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고래가 개미 힘 뺏어서 뭐 해
추석을 하루 앞둔 9월 20일.
사흘 동안 각성자 연구소가 있는 세종시에서 지내던 한율은 서울로 돌아왔다. 숙소에 들러서 가볍게 씻은 뒤, 매니저 조유찬과 함께 간 곳은 강남에 있는 샵.
조유찬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샵 직원에게 당부했다.
“한복 입고 뉴스에 나갈 거니까 과하지 않게, 단정하게 부탁드립니다.”
“네엡.”
스타일리스트가 챙겨온 한복으로 갈아입고 향한 곳은 지난번, 제임스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던 KBC 뉴스 스튜디오.
“어서 와요, 한율 씨. 오늘 인터뷰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본의 아니게 방송 사고 유발한 거 죄송해요.”
“아뇨, 아뇨, 별말씀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 이해합니다. 우리 다 한율 씨 응원하는 거 알죠?”
“네, 감사합니다.”
오늘은 인터뷰 내용을 사전에 논의해 대본이 나와서 그런지, 스태프들도 한결 마음이 편해 보였다. 뉴스 생방송에 앞서 리허설을 진행할 땐 모두 미소 지었다.
“역시 서 국장님 아드님. 발음이랑 발성, 시선 처리 다 좋네요. 표정도 자연스럽고.”
“아이돌이자 배우이기도 하잖아요.”
오후 5시. 생방송 뉴스가 시작되었다. 한율은 20여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영상이 흘러나올 때 데스크 앞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오늘, 추석 연휴를 맞이해 특별한 손님이 자리해주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분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십니까.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의 멤버이자 배우, 그리고 각성자인 서한율이라고 합니다.”
한율은 대본에 적힌 대로, 지난번 출현해 제임스라고 밝힌 이후에 있었던 일들, 최근 미국에 가서 한 일들과 현재 각성자 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실험에 관해 앵커와 이야기 나누듯 인터뷰했다.
“각성자의 능력이 제각기 달라도, 근본적인 힘은 같을 거란 생각에 착안해 이번 실험을 떠올리셨다는 거군요.”
한율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태연히 거짓말했다.
“네. 저도 제 능력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불안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절 믿고 실험에 참여 및 지원해주신 각성자 분들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한율 씨가 생각하기에 이번 실험,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이제 막 시작 단계라 가능성을 말하기엔 이르지만, 적어도 무의미한 실험이 되진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자신감이 섞인 여유로운 대답에 앵커가 흐뭇하게 웃었다.
“진솔한 답변 감사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시청자분들께 추석 인사 부탁드립니다.”
“네.”
한율은 카메라를 향해 조심스럽게 미소 지었다.
“게이트라는 불청객으로 인해 전 세계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 하루만이라도, 비록 예년처럼 풍성하진 않지만, 따뜻한 추석 명절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한율 씨도 내일 추석을 맞아 고향에 내려가시나요?”
“아니요.”
앵커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웃는 한율.
“게이트 방어 지휘부 일을 도울 예정입니다.”
뉴스 인터뷰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대형 포털사이트 메인엔 이런 기사들이 올라왔다.
[서한율, 추석 맞이 게이트 피해 성금 10억 기부]
[서한율, 외면당하는 유기 동물보호소에 3억 기부]
[서한율, 추석에 고향 아닌 게이트 방어선으로]
-우리나라 서한율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미국에서 썼던 힘 다 안 돌아왔다던데 걱정이네요ㅜㅜ
ㄴㅠㅠ
ㄴ그러게 왜 쓸데없이 미국엘 가선
ㄴ우리나라에 필요한 무기 얻으러 간 거예요..
-님들 너튜브에 어스래빗 추석 쳐보셈ㅋㅋㅋ 서한율 송편 인형 탈 쓰고 송편 먹는 거 졸귀ㅋㅋㅋㅋ
ㄴ아직 예고만 나온 걸 추천하네, 이 나쁜 사람
-한복 입고 이런 핏 나오기 힘든데 역시 키 크고 비율 좋고 얼굴 작고 피부도 빛나고 이목구비도 단정하고 예쁘고 잘생기니 서한율 부모님은 아들 볼 때마다 무슨 생각 할까 아니 서한율 미래의 와이프는 ㅅ1발 전 인류한테 죄송하다고 사과해라
ㄴ마지막 급발진ㅋㅋㅋㅋㅋㅋ
-각성자 커뮤에서 서한율 폭로 나왔던데 그건 해명 안 함?
ㄴ무슨 폭로요?
한 인터넷 커뮤니티.
[현재 삭제된 각성자 커뮤 서한율 폭로 게시글 박제]
[(문해력 떨어지는 놈들 위해서 간결하게 말함.
