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8화 (390/427)

마침내 탈출 기회

몇 시간 전, 루아는 택시를 타고 어스래빗 숙소로 향했다.

‘어떻게든 서한율을 만나 선생님의 선처를 부탁해야 해.’

진은수를 통하면 되겠지만,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만나려는 이유를 알면 반대할 것도 뻔하고. 그러나 그 외엔 서한율과 연락할 방도가 없어 무작정 숙소로 갔지만, 카메라를 들고 서성거리는 사람이 많아 택시에서 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 숙소에서 차 한 대가 나왔다. 루아는 기사에게 그 차를 쫓아가 달라고 부탁, 문제의 헬스장 건물 앞에서 내렸다.

“그러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괴물을 봤고, 112랑 119에 신고했어요. 그리고 앞에 숨어서 지켜보다가… 덩치 큰 아저씨 어깨에 들린 가람 씨 눈이 파랗게 변한 걸 봤고요. 무너지는 천장 더미가 한율 씨 결계랑 비슷한 거에 부딪혀서 옆으로 떨어지는 것도.”

무릎에 올려놓은 손을 꽉 쥐면서 루아가 말을 이었다.

“수천 명에 한 명꼴이라는 각성자가, 어떻게 어스래빗에 셋씩이나 있을 수 있어요?”

“루아 씨.”

지금 말한 걸 다물어주는 대가로 양병근의 선처를 요구하려는 걸까. 한율은 작게 한숨을 쉰 뒤 루아에게 말했다.

“양병근의 공범이 다 자백했어요. 루아 씨를 포함한 피해자들을 두고 ‘나중에 협박 용도로 쓸 수 있으니 몰래 촬영도 했다. 이게 다 우리 연금이다.’라고 양병근이 킬킬거리는 녹음 파일도 제출했고요.”

“거짓말! 그럴 리 없어요! 선생님이…!”

왈칵 소리친 루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선생님이 그럴 리 없어요…!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요! 내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어른인데…. 어떻게…. 흐윽….”

“…….”

한율은 섣불리 위로하지 않고 가만히 두었다.

루아도 속으론 의심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게 사기였다면 그에 속아 위안을 얻었던 본인이 더욱 힘들고 괴로워지니, 스스로 불안을 없애려 더 크게 부정했던 건 아닐까.

우웅.

한율은 핸드폰에 뜬 이름을 확인하곤, 조용히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아주었다.

“네, 선배님.”

원카운트의 나기혁이었다. 루아의 전 남자친구.

-[너 나한테 루아 친구 아냐고 물었던 거, 혹시 오늘 아침에 뜬 기사 때문은 아니지? 아이돌 상대로 돈 뜯었다던 사기꾼….]

한율은 나기혁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네, 아니에요. 바쁘니까 끊을게요.”

뚝. 한율은 루아를 한번 보곤 차에 몸을 기댔다. 괜히 혼자 두었다가 이쪽을 주시하는 하이에나 한 마리에게만 잘못 걸려도 크게 난리가 날 테니.

[은수 씨, 여기 와서 루아 씨 챙겨가세요. 크게 충격받아서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니 잘 지켜보셔야 합니다.]

[(초코톡 지도)]

진은수에게 톡을 보내자, 곧 답변이 왔다.

-[금방 갈게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 * *

[[단독] 서한율♡루아, 핑크빛 열애 중?!]

[지구 최강의 각성자이자 인기 아이돌인 서한율이 걸그룹 퍼플아워 리더 루아와 핑크빛 열애 중으로 추정되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사진=익명의 제보자)

제보자는 오늘 24일 괴물의 추락으로 인해 건물이 무너진 현장에 등장한 여성이 ‘서한율과 아는 사이’라며 안전선을 넘어갔으며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으나 옷과 신발, 가방, 귀걸이가 모두 퍼플아워 루아가 소지한 아이템이며 머리 색과 길이 또한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사진=퍼플아워 루아)

서한율은 루아와 경찰차에 단둘만 탑승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잠깐 차 문이 열린 사이 루아가 우는 듯한 모습도 포착되었고 그녀는 곧 퍼플아워 매니저의 차를 타고 현장을…(중략).]

-괴물이 들이받고 무너진 건물 옆에서 데이트하는 정신 나간 비밀 연애 커플이 어디 있냐 기자야, 돈이 그렇게 궁하더냐 미친 기자야

-서한율 열애설이 최고 어그로 키워드가 된 건 알고 있었지만 점점 기레기들까지 뇌절하기 시작하는 듯ㅋㅋㅋ

-잠깐 차 문이 열린 사이 우는<???? 재난 장소에서 저러는 걸 보고도 스캔들이라 우긴다고? 피해자 중에 아는 사람이 있는 거 확인하고 충격받아 우는 게 더 신빙성 있지 않나?

