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3화 (405/427)

안녕, 워싱턴

국회의사당 의원회관.

장호운 국회의원은 서한율과 함께 미국으로 간 외교부 직원의 보고를 비서를 통해 들었다.

“도착 첫날에 몰래 나갔었다고?”

“네. 서한율을 쫓는 파파라치들이 호텔 직원을 매수해 알아낸 정본데…. 결론만 말씀드리면 제임스 때처럼 모습을 완전히 바꾸고 외출했던 것 같다고 합니다. 당연히 누구를 만났는지 오리무중이고요.”

장호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작정하면 무슨 일이든 가능하겠어. 건강 상태는?”

“입맛이 없다면서 식사를 종종 남기고, 날이 갈수록 안색이 안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고 합니다. 각성자 능력의 힘을 흡수하는 결계를 만들 때, 그리고 회색 게이트를 살폈을 때 외엔 힘을 최대한 아끼는 모습도 보이고요.”

서한율이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새벽, 그가 대규모 결계를 만든 직후 의식을 잃었다는 속보가 떴을 때 국민은 크게 동요했다.

게이트 방어선에서 희생하는 군인들도 안타깝지만, 왜 그 죄책감을 청년 한 사람이 짊어지고, 그걸 또 방치하느냐 비난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아무리 강한 각성자라 할지라도 일반적인 사회 경험이 없는 아이돌이다. 그런 아이돌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이용하는 거 아니냐는 의심도.

외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한국이 멸망할 뻔한 나라를 구한 영웅을 오히려 노예처럼 부린다며 비웃고 비난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서한율을 국가 귀속 병사로 만들고자 각성자 군 복무 강제 법안을 밀어붙이려 했다!

-기어코 황금알 낳는 거위를 과로사시키려는 한국인들.

그러나 장호운은 서한율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의심부터 들었다. 자신의 몸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대책 없이 무리할 타입으론 보이지 않았기에.

“이전부터 대규모 결계를 펼친 후엔 한동안 휴식했었지. 하지만 이번 미국에서 하는 실험은 수천 명의 각성자가 참여하는 만큼 쉽게 미룰 수 없으니, 최대한 힘을 아끼는 거겠지.”

“그럼 귀국 후에도 서한율의 도움은.”

“못 받겠지. 지난번 부산에서처럼 바닷속 게이트에서 나타난 거대한 괴물이 습격해도.”

장 의원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군이 버텨주는 수밖에.”

“네. 그런데 저… 의원님.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비서는 빨리 보고하지 않았다며 호통 들을까,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야당에서 서한율의 부친인 서석진 전 KBC 시사교양국장과 접촉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요.”

하. 장호운은 실소를 흘렸다.

“이래서 야당이 야당인 거야. 그쪽은 신경 쓰지 말고, 서한율 신경 거슬리게 할 법한 벌레들한테 미리 살충제 좀 뿌려. 서한율 친구들 다치게 한 광신도들과 비슷한 부류 말이야.”

“네.”

비서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뒤 나갔다. 장호운은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포털사이트 메인에 새로운 기사가 떴다.

[서울‧강원 일대에서 발생한 동물 집단 이상 행동 추적 르포]

고작 동물들 이상 행동이 뭐 대수라고.

장호운은 다른 기사를 클릭했다.

[서한율·진은수 없는 각성자 협회, 왜?]

* * *

WB래빗 엔터테인먼트, A&R팀.

진장현 팀장과 노래를 들어본 유호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파일을 재생했다.

“정말 좋은데요? 한율이 목소리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렇지? 나도 듣자마자 한율이가 무대에서 이 노래 부르는 모습이 바로 떠올라서 소름 돋았다니까? 일단 한율이한테 보내볼까?”

“네.”

각성자로 바쁘게 활약하고 있지만, 서한율은 아이돌이 본업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당장 다시 그룹 활동을 하는 건 서한율과 다른 멤버들에게 서로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컸다. 멤버들을 서한율의 발목을 잡는 방해물로 취급하는 악개가 많은 까닭.

그래서 WB래빗에선 서한율의 솔로 앨범을 계획하고 있었다. 앨범 활동은 힘들겠지만, 서한율이 각성자이기 이전에 여전히 대한민국 가수란 사실을 알리자는 취지였다.

서한율도 싱글 앨범이면 괜찮다고 동의했고.

“호 넌 괜찮아? 유닛도 아니고, 첫 솔로 데뷔를 동생이 먼저 하는 거잖아.”

