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존도를 줄일 필요가 있음
어스래빗 숙소.
며칠 만에 귀가한 한율을 보곤 라이언이 호들갑을 떨었다.
“하뉼, 왜 이렇게 살 빠졌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닌 거야? 군대가 굶겼어? 안색도 안 좋아.”
유호도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한율을 살폈다.
“한율이 너 잠도 몇 시간 안 자고 쉬지도 않고 계속 일한다며. 정말 괜찮은 거야?”
“라방 전에 가볍게 뭐 좀 먹을래?”
“각성자라고 근로기준법 적용도 못 받는 거냐? 아니, 어디에다 항의해야 하는 거냐? 노동청에 고발해도 돼? 국방부에 민원 넣을까?”
므앙므앙. 끼우웅?
달냥과 구동까지 무어라 한마디씩 한다.
한율은 발등으로 올라와 바짓가랑이를 잡는 구동, 다리에다 박치기하는 달냥을 함께 안아 들었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좀 씻을게요. 거기에서 가볍게 샤워만 해서 그런지 피로가 잘 안 풀리더라고요.”
“나 입욕제 좋은 거 있어. 줄게. 사람들 구하느라 수고한 하뉼한테 주는 선물.”
“괜찮아요. 오늘 선물 받아야 하는 사람은 형이잖아요.”
“하뉼도 받아도 돼. 기다려.”
한율은 라이언에게 받은 입욕제를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에 풀었다. 느긋하게 목욕을 즐기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한율을 향한 부정적인 기사는 지난 5일 하루만 반짝하고 그쳤다. 실검까지 올랐던 [서한율 은퇴]도 생각보다 빨리 사라졌으며, 각성자 군 복무 강제 법안 발의를 예측하는 기사도 더는 나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서로 없었던 일로 하자며 일부러 내린 듯이.
오늘은 한율이 게이트 방어선에서 쉴 새 없이 일한다는 기사가 뜨자, 장 의원 아들을 비롯한 군인들 사망에 죄책감 혹은 책임감을 느끼고 그러는 게 아니냐 안타까워하는 분위기가 흘렀다.
-같은 소속사인 드림래빗 멤버들도 본인 때문에 죽을 뻔했다고 자책하고 있을 텐데ㅜㅜ
-생각해 보니 웃기네. 군인들이 사망한 건 안타깝지만, 대체 왜 서한율이 죄책감을 느껴야 함? 원흉은 게이트 괴물인데? 그런데 그걸 빌미로 각성자 군 복무 강제 법을 은근히 밀어붙이려 했다는 게 더 웃김.
-서한율 멘탈 진짜 괜찮은 거 맞나요? 게이트 방어선에서 사망한 군인 시신도 직접 수습한다던데.. 힘이 강하다고 정신적인 충격을 전혀 안 받는 것도 아니잖아요. 공감 능력 떨어지는 사패나 소패도 아니고ㅜㅜ
ㄴ시신 수습도 한다고요?
ㄴㅇㅇ 장의사도 절레절레할 정도로 참혹해도, 평범한 사람은 접근하기 힘들거나 위험한 곳이라 혼자 들것에다 옮겨서 수습했다네요.
ㄴ미쳤네.. 아무리 본인이 괜찮다고 해도 그렇지, 군인도 아니고 불과 4개월 전까지 아이돌하던 애한테 그런 힘든 일을 시킴?
ㄴ그래서 대한민국 이미지 점점 폭망 중임. 나라 구한 최강의 각성자를 제대로 대우해주진 못할망정 괴롭히면서 노예처럼 부려 먹는다고 해외에서 ㅈㄴ 욕하는데 우리만 그걸 이 악물고 모른 척하는 중ㅋㅋ
-한국은 서한율 의존도를 줄일 필요가 있음.
‘정말로 의존도를 낮출 때가 되긴 했지.’
서한율이 무슨 짓을 하든, 각성자들을 데리고 어떤 실험을 하든 믿을 수 있다는 신뢰.
이만하면 긍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충분히 쌓았다.
부작용으로 신경을 건드리는 불쾌한 일, 귀찮은 일 또한 자주 발생하긴 했으나, 그런 것도 서서히 줄어들 것이다.
그러기 위해 며칠에 걸쳐 연기했으니.
우웅. 한율은 욕조 옆에 둔 핸드폰을 집었다.
박세은의 톡.
-[내일 퇴원한당ㅠㅠ]
-[(사진)]
브이 자를 그린 손가락 사진.
-[너도 몸 잘 챙겨ㅠㅠ]
[ㅇㅇ 퇴원 축하해]
잠시 후, 라이언의 생일파티 라이브 방송.
멤버들은 지난달 길우성의 생일 때보다 조금 더 높아진 텐션으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선물 증정식을 진행했다. 한율은 라이언에게 생일 선물을 건네며, 조금 전 그에게 받은 입욕제 얘기를 꺼냈다.
