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6화 (398/427)

은퇴하겠습니다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오동식 팀장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네 잘못 아니야, 한율아.”

장호운 국회의원이 게이트 방어선 본부까지 찾아갔었던 것, 그의 아내도 한율에게 부탁하기 위해 회사까지 찾아왔지만, 결국 아들이 사망했다는 것.

한율이 이 이야기를 들은 건 뉴스가 보도되고 몇 시간이 지난 자정께였다. 일련의 일이 벌어지던 그 시각, 그는 어스래빗 자체 콘텐츠에서 부를 노래를 연습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피아노도 직접 치면서.

“네가 모두를 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잖아. 어쩔 수 없었던 비극적인 사고라고 생각해.”

옆에서 조유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런 생각도 들어요. 지금 이 시각에도 죽음의 공포와 생사를 넘나드는 군인이 많은데, 매일 집계되는 사망자 수, 부상자 수에 포함되는 한 명이 아니라 누구누구의 아들이라고 콕 집어 보도되어 조명되는 이 상황 자체가…. 하, 뭐라고 해야 하지.”

말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지, 조유찬은 뒷머리를 긁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튼 삐딱하게 생각하게 되네요. 죽은 사람은 안타깝지만, 만약 국회의원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모두가 그 죽음을 알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요. 그리고 왠지… 안 좋은 예감도 들고. 국회의원이 법을 만드는 사람이잖아요. 만약 이 일로 각성자를 강제로 얽어매는 법이라도 만들면.”

조유찬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한율을 바라보았다.

사실 각성자에게 국가 안위를 위한 의무를 부여하는 법률이 필요하단 주장은, 게이트 사태 이후부터 쭉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각성자보다 최신 무기가 더욱 효과적이란 게 증명되어 그리 힘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한율이 제임스라고 밝힌 이후, 각성자의 군 복무 강제 의무 법률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다시 힘이 실리는 상황.

한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전 괜찮아요. 두 분 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든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어.”

“네. 두 분도 얼른 퇴근하세요.”

한율은 다른 직원들에게도 꾸벅 인사하곤 사무실을 나왔다. 조유찬이 말한 우려를 생각하며.

‘시간은 걸리더라도 결국 그런 법이 만들어지겠지. 사람들 대부분은 본인 일이 아니니 찬성할 테고.’

지금도 한율이 본업, 아이돌 일을 중요시하는 걸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 당연히 그에 따른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며, 힘이 회복되는 족족 많은 사람의 안전을 위해 기계처럼 괴물을 처리하고 결계를 만들기를 원하는 인간들.

법은 그걸 강제하는 좋은 수단이다. 굉장히 환영하며 여론 형성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터.

반대로 다른 나라는 대한민국 여론이 그렇게 흘러가는 걸 비난할 것이다. 대규모 결계를 칠 수 있는 최강의 각성자가 한국인인 까닭.

‘특히 미국은….’

한참 생각을 이어가는데, 맞은편 계단에서 올라오던 누군가가 불쑥 손을 뻗어 흔들었다.

드림래빗의 박세은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아까부터 인사해도 못 봐.”

“아, 피곤해서 멍한 상태였어. 넌 이 시간에 안 들어가고 뭐 해.”

“매니저 오빠 기다리는 중. 팀장님이, 위험하니까 절대 혼자 퇴근하지 말라고 하셨거든.”

“나 지금 퇴근할 건데. 가는 김에….”

말이 다 끝나기도 전, 박세은이 정색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싫거든? 신문 1면에 실리고 싶지 않거든? 어쨌든, 조심히 들어가.”

“어, 너도. …아.”

인사를 나누고 지나치던 한율은 고개를 돌렸다. 계단 하나를 더 올라간 박세은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응?”

“나 들먹거리면서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너 괴롭히는 사람들, 절대 용서하지 마. 그런 사람들 말과 행동에도 심신 낭비하지 말고. 손해는 피해자인 네가 아니라 가해자가 봐야지.”

박세은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입가를 올렸다.

“응.”

잠시 후, 박세은은 3층 연습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늦은 시간에도 서한율을 보기 위해 회사 앞에 모인 사람들이 홍해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서한율의 차를 피해서.

얼마 전, 서한율의 사생 스토커가 그의 차에다 흠집을 낸 일이 있었다. 서한율은 곧바로 변호사를 고용해 민사 소송을 걸었다.

이 사건은 사생 스토커의 부모가 ‘서한율 정도나 되는 영웅이 너무하지 않냐’라며 인터넷에 하소연해 순식간에 퍼졌다. 그러나 여론은 서한율의 편이었다.

-본보기 지렸다.

