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7화 (399/427)

벌써 집이 그립다

드림래빗 매니저와 박세은, 은보람이 입원한 서울의 한 종합병원. 한율은 보란 듯이 그곳을 찾았다. 매니저 조유찬과 함께.

“서한율?”

“저거 서한율 아니야?”

면회 허용 시간이라 병원엔 방문객이 많았다. 한율은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드림래빗 매니저의 병실을 먼저 찾았다. 그다음엔 박세은과 은보람의 병실로.

차는 거의 반파되었으나, 다행히 세 사람 모두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그러나 박세은은 왼팔이 골절되었고 얼굴에도 상처가 났다. 은보람은 오른쪽 이마와 어깨가 조금 다친 정도.

한율은 두 사람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병실에는 그들의 가족과 드림래빗 멤버들도 함께 있었다.

“두 사람에게 미안해요. 내가 미리 그런 사람들을 잘 처리했다면 이런 불미스러운 사고를 겪지 않았을 텐데.”

“아니야.”

박세은이 고개를 저었다.

“이게 어떻게 네 잘못이야.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범죄였잖아. 그리고 대표님께 들었어. 해외 악플러들까지 색출하기 위해 네 사비로 해외 로펌에다가도 의뢰하고 있었다고.”

“한율 씨는 이미 그런 사람들한테 여러 번 선 넘지 말라고 경고했잖아요. 그래도 미안하면.”

은보람이 침대 옆에서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 사람들, 정말 따끔하게 처벌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건 제가 확실히 약속드릴게요.”

병실 복도엔 한율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병원 직원들과 WB래빗이 고용한 경호원들이 간신히 병실까지 들이닥치려는 걸 막고 있었다.

“한율 씨, 팬입니다!”

“한율 씨, 사진 한 번만 부탁해도 될까요?”

“한율 씨, 우리 아이가 한율 씨 진짜 보고 싶어 하는데, 잠깐 병실로 와줄 수 없어요? 네? 부탁이에요! 우리 아이가 정말로 아파서요!”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한율은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의 요청을 모두 무시하곤 병원을 빠져나왔다.

어스래빗 숙소로 이동 중인 차 안.

“형.”

“응?”

한율은 창에 삐딱하게 머리를 기댄 채 조유찬에게 물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 새벽에 벌어진 일로 상처받았으나, 애써 티 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연기했다.

“형이 생각해도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요? 내 욕심을 위해서 모두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잖아요.”

“저언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유찬이 큰소리로 부정했다.

“애초에 한율이 너 아니었으면 대한민국 진작 망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런 이유로 참는 거라면.”

“그런 이유로 참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서한율 씨.”

조유찬이 씩 웃으며 한율을 바라보았다.

“하루하루 감사함을 느끼면 모를까.”

“…하지만 내가 제임스라고 밝히지만 않았어도.”

“그래도 언젠가는 들통났을걸? 동선이 한두 번 겹쳤어야지.”

한율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함인지, 조유찬이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다. 한율도 그제야 입가를 올리며 창에 기댔던 머리를 뗐다.

“고마워요, 형.”

우웅.

좌기훈 대표의 전화.

“네, 대표님.”

-[한율아, 조금 전에 어떤 연락이 왔는데… 너한테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연락인데요?”

-[자신을 각성자 윤다희라고 소개한 여자분인데.]

“아.”

계나리가 지나온 시간, 이우그룹은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며 각성자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사람 목숨보다 돈을 중요시하게 여기며 장사했는데, 그 중심엔 이우그룹에 충성한 본사 직원이자 강한 각성자가 있었다.

그게 바로 윤다희.

각성자 연구소 실험에서도 빨간색 등급이 나와, 한율이 눈여겨본 각성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아는 사람 맞니?]

“네. 용건이 뭐래요?”

-[각성자들끼리 모여서 국내 각성자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싶다더라. 연락처 보내줄까?]

‘한국도 각성자 협회가 만들어질 때가 되긴 했지.’

아니,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한참 늦었다. 보통 그런 단체는 강하고 리더십 있는 인물이 나서서 만들기 마련. 그러나 한국은 서한율이란 괴물이 각성자의 권리를 챙기기보단 사람들을 도우려 뛰어다니기만 했으니, 섣불리 나서기엔 눈치가 보였을 터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한율을 향한 부정적인 기사가 쏟아지고, 그 밑에서 각성자 관련 법안 발의를 위한 작업이 시작될 기류가 보이자 지금이 적기라고 느낀 모양.