“이 바닥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흐름을 탈 수 있는 멤버가 하는 거지. 그리고 처음 아니에요. 4년 전에 남석이가 부른 웹드라마 OST 앨범 나왔던 거 잊으셨어요?”

“아 참, 그랬지? 내 손 거친 게 아니다 보니 잠깐 잊고 있었다.”

“작년에도 <서울 구미호> OST 불렀었고.”

“남석이한텐 비밀로 해주라. 어쨌든 OST 말고, 음음.”

유호는 씩 웃었다.

“불만 없어요.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일걸요?”

“너희가 참 사이좋아서 다행이다. 그럼 이번엔 크리스마스 스페셜 곡 가이드 들어볼까?”

“네.”

잠시 후. A&R팀을 나온 유호는 자신의 작업실로 향하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비행기에 탑승했다는 박가람의 톡이 와 있었다.

우웅, 우웅.

“……?”

마침 걸려오는 전화. 모르는 번호였으나 잠시 고민하다가 받았다. 왠지 육군훈련소에 있는 JE일 것 같아서.

“네, 여보세요?”

-[호, 난데.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말할게.]

“어? 어. 뭔데? ……뭐?”

유호는 빠르게 이어진 JE의 말에 순간 멍해졌다가, 자신의 작업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정말이야?”

-[진짠지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서 너한테 전화한 거야. 난 지금 나갈 수 없잖아.]

“일단 한율이한테 연락할게. 게방부 사람이랑 같이 있으니까 그쪽으로도 바로 전달될 거야. 지금쯤이면 호텔에서 쉴 시간이기도 하고.”

-[내일 점심시간에 다시 전화할 테니까, 어떻게 됐는지 알려줘.]

“어. 수고해.”

통화를 마친 유호는 곧바로 서한율에게 전화를 걸어, JE가 말한 내용을 고스란히 전했다.

-[…게방부에 확인 부탁했어요. 그리고 형은 절대 그곳 근처에 가지 마세요. 길우성 단속도 부탁드릴게요.]

이번엔 길우성에게 전화.

“우성아, 어디야?”

-[나? 곰순이 새로 살 집 보러 다니는 중. 왜?]

목소리 톤이 절로 낮아졌다.

“그러니까 어디냐고.”

-[곰순이 새집 우리 숙소 근처로 알아본다고 했잖아. 동네지?]

유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한율은 핸드폰을 내려놓곤 다시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한국에 정말 다른 세상과 오갈 수 있는 노란색 게이트가 열렸다면 계나리가 몰랐을 리 없으므로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잘못된 소문일 가능성이 컸다.

달칵. 조금 전 WB래빗 엔터의 A&R팀이 보낸 메일의 첨부파일을 확인했다. 아직 가사가 없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첫 마디를 듣자마자 떠오른 감상은.

‘좋다.’

한율은 솔직하게 답장하곤 다시 미국 각성자 연구소에서 보내준 데이터를 확인했다. 예전에 루크 네빌로부터 얻었던 자료보다 확실히 풍부하고 세밀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실험에 참여한 각성자 능력의 등급 색도 빠짐없이 추가 기록되었고.

마나 등급을 확인하는 실험은 내일이 마지막. 그 이후엔 한율 혼자 조용한 곳에서 마나를 마력으로 정제하고,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로 이동한 뒤 인근에 생성된 레드 게이트에서 최종 실험할 예정이었다.

우웅.

계나리로부터 톡.

-[박가람 씨, 라이언 씨, 차남석 씨. 미국 워싱턴행 비행기 탑승이욥ㅎㅎ]

-[서프라이즈로 놀라게 할 생각일 것 같아 미리 알려드립니당!ㅎㅎㅎㅎㅎ]

하아. 한율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러시아에서 실험할 때까지 당분간은 다시 쓰러질 계획이 없는데.

그래도 자신이 걱정된다며 오는 아이들을 매정하게 내치고 싶진 않다.

지금쯤 비행기 안이라 닿진 않을 테지만, 한율은 박가람에게 워싱턴 관광 지도를 톡으로 전송했다.

[전 곧 워싱턴 떠납니다. 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안전하게 관광하고 계세요. :)]

다음 날, 미국 각성자 연구소.

각성자 참여 실험 마지막 날 온 각성자 중엔, 미국에서 가장 각성자이자 미국 각성자 협회장직을 맡은 JJ가 포함되었다.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힘차게 악수하는 JJ는 상당히 호쾌한 인상이었다. 한율도 반갑게 웃으며 화답했다.