-댓글 수 보소ㄷㄷㄷ 어그로 제대로 끌기는 했네

-진은수는 몰라도 루아는 쫌;

ㄴ루아가 어때서요ㅡㅡ

ㄴ나 모 씨 전 여친이잖음. 나 모 씨랑 서한율은 또 친한 사이고

ㄴ원래 아이돌들 자기들끼리 돌아가면서 사귐.

ㄴ그런데 서한율이 아이돌이라고 해도 같은 아이돌이 눈에 찰까? 서한율인데?

“정신 나간 기레기가 또.”

어스래빗 숙소.

포털사이트 메인에 뜬 단독 기사를 본 이건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옆에서 함께 들여다본 강보배도 고개를 흔들었다.

“기사에 한율이 이름만 들어가도 조회 수가 펄쩍 뛰니까 별의별 허위 기사가 다 나오는 것 같아. 로펌에서도 허위사실 자료가 워낙 많아 추리는 데에만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린다며?”

“그쪽은 완전히 일복 터지셨지. 하지만 문제는 해외에서 만들어지는 루머 아닐까? 이탈리아에선 완전히 그, 같이 갔었던 분이랑 한율이가 연인 사이라 믿고 있다던데.”

“그렇게 믿고 싶어서?”

“그런 듯?”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한율 씨?”

식탁 앞에 앉아 저녁을 먹던 한율은, 길우성의 장난스러운 질문에 대충 대답했다.

“아무 생각 안 하는데.”

지금까지 한율과 열애 중이라며 기사가 뜬 여자 연예인만 수십 명이었다. 연예인뿐만이 아니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재벌 3, 4세의 이름도 툭하면 거론되었으며, 한율이 이미 비밀리에 세계적인 부호의 딸과 결혼했다는 루머가 돈 적도 있었다. 일일이 반응해봤자 몸만 피곤하다.

“그나저나 가람이 형 계속 잠만 자는데. 괜찮은 거냐?”

“어.”

조금 전 귀가한 한율은 곧바로 박가람의 상태부터 살폈다.

박가람은 찹쌀떡의 의식을 차리게 했을 때와 달리 이번엔 마력을 적잖이 사용했다. 그러나 그때처럼 허공에다 날린 게 아니라 법칙을 따라 운용한 거라, 며칠 쉬고 다시 꾸준히 유동하면 괜찮아질 상태였다.

오히려 한계까지 공격 마법과 보호 마법을 동시에 사용한 이번 경험으로 크게 성장할 터다. 몸의 체질도 그만큼 적합한 방향으로 변화할 테고.

어떤 일이든, 이론보다 실전이 성장에 큰 도움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다들 위험한 곳 피해 다니세요. 이번 일은 정말 운이 안 좋아서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었지만요.”

멤버들에게는 박가람이 각성자가 아니며, 그가 준 ‘부적’을 사용하느라 그리되었다고 둘러댔다. 이참에 팀 반지에 작지만 비슷한 힘을 새겼다는 사실도 고백했다. 그 덕에 길우성이 괴물의 공격에 안전할 수 있었던 거라고.

이건우가 가장 먼저 큰소리로 대답했다.

“응, 명심할게!”

유호가 큭큭 웃었다.

“건우 너 앞으로 운동할 땐 팀 반지 꼭 빼고 해라.”

“아니, 미리 알고 있었으면 더 조심했지…. 미안하다, 한율아.”

“아니에요. 운동할 때도 팀 반지 끼고 하세요. 형이 다치는 게 더 손해예요.”

“차라리 운동을 줄여, 이건우 씨.”

“내 핑계로 운동 빼먹을 궁리 하지 마라, 우성아.”

“쳇, 들켰나?”

“서한율, 다 먹으면 설거지는 둬. 너도 오늘 힘써서 피곤할 텐데.”

“괜찮아요. 이번엔 그릇 안 깨요.”

저녁을 먹고 뒷정리까지 마친 한율은 다시 나갈 채비를 했다.

“게이트 방어선에 다녀올게요.”

“이제 곧 해 떨어질 텐데?”

“그래서예요. 연구소 실험 일이라, 밝을 때 하면 여러모로 신경 쓰일 것 같아서요.”

“응, 조심히 다녀와.”

잠시 후, 게이트 방어선 본부.

“안녕하십니까, 서한율 님. 청와대에서 나왔습니다.”

정상욱 중위와 함께 소장실로 올라가 보니, 청와대 비서실에서 나온 인물이 한율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이걸.”

인사를 나눈 뒤 건네받은 건 서류 봉투와 명함.

국가의 안위를 위해, 국민의 안전을 위해 활약한 만큼 보상금을 지급하겠다는 증서였다. 이전에 활약했던 것까지 검토해서.

“살펴보신 후 명함에 적힌 번호로 편히 연락해 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오늘 무너진 건물에선 다행히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한율이 신속하게 무거운 건물 잔해를 치워준 덕이라고 칭찬을 늘어놓았고, TV 토론 프로그램에서는 국회의원들이 이제 국가 차원에서 적절한 보상금 지급 논의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내놨다. 그러나 뒤로는 이미 정부와 국회 간의 논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축하해요, 한율 씨. 작지만 그래도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되었잖아요.”

