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4화 (386/427)

형한테 혼나볼래?

“무슨 공부 모임이요?”

-[전에 네가 다닌 명상 센터처럼 또 다른 모임이 있나 해서.]

늦은 밤. 한율은 별장으로 가던 도중, 차남석의 전화를 받았다.

“전혀요. 제가 사람들이랑 따로 만나 공부할 게 뭐가 있겠어요. 지금 일도 바쁜데.”

-[그렇지?]

차남석은 한숨을 내쉬더니, 오늘 아이돌그룹 빅타임 멤버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한율은 헛웃음을 흘렸다.

‘보호 부적이라. 내가 보호 마법을 새긴 아이템을 멤버들이나 JE, 이해원에게 준 걸 아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 활약을 보곤 그럴싸하게 이용하는 누군가의 소행?’

왠지 후자일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어쨌든 그런 모임에 누군가가 천만 원이나 되는 거금을 낸 게 사실이라면, 이건 단순한 장난이 아닌 사기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짓에 자신의 이름을 판다는 것도 퍽 불쾌하고.

“형. 빅타임 멤버랑 초코톡 ID 교환했다고 했죠? 저한테도 좀 보내주세요.”

별장은 청소 및 관리 업체에서 정기적으로 와서 청소하는 터라, 마지막으로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깨끗했다. 한율은 가장 먼저 보안 시스템을 확인한 뒤, 서재에 숨겨놓은 비밀의 문을 열었다. 늦은 시간이라, 빅타임 멤버에겐 나중에 연락하기로 했다.

“내가 일하는 동안 순찰 부탁해, 달냥.”

한율은 이동장 문을 열었다. 달냥이 거의 눈을 까뒤집으면서 하품하더니, 쭉쭉 기지개 켜며 느긋하게 나왔다.

므앙.

비밀 공간으로 내려간 한율은 가방에서 작은 케이스와 토끼 인형을 꺼냈다. 케이스는 어스래빗 로고가 새겨진 굿즈로, 그 안에다 각성자 3백 명의 능력에서 흡수한 마나 응축 구슬을 결계로 포장했다.

주로 마법 아이템을 만들 때 사용하는 비밀 공간은 널찍한 책상과 의자, 책장, 소파를 모두 벽 쪽으로 붙여놓아, 중간이 크게 빈 모양새였다.

한율은 그 가운데에다 토끼 인형을 내려놓곤 마나 응축 구슬을 허공에 띄웠다.

3백 명이나 되는 각성자의 능력에서 흡수한 마나였다. 근본적인 힘은 비슷할지라도 보유자의 특성도 섞여 있어, 한율은 집중하기 위해 핸드폰 전원을 껐다.

‘어디.’

구슬을 감싼 결계를 풀자 꽁꽁 묶어두었던 마나가 넘실거렸다. 한율은 그것들을 자신의 마력으로 다루며 세밀하게 정제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눈이 여느 때보다 짙은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믕…. 별장 순찰을 하러 갔다가 되돌아온 달냥은, 계단에 가만히 웅크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작업을 끝낸 건 새벽 1시가 조금 지날 무렵.

한율은 각성자 3백 명의 능력에서 추출한 마력을 봉인한 토끼 인형, 달냥을 챙기고 별장을 나섰다. 계나리가 보통 새벽 3시에 잔다고 했으니, 서두르면 그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 핸드폰.’

차에 시동을 걸고 라디오 채널을 맞추다, 핸드폰과 연결되었다는 시스템 문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곤 그제야 핸드폰 전원을 켰다. 늦은 시간, 그것도 고작 몇 시간 사이에 중요한 연락이 왔을까도 싶지만.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선배님. 잠깐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괜찮을까요?ㅠㅠ]

웬일로 진은수에게서 개인 톡이 띄엄띄엄 와 있었다.

-[편할 때 연락주세요ㅠㅠ]

-[이상한 사람들이 선배님 이름 팔면서 이상한 짓을 하는 것 같은데, 루아 언니가 그놈들에게 단단히 홀린 것 같아요ㅜㅜ]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언니는 건전한 종교 활동이라고 하는데 너무 수상해서요. 늦은 시간에 정말 죄송합니다ㅠㅠ]

설마.

한율은 몇 시간 전, 차남석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곤 초코톡 음성 통화 기능 버튼을 눌렀다. 진은수가 마지막 톡을 보낸 게 불과 3분 전. 금세 그녀가 응답했다.

