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세상
포털사이트 메인.
[드디어 정체를 밝힌 미스터리 해커, 한국인 맞았다]
-한국인이라 기쁘냐
ㄴ기쁘옵니다.
-서한율 뉴스에선 미스터리 해커한테 도와달란 연락 몇 번 받았을 뿐이라고만 말했는데 실제론 펜션에서 같이 살았던 그 여자애면
ㄴ멤버들이랑 그 가족, 매니저들까지 함께 지냈습니다. 이상한 뉘앙스 풍기지 마세요.
ㄴ서한율에겐 모든 게 은혜로운 이탈리아 눈나가 있어요.
-미스터리 해커 고등학생이라던데ㅋㅋㅋ 정원이우 급식한테 털렸쥬? 열받쥬? 쪽팔리쥬?
ㄴ그만해라..
-미스터리 해커는 각성자 아니에요?
ㄴ각성자란 소린 어디에도 없네유
-그래서 왜 정체를 기사 본문이 아닌 댓글로 알아야 하죠, 기자님?
걸그룹 퍼플아워 M/V 촬영 세트장.
개인 촬영 대기 중이던 진은수는 핸드폰으로 기사를 보고 있었다.
‘나리가 미스터리 해커였구나.’
계나리와 어울리며 운전면허학원에 다닐 때가 떠올랐다.
즐겨하는 게임과 게임용 PC에 관해 잡담하다가, 이우그룹에서 선물 받은 그래픽카드 이야기가 나왔다. 그에 맞춰 세팅해보고 싶다고 말했더니, 계나리는 바로 조립 PC 사이트에 들어가 알 수 없는 외계어를 줄줄이 읊으며 견적을 짜줬다.
『이대로 사기만 하면 돼. 세팅은 나한테 맡겨, 언니.』
그러곤 정말로 집에 와서 데스크톱 조립을 뚝딱, 복잡해 보이는 여러 프로그램 설치와 최적화 작업도 인터넷을 참고하지 않고 혼자 뚝딱해냈다.
‘어쩐지 PC에 빠삭하더라니.’
계나리가 정체를 숨긴 건 정말로 알려지면 안 될 큰 비밀이었으니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되었다. 네티즌들의 기세로 보아, 계나리의 얼굴과 신상이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 같아서.
‘괜찮냐고 물어볼까? 아냐. 나리가 먼저 말하기 전까진, 계속 모른 척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우웅.
마침 계나리로부터 톡이 왔다.
-[이실직고합니다.]
-[(기사 링크)]
-[접니다.]
-[(이모티콘)]
-[(이모티콘)]
미스터리 해커 관련 기사 링크, 머쓱하게 눈치 보는 토끼 캐릭터, 잘난 척 ‘ㅎㅎ!’ 웃는 토끼 캐릭터 이모티콘이 연달아 떴다.
진은수는 저도 모르게 웃으면서 답장했다.
[(이모티콘)]
[시간 나면 연락해, 지난번에 가보기로 한 카페 가자ㅎㅎ]
불쑥.
“누구 톡인데 그렇게 웃어? 혹시.”
퍼플아워 막내, 송의연이 얼굴을 들이밀곤 음흉하게 웃었다.
“서 씨?”
진은수는 핸드폰 화면을 가렸다.
“아니, 친한 동생.”
“아. 언니랑 같이 면허 땄다던 걔?”
“응.”
송의연이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앉았다.
“에이, 재미없어. 서 씨랑 또 연구소에서 만났다길래 진전이 있을 줄 알았더니.”
“의연아.”
“응?”
화려하게 꾸며진 손톱을 살피던 송의연이 고개를 돌려 진은수를 바라보았다. 진은수는 담담하게 웃었다.
“나 완전히 마음 접었어. 그러니까 그만해.”
“진짜?”
“응.”
고개를 끄덕인 진은수는 며칠 동안 했던 생각, 들었던 감정을 다듬어서 말했다.
“혼자 들떴다가 혼자 실망하고, 혼자 휘둘리면서 눈치 보는 게 반복되다 보니까 지쳐서 마음이 차츰… 차츰 식더라. 자존감 깎이는 느낌도 많이 들고. 나한텐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어야 하잖아.”
“…….”
진심이 전해진 걸까. 송의연은 가만히 진은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진짜 접기로 마음 굳혔나 보네. 재미없게.”
“재밌었어?”
자칫 시비조로 들릴 수 있을 말이라 다정한 어감으로 물었다. 송의연이 입을 삐죽거렸다.
“좀 신기해서 재밌었지? 나였으면 차이자마자 ‘그래, 잘 먹고 잘살아라! 어디 나보다 얼마나 잘난 년 만나나 두고 보자!’ 이러고 말았을 텐데.”
후. 송의연이 오히려 후련한 얼굴로 씩 웃었다.
