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8화 (400/427)

가입 보류하겠습니다

“…그래서, 각성자의 권리 및 자체 관리를 위한 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각성자의 능력이 필요한 곳에 쉽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창구도 되고요.”

“여러분 모두 어제 장호운 국회의원의 아들이 군 복무 도중 사망했다는 소식 들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기 직전, 장 의원이 게이트 방어선으로 직접 찾아가 구조를 부탁하면서, 특정 각성자들에게 연락하라 압박했단 이야기가 들리더라고요.”

“카모플라쥬의 진은수 씨랑 소리 차단 능력의 강준식 씨요. 저도 들었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듣고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과연 장 의원은, 군인 아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건 우리가 모인 목적이랑 조금 빗나간 문제 같은데요.”

“아니요? 권력자의 권력 남용은 우리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진은수 씨와 강준식 씨가 그때 본부에 있었다면, 능력 사용이 가능한 상태였다면 장 의원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었을까요?”

“음….”

“난 군인이 아닙니다, 군인이라 하더라도 의원님의 명령을 따를 의무가 없습니다. 이렇게 반박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다들 열심이네.

한율은 이곳에 모인 각성자 15명의 토론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애초에 이 모임을 주관한 윤다희가 협회를 만드는 데에 긍정적인 사람, 각성자 군 복무 강제 법안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만 연락해서 그럴까. 금세 협회 구성에 대한 틀이 잡혔다.

“그럼 이 자리에 모인 분 모두 한국 각성자 협회 구성원이 된다 여겨도 될까요?”

조용해진 장내. 질문을 던진 윤다희를 비롯해 모두가 한율을 바라보았다. 지구 최강의 각성자인 그가 각성자 군 복무 강제 법안이 만들어지면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들과 함께할 거라 믿는 기대 어린 시선으로.

한율은 손을 들어 발언했다.

“전 가입 보류하겠습니다.”

“……!”

“네?! 왜….”

놀라는 사람들을 향해 담담히 미소 지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전 게이트 방어 지휘부, 그리고 각성자 연구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본업은 이미지가 중요한 아이돌이고요. 그렇기에 섣불리 어떤 단체에 속할 수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실망하는 각성자들. 윤다희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도 각성자의 군 복무 강제 법안에 반대하는 뜻은 변함없으시죠?”

한율은 단호히 대답했다.

“네.”

윤다희가 안도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한율 씨.”

이후 한율은 스케줄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먼저 그곳을 나왔다. 가입을 보류하겠다면서 조직 구상도를 그리는 걸 지켜보는 것도 우스운 까닭이었다. 딱히 재밌을 것 같지도 않고.

‘손지은은 문제없이 입대했나?’

밖은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저물어 캄캄했다.

차에 탄 한율은 핸드폰으로 ‘스타믹스 입대’를 검색했다. 오늘 입대한 JE와 지헌의 기사가 떴다. 나머지 멤버들도 며칠 간격을 두고 입대할 예정이라, 댓글은 스타믹스 팬들의 눈물로 가득했다.

실검을 살폈더니 5위는 [스타믹스 동반입대], 4위는 [드림래빗 사고], 3위는 [장호운 아들], 1위는 [서한율 은퇴]였다.

2위는 [미스터리해커 정체].

‘결국.’

한율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보안에 철두철미한 국가 기관이라 하더라도 입이 가벼운 인물이 있기 마련. 국가 기관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뉴스 보도 하루 만에 계나리의 신상이 인터넷에 퍼졌다.

-사진 봤는데 귀여운 여학생이라 당황함.

ㄴ당황할 것까지야ㅋㅋㅋㅋ

ㄴ입에 사탕 꼬나물고 여기저기 문신 새긴 존나 힙한 형님 아니면 수염 덥수룩한 아저씨 상상했단 말이야

-체형 보니까 맞네, 서한율 펜션에 지내면서 둔갑술 각성자 잡았던 눈나

-ㄱㄴㄹ랑 같은 학교 다녔는데, 어스래빗 찐팬입니다. PPT 과제도 어스래빗 주제로 했을 정도ㅎㅎ

ㄴ게이트 사태 예견한 것처럼 서한율도 지금처럼 활약할 거 알고 있어서 팬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정말로 서한율 펜션에서 지냈다면 다른 어스래빗 멤버들도 얘가 미스터리 해커란 사실 알았을 것 같은데

-만약 이 여자애 아니면 단체로 소송당할 각;

ㄴ원래 다니던 고등학교가 통제 구역에 포함돼서 양평에 있는 학교로 재배치됐다는 걸로 봐선 빼박임

ㄴ초등학생 때부터 노트북이나 사과패드를 한 시도 몸에서 떨어뜨린 적 없다는 동창들의 증언

ㄴ초등학생 때 세계 주니어 해킹 대회 출전 이력도 있음. 동일 인물 아니고서야 이렇게 특징이 겹칠 수 있나?