-[네, 선배님….]

잔뜩 잠긴 작은 목소리.

“미안해요, 은수 씨. 톡을 이제야 확인했어요. 자세한 이야기 좀 들을 수 있을까요?”

한편, 인기 아이돌그룹 원카운트 숙소.

“…허억!”

나기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황급히 불을 켜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내 인상을 구겼다.

‘씨발, 왜 하필 이딴 능력이냐고.’

조금 전 꿈에서 그는 작은 괴물이 되어 좁디좁은 건물 사이를 달렸다. 괴물은 돌연 맛있는 냄새라도 맡은 듯 벽을 타기 시작했는데, 나기혁은 도중에 나타난 창문 너머의 무언가를 보곤 큰 충격을 받아 잠에서 깼다.

‘그거 꼭 사람 사체 같았는데….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놀라 쿵쿵 뛰는 심장이 도통 진정되지 않는다. 나기혁은 기억의 잔상을 날리기 위해 창을 활짝 열고 바람을 쐬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각성자 연구소의 결계 실험에 참여한 각성자들이, 한동안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인터넷 글이 떠올랐다.

‘각성자 등록은 하기 싫지만, 서한율한테 따로 부탁하면.’

한동안은 강제로 괴물이 되는 꿈에서 해방될지도 모른다.

‘일단 톡으로….’

단톡방에서 서한율의 이름을 눌러 개인 톡을 보내려 할 때였다. 우웅. 서한율이 초코톡을 통해 전화를 걸어왔다.

“……?”

나기혁은 얼결에 응답 버튼을 눌렀다.

“웬일이냐, 네가 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 …뭐? 야, 난데없이 남의 전 여친의 친구가 왜 궁금한데. 무슨 일인데, 그래?”

* * *

“워어, 남의 세상에서 저게 무슨 꼴이람.”

스타믹스 JE의 집. 이곳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박가람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거실 통창 너머, 저 멀리 흐릿하고 거대한 무언가가 넘실거린다.

“뭘 보는…. 야, 저거 뭐냐?”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면서 지나가던 JE가 움찔거렸다. 박가람이 웃으며 그걸 가리켰다.

“형 눈에도 보이지?”

“저거 설마 괴물 귀신이냐? 하…. 하다 하다 다른 세상에서 쳐들어온 괴물 새끼까지 귀신으로 변하고 지랄이네. 뭐가 억울하다고.”

“막상 입대 날짜가 잡히니 잔뜩 예민해져 입이 거칠어진 손지은 씨.”

“…….”

JE는 박가람의 뒤통수를 힐끗 째려보곤 방으로 들어갔다. 박가람은 기지개를 쭉 켜곤 늘어지게 하품했다.

“오오늘도오 여얼심히 수련해야지이.”

그때 테이블에 둔 핸드폰에서 어스래빗의 최근 타이틀곡 의 후렴구가 흘러나왔다.

“유, 호우! 나 아직 지은이 형 집…. 엉?”

유호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우성이 있어?]

“아니? 여기에 없는데? 왜?”

하아…. 깊은 한숨을 쉰 유호가 대답했다.

-[내가 팀장님한테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서. 나중에 우성이한테서 연락 오면 나한테 전화해줘.]

“길우성 숙소에 없어? 핸드폰은?”

-[라이언 말론 아침 일찍 차 끌고 나갔대. 핸드폰은 계속 안 받고.]

“서한율한텐 연락했어? 걔, 길우성이 낀 팀 반지에 추적마법 걸어놨을걸? 게이트 근처로 접근하지 못하게 감시하는 용도로?”

-[아, 그 생각을 못 했네. 한율이한테 전화해볼게.]

뚝. 통화가 끊겼다.

박가람은 마저 기지개를 켰다.

“아침부터 대체 무슨 난리야아.”

* * *

길우성은 ‘휴업 중’ 팻말이 걸린 낯선 가게에 사촌인 김지완과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핸드폰에는 오 팀장이 보내준 캡처 이미지가 떠 있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왔던 게시글.

[제목: 내 사촌 동생이 인기 아이돌인데….]

김지완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나 아직도 그날 생각하면 심장이 떨린다, 우성아. 대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촌 오빠한테 양심은 지능 문제라는 둥, 너한테 빌붙으려고 수작 부리지 마라, 거지새끼야라고 욕하는 건지. 내가 본 우성이 너는, 우리를 그런 식으로 말할 애가 아니라서 더더욱.”