“어쨌든 잘 생각했어. 어차피 남녀 사이는 한쪽만 너무 좋아하면, 사귀어도 연인이 아니라 갑을 관계가 되거든. 이참에 남사친이라도 만드는 게 어때? 성격 꼬이지 않은 착한 애로. 아, 스카이러너의 용맹? 그 사람도 언니가 요즘 즐겨하는 게임 하는 것 같던데. SNS에 그 게임 캐릭터 인형 올린 거 본 적 있어. 메롱 하는 이상한 새싹 인형.”
“됐어. 아이돌이 이성 친구는 무슨.”
“그렇게 말하면 난 뭐가 되냐? 아이돌 아니야?”
“또 삐딱하게 군다, 송의연.”
“원래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떡하냐?”
“은수 씨, 준비할게요!”
“네!”
진은수는 가방에다 핸드폰을 집어넣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갔다 올게.”
“네엥.”
송의연도 일어났다. 그러곤 진은수의 개인 촬영을 구경하다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찰칵.
위험한 게이트 방어선을 드나들며 쌓인 경험 탓일까. 서서히 앳된 티를 벗어 던지는 스물한 살, 4년 차 아이돌 진은수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분위기를 잘 자아내고 있었다.
더순한화장품 첫 CF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고, 더 예뻐졌다.
사실 송의연은 진은수가 참 별로였다. 언니인 호수의 후광으로 남들보다 편히 데뷔의 기회를 잡은 것 같아 질투가 났다. 답답하게 착한 성격도 짜증 났고.
그러나 생각보다 굳세고 강한 사람이란 걸, 게이트 사태가 벌어지며 알게 되었다. 멤버들에게 한 번도 피곤하다,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도.
살인적인 스케줄로 쓰러질 지경이 되어도, 피해 끼치기 싫어서 묵묵히 참고 최선을 다하는 곰이었다.
‘기다려라, 진은수. 내가 너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너만 아껴주는 좋은 놈 꼭 찾아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세상에서 아이돌이라고 알콩달콩 연애 한 번 못하다니, 너무 억울하잖아.’
찰칵, 찰칵.
우웅, 우웅.
“……?”
한창 신나게 진은수의 사진을 찍던 송의연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진은수의 가방에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우웅, 우웅. 끊겼던 전화가 다시 걸려와 또 끈질기게 울린다.
‘누군지는 몰라도 급한 용건 같은데.’
송의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지난번처럼 진은수의 전화를 멋대로 받았다가 녹음되는 일은 사양이었다.
‘난 몰라. 촬영 중인데 뭐 어쩌라고.’
* * *
게이트 방어선 본부.
각성자 관리과 직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 받습니다.”
“다시 걸어봐요.”
“의원님.”
정상욱은 이곳까지 찾아와 억지를 부리는 국회의원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선 김관식 소장이 막지 못해 미안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며칠 전 각성자 연구소에서 2차 실험이 진행되었단 사실, 알고 계실 겁니다. 그때 진은수 씨 또한 실험에 참여해 한동안은 능력을….”
“그럼 내 아들을 이대로 죽게 놔두란 겁니까? 그 끔찍한 괴물이 득시글거리는 곳에?!”
버럭 소리를 지른 국회의원은 금세 침착을 가장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정상욱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청독각룡 새끼 생포 작전 보고서 읽었습니다. 그때 참여한 진은수와 강준식. 이 두 사람이 함께 가면 아무런 위험 없이 무사히 구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네?”
“말씀드렸잖습니까. 강준식 씨 또한 실험에 참여했던 터라 당분간은….”
“그럼 서한율한테 연락이라도 해주든가!”
정상욱은 골치가 지끈거렸으나, 상대는 당장 아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성을 잃은 아버지였다.
“죄송합니다, 의원님. 많은 이의 생명이 위협받는 대규모 재난과 재앙 사태가 아닌 이상, 한율 씨에게 사사로이 연락하는 건….”
“사사로워? 내 아들이 죽게 생겼는데! 대한민국 국민이 죽게 생겼는데 사사롭다고?!”
“한율 씨는 각성자 부대 소속이 아닙니다. 그리고 각성자 관리과는 국내 각성자를 관리만 할 뿐이지, 군인이 아닌 그들에게 어떤 명령을 할 권리도 없습니다.”
김관식도 끼어들어 국회의원을 달랬다.
“의원님, 아드님이 걱정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드님이 무사히 구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이만 회의실로 가시죠. 구조 작전 브리핑 준비하겠습니다.”
“내 아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딴 곳엔 오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는데, 괜히 나 때문에….”
정상욱은 울컥했다.
이딴 곳? 지금 게이트 방어선에서 죽거나 다치는 수많은 군인은, 오고 싶어서 이곳에 와 있는 줄 아는 건가?
그러나 눈이 마주친 김관식이 황급히 고개를 저어, 주먹만 꽉 움켜쥐고 참았다.
