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도 있대
웨스트 포토맥 공원 링컨 기념관 뒤.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에 따뜻한 오후 햇살이 비친다.
한율은 어스래빗 멤버들과 함께 왔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조용히 그곳을 거닐었다. ‘로건 워커’로 전장 한복판에 떨어졌을 당시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한율?]
걸음을 멈추고 미군 조각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커다란 선글라스를 낀 여성이 다가왔다.
한율은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엠마.]
[정말 한율 맞죠? 미리 특징을 듣지 않았다면 감쪽같이 모를 뻔했어요. 그나저나.]
엠마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멋쩍게 미소 지었다.
[약속 장소를 다른 곳으로 잡을 걸 그랬나 봐요.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은.]
기념비 근처엔 사람이 무척 많았다. 꽃다발과 화환, 편지도 풍성하게 쌓였다. 이는 한율, 그리고 어스래빗의 인기가 많아져 생긴 영향 중 하나였다. 3년 전 이곳에 와서 헌화하고 묵념한 콘텐츠가 재주목받은 까닭.
미국인에겐 자국이 한국전에 참전해 도운 게, 오늘날 최강의 각성자인 서한율의 도움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큰 자부심으로 느껴졌을 테니 당연했다.
미국인뿐만이 아니었다. 워싱턴에 방문한 다른 외국인 팬들에게도 꼭 둘러봐야 하는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고 들었다.
서한율도 아니고 제임스도 아닌,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한 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당신의 활약은 늘 뉴스와 인터넷으로 보고 있어요. 몸은 괜찮아요? 얼굴 바꾸는 데도 힘이 적잖이 소모된다고 들었는데.]
[잠깐 정돈 괜찮아요. 좀 걸을까요?]
[네.]
엠마와 나란히 걸으면서 우선 그녀를 속인 걸 사과했다. 엠마는 충분히 이해한다며 받아주었으나, 어떻게 제임스의 외형을 결정하게 됐는지 무척 듣고 싶어 했다. 한율은 적당히 둘러댔다.
[당시엔 그냥 떠올라서 사용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신의 SNS를 본 게 뇌리에 박혔던 것 같아요. 그의 가족들에겐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아….]
엠마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실소했다. 그녀는 3년 전, 자신의 SNS에 [1960년대 중반, 한국을 방문했다 실종된 텍사스 출신의 로건 워커 씨를 찾습니다. 크리스티나가 기다려요]라는 글과 함께 로건 워커의 젊은 시절 사진을 함께 올렸다.
[그런 경우 있죠. 스치듯 들은 이름이나 문장을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생각인 양 떠올리는 일. 어쨌든 내 SNS 영향을 받았다니, 음….]
[엠마 당신의 잘못은 아니에요.]
[네. 그럼 한율은.]
엠마가 한율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거리가 가까워 선글라스 너머 그녀의 눈빛이 잘 보였다.
[3년 전에 내 SNS를 봤다는 거네요?]
한율? 현재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의 이름에, 지나가던 이들의 고개가 둘을 향했다. 곧 ‘그’ 서한율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곤 실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런데도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한율이 가장한 지금 모습을 보고.
한율은 호감이 가득한 엠마의 눈빛, 그녀의 선글라스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본래 세상, 그의 진짜 외모와 흡사한 얼굴을.
한율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당신이 우리 콘서트에 왔었다는 기사가 한국 최대 포털사이트에 대문짝만하게 떴었거든요. 로건 워커를 찾는다는 SNS 글도.]
[아.]
가볍게 반응하는 엠마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더니 과거 크리스티나처럼 매력적으로 웃는다.
[여자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가 있네요? 직접 이야기하고 싶다길래 살짝 기대했는데.]
[미안해요.]
[와, 자연스럽게 두 번 연속으로 차네. 이런 취급은 조금 익숙하지 않은데. 음, 맛있는 걸 먹으면 마음이 살짝 풀릴 것 같기도 하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엠마를 향해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대접할게요.]
다음 날.
한율은 한국에서 함께 온 인원과 미국 각성자 연구소를 찾았다. 초기 명칭은 ‘각성자 능력 실험 연구소’였으나, 실험이란 단어가 부정적으로 들린다며 각성자 연구소로 바뀌었다.
미국 각성자 연구소 소장은 인사를 나누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통역가를 제외한 외교부 직원들은 미 정부에서 나온 인물들과 따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에서 보내주신 실험 관련 자료 읽어봤습니다. 정말… 한율 없이는 불가능한 실험이더군요.]
한율은 입에 발린 거짓말을 했다.