“네, 부탁드릴게요.”

어스래빗 숙소.

“다녀왔습니다.”

“써한.”

초조한 얼굴로 거실에서 서성거리던 길우성이 순식간에 다가와 덥석 옷소매를 잡았다.

“잠깐 얘기 좀.”

“뭔데.”

길우성은 한율을 옥상까지 끌고 온 후에야 입을 열었다.

“병원 갔었다며? 다들 어땠어? 괜찮아 보였어? 많이 다쳤어? 야, 빨리 대답 좀 해 봐.”

“대답할 시간이나 주고 닦달해. 보람 씨는 이마 살짝 찢어지고 어깨 약간 다친 것 빼곤 괜찮아.”

“그렇….”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으려던 길우성이 멈칫했다.

“님, 왜 보람… 씨 상태만 말하는 거죠?”

“네가 제일 궁금해하는 게 그거잖아.”

“아니….”

길우성이 당황해하며 얼굴을 붉혔다. 우물쭈물하며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나더니, 인상을 팍 쓴다.

“아닌데? 세은 씨랑 매니저 형 상태도 궁금해서 물었는데? 왜 사람을, 어? 이상하게 몰지? 어?”

“내가 뭘. 너 예전부터 보람 씨한테 관심 있었잖아.”

“……!”

“들키기 싫었으면 티나 내질 말든가.”

길우성이 한 걸음 더 주춤 물러났다.

“나 그렇게 티 났냐?!”

“아니.”

“너 사람 놀리냐?!”

“용건 끝났지? 나 바쁜 일 있어서 다시 나가봐야 하니까, 달냥이 화장실 청소 좀 해 줘.”

등을 돌리자 길우성이 빽 소리 지르듯 대답했다.

“알았다! 야, 그런데 넌 괜찮은 거지?”

한율은 말 대신 손만 대충 흔들곤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인터넷은 난리가 났다.

오늘 아침 한율이 진행한 인터뷰가 조금 전, 미국 방송국 뉴스에서 공개된 까닭.

[서한율 美 방송국 인터뷰 충격 발언 “각성자 군 복무 강제되면 은퇴할 것”]

[(중략).

각성자로서의 은퇴를 말하는 거냐, 아이돌로서의 은퇴를 말하는 거냐 묻는 말에 서한율은 “각성자일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라며 사실상 각성자로서의 활약을 그만두겠다고 대답했다.

한편 오늘 새벽, 서한율의 해외 사생팬들이…(중략).]

-사실상 최상위 포식자의 협박 아닌가요?

ㄴ서한율 사람 잡아먹은 적 없는데요.

-생각을 해봐라. 하늘 날아다니는 범고래가 목줄 얌전히 차겠냐고ㅋㅋㅋㅋ

-???: 기껏 구해줬더니 이젠 노예처럼 부려 먹겠다고? ㅋㅋㅋㅋㅋㅋ 나 안 해 ㅅㅂ

-서한율이 맞말했네. 희생당하는 본인이 자발적으로 나서는 거면 모를까, 그걸 강요하는 건 폭력이나 다름없지. 대부분인 다수는 당사자가 아니라 남 일이니까 쉽게 지껄이는 거고.

-얼마 전엔 떠비 대표가 가족들 인질 잡혀서 협박당하고 오늘 새벽엔 열애설(허위) 상대란 이유로 드림래빗 멤버들 죽을 뻔하고. 내가 서한율이었어도 이런 상황에 강제로 군 복무까지 하게 만들면 개빡돌듯

-사실 서한율은 일가친척까지 다 끌고 미국에 이민 가도 할 말 없다ㅎㅎ

-서한율 씨. 서한율 씨는 가볍게 내뱉은 말이었을지 몰라도 당신처럼 유일무이한 강한 사람의 발언은 다수를 향한 폭력이자 불안감을 심어주는 협박이 됩니다. 실망이네요.

ㄴ구했으니 끝까지 책임지라는 개소리를 신박하게 하시네

ㄴ강제로 나라에 묶이는 게 싫다는 말이 왜 협박?ㅋㅋㅋㅋ 서한율이 언제 군대 안 간다고 했음?

-서한율 아이돌 계속하겠다는 말에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던 ㅅㄲ들 잘 봐라. 그 아이돌 일 때문에 서한율 계속 한국에 있는 거야. 왜 그걸 모르지?