[밀워키의 기적을 이끈 영웅을 이렇게 만날 수 있어 저 역시 영광입니다.]

[하하, 기적을 이끈 영웅이라니. 과장에 과장을 더한 칭호입니다. 한율과 비교하면 고래 앞에서 주름잡는 새우죠.]

[겸손하시네요.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오늘 실험에 참여하면 당분간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텐데.]

[네. 그래서 친구들에게 경호원 역할 좀 해달라고 부탁해뒀습니다. 그리고 인류를 위한 위대한 실험에 참여하는 건데, 며칠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쯤이야. 아, 그리고 제 아내가 어스래빗 팬입니다. 나중에 사진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흔쾌히 수락하며 자연스럽게 JJ의 손을 놓았다.

그가 살던 세상에 쳐들어와 무수한 이의 목숨을 앗아갔던 손. 당장 으스러뜨리고 싶었으나, 나중을 기약하며 참았다.

실험은 여느 때처럼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끝났다.

지금쯤이면 박가람과 라이언, 차남석이 워싱턴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한율은 내내 무음으로 뒀던 핸드폰을 꺼냈다.

역시나 톡이 와 있었다.

-[여기 어디게? ㅎㅎ]

워싱턴 기념탑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과 함께.

-[우리는 아직 네가 워싱턴에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네 일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이모티콘)]

-[네 말대로 열심히 관광이나 하고 있겠다.]

그러면서 마지막 톡엔 현재 그들이 머무는 숙소 주소를 적어두었다. 지도까지 첨부해서.

한율은 밤에 잠깐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짧게 답장했다.

[네.]

호텔로 돌아왔을 땐 객실 거실에 선물더미와 꽃다발이 보기 좋게 쌓여 있었다.

‘또.’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한율에겐 각성자 연구소장을 비롯, 미국의 정치인, 세계적인 기업가, 유명한 셀럽의 만남 요청이 쏟아졌다. 그러나 실험에 집중하고 싶다며 모두 거절했더니, 대신 온갖 선물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사전에 호텔 측에다 아무것도 들이지 말라 말해두었건만, 오늘도 직원 중 누군가가 거한 팁을 받고 일을 저지른 모양.

‘그나마 전부 들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한율이 이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는 퍼진 지 오래. 그래서 수많은 팬도 선물과 편지를 보냈겠으나, 객실을 멋대로 차지하는 물건을 보면 온통 고가의 명품이었다.

그중 작은 상자에 끼워진 카드를 눈으로 읽었다.

[무례한 선물 전달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도저히 마음을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보내는 것이니, 어떻게 처분할지는 당신의 자유입니다.]

한율은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호텔 지배인을 호출했다. 지배인은 한율이 웃으며 가리키는 선물 더미 등을 보곤 송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한율. 이런 짓을 저지른 직원을 찾아내 마땅한 징계를 내리겠습니다. 하지만 보낸 이의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물건은 돌려보내기가 어려워 임의 처분해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고가의 물건이 많아서….]

선물을 보낸 이들에게 후환을 당할까 두렵다는 뜻이었다. 물론 객실에 멋대로 물건을 들인 건 호텔의 잘못이 명백해, 사정을 봐줄 필요는 없다.

함께 객실로 들어온 이해원이 대신 항의했다.

[만약 이 물건 중에 폭탄이나 위험한 화학 약품이 있다면 책임질 수 있습니까? 모두 정리해주십시오.]

[네, 정리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지배인이 다른 직원을 불러온다며 자리를 떴다. 이해원이 한율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아하니, 네 앞으로 온 선물을 빼돌리는 일도 많았겠는데?”

“어쩔 수 없죠. 따로 선물 같은 거 안 받는다, 와도 돌려보내거나 버린다고 누누이 경고했는데도 보낸 거니까요.”

한율은 핸드폰을 들어 선물더미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어제처럼 SNS에다 영어로 올렸다.

[선물 보내지 말라고 했는데 오늘도…. 전부 호텔이 임의 처분하기로 했으니, 그게 싫은 분은 알아서 찾아가세요. :( #안녕워싱턴]

워싱턴의 다른 호텔.

박가람이 핸드폰을 보며 히죽 웃었다.

“무뚝뚝하게 짧게 대답하는 걸로 봐선 이미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으며, 곧 여기로 방문한다는 소리다. 분명해.”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뉼을 잘 아는 가람.”

“서한율이 겉으론 무뚝뚝하게 굴어도 속으론 은근히 정이 많잖아. 크, 진작 파악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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