-안녕하세요, 미스터리 해커 팬카페 만들었습니다. :) (링크)

관련 기사 댓글을 보던 한율은 고개를 기울였다. 문득 무언가 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뭔지 떠올려보려고 애쓰는데, 강보배로부터 사진이 도착했다.

-[ㅎㅎㅎ귀엽다]

-[(사진)]

지하 차고로 이어지는 문 앞에 나란히 앉아있는 달냥과 구동의 뒷모습. 그를 기다리는 걸까.

한율은 저도 모르게 웃곤 시동을 걸었다.

‘나중에라도 생각나겠지.’

* * *

인기 연예인을 주로 표적 삼아, 자극적인 소스로 집요하게 취재하기로 유명한 앗싸패치.

김 기자는 계나리의 사진을 보곤 중얼거렸다.

‘이 여학생이… 미스터리 해커였어?’

작년, 서한율이 경기도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비연예인 여학생과 데이트하는 사진을 제보받아 기사를 준비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사진 속 여학생이었다.

‘그럼 우리가 작년 말에 겪은 그 난리는….’

앗싸일보의 레이블로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작년 마지막 날, 바이러스 및 해킹 공격으로 인해 사무실과 기자들 PC가 온통 먹통이 되고 데이터까지 전부 날아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경찰에 신고해 수사가 진행됐으나, 결국 범인의 단서 하나 잡지 못한 채 종결되고 말았다.

‘설마….’

게이트 사태 이후 방송 및 연예계가 침체하면서 앗싸패치의 재정 역시 악화했다. 통제 구역에 포함된 사무실 또한 급히 옮기게 되어 더더욱. 직원도 절반가량이 떠났다.

현재는 각성한 연예인 관련 기사, 특히 서한율과 진은수 특집 기사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에이, 아닐 거야. 그때 결국 원본 사진은 이우그룹에 넘기고, 기사도 조용히 접었는데? 하지만 만약… 우릴 공격한 게 정말 미스터리 해커 짓이었다면?’

꿀꺽. 김 기자는 마른침을 삼키곤 가방에서 자료 저장용 핸드폰을 꺼냈다. 이 안에 당시 사진의 복사본, 그리고 제보자, 이우그룹 인물과 주고받은 연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터뜨리면 내 심장도 같이 터질 것 같아 무섭고. 그렇다고 덮고 넘어가자니 뭔가 억울하고.’

당시 그는 사진을 제보받자마자 WB래빗 엔터의 오동식 팀장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남들이 보기엔 언론사가 아무 예고 없이 열애설을 막 터뜨리는 것 같아도, 뒤에선 기획사에다 가볍게 혹은 대놓고 확인하는 게 이 바닥의 상도덕이었다. 그래서 곱씹을수록 억울했다.

‘결국 기사도 안 내고, 그 대가로 뭘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조용히 씩씩거리던 김 기자는 고개를 돌렸다. 예전과 비교하면 초라하고 볼품없는 작은 사무실, 그리고 기운 없이 야근하는 동료 기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

요동치던 감정이 절로 차분해졌다.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들을 상대로 싸움을 걸었다간, 이번엔 데이터가 아니라 회사가 날아갈지도 모른다.

‘그래. 기사는 안 썼지만, 이우그룹에 팔아넘겼잖아. 그걸 알고 기분이 얼마나 상하셨겠어. 어쨌든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사과드리러 가자.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김 기자는 자리를 정리하곤 일어났다.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내일 아침은 취재로 들를 곳이 있어서 늦을 거예요.”

선배 기자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래, 내일도 무사히 살아서 보자.”

다음 날 아침.

한율은 정상욱 중위의 연락을 받았다.

-[한율 씨, 오늘… 바쁘십니까?]

“이런저런 일이 있기는 한데. 무슨 일 있으세요?”

-[그게….]

머뭇거리던 정상욱이 대답했다.

