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안 돼
어스래빗 미국 여행은 불발되었다.
먼저, WB래빗 엔터 좌기훈 대표.
“중요한 나랏일 하러 가는 데에 방해하면 돼요, 안 돼요?”
여기에 라이언이 항의했다.
“전 집에 다녀오는 건데요?”
“응, 나중에 가렴.”
각성자 관리과는 길우성의 출국을 단호히 불허했다. 각성하지 않은 1130 증상자라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길우성은 상심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공격적인 능력이 각성하면 주변에 피해 줄 우려가 있으니까 안 된대…. 어정쩡한 미각성 상태인 것도 서러운데… 흑.”
어스래빗 숙소. 몇 시간 만에 퇴원하고 돌아온 한율은 방으로 찾아와 징징거리는 길우성에게 말했다.
“그래서 말했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안 된다고.”
“그럼 나 앞으로 해외 스케줄은 어떡하냐?”
“단체 스케줄이면 나도 같이 가는 거니까 허락 떨어질걸?”
“그럼 이번엔 왜 안 되는 건데?”
“내가 지금 아이돌 일로 가는 건 아니잖아.”
“하…. 슬프다, 달냥아.”
길우성이 멋대로 침대에 누우며 달냥을 끌어안았다. 달냥이 앞발로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므앙.
“아무튼 달냥이 잘 부탁한다.”
“엉. 나만 믿어라, 서 집사.”
구동은 진짜 정체가 수액 먹는 마물이란 사실을 아는 유호와 박가람이 돌봐주기로 했다.
한율은 작은 가방과 캐리어 하나를 챙기고 방에서 나왔다. 이건우가 캐리어를 대신 들어주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조심히 다녀와. 무리하지 말고.”
“또 쓰러지면 우리 바로 미국 날아간다? 우성이 빼고.”
“강보배 씨?”
“도착하면 단톡방에 톡 올릴게요.”
“사진도 올려.”
“네.”
대문 앞에는 각성자 관리과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골목엔 한율이 쓰러졌었단 소식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로 가득 차 상당히 시끌벅적했다. 결계에다 아예 사다리를 대고 담 너머를 훔쳐보던 사람들이 카메라나 핸드폰으로 촬영하거나 외쳤다.
“한율 씨, 몸은 괜찮아요?!”
“서한율, 아프지 마! 너 아프면 나도 죽어!”
“한율아, 사랑한다!”
한율은 그들이 전혀 안 보이는 것처럼 게방부 군인과 인사를 나눴다. 캐리어를 실어준 이건우에게도 고맙다고 말한 후 차에 탔다.
이건우가 한율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든, 다른 사람 배려하기 전에 너부터 챙겨. 알았지?”
“네, 형. 고마워요.”
“다녀와.”
이건우가 한율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곤 문을 닫아주었다. 한율은 창 너머로 씩 웃어준 뒤 안전띠를 맸다. 게방부 군인들이 차를 에워싼 사람들을 물러나게 했다.
“출발하겠습니다.”
“네. 안전 운전 부탁드립니다.”
미국으로 가는 인원은 한율을 포함해 총 15명이었다. 각성자 연구소 4명, 외교부 5명, 국방부 5명.
국방부에선 각성자 관리과의 정상욱 중위, 각성자 부대의 이해원과 권한정이 포함되었다. 다른 두 명의 군인은 특수부대 소속으로, 한율의 경호 임무를 맡았다.
인천 국제공항.
공항에서 특별히 마련해준 귀빈실에서 만난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눴다. 외교부 북미국장이 가장 먼저 한율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몸은 괜찮아요?”
“네. 걱정 끼쳐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오히려 우리가 많은 부담을 짊어지게 해드려 죄송하죠.”
각성자 연구소 사람들은 초조한 얼굴로 한율을 살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죠, 한율 씨?”
“네. 이동하는 시간도 있고, 가자마자 곧바로 실험을 진행할 것도 아니니까 그때까진 어느 정도 힘이 회복될 거예요.”
“영양제 챙겨왔는데, 드시겠어요?”
“괜찮아요. 멤버들이 이미 가방에다 듬뿍 넣어줬거든요.”
한율은 내친김에 가방을 열어, 강보배가 잔뜩 챙겨준 홍삼 엑기스를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드세요. 많아요.”
“앗, 감사합니다.”
“허허, 뭘 이런 걸 다. 고마워요.”
한율도 의자에 앉아 홍삼 엑기스를 먹었다.
우웅. 계나리로부터 톡이 왔다. 누군가의 증명사진과 함께.
-[함께 가는 외교부 직원 중에 장호운 의원 쪽 사람이 있네욥]
[ㅇㅇ 아마 허튼짓은 안 할 거야.]
-[넵ㅎㅎ 그런데 몸은 정말 괜찮은 거 맞죠?]
[ㅇㅇ]
-[(이모티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토끼 캐릭터 이모티콘.
옆에 앉은 이해원이 조용히 물었다. 다른 사람도 있는 공적인 자리라 어색하면서도 딱딱한 말투로.