-???: 돈 많으면 드루와ㅋㅋㅋㅋ

-서한율식 ㅍㄹㄹ 사용 방법

-청구 금액 보고 내 눈을 의심함ㄷㄷ 이래서 도로에서 비싼 차 발견하면 멀찌감치 떨어지란 거였고

-다른 각성자였으면 선물 받은 걸로 유세 떤다고 했을 텐데 그전부터 이미 수백억 가졌고 평소에 워낙 기부도 많이 해서 돈이 목적이 아니라 인실ㅈ이 목적이구나 확 와 닿아서 더 멋져요, 형님. 사랑합니다, 형님. 한 번만 태워주십시오, 형님.

-자식 단속이나 하세요. 영웅 스토킹하게 두지 말고.

-남의 재물에 고의로 손댔으면 당연히 배상해야지.

박세은은 서한율이 그렇게 강단 있게 대처할 때마다 감탄스러웠다. 수많은 사람을 구한 영웅이자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된 지금도, 여전히 어른스럽고 차분해서 더더욱. 그래서 종종 ‘나랑 동갑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나저나 그 얘기는 늘 할 타이밍을 놓치네.’

핸드폰을 가볍게 터치하자 뚱한 표정을 짓는 고양이 사진이 배경 화면으로 떴다. 본가에서 키우는 고양이 ‘뚱이’로, 서한율을 처음 봤을 때 뚱이와 굉장히 닮아 살짝 놀랐다. 그 뒤로 ‘나중에 조금 더 친해지면 말해줘야지’ 하고 미룬 게 벌써 몇 년째.

‘내가 어스래빗이란 팀명을 지었다는 것도.’

말하면 왠지 뚱한 얼굴로 ‘너였냐.’라고 말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말이다.

똑똑. 같은 드림래빗 멤버인 은보람이 열린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세은아, 퇴근하자.”

“응. 촬영은 잘 끝냈어?”

박세은은 은보람과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면서 함께 연습실을 나왔다.

은보람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다음엔 나 안 불러줄 것 같아. 선배님한테 찍혀서.”

“왜?”

은보람은 오늘 3세대 인기 남자 아이돌그룹의 멤버가 진행하는 인터넷 라디오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내가 번호를 안 줬거든.”

“잘했어. 여자 게스트한테 치근덕거리는 사람 프로그램에 또 나가서 뭐 해.”

“히. 그렇지?”

두 사람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매니저가 기다리는 차에 탔다.

숙소로 가는 동안 은보람은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그나저나 오래간만에 스케줄 가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다 나한테 서한율 어떠냐고 묻더라. 친해요? 회사에 자주 와요? 진짜 성격 어때요? 등등. 그래서 따로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다고 하니까, 같은 소속사면서 여태 뭐 했냐고 하는 거 있지?”

“수고했어. 배는 안 고파?”

“고프다. 많이. 고프다.”

매니저가 웃으며 물었다.

“가다가 어디 잠깐 들를까?”

“괜찮아요, 오빠. 지금 먹고 자면 붓잖…. 뭐야, 저 차?”

“응?”

어둑한 거리. 맞은편에서 오는 차의 전조등이 이리저리 휘청거린다.

“음주운전인가?”

매니저는 맞은편 차를 불안한 눈으로 힐끗하곤, 조금이라도 피하려 오른쪽 차선으로 바꿨다.

그 순간이었다.

번쩍. 맞은편 차가 돌연 상향등을 켜더니 곧바로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어, 어어?!”

당황한 매니저가 황급히 핸들을 돌렸으나.

콰앙!

“꺄악!”

전신이 흔들리는 강한 충격이 차를 덮쳤다.

…툭. 정신을 잃고 힘없이 떨어지는 박세은의 손. 바닥으로 나뒹군 핸드폰에선 고양이 사진이 환하게 켜졌다. 그 위로 천천히 핏물이 번졌다.

20여 분 후.

차남석이 한율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욕실에서 막 씻고 나오던 한율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차남석이 굳은 얼굴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너, 박세은이랑 친하지?”

한율은 핸드폰에 뜬 기사 제목을 보곤 미간을 구겼다.

[[속보] 인기 아이돌 차량, 무면허 외국인 차량과 충돌]

우웅. 그때 한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팀장님.”

-[한율아, 방금 경찰서에서 전화 왔는데…. 조금 전에 드림래빗 매니저, 그리고 세은이랑 보람이가 탄 차가 사고가 났거든.]

“네, 방금 속보로 뜬 기사 봤어요.”

오 팀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가해자 중 한 명이 경찰한테, 한율이 널 위해서 그랬다고 헛소리하고 있단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

한율은 목구멍까지 울컥 올라오는 쌍욕을 삼켰다.

“세 사람 상태는 어때요?”