-[장호운 국회의원이 한율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국군 병원에서요.]

국군 병원. 사실상 아들 장례식에 와 달라는 소리였다.

‘무슨 속셈일까.’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슬픔에 잠긴 부모를 향한 무례한 의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짐승만도 못한 자들을 많이 봐왔다. 자신이 살고자 죽은 자식의 사지를 잘라 육식 동물의 미끼로 쓴 부모, 배고프다며 자식을 잡아먹은 부모, 악독한 범죄자에게 돈을 받고 자식을 파는 부모 등등.

지구에서도, 한국에서도 제 자식을 무참히 때려죽이거나 방해된다며 방치해서 굶겨 죽인 부모의 뉴스가 종종 나오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부모가 훨씬 많다는 걸 알지만, 극소수라 해도 없는 것은 아니기에.

‘어제 각성자들이 모여 협회 조직을 논의했다는 정보도 귀에 들어갔을 테고.’

고민은 길지 않았다.

무슨 생각인지는 직접 만나면 알게 될 터.

-[말씀만 드리는 거니까, 곤란하면 제가 대신 장호운 의원에게….]

“아니요, 갈게요.”

장례식장에 입고 갈 만한 정장과 구두가 있었던가?

한율은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그럼 해원 씨도 보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각성자인 해원이 형이 근무 대신 국회의원 아들 장례식에 참석한다면, 그걸 두고 말이 만들어질 것 같아서요.”

-[고자질하는 것 같아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해원 씨, 휴가를 제대로 안 씁니다.]

“그래요?”

-[네. 기껏 휴가 쓰라고 보내는 곳이 장례식장인 게 조금 그렇기는 하지만, 이런 핑계라도 없으면 총성 없는 조용한 곳에서 맑은 공기 마시는 여유도 잊어버릴 것 같아서 말입니다. 휴일에도 주로 통제 구역 숙소에만 있고.]

“그럼 해원이 형이랑 시간이랑 장소 조율해서 함께 가도록 할게요. 아, 장호운 의원에게는 제가 간다는 이야기 하지 말아 주세요. 아직 대답 못 들었다고요.”

-[네.]

몇 시간 후, 경기도의 한 국군 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는 조문객의 차로 가득했다. 방송국과 언론사에서 나온 차도 많았다.

게이트 사태 이후, 순직한 군인들의 합동 영결식이나 장례식 취재 보도가 매일 있기는 했으나, 이번엔 장호운 의원의 아들 장례도 치러져 평소보다 더 많은 기자가 온 듯했다.

“게이트 방어선에서 순직한 군인 대부분은 합동 영결식으로 진행하는데.”

이해원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역시 한율처럼 새카만 정장과 구두를 신고, 머리도 단정하게 했다.

“합동 영결식으로 하면 다른 유가족에게 피해가 될까 봐 따로 하는 거래요.”

주차장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차를 주시했다. 기자 신분증을 목에 건 한 명은 눈을 크게 뜬 채 카메라를 들고 다가왔다. 한율의 차란 걸 알아본 모양.

“내릴까요?”

주차한 뒤 시동을 껐다. 이해원이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차에서 내렸다. 카메라를 들고 새롭게 나타난 차에 다가가던 기자를 의아하게 쳐다봤던 다른 이들이 화들짝 반응했다.

군인 신분이라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지는 않지만, 이해원 또한 전 아이돌이자 각성자 부대 소속으로 유명한 까닭. 여기에 한율까지 내리자, 누군가는 황급히 장례식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누군가는 전화를 걸었다.

“서한율 왔습니다! …서한율이 장 의원 아들 장례식에 왔다고!”

이해원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앞장섰다. 한율 또한 무거운 표정으로 걸으며, 눈이 마주치는 기자들에게 묵례했다.

찰칵, 찰칵. 이쪽을 찍는 카메라는 응시하지 않았다.

장 의원 아들의 빈소는 복도에 나열된 근조화환, 그리고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이쪽이라며 정중히 안내해주는 사람들 덕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서한율 씨.”

TV에 나오는 번듯한 모습이 아닌, 대충 빗질한 머리에 초췌하고 지쳐 보이는 중년 남성이 비틀거리며 빈소에서 나왔다. 비서로 보이는 이들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를 부축한다.

장 의원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율을 바라보며 힘없이 미소 지었다.

“우리 아들 장례식에 와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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