현재 각성자 연구소에서 서한율이 주도하는 실험 전부 사기임. 서한율이 본인 떨어진 힘 채우려고 각성자들 힘 흡수하려고 수 쓰는 거. 그래서 참여자들 능력 안 되는 피해 다수 속출.)
이 게시글 베댓도 가져옴.
(-범고래가 개미 힘 뺏어서 뭐 하냐 ㅂㅅ아)]
-베댓 뼈 때리네ㅋㅋㅋㅋㅋ
-육눈박이보다 더 큰 괴물도 때려잡는 서한율한테, 혼자선 괴물 한 마리도 못 잡는 것들이ㅋㅋㅋ
-폭로가 아니라 망상글이었고
-각성자 연구소에서 당분간 능력 사용 힘들 수 있다고 주의까지 한 걸 피해자 ㅇㅈㄹ 하고 있네
-애초에 각성자 힘으로 결계 만들 수 있나 하는 실험이라 그 힘이 빠져나가는 게 당연한 건데?
-와 서한율 어떻게든 깎아내리려는 머저리가 아직도 있네; 그러다 천벌 받는다.
* * *
21일 추석. 게이트 방어선에 인기 걸그룹 퍼플아워가 준비한 송편 및 추석 선물이 도착했다.
한율은 차와 헬기가 들어가기 힘든 곳을 지키는 군인들을 위해 직접 배달에 나섰다. 게이트 바로 아래엔 떨어지는 괴물들을 가둘 거센 회오리바람을 만들고.
“수고 많으십니다. 이것 좀 드시고 하세요.”
“헉, 서한율 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드시는 동안 제가 대신 경계 설게요. 위에서 허가받았으니 걱정하지 말고,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서 드세요. 여기, 마실 차랑 커피도 가져왔어요.”
“감사합니다!”
띠링. 이렇게 봉사 아닌 봉사활동을 하던 중 받은 앱 알림. 너튜브 어스래빗 채널에 새로운 영상이 올라왔다는 알림이었다. 바로 지난주 한옥 펜션에서 촬영한 추석 기념 영상 콘텐츠.
그러나 한율은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해당 콘텐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침에 게이트 방어선에서 퇴근해, 자다가 일어나 보니 이 시간이었다.
댓글은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가 압도적이었으나, 간간이 한국어도 보였다.
-어스래빗은 얘네끼리 있을 때가 가장 웃김
-세상 사람들아 서한율한테 너무 초현실적 영웅 프레임 씌우고 환상 갖지 마세요. 얘도 은근 뻔뻔하고 사차원이고 지기 싫어하는 20대 초반 남자임ㅎㅎ
-[07:28] 능력으로 반칙하려다가 차남석 눈치 보는 서한율
ㄴ차남석 눈치 빠른 거 너무 좋다
ㄴ서로 이 타이밍이다! 하면서 서로 확인하는 거 개웃겼음
ㄴ꽃토끼 때부터 맞췄던 호흡 어디 안 가죠ㅎㅎ 상대가 어떤 때에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너무 잘 알아
외국인들은 너무 인간적이고 평범해서 더 대단하다, 보기만 해도 즐겁고 흐뭇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한국의 명절과 어스래빗 멤버들이 입은 한복, 멤버들이 즐긴 전통 놀이와 송편, 한옥을 향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물론 다른 어스래빗 멤버들에게도.
우웅. 스카이러너의 하신이 톡을 보냈다.
-[축하한다 친구]
-[(기사)서한율, 명실상부 한국 문화 홍보 대사 등극(링크)]
-[00즈 모임 때 찍은 영상 올려도 됨?]
-[(동영상)]
-[(이모티콘)]
영상을 확인한 뒤 대답했다.
[마음대로ㅇㅇ]
-[감사!]
한율은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렁그렁. 어느새 품에 파고든 달냥도 기분 좋게 목으로 울면서 두 앞발을 쭉 뻗다가 한율의 뺨을 눌렀다. 한율은 한참 동안 녀석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고 앞발을 만지작거리다가 일어났다. 더 느긋하게 쉬고 싶었지만, 오늘도 할 일이 많았다.
잠시 후. 씻고 나서 거실로 나가자 이건우가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일어났어? 남석이가 너 먹으라고 갈비찜 해놨다.”
“형은 스케줄 갔어요?”
차남석은 다음 달에 첫 방송 될 뮤닷의 새로운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자로 섭외되었다.
“응. 2주 치를 한꺼번에 녹화하는지, 올 기미가 안 보이네.”
“다른 형들은요?”
“호 형이랑 트레리안은 회사, 우성이는 방에 틀어박혀서 영화 보는 중. 박가람은 지은이 형 집에 갔어. 거기에서 자고 올 수 있다더라.”