“나리 씨는 좀 어떻습니까?”
지난주 미스터리 해커 계나리의 신상이 인터넷에 파다하게 퍼졌다. 아직 각성자라고 발표는커녕 어떻게 게이트 사태를 예견했는지 밝히지도 않았건만, 저들끼리 이러쿵저러쿵 추론은 기본에다 팬 카페까지 만들어졌다.
계나리가 주목받으니 자연스레 그 가족에게도 관심이 쏠렸고, 특히 오빠인 계마루는 SNS 스타가 되었다.
“괜찮은 것 같아요. IP 추적 들어갈까 봐 섣불리 악플 다는 사람도 적고, 기관 일을 그리 자주 돕는 것도 아니라서요. 외출할 땐 늘 경호원이 붙기도 하고. 그런데 형, 나리 씨랑 따로 연락 안 해요?”
게이트 사태가 벌어지기 전, 명상 센터에서 수련할 때부터 두 사람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양평에 펜션과 집을 마련했을 때도 자주 만났고.
이해원이 옅게 미소 지었다.
“입대한 뒤로 정신이 없다 보니. 나리 씨도 고3인데다 지금 일로 바쁘잖습니까.”
한편 그 시각, 종로에 마련된 계나리의 집.
계나리는 쭈욱 기지개 켜며 하품했다.
“흐아아암.”
며칠 동안 귀찮아서 감지 않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긁적긁적. 바닥마다 커피 자국이 말라붙은 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의자에 미끄러지듯 기댔다.
‘알바 자리는 구했는데 왜 이렇게 심심하지…. 일거리를 안 주는 개꿀 알바라 그런가.’
계나리는 초코톡 상태 메시지를 [세금 도둑]으로 바꿀까 1초 정도 고민하다가,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아잇, 깜짝이야! 뭐야, 계마루!”
계마루가 문틈으로 얼굴 반만 내민 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터덜터덜 들어왔다.
“나리나리.”
“왜.”
“나 영장 나왔다.”
“어쩌라고.”
“네 백으로 나 한적하고 안전한 데로 보내주면 안 되냐?”
“꺼져.”
“엄마가 다 마신 컵 설거지 안 해놓고 머리도 안 감으면 네 어릴 적 사진 인터넷에 올리겠다던데.”
“아, 엄마아!”
계나리는 괜히 칭얼거리면서 일어났다. 계마루가 씩 웃으면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걱정하지 마. 이미 내가 한 장 올렸어.”
“죽어!”
퍽.
“악!”
털썩. 요란스럽게 쓰러진 계마루가 부들부들 떨면서 계나리를 노려보았다.
“내 너의 실체를 한율 형님에게 고자질할 것이다…!”
계나리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넌 최전방으로 가게 될 것이다.”
“으아아…! 왜 이딴 녀석이 미스터리 해컨데!”
“시끄러워, 당장 나가!”
거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 다 조용히 해! 언제 철들는지 정말.”
“…….”
“…….”
“…야. 어떤 기자 아저씨가 나보고 인터뷰하자더라?”
계마루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며 조용히 말했다. 계나리도 목소리를 낮췄다.
“어디의 누가?”
“앗싸패치의 김 기자란 사람이, 한율 형님 펜션에서 지냈을 때랑 너에 관해 묻고 싶다고. 거절했는데, 아까 편의점 갔을 때 마주쳤어.”
“그래서?”
“‘사랑합니다’ 한마디 해달라고 했지? 하시더라? 그래서 ‘전 싫은데요, 두 번 더 찾아오면 스토킹으로 경찰에 신고할게요’라고 말했다.”
“잘했다.”
“그런데 한율 형님은 괜찮으시대?”
계나리는 다 마신 컵을 챙기며 대답했다.
“네에.”
“정말 형님이랑 아무 사이 아니지?”
“아니라니까 몇 번을 말해.”
“하긴. 음, 그런 기적이 일어날 리 없….”
퍽.
“악!”
우웅.
초코톡을 확인한 계나리는 씩 웃곤 PC 전원을 모두 껐다.
“난 은수 언니나 만나러 가야겠당.”
“은수…? 설마 퍼플아워 은수 누님?!”
“흐흐.”
“동생님, 나도 제발. 어? 야, 그런데 너 머리도 안 감고 나가는 건 아니지? 그래, 우리 동생. 머리 안 감으면 뭐 어떠냐. 든든한 오라버니가 경호원으로 같이 가주는데. 어? 야, 줘. 설거지 내가 해줄게. 넌 가서 머리 감아.”
잠시 후, 예쁜 식물과 꽃으로 가득한 플라워 카페.
며칠 만에 깨끗하게 씻고 예쁘게 차려입은 계나리는 후련한 얼굴로 음료를 마셨다. 계마루는 집에다 떼어놓고 나왔다.
“언니 덕분에 사람들한테 안 잡히고 편하게 나올 수 있었어. 고마웡.”
진은수는 계나리를 귀엽게 바라보며 웃었다.