국회의원이 김관식과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사무실을 나갔다. 하아. 정상욱은 그제야 크게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각성자, 김바람이 그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조금 전 말, 너무 마음에 담지 마세요. 수고하셨어요.”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내가 만약 그런 구조 작전에 쓸모있는 능력이었다면 기꺼이 돕겠다고 나섰을 텐데….”
“아닙니다. 바람 씨 능력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데요.”
김바람이 웃으며 농담조로 되물었다.
“발파 작업에 화약이 덜 낭비돼서요?”
“하하. 화약보다 훨씬 친환경적이라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렇게 서한율 씨한테 청탁 전달해달라는 사람, 많죠?”
정상욱은 크게 한숨 쉬었다.
“네, 아주. 경찰에도 하루에 수천 통씩 신고 전화가 걸려온다고 합니다. 여기 어디 어디인데 서한율 씨더러 와 달라고 해주세요. 큰일 났어요.”
직원이 살며시 끼어들었다.
“여기 직통으로 협박 전화도 와요. 나 높은 분 누구랑 아는 사이인데, 자기네 회사나 집에 결계 쳐주지 않으면 지금 통화하는 사람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으로요.”
김바람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기울였다.
“왜 통화하는 사람을?”
“어이없죠? 그런데 한율 씨 소속사론 오히려 그런 연락이 잘 안 들어온대요. 강약약강, 직접 연락하기엔 겁나는 거죠. 그래서 만만한 우리만 신나게 들볶는 거고.”
우웅.
정상욱은 ‘최은수 님’ 이름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네, 은수 씨. 일하는 중에 전화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중위님. 무슨 일 있으세요? 제가 필요한 급한 일이라도….]
“아.”
정상욱은 문이 잘 닫혔는지 확인하곤 대답했다.
“2차 실험 이후 컨디션이 어떤지 궁금해서 연락했습니다. 요즘 바쁘시죠? 듣기론 곧 새 앨범이 나온다던데.”
-[네. 오늘은 M/V 촬영 중이에요. 그리고 능력은 지난번 첫 번째 실험 이후 열흘쯤 지나서야 평소처럼 사용할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번 주 주말부터 다시 방어선 일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평소보다 절반 정도, 아주 잠깐만이라도 카모플라쥬가 필요한 상황이면….]
어떻게 이렇게 심성이 고울 수 있을까.
정상욱은 진은수가 처음 맡은 청독각룡 새끼 생포 작전 이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떨리는 손을 감추며 애써 웃던 모습을 떠올렸다.
당시 그는 진은수가 앞으론 방어선에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뉴스에도 보도되지 않는 끔찍한 현장을 겪으며 많이 무서웠을 테니. 그러나 진은수는 또 도울 일이 없냐며 찾아왔다. 자주 왔다. 무서워하면서도, 늘 시간이 날 때마다.
그래서 더욱 조금 전과 같은 일로 무리하게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의원의 사정도 딱하지만, 진은수도 서한율처럼 군 소속이 아닌 민간인이며, 본인의 삶이 있기 때문이었다.
높은 분의 청탁이라고 특별히 들어주면, 각성자 또한 국민의 비난을 받게 될 테고.
“아닙니다. 정말 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할 테니, 그때까지 컨디션 관리 잘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농담처럼 웃으며 말하자, 진은수도 안심하는 목소리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넵, 감사합니다!]
“그럼 끊겠습니다. 홧팅.”
그날 늦은 오후,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앞.
빠앙! 창이 새카맣게 틴팅 된 고급 승용차 한 대가, WB래빗 앞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위협적으로 경적을 울렸다. 놀란 사람들이 옆으로 비켜서자, 차는 회사 정문을 부술 기세로 바짝 다가가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위험하게 뭐 하는 짓이에요?!”
“뭐야, 저 차!”
운전석에서 내린 건 머리가 흐트러진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가 WB래빗 회사 정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두드렸다. 탕탕!
“열어주세요, 당장! 급한 일이에요!”
금방이라도 숨어 넘어갈 것처럼 상당히 다급해 보인다. 그러나 로비에 있던 직원은 망설였다. 서한율이 제임스라고 고백한 후로, 회사에 들어오려 온갖 쇼를 부린 사람이 한둘이 아닌 까닭이었다.
중년 여성이 외쳤다.
“열라고! 나 서한율 만나야 한다고!”
또 이런 사람인가. 직원은 서한율의 이름에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 앞에 모인 사람들도 중년 여성을 비난했다.
“아줌마! 서한율이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아요?! 차나 빼요!”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사람이 정도를 알아야지!”
그러나 중년 여성은 비난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문을 두드리며 소리 질렀다.
“지금 내 아들이 죽게 생겼다고! 그러니 제발…! 한율 씨한테 말 좀 전해줘요!”
털썩. 그녀가 쓰러지듯 주저앉으며 울부짖었다.
“내 아들 좀 살려달라고…!”
그 시각, 생방송 뉴스.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여당 대표 장호운 의원의 아들이, 조금 전 게이트 방어선에서 군 복무 도중 사망했습니다. 장호운 의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