“그래서….”

어릴 적부터 몇 년 동안 또래 아이들에게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을 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무력감을 매일 느낀 탓일까. 길우성은 다른 사람과 언쟁하는 게 힘들었다.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강하게 들어서.

중학생 땐 스스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고, 아이돌이 되고자 서울로 올라온 후론 그를 괴롭히기는커녕 잘 배려해주는 좋은 사람들만 만나 누군가와 척질 일도 없었다. 당연히 부정적인 말과 험한 욕설을 내뱉는 일 또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인지도가 높아지며 이유 없이 악의를 드러내는 악플러와 안티도 많아지기는 했으나,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범죄자들이니 예외로 두고.

“그런 글을 쓴 거예요?”

그래서 지금 김지완과 이런 식으로 대면하는 것 자체가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악플러나 안티처럼 변호사에게 맡긴 채 무작정 선을 그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닌 까닭이었다.

김지완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뻔뻔하게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잖아. 그 글에, 거짓이 있었어?”

“…….”

“나도 네가 추석 때, 그래. 나한텐 연락 안 해도 좋아. 그래도 할머니한테 안부 인사는 하러 올 줄 알았거든? 형편이 안 좋으니 당분간 할머니를 모셔줄 수 없겠냐는 부탁 거절한 거. 그 일에 관한 사과를 바란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네 누나가 우리 가족을 너한테서 돈 뜯으려는 기생충 취급한 건.”

하. 김지완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적어도 그 일을 생각하면 직접 찾아와서 오해를 풀겠지 생각했는데…. 안부 전화 한 통 달랑? 야, 나도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어. 네 인기가 워낙 많은 덕에, 추석 당일에 네가 스케줄을 했는지 집에서 편히 쉬었는지 다 안다고.”

길우성은 용기 내서 목소리를 크게 냈다.

“그래서요. 왜 지금 날 가해자 취급하고, 형은 피해자처럼 따지는 건데요?”

“뭐?”

테이블 아래. 길우성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또다시 자신 때문에 어스래빗이 안 좋은 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멤버들은 그에게 잘못이 하나도 없다고, 나쁜 건 가해자들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나로 인해 형이 피해당한 게 대체 뭔데요?”

“서운해서 그런 거잖아! 너 공감 능력 떨어져? 아이돌이 일반인보다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듣긴 했지만, 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실망이다, 길우성.”

길우성은 울컥했다.

“형이야말로 공감 능력 떨어지는 거 아니에요? 그런 글을 올리면 나뿐만이 아니라 내가 속한 팀에도 어떤 피해가 갈지, 정말 생각을 못 한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금방 지웠고 사과도 하러 왔잖아. 지운 걸 그새 퍼간 걸 어쩌라고. 또, 나는 친구들한테 하소연도 못 하냐? 그 새끼들이 제멋대로 부풀려서 떠드는 걸 내가 어떻게 막냐? 그리고 그 게시글에 너라고 유추할 수 있는 정확한 단서가 있었어? 말해봐. 있었냐고.”

길우성은 더 반박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소용없어. 대화가 안 통해.’

꼭 초등학생 때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가면서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 같았다.

‘이런 사람인 줄도 모르고.’

문득 유호가 보고 싶어졌다.

피는 섞여 있지 않지만, 엉뚱하고 멍청한 소릴 해도 언제나 끝까지 잘 들어주고 진심으로 대해주던 어스래빗의 큰형. 김지완과 동갑이라서 더 그가 생각나는 걸까.

“이럴 거면 왜 사과하고 싶으니 만나자고 한 거예요?”

“그야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니까 그랬지. 그런데 지금 너 태도 보니까, 그나마 있던 미안한 마음도 사라진다. 어떡하냐?”

혹시 지금 이 대화, 녹음 중인 건 아닐까?

아니면 카메라를 숨겨놨을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들던 그때였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떡하긴 뭘 어떡합니까. 변호사 불러드릴까요?”

길우성은 놀라 뒤를 휙 돌아봤다. 대체 언제 들어왔는지, 박가람이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착각일까. 능력을 사용할 때의 서한율처럼 푸른색으로 물들었던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박가람이 길우성의 머리를 덥석 잡고선 으르렁거렸다.

“막내 너 왜 전화 안 받냐. 형한테 혼나볼래? 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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