[어쩌면 저처럼 각성자의 능력에서 힘을 흡수해 가공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있지만,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소장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제삼 세계 국가에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한율, 다른 각성자의 능력에서 힘을 저장해 가공할 수 있다면, 당신의 힘 또한 저장이 가능한 겁니까?]
[제가 만드는 결계도 엄연히 따지면 그런 종류가 아닐까 하는데.]
[아. 제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군요.]
[아니요. 핸드폰처럼 소장이 가능한 형태를 떠올리고 물어보신 거라면, 비슷한 걸 만든 적이 있습니다.]
[오, 실례가 안 된다면 한번 볼 수 있을까요?]
한율은 가방에서 어스래빗 굿즈 중 하나인 작은 인형을 꺼내 내밀었다. 지구를 품에 안고 눈을 찡긋하는 귀여운 토끼 인형. 걸치고 있는 티셔츠 뒤쪽엔 어스래빗 로고가 멋지게 새겨져 있었다.
[선물로 드릴게요.]
[오오, 귀엽네요. 촉감도 부들부들하니 좋고. 우리 딸아이가 참 좋아하겠어요. 여기엔 어떤 힘이 담겨 있나요?]
[총을 제외한, 어느 정도 강한 물리력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작은 결계요. 스스로 충격을 감지하고 결계를 펼치도록 설계했어요.]
[……!]
놀라는 사람들의 표정. 곧 소장을 향해 부럽기 그지없다는 시선이 쏟아졌다.
[예전에 한국에서 어떤 사기꾼이 한율이 만든 보호 부적으로….]
[그건 정말 저와 무관한 사기 행각이었어요. 진짜는 만들기가 참 까다롭기도 하고 힘이 적잖이 들어가서, 정말 소수의 사람에게만 나눠줬거든요.]
소장의 얼굴이 감동으로 얼룩졌다.
[그렇게 귀한 걸 저한테. 정말 고마워요.]
[아니에요. 인류를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는 분께 이 정도쯤이야. 부디 소장용으로만 사용되길 바랍니다.]
겸손한 미소 뒤, 한율은 속으로 덧붙였다.
미국 각성자 수만 명의 정보를 모조리 공유해준다는데, 이 정도 선물은 줘야지.
연구소에는 오늘 실험에 참여하기로 한 각성자 수백 명이 모였다. 실험은 한국에서 한 방식과 똑같이 진행되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한율의 관심을 끌기 수작질하는 사람도 많았고, 핸드폰 반입 금지를 거부하며 난동 피우다가 쫓겨나는 사람도 있었다. 다짜고짜 한율에게 겨뤄보자는 호승심 넘치는 사람도 있어, 가볍게 허공에서 놀이기구를 태워줬더니 잠잠해졌다. 여기에 권한정의 능력에 걸려 쫓겨난 사기꾼들까지.
실험이 끝나 호텔로 돌아왔을 땐 피곤한 모습을 연기했다. 그런데도 애써 괜찮은 척, 식사는 객실에서 혼자 먹겠다고 말하곤 틀어박혔다.
다음 날도.
미국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던 주말. 주말 동안은 실험 없이 휴식이라, 한율은 오후 늦게까지 자다가 일어났다. 그러곤 워싱턴 인근에 뜬 회색 게이트로 향했다.
게이트는 미군이 거대한 진지로 둘러싸고 있었다. 사전에 허락을 받아둬, 경호 임무를 맡은 군인들과 정상욱 중위, 이해원과 함께 미군의 안내를 받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서울에 뜬 거랑 크기가 비슷한 것 같은데요?”
“이렇게 가까이에서 게이트를 보는 건 처음입니다.”
이곳 게이트는 지상 아래로 수십 미터 파묻혔을 정도로 낮게 생긴 까닭에, 진지만 뚫으면 누구나 접근하기 쉬웠다.
미군이 물었다.
[미스터리 해커가 그랬잖습니까. 회색 게이트는 언제 열릴지 장담할 수 없다고. 그래서 이렇게 만반의 준비로 대비하고 있습니다. 한율, 당신이 보기에 적색 게이트와 비교하면 어떤 것 같습니까?]
[잠깐 뒤로 물러나 주시겠어요?]
한율은 한국인 일행에게도 똑같이 말했다. 그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슬쩍 떨어졌다. 다시 게이트로 시선을 돌린 한율의 눈이 짙은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게이트로 손을 뻗어 바람의 마나로 공격해보았다. 츠팟. 날카로운 바람의 마나가 두 동강 나며 흩어졌다.