같이 수련하려나 보네.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곤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밤 8시가 지나고 있었다.
‘먹고 나서 출발해도 괜찮겠지.’
한편 그 시각, 뮤닷 <아이돌의 시간> 스튜디오.
조연출이 큰소리로 외쳤다.
“잠깐 쉬었다 갈게요!”
차남석은 속으로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떠들고 리액션하는 게 쉬운 게 아니구나.’
어스래빗 자체 콘텐츠야 워낙 서로 잘 아는 사이다 보니 뭐든 자연스럽게 잘 나왔지만, 오늘 처음 만나거나 낯선 이와 합을 맞추고 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까이에 앉아있던 여성이 어색하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2주분을 한꺼번에 촬영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네요.”
2세대 아이돌로 분류되는 대선배라, 차남석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네. 선배님은 괜찮으세요?”
“내내 앉아서 말만 하니까 허리랑 무릎이 좀 아프네요. 아이고, 30대 되니까 몸이 예전 같지 않아요.”
“전혀 몰랐어요. 아까 춤을 굉장히 멋지게 추셔서.”
“흐. 30대 되니까 안 아픈 척 춤추는 요령도 늘더라고요. 아고고, 가서 카페인 충전이나 하고 와야겠다.”
대선배가 허리를 툭툭 두드리면서 스튜디오를 나갔다. 차남석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재 <아이돌의 시간> 2회 녹화 중.
<아이돌의 시간>은 아이돌 관찰 예능이지만, 예전에 서한율이 출연했던 <바다의 백조>보다는 더 담백했다. 게이트 사태 이후 스케줄이나 컴백 등이 취소되어 어려움을 겪는 아이돌이 많은 까닭이었다. 그 점을 덤덤히 담아내기도 했고.
스튜디오 의자엔 2회 관찰 대상 아이돌그룹 ‘빅타임’ 멤버들이 여전히 머쓱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빅타임은 2018년 데뷔로, 어스래빗보다 1년 후배였다.
차남석은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쉬는 시간이니까 편하게 있어요.”
다른 업계는 몰라도 아이돌 판에서 1년은 아주 크다. 하물며 어스래빗은 게이트 사태가 벌어지기 전 성적으로 봐도 대형 기획사의 스카이러너, 원카운트와 어깨를 견줄 정도인데다, 지금은 서한율이 속한 팀이라며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중.
그리고 차남석은 타팬도 홀릴 정도의 잘생김과 매력적인 중저음 목소리로 개인 인기도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일까.
“넵.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고작 1년 후배지만, 그들은 차남석에게 깍듯하게 행동했다.
차남석은 어쩌면 멤버 중 한 명인 성건 때문에 더 이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성건이 드림래빗의 신혜란에게 치근덕거리다 은보람에게 저지당한 이후로, 은보람만 보면 시비를 걸어대서 둘의 사이가 원수지간이 되었다던가.
그때 성건의 나이가 21살, 신혜란이 미성년자인 19살이었다. 그래서 그 얘길 들은 어스래빗 멤버들은 분노했다. 평소에 어스래빗이 롤모델이라며 싹싹하고 예의 바르게 굴었던 놈인지라 더더욱.
그러나 여기는 방송국.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놈일지라도 티를 내선 안 된다. 자칫하면 가뜩이나 어려운 후배 아이돌의 기강을 잡는, 거만한 이미지로 비춰질 수 있으므로.
차남석은 빅타임의 한 멤버와 대화를 시도했다.
“아까 영상 보니까 요리 잘하던데. 나도 숙소에서 요리하거든요.”
“어, 정말요?”
“네. 그런데 우리는 간을 세게 해서 먹으면 안 되잖아요, 얼굴 부으니까. 그러면서 맛있게 만드는 게 좀 힘든 것 같아요.”
“맞아요, 맞아요. 선배님은 어떤 요리 주로 하세요?”
“고기요.”
“고기가 최고죠.”
“아까 영상에서 만든 요리 레시피 좀 알려줄 수 있어요?”
“네, 물론입니다.”
차남석은 그와 나란히 앉아 요리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초코톡 ID도 교환했다. 그동안 성건은 다른 빅타임 멤버와 함께 스튜디오를 나갔다.
“그런데요, 선배님.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요.”
“네, 편히 하세요.”
주위를 살핀 빅타임 멤버는, 마이크가 꺼졌는지 확인까지 한 후에야 조심스레 물었다.
“어떤 공부 모임에 들어가면 한율 선배님이 만든 보호 부적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이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한율 선배님이 그런 수상한 모임에 소속되거나 관련됐을 것 같진 않아서요. 유명한 여자 아이돌이 그 모임에 천만 원을 냈다는 소문도 돌고….”
차남석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