이 사라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어쨌든 그 덕에 한율은 마음 편히 결계로 위장한 마나 흡수 마법진을 만들었다.
“네, 알림 메시지에 적힌 주의사항 확인했어요. 각성자 관리과에도 미리 연락드렸고요.”
“네. 그럼 이 앞에 서서 차분히 능력을 전개해보세요.”
진은수는 앞서 다른 각성자들이 그랬듯이 검은색 테이프에 발끝을 대고 섰다. 그리고 차분히 카모플라쥬 능력을 전개했다. 진은수의 모습이 흐릿해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범위가 너무 작기는 하지만, 정말 감쪽같은데?’
한율은 짧은 감상을 속으로 중얼거리곤 마법진을 살폈다. 마법진은 각성자의 능력에 담긴 마나의 질에 따라 흰색, 초록색, 파란색, 빨간색 순으로 변하게끔 설계했다.
‘과연.’
사아아. 은은한 푸른색을 띤 하얀 마법진이 진은수의 능력에 담긴 마나에 반응하며 변하기 시작했다. 초록색에서 또렷한 파란색을 거쳐, 어둑한 붉은 색으로.
“…….”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율의 눈도 반짝 빛났다.
스륵. 불과 몇 초 만에 카모플라쥬 능력이 해제되고 진은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벙벙한 얼굴로 제 두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힘이 그대로 쑥….”
“수고했어요, 은수 씨. 보면 알겠지만 가장 높은 단계인 빨간색이 나왔거든요. 괜찮으면 다음 실험에도 참여 부탁해도 될까요?”
“어…. 네? 하지만, 저기, 힘이….”
“며칠 쉬면 금세 돌아올 거예요.”
“아, 조금 전에 말씀해 주셨었죠. 당황해서 정신이…. 그, 다음 실험은 언제…?”
한율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개인적으로 연락드릴게요.”
처음으로 진은수가 한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개인적으로요…?”
“네. 개인의 컨디션이 중요한 실험이라서요. 그리고 연구소에서 진행될 예정이니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
잠깐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진은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네, 알겠… 습니다. 그럼, 어, 수고하셨습니다.”
“네, 수고했어요. 다음에 또 봐요.”
“네.”
크게 고개를 꾸벅인 진은수가 종종걸음으로 검은색 결계를 벗어났다. 그동안 마법진은 다시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조용히 실험 결과를 기록하던 연구소 직원이 큰 소리로 말했다.
“다음 분.”
검은색 결계 안으로 다음 각성자가 들어왔다. 쭈뼛쭈뼛 한율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안녕하십니까. 둔갑 능력을 지닌 황재은이라고 합니다.”
그 남자는 두 달 전, 한율로 둔갑한 채 인터넷 방송을 켜고 양평 펜션에 침입했던 황재은이었다.
한율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하필이면 그로 둔갑해 범죄를 저지르려던 사람인데 괜찮겠냐, 연구소에서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흔쾌히 괜찮다고 대답했다.
제 발로 굴러 들어온 적절한 실험체를 내칠 필요가 있을까.
“네, 안녕하세요.”
* * *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유호의 개인 작업실.
다짜고짜 작업실로 쳐들어온 길우성이 유호에게 우편물 하나를 들이밀었다.
“이게 뭐지, 큰형? 응? 이게 뭘까아?”
길우성의 차량이 속도위반했다며 날아온 고지서였다.
“이 날짜, 이 시간에 나는 내 사랑스러운 차를 형들에게 믿고 맡긴 채 제주도로 향했는데, 어떻게 과속 카메라에 내 차가 찍힌 걸까? 응? 큰형, 본인 차는 아주 천천히 안전 운전하더니, 응? 이미 남석 씨랑 보배 형한테서 형이 운전했단 사실 다 들었으니까 발뺌할 생각하지 마쇼!”
“미안해, 우성아. 그게 결국… 음, 날아왔구나.”
작업에 집중하느라 하룻밤을 꼬박 새운 유호는 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심 게이트 괴물이 단속 카메라 박살 냈길 바랐는데.”
“아니, 그걸 말이라고? 어스래빗 리더나 되는 사람이 세금 아까운 줄 모르고!”
“이거 범칙금 말고 과태료로 내야 벌점 안 깎이는 거 알지? 내가 줄게. 여기. 잔돈은 용돈.”
길우성은 유호에게 받은 20만 원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그러곤 폴짝폴짝 작업실을 나가며 신나게 외쳤다.
“신상 닭가슴살 사 먹어야지!”
쯧쯧. 유호는 고개를 흔들곤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다이어트가 저렇게 정신 건강에 해롭다….”
소파. 커다란 토끼 인형 옆에 쭈그리고 앉아, 길우성의 눈에 띄지 않았던 크리스탈 래빗의 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렇게 보이네.”
“그런데 넌 안 가? 나 슬슬 불편해지려고 하는데.”
“십년지기 사이에 뭐가 불편해. 지금까진 별말 안 해놓고선. 여친이랑 영상 통화라도 할 거야?”
달칵, 달칵. 유호는 마우스를 클릭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 그런 게 어디 있냐? 만들고 싶어도 그럴 시간 없다는 거 제일 잘 알면서.”
“바빠도 연애하는 애들은 어떻게든 하는 거 제일 잘 알면서. 음방 MC 하면서 많이 봤잖아.”
“그렇긴 하지.”
“…….”
“…….”
다시 찾아온 정적. 유호는 거울에 비치는 은영을 힐끗하곤 재차 한숨을 쉬었다. 아주 작게.
“은영. 네 솔로 앨범, 적절한 시기 되면 일정 새로 조율하고 나오게 될 테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
은영이 거대한 토끼 인형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응…. 아, 참. 너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은영이 심각한 얼굴로 토끼 인형의 손을 꽉 잡았다.
“요즘 이 바닥에 이상한 종교 권유가 퍼지고 있대.”
한편, 신나게 유호의 작업실을 나선 길우성은 얼마 못 가 시무룩해졌다. 맞은편에서 오던 이건우를 발견해서가 아니었다.
“뭐냐, 막내? 표정이 왜 그래?”
“난 봤어. 거울에 비친 그분. 조용히 숨어있던 그분.”
“귀신이라도 본 거야?”
길우성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뜸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면 발뺌하겠지?”
“귀신이?”
“이 형은 대낮부터 웬 귀신 타령이야? 우리 회사만큼 귀신 청정 연예기획사가 어디에 있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몰라? 가람이 형이 그랬어.”
그날 저녁.
게이트 방어 지휘부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게이트 방어선 범위를 일부 축소, 통제 구역 중 일부 지역 역시 자연스럽게 해제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국토부는 도시 복구 작업을 진행할 장비와 회사, 인력이 필요하다며 호소했다.
각성자 연구소에 있는 서한율, 작업실에서 잠든 유호를 제외한 어스래빗 멤버들은 연습실에서 해당 뉴스를 봤다.
“비 엄청 많이 오던 날, 처음 게이트 방어선이 무너졌을 땐 진짜 우리나라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