ㄴㄹㅇㅋㅋ 아이돌 아니었으면 진작 한국 뜨고도 남았음. 팬들이랑 의리 지키느라 가만히 있는 거지

-사생팬(x) 사생 스토커(o)

-아 제발... 대한민국을 구한 사람이면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걸 왜 모르냐 아오 진짜 내가 다 답답하네ㅡㅡ

* * *

-[하루아침에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내게 한 건 여당 쪽 짓이 맞아요. 몇몇 시민 단체, 언론사랑 짜고 작전에 들어갔더라고요. 오빠를 확실히 나라에 묶어둘 수 있게 되면 다음 대선 또한 여당의 승리가 될 테니까요. 하지만.]

윤다희를 비롯한 각성자들을 만나기 위해 직접 차를 끌고 가는 중. 한율은 계나리와 통화했다.

-[하루도 안 지나서 오빠가 다른 데도 아니고, 하필이면 미국 뉴스에서 그렇게 선언할 줄 몰랐던 거죠. 이제 어떻게 나올지 기대되는데요? 회유로 노선을 바꿀지, 계속 여론을 통해 압박하는 방법을 사용할지.]

“윤다희에 대해선 알아봤어? 이번에도 이우그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것 같아?”

-[우음…. 아직 잘 모르겠어요. 실은 예전에도 윤다희가 왜 그렇게 이우그룹에 충성했는지 그 이유를 따로 캐지 않았거든요. 늘 명품을 휘감고 다녔던 거 보면 돈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에도 각성자 협회가 만들어지고, 그 협회장을 윤다희가 맡게 된다면?”

-[오빠가 맡을 생각은….]

“없어. 리더십이 좋은 것도 아니고, 바쁘기도 하고.”

-[음….]

계나리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윤다희도 리더로 두면 안 될 것 같아요. 예전에도 사실상 이우그룹의 명령대로 움직인 사람이었으니까요. 어쨌든 제 생각엔, 오빠가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사실 각성자를 강제하는 법만 막으면 상관없거든요.]

“각성자 협회가 만들어지는 건?”

-[그것 역시도요. 각성자 중에도 ‘마땅히 나라를 위해 희생해야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각성자가 갑이었던 시간을 겪어서 그런지, 협회 설립이 크게 기대되진 않네요.]

“나도 솔직히 기대되진 않아. 괴물을 상대로 효과적인 건 각성자의 어쭙잖은 능력보단 군이 가진 무기니까.”

-[네. 각성자들 능력 대부분은… 괴물보단 사람을 상대하기에 더 적합하죠. ‘지난번’은 대비도 못 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한 상태였으니 그거라도 감지덕지했지만.]

계나리와 떠드는 동안 어느새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한율은 통화를 마무리하곤 차에서 내렸다. 연구소에서 만났던 각성자들이 한율의 차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한율 씨. 일찍 오셨네요?”

“네. 잘들 지내셨어요?”

“네. 아, 그리고 미국 뉴스 봤어요….”

한편 그 시각, 육군훈련소.

오늘 막 입대한 스타믹스의 JE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멍해졌다. 생활관을 배정받고 난 뒤 저녁을 먹기 위해 온 식당. 웬 미친놈 하나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미안합니다, 전우들! 소중한 식사 시간에 쓸모없는 각성자 하나가 먼지 내며 돌아다니네요! 하하하!”

각성자 전형으로 입대한 놈일까. 머리카락을 완전히 빡빡 밀고 안경을 쓴 녀석이 천장에서 사족보행으로 돌아다닌다.

“하지만 어찌합니까! 군인은 상명하복이라고 하네요! 하하하! 하루 먼저 들어온 분이라도 하늘 같은 선배님이니, 여러분도 명령에 충실히 따르시길 바랍니다! 하하하!”

그 아래엔 한 훈련병이 난처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하고 있었다. 능력을 사용해보라고 부추긴 사람인 모양. 조교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간다.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JE는 반대로 시선을 던지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오늘이 입대 첫날인데 벌써 집이 그리웠다. 식판에 놓인 음식도 죄다 맛없어 보이고.

‘전역까지 며칠 남았지? 우리 팬들이랑 구동이 보고 싶다. 서한율 말 듣지 말고 나도 해원이처럼 각성자 전형으로 들어올 걸 그랬나?’

“손지은 훈련병님?”

“네?”

맞은편에 앉은 훈련병이 씩 웃었다. 주근깨가 인상적인 앳된 얼굴이었다.

“저 팬입니다. 소시지 하나만 주실 수 없겠습니까?”

팬이라면서 그나마 먹을 만해 보이는 반찬을 탐내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으나, JE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네, 드십시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