“도움 돼서 다행이야.”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의 근황을 물어보며 수다를 떨었다. 음료가 반 정도 남았을 때 즈음, 계나리가 물었다.
“그런데 의논하고 싶은 일이 뭐야?”
“이 기사, 나리 너도 봤지?”
진은수가 핸드폰에다 기사를 띄워 내밀었다.
[한국 각성자 협회 설립 “국내 각성자 보호 및 상생 위할 것”]
“응. 어제 뉴스에서도 온종일 떠들었잖아.”
“오늘 회사 통해서 가입 권유 연락이 왔는데, 고민돼서.”
진은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각성자 권리를 위해서 활동도 하고, 사람들을 돕는 봉사활동도 할 계획이라니까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내가 아는 각성자 중엔 가입한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음,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어.”
주위를 살핀 계나리는 목소리를 낮췄다. 카페에 있는 손님은 둘 뿐이었다. 사장은 가게 구석에서 화초를 정성스레 닦는 중.
“언니 거기 가입하면, 게이트 방어선 드나드는 것 가지고 오지랖 빙자한 불만 열 마디 듣게 될걸?”
“왜?”
“위험한 곳에서 목숨 걸고 무료 봉사한다고.”
“…….”
“나라에서 배상금 제도를 만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료 봉사에 가깝잖아. 그런데 언니처럼 유명한 각성자가 지금처럼 바쁜 시간 쪼개가면서 일 도와봐. 이런저런 권리 외치는 본인들은 뭐가 되냐 이거지.”
“하지만 사람 돕는 봉사활동도 한다고….”
계나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선전용 문구야. 초반에나 깔짝깔짝 시늉만 하고, 나중엔 중개 수수료 받아 처먹을 게 뻔해. 글로벌 스타인 언니를 간판으로 세워놓고.”
점점 멍해지는 얼굴로 설명을 듣던 진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입 안 할게.”
“잘 생각했어. 그렇게 좋은 곳이면 율이 오빠나 해원 씨가 먼저 가입했겠지.”
진은수는 재차 고개를 끄덕이며 음료를 들었다.
“그건 그래.”
* * *
미국 워싱턴.
약 14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한율은, 미국 정부 측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호텔로 이동했다. 한율에겐 호텔에서 가장 좋은 객실이 제공됐다.
한율은 이 널찍하고 아름다운 객실에 얼마나 많은 카메라와 도청기 등이 설치되어 있을까 추측해보며 창밖을 보았다. 저 멀리 게이트가 보였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꽉 막힌 회색 게이트가 마치 생기다 만 뭉게구름처럼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게이트는 그의 마법에 영향을 받고 일찍 열렸다. 미국 몇몇 주에서 실험했을 때도 그랬다.
이후 회색 게이트에 어떤 영향을 끼치진 않을까, 한국에서 대규모 결계를 펼친 후 돔구장에 뜬 게이트를 살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별다른 특이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계나리도 지난 시간, 회색 게이트에서 변화가 일어난 걸 본 적이 없다고 했고.
‘레드 게이트보다 훨씬 많은 게 저런 종륜데. 지구와 뭔가 맞지 않아서 열리지 못하는 건가? 하지만 한국에서 회색 게이트가 생긴 직후 능력자들이 각성하기 시작한 걸 생각하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던 한율은 짐을 풀었다. 아직 정오라 밖이 환했으나, 오늘은 시차 적응과 컨디션을 위해 푹 쉬기로 했다. 숨겨진 카메라가 있을지 모르므로, 목욕할 때나 옷을 입을 땐 환영 마법으로 모습을 감췄다.
‘단톡방에 사진 올리기로 했었지.’
한율은 창밖으로 보이는 워싱턴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었다.
[워싱턴 호텔 도착했습니다.]
한국은 늦은 밤이었지만, 금세 멤버들이 반응했다.
-[안색 조금 나아진 것 같아 다행이다ㅎㅎ]
-[맛있는 거 많이 먹어!]
-[(사진)]
-[달냥이랑 구동이 너 며칠 동안 안 오는 거 아는 것 같당. 안 기다리고 논다.]
띠링. SNS DM 알림이 떴다.
지난 6월, 이탈리아 패션쇼에서 만나 맞팔을 맺은 엠마 애커먼.
-[제임스에게 로건 워커 씨와 관련 있는지 물어봐 준다던 약속, 기억하나요? :)]
‘아.’
태연히 엠마를 속이며 했던 말과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율은 솔직한 답장을 보냈다.
[본의 아니게 속인 점 미안해요. 여유가 생기면 직접 설명하고 사과하고 싶었는데, 바빠서 그만 깜빡 잊었어요.]
곧 답장이 왔다.
한 장의 사진과.
-[분명히 ‘직접’이라고 했어요?]
-[(사진)]
워싱턴의 명소 중 하나인 링컨 기념관.
-[오해할까 봐 말해두는데, 전 한 달 전부터 워싱턴에 있었어요. :)]
한율은 전 약혼녀 손녀의 마음을 어떻게 풀어주고, 어떻게 변명해야 좋을지 잠시 고민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