[한국에 뜬 회색 게이트와 마찬가지로 단단히 막힌 느낌이 강하네요. 위쪽도 둘러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게이트 위로 도약했다. 구석구석 살펴보며, 게이트 주변에 흐르는 자연의 마나에 집중했다. 게이트를 슬며시 피해서 흐르는 게, 다른 게이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회색 게이트에서도 각성자 능력에서 추출한 마력으로 실험해보고 싶은데. 하지만 이건 너무 커. 만약 게이트가 열리기라도 한다면…. 아니, 반드시 적색이 되리란 법도 없지만.’
드드드.
“……?”
둥둥 뜬 채 생각에 잠겼던 한율은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카메라가 설치된 미군 드론이 가까이 다가와 주위를 맴돌았다.
한율은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 * *
[미국 각성자 3천 명 만나는 서한율… 건강은?]
[외교부와 국방부, 각성자 연구소와 함께 공식적으로 미국에 건너간 서한율이 한국 날짜로 오늘 26일까지 만난 미국 각성자가 2천 명을 돌파했다.
(중략).
외신에 따르면 서한율은 도착 첫날을 제외하곤 실험 일정이 끝나 호텔로 돌아가면 식사를 모두 객실에서 해결하고 있으며, 외출도 워싱턴의 회색 게이트를 한번 둘러본 것 외엔 일절 하지 않고 컨디션 조절에 집중한다고 전해진다.
한편 서한율은 미국 레드 게이트에서 최종 실험을 마치면 귀국해 본업인 아이돌 일정을 소화한 뒤, 러시아로 건너갈 예정이라고 알려졌다.]
-3천 명까지 만날 예정이면 하루에 수백 명씩 만나야 한다는 소리네ㄷㄷㄷ
-스케줄: 광고 모델로 활동 중인 도레미 피자 팬 사인회
ㄴ광고 계약 다 끝냈다고 알고 있는데 아직도 있었구나
ㄴ다른 곳이랑은 연장 없이 끝냈는데 피자는 올해 12월까지였고 이우전자 브랜드 광고 계약 기간도 남았음
ㄴ최강의 각성자도 감히 어기지 못하는 계약 조항
-얘 출국 전 새벽에 의식 잃었을 정도로 몸 상태 안 좋지 않았나? 이렇게 바쁘게 다녀도 괜찮은 거임?
ㄴ그러게 말이에요ㅜㅜ
ㄴ미국 방송국 인터뷰도 컨디션 조절 땜에 전부 거절한다던데ㅠㅠ
ㄴ아프지 마 한율아ㅠㅠ
인천 국제공항.
슥슥. 기사에 달린 댓글을 살피던 라이언은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타야 할 비행기 탑승이 시작된다는 안내 방송을 듣고.
박가람이 가방을 챙기고 일어났다.
“게이트 실험 시작 전엔 도착할 수 있겠지?”
차남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렌터카 빌렸으니까, 밟으면 되겠죠.”
“음, 만약 사고가 나더라도 우리에겐 서한율이 준 아이템이 있다. 흐. 가자, 아우들아.”
“응.”
박가람과 라이언, 차남석은 탑승 게이트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세 사람은 서한율의 미국 공식 일정이 곧 끝나니, 그에 맞춰 직접 데리러 가는 건 괜찮지 않냐며 좌 대표를 설득해 출국 허락을 받았다. 다른 멤버들도 함께 가고 싶어 했으나, 여러 명이 움직이면 사람들 눈에 띄어 여러모로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허락받지 못했다.
“우리 갈 때까지 또 쓰러지기만 해 봐. 아주, 맛없는 죽을 쒀서 입에 넣어버리겠어.”
한편 그 시각, 육군훈련소.
입대한 지 어느새 4주 차에 접어든 JE는 무념 무상한 얼굴로 맛없는 아침을 입에 넣고 있었다.
“형님, 그 얘기 들었습니까?”
툭하면 팬이라며 맛있는 반찬을 뺏어 먹는 입소 동기가 이번에도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JE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무슨 얘기 말입니까?”
동기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 끝에는 각성자 전형으로 입대한 훈련병이 모여있었다.
“아까 저쪽에서 하는 말 들었는데, 우리나라에도 노란색 게이트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서울 근처에요.”
“……?!”
놀란 JE는 하마터면 수저를 떨어뜨릴 뻔했다.
설마 서한율이 건너갔었다던 그 게이트는 아니겠지? 그 녀석이 건너간 게이트는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혹시 다른 게이트인가?
“어디에 말입니까?”
동기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야 모르죠? 계란말이 하나만 먹어도 됩니까?”
보다 못한 또 다른 동기가 한마디 했다.
“그만 좀 뺏어 먹어라, 인마. 손지은 훈련병님 살 빠진 거 안 보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