“정말 오래간만에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었어요. 향도 진짜 좋고.”
“더 줄 테니까 내일 갈 때 챙겨가.”
“고마워요, 형. 미국에서 필요한 거 없어요?”
라이언이 받은 선물을 끌어안고선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 건강.”
“…….”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해하는 한율과 웃음을 터뜨리는 멤버들.
“그래. 너만 건강하게 돌아오면 돼, 한율아.”
“이거 절반 줄게. 다 먹을 때까지 라이브 계속할 거야.”
라이언이 케이크를 내밀었다. 한율은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아니, 이건 너무 많잖아요. 하룻밤 사이에 3kg은 족히 찔 것 같은데.”
“한율이 넌 그 정도 쪄도 돼.”
“정 버거우면, 위의 딸기 장식은 내가 대신 해치워줄까?”
“야.”
결국 한율은 받은 케이크의 절반의 절반도 다 먹지 못했으나, 라이브 방송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끌벅적한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다 종료되었다.
그러나 라방을 본 이프림의 분위기는 마냥 밝지 않았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의 어스래빗 게시판.
-율톢 안색 안 좋아 보이던데 괜찮은 거 맞나
-율토끼 평소보다 리액션 0.3초 정도 느리고, 멤버들 보면서 웃는 데도 뭔가 한 걸음 물러서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이고
-라욘이 괜히 건강하게 돌아오라고 한 건 아닐 것 같음
-희생은 당사자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정당성이 없다고 율톢이 말하긴 했지만, 너무 희생하는 거 아니냐고ㅠㅠ 평소엔 똑 부러진 것처럼 보여도 은근히 마음 여린 게 율톢인데
-오빠가 게방부 군인인데, 원래 나만 보면 장난을 심하게 쳐서 언젠가는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였던 인간이었거든? 그런데 휴가 나올 때 보니까 전혀 다른 사람 됐더라. 자다가 갑자기 비명 지르면서 깨어나고, 동기가 눈앞에서 괴물한테 물려 죽는 거 봤다고 울면서 말하는데.. 율톢도 굉장히 강한 괴물을 처치한다곤 해도 사람이 죽은 거 보는 건 다른 문제일 텐데..
-서한율 성격상 본인 멘탈 흔들리는 모습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기 싫어서 더 참고 티 안 내려고 노력할 게 뻔해서ㅠㅠ
-정말 무사히 건강하게만 돌아오면 바랄 게 없을 것 같음
시간이 지나 새벽.
새로운 글 하나가 올라왔다.
[제목: 율톢 게이트 방어선 출근했답니다..]
[통제 구역 지키던 친구가 말해줬는데, 율톢 새벽에 게이트 방어선 간다고 지나갔다고 함]
-오늘 출국 아니었나?
-헐
-그만해 율아ㅠㅠㅠㅠㅠㅠㅠ
-얼마나 사람들이 뭐라고 그랬으면 평소 자기 관리 잘하던 애가 건강 해치면서까지 무리하냐고
-잠깐 볼 일 있어서 간 것일지도 모르잖아 진정하고 무장하자
ㄴ무장ㅋㅋㅋㅋㅋ
게이트 방어선.
한율은 게이트와 가까운 고층 건물 옥상에 섰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아직 출근 전인 정상욱 중위를 대신해 한율을 맞이한 본부 군인이 무전으로 물었다.
“네. 오늘 출국하면 몇 주 동안 자리를 비우게 될 텐데, 이 정도는 해놓고 가야죠.”
밑밥은 충분히 깔았다.
한율은 가볍게 몸을 풀곤, 보조를 위해 따라온 군인들을 향해 다녀오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군인들은 거수경례로 답했다.
탓. 한율은 가볍게 몸을 띄워 난간을 한 차례 밟았다. 바람에 몸을 실어, 쉬지 않고 괴물을 쏟아내는 게이트를 향해 날아갔다.
한편. 숙소에서 자고 있던 정상욱 중위는 서한율이 왔다는 보고를 받고, 부랴부랴 군복을 걸친 채 방어선으로 달려왔다. 그가 도착했을 땐 이미 은은한 푸른빛을 띤 거대한 결계가 스멀스멀 게이트를 감싸고 있었다.
정상욱은 망원경을 들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렇게 무리해도 괜찮은 건가.’
이윽고 결계가 완성되었다.
“한율 씨…!”
정상욱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결계 앞에 떠 있던 서한율의 몸이 순간 크게 휘청거리며 떨어지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몇 달 전, 서한율이 부산에서 거대한 괴물을 잡을 때였다. 일본인 각성자에 의해 그대로 추락하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일본인 각성자가 현재 게이트 방어선에 있을 리 만무.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힘을 바닥까지 다 쓴 거야…!’
건물에 가려 더는 서한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상욱은 무전을 쳤다. 서한율이 힘을 다 소진한 것 같으니, 가까이에 있는 부대는 그를 무사히 데리고 빠져나와달라고.