소장실을 나와 계단을 올라가는 길. 한율은 정상욱의 축하에 고개를 저었다.

“축하받을 일인지 잘 모르겠네요.”

“기사 보니까 이탈리아 자동차 회사에서 한율 씨한테 5억 원 상당의 슈퍼카를 선물로 보냈다던데요. 다른 회사에서도 고가의 SUV를 보냈다고.”

“5억짜리 차는 도착하면 한 번 빌려드릴게요.”

정상욱이 정색하면서 거부했다.

“괜찮습니다. 1m도 못 가서 작은 흠집 하나라도 날까, 심장이 벌벌 떨려서 시동도 못 걸 것 같네요. 그런데 한율 씨, 이미 차가 두 대죠?”

“네. 그래서 새로 오는 SUV는 어머니께 드릴 생각이에요. 지금 있는 차 중 한 대는 오늘 차가 박살 난 친구한테 넘길 생각이고요.”

“아, 오늘 무너진 건물에 차가 깔렸다던. 친구분이 참 속상하겠네요.”

“살아서 나온 것만도 다행이죠.”

잡담을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옥상이었다. 옥상엔 한율을 게이트 근처까지 바래다줄 헬기가 대기 중이었다.

“무슨 일 있으면 무전 부탁드립니다.”

“별일 없을 거예요. 그럼 다녀올게요.”

한편 그 시각, 본부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각성자 임시 수용소. 지하에 있는 독방 중 하나엔 두 달 전, 의뢰를 받고 이해원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붙잡힌 ‘한타오’란 남자가 갇혀있었다.

그는 한국에 불법체류 중인 중국인이었으나, 이곳에 홀로 갇힌 뒤로 중국 측 인물은커녕 변호사, 통역가도 만나지 못했다. 누구 하나 그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갇힌 지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은폐되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내 다른 여죄가 궁금하지 않아?

중국어로, 어설픈 한국어로 이렇게 외치며 관심을 끌어보려고도 했으나 아무 소용 없었다. 식사를 가져다주는 군인도 철문 아래에 있는 배식 구멍을 통해서만 식판을 밀어 넣었다. 일부러 굶어도 보고 아프다고 소리도 질렀지만, 차라리 그대로 죽어줬으면 하는 무언의 바람이 느껴져 꾸역꾸역 목숨을 이어나갔다.

탈출 기회를 엿보면서.

그의 각성 능력은 손톱으로 만든 ‘벌레’를 날려, 그 벌레가 파고든 사람의 시야를 보며 조종하는 것. 군인들도 이 사실을 아주 잘 아는지 도통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기회라곤 식판이 들어오는 순간인데, 늘 두꺼운 장갑을 쓴 데다 그마저도 잘 보이지 않아 손톱 벌레가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두 달.

마침내 한타오는 탈출 기회를 잡았다. 어제 옆방에 들어와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웬 미친놈 덕분이었다. 미친놈이 떠드는 소리에 역정을 내던 군인이 쿵쿵거리며 다가와 식판을 거칠게 밀어 넣었다. 평소보다 깊숙이 들어온 손. 한타오는 그의 손끝을 덥석 잡아 장갑을 벗겨내 손톱 벌레를 박아넣었다.

‘혼자선 아무래도 불리하겠지. 미끼가 필요해.’

한타오는 눈을 감았다. 손톱 벌레가 파고든 군인의 시야. 우선 CCTV 위치를 확인하곤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찾았다. 자신의 독방을 열도록 한 뒤, 그보다 앞서 지하에 갇혀있던 놈의 독방도 열게 했다.

“웬일입니까, 문을 다 열어주시고?”

돌연 문이 열리자, 안에 있던 김대현은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김대현은 석 달 전, 러시아 용병의 의뢰를 받고 서한율의 양평 별장과 이해원의 집에 침입하려다 실패, 이후 이해원에게 잡힌 자였다. 당시 이해원에 의해 시력을 잃었으며, 병원에서 러시아 용병들 도움으로 탈출했으나 얼마 안 가 그들에게 버려져 다시 잡혔다.

각성 능력은 폭발.

“…누구야.”

문을 연 상대방이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자, 이상함을 감지한 김대현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누구….”

한타오는 어설픈 한국어로 말했다.

“그만 물어. 살고 싶어? 알아서 해.”

“이 목소리…. 너 두 달 전에 들어온 중국인이지?”

“닥쳐. 다시 문 닫아?”

“아니야, 아니야.”

김대현은 벽을 더듬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문으로 향했다.

“여기 갇힌 뒤로 머릿속으로 온갖 탈출 계획을 세우고 각종 상황을 상상했거든? 일단 어제 들어온 미친놈을 방패막이로 쓰자. 어때, 따거?”

한타오는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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