* * *

[드림래빗 차량 충돌 가해자 “감히 서한율에게 꼬리 쳐”]

[서한율 소속사 및 숙소 인근 주민들 “항의하기도 지쳐 포기 단계”]

[서한율 향한 일그러진 팬심, 주위 여성 무차별 인신공격 도 넘은 지 오래]

[전문가 “서한율, 이런 사태 충분히 예상했을 것”]

[장 의원 측근 “도와달라 울부짖었지만, 서한율 외면… 결국 군인 아들 죽어”]

[영웅과 슈퍼스타에겐 책임이 따른다]

[한 시민 단체 “서한율의 전선 부재는 곧 부작위 범죄” 진정서 국방부 제출]

5일 아침, 어스래빗 숙소.

이건우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거실로 나오며 쌍욕을 내뱉었다.

“씨발, 하루아침에 이게 무슨 일이냐? 다들 미친 거 아니야? 정신이 어떻게들 된 거 아니냐고.”

거실 소파엔 유호가 삐딱한 포즈로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TV에선 오늘 새벽에 발생한 교통사고에 대해 떠들고 있었는데,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범행 동기에 초점을 맞췄다.

[이 외국인 여성들은 평소 인터넷과 SNS에 이번 사건 피해자들을 포함, 서한율 씨와 열애설이 났던 여성들을 대상으로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과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등의 행동을 했다고 하는데요. 전문가들은 ‘터질 게 터졌다’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요?]

[네. 아시다시피 요즘 서한율 씨의 인기가 대단하잖습니까. 그렇다 보니 삐뚤어진 팬심을 지닌 사람도 늘었는데, 서한율 씨는 4년 전 데뷔 초부터 온갖 사생 스토커에게 시달려 왔습니다. 그런 그가 현재 자신이 누리는 큰 인기의 부작용을 절대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는 게 많은 전문가의 주장입니다.]

[서한율 씨가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곳에 따로 회사를 차리거나 거주지를 옮겨야 했을까요?]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나 세계적인 팝스타들이 정원만 수천 평에 이르는 저택을 짓고, 경호원을 수십 명씩이나 거느리는 것만 봐도….]

삑. 더 듣기 싫다는 듯 이건우가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잘못은 정신 나간 범죄자들이 했는데 왜 한율이를 걸고넘어지냐고. 왜 우리 애가 조심해야 하는 건데.”

라이언도 화가 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꼭 누가 일부러 하뉼 때리려고 안 좋은 기사 한꺼번에 쓰게 만든 것 같아. 우리 쪽은 우리 회사 애들이 다쳐서 걱정인데.”

“의심하고 싶진 않은데…. 설마 어제 아들 잃었다는 그 국회의원 짓은 아니겠지?”

“난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봐. 아니면 그 아저씨 지지하고, 평소에 어떻게든 하뉼한테 이래라저래라하고 싶었던 사람들. 그런데 하뉼, 어디 갔어?”

서한율의 방은 활짝 열려 있었다. 이불이 잘 정돈된 침대엔 구동과 달냥이 태평하게 드러누웠다.

유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포털사이트 메인과 연예 뉴스란이 서한율을 향한 부정적인 기사, 혹은 우려를 표하는 기사로 도배되었다.

“원래 잡혔던 인터뷰 스케줄 있어서 일찍 나갔어.”

“어디랑?”

“미국 방송국.”

그 시각, 한 실내 스튜디오.

한율은 미국의 한 방송국에서 파견된 기자와 각성자 실험 관련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사전에 대본을 받은 데다, 생방송이 아니라 부담은 덜한 자리였다.

[그리고 대본에 없던 질문을 더 해도 될까요? 대답하기 곤란하거나 싫으시면 거부하셔도 됩니다.]

대본에 적힌 질문이 모두 끝난 상태. 기자가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한율은 흔쾌히 수락했다.

[네.]

[현재 수많은 나라에서 각성자의 군 복무 강제 법안을 거론하고 있는데, 한율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음….]

절대 그냥 묻는 게 아니다. 어제 대한민국 여당 대표의 아들이 군 복무 도중 사망한 일, 이후 흘러갈 시나리오를 염두에 둔 질문이 틀림없었다.

[각성자의 군 복무를 강제하는 건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희생은 당사자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정당성이 없으며, 의지 없는 희생 강요는 폭력이나 다름없지 않을까요?]

[한 사람의 희생으로 수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상황이 와도요?]

[네. 당사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기자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율은 반대한다는 거군요.]

[그렇다고 제가 병역 의무를 거부하겠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군대는 갈 거예요.]

[아, 한국은 병역 의무가 이미 법으로 명시되어 있죠?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 정말로 그런 법이 만들어진다면 한율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한율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은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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