그러나 잠시 후 돌아온 대답에, 정상욱은 그만 무전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서한율 씨가… 의식을 잃었습니다.]
* * *
[[속보] 서한율, 대규모 결계 만든 직후 실신]
[오늘 13일 새벽, 게이트에 대규모 결계를 만든 서한율이 직후 의식을 잃어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사진=서한율.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서한율은 오늘 각성자 실험 건으로 미국으로 출국할 예정이었으며, 현재는 의식을 차렸다고 전해진다.]
-최강의 각성자라고 치켜세우면서 이거 해줘 저거 해줘 오만 가지 부담 다 떠넘기고 징징거릴 때부터 이 사달 날 줄 알았다 ㅅㅂ
이른 아침. 서울의 한 종합병원 VIP 병실로 어스래빗 멤버들이 들이닥쳤다.
길우성이 씩씩거리며 한율에게 다가왔다.
“야, 이 미련한 놈아. 네 몸 상태는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냐. 너 진짜 요즘 왜 그러냐? 어? 힘들면 힘들다고 말을 해라, 인마! 이프림 놀라서 다 울고 난리 난 거 안 보여?”
“내가 건강 챙기라고 했잖아. 새벽엔 왜 또 방어선으로 간 거야? 다친 데는 없어?”
“서한율 너도 막 의식 차려서 정신없는 거 아는데, 이 말은 꼭 해야겠다. 야, 너도 사람이야. 게이트가 열린 게 네 잘못도 아닌데 왜 그렇게…. 하…. 답답하다, 진짜. 좀 이기적으로 살 수 없냐?”
“부모님께는 연락드렸어?”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링거 주사가 꽂힌 손등이 아릿하다.
“네. 하지만 오시지 말라고 했어요. 힘을 바닥까지 쓴 것 때문에 잠깐 의식을 잃었던 것뿐이고, 그 외엔 아무 문제가 없거든요. 이것만 맞고 숙소 들렀다가 공항 가려고요.”
길우성과 라이언이 눈을 부릅뜨며 버럭 외쳤다.
“미쳤어?!”
“안 돼, 가지 마! 쓰러졌는데 어디를 가려고 그래!”
“아니… 정말로 몸에 이상 없다니까요? 이것도 그냥 영양제예요.”
“이상이 없는데 왜 쓰러져. 각성자 연구도 진행 중이잖아. 정말로 괜찮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거잖아.”
한율은 새삼 놀라운 얼굴로 라이언을 바라보았다.
“형 정말 한국어….”
“말 돌리지 말고. 나 지금 화내는 거야.”
“네. 하지만 출국은 미룰 수 없어요. 외교부랑 각성자 연구소 사람들까지 함께 가기로 했고, 미국에서도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유호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힘 다 썼다며. 각성자 실험도 모두 네 힘으로 하는 건데.”
한율은 안심하란 얼굴로 미소 지었다.
“이동하는 동안 조금이라도 회복되겠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유호는 가만히 한율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율이 각성자가 아닌 마법사이며, 어떤 원리로 각성자의 능력에서 마나를 추출하는지 아는 까닭이었다.
“아.”
그때 이건우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래간만에 해외여행이나 갈까? 게이트 없는 지역은 그나마 안전하다던데.”
“갑자기?”
“아.”
라이언도 문득 생각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사촌 동생 잘 지내나 궁금해졌어. 고모가 내 어릴 적 사진이랑 물건을 얼마나 팔아치웠는지도.”
“아이고, 그거 큰일이네.”
두 사람의 말뜻을 눈치챈 멤버들이 맞장구치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봐줘야겠는걸?”
“라이언 어릴 적 사진 궁금하다. 나도 갈래.”
“워싱턴 근처에 회색 게이트가 있기는 하지만, 안전하겠지. 전에 워싱턴 갔을 때, 어떤 박물관에서 제대로 느긋하게 구경 못 하고 나온 게 아직도 가슴에 미련으로 남았잖아.”
“나도. 그런데 남석이 넌 스케줄 괜찮아?”
“이번 주엔 없어. 그나저나 요즘 미국 날씨 어떠냐?”
“10도에서 20도 사이래.”
길우성은 한술 더 떠서 한율의 모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저 우성이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달냥이랑 구동이를 맡아주십사 하고요. …네, 우리 다 미국에 가야 할 것 같아서요. …응? 전 출국 허가받아야 하지 않냐고요? 아휴, 어머님.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걸 다 신경 써주시고.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박가람이 거기에다 대고 외쳤다.
“서한율은 걱정하지 마세요! 또 쓰러지지 않도록 감시하고 지키겠습니다!”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건지.
한율은 어이없는 얼굴로 멤버들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길우성을 향해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안 돼. 얌전히 숙소 지켜.”
“뭣이?! 어머님, 들으셨습니까? 어머님 아들이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