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개야?
늦은 밤. 한율은 자신의 짐을 챙기고 박가람이 주소를 보낸 호텔을 찾았다. 라이언은 올 줄 알았다면서 한율과 가볍게 포옹했다.
“하뉼이 먹을 맛있는 거 남겨뒀어. 들어와, 들어와.”
한율은 테이블에 놓인 와인 상자를 발견했다.
“웬일로 와인이 있네요? 형 술 냄새 싫어하잖아요.”
“왔냐.”
차남석이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하곤 말했다.
“네가 와인 좋아한다고, 너 준다면서 사더라.”
“고마워요, 형.”
라이언이 씩 웃었다.
“별말씀을.”
한쪽 침실에서 새하얀 마스크팩을 붙인 박가람이 나왔다.
“좀 일찍 일찍 다니면 안 되냐? 응? 짐 다 가지고 왔어? 왜?”
“왔다 갔다 하기 귀찮아서요.”
“공적인 일로 온 애가 그래도 돼?”
“파파라친지 사생인지, 하다 하다 호텔 직원으로 위장해서 객실에 들어오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쪽 사람들한테만 양해 구하고 슬쩍 빠져나왔어요. 어차피 연구소 일도 오늘로 끝났고, 나머진 혼자 작업해야 하는 거라.”
“고생했어, 하뉼. 원하는 방에다 편하게 짐 풀어. 차남석이 바닥에서 자면 돼.”
“야.”
객실엔 침실이 두 개였다.
“가람이 형이랑 같은 방 쓸게요.”
차남석과 라이언의 표정이 구겨졌다.
“왜?”
“…야, 가위바위보 해.”
두 사람의 가위바위보는 라이언이 이겼다.
“히. 내가 너 바닥에서 잘 거라고 했지?”
“하….”
“그런데 너 술 마셔도 되냐?”
“와인 한 잔 정돈 괜찮아요. 나중에 라방할래요?”
“좋지.”
잠시 후. 호텔을 특정할 수 없도록, 네 사람은 새하얀 벽을 배경으로 테이블과 소파, 의자를 옮겨놓고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다. 방송 제목은 [차라람 그리고….].
“안녕, 이프림~. 차라람의 차남석.”
“라이언!”
“박가람!”
그들 사이에서 한율도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리고 점점점을 맡은 서한율입니다.”
-????
-차라람 율톢 있는 데로 갔어??
-아니 이렇게 갑자기 놀라게 하기 있어ㅜㅜ?
-♡♡♡♡♡♡♡♡♡♡♡♡
한율은 미소 가득한 얼굴로 설명했다.
“형들이 제가 걱정된다고 먼 미국까지 와줬어요. 그래서, 연구소 일도 끝난 김에 합류했습니다. 며칠 동안 혼자 지내다가 형들 보니까 정말 반갑네요.”
“하뉼, 호텔에 있던 캐리어랑 짐 다 싸 들고 왔어요.”
“아까 내가 도착했다고 톡 보냈을 땐 워싱턴 관광 잘하라고 그러더니,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습니다.”
-ㅠㅠㅠㅠ
-진짜 가족 같아ㅜㅜ
-[늘 멤버끼리 복작거리면서 지내다가 혼자 그것도 타지에서 힘든 일 하면서 있다 보니 쓸쓸했나 보네요.]
-[내가 어스래빗을 사랑하는 이유]
-[몸은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살이 더 빠졌어. 밥 잘 안 먹었어?”
“신경 쓸 게 많다 보니까 입맛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러니까 내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뭐 먹고 싶은데?”
“갈비찜이요.”
“자, 워싱턴에 있는 이프림. 갈비찜 파는 식당마다 가서 기다리시면 안 됩니다. 재료 사다가 차남석이 직접 만들 거거든.”
“……?”
-남석인 금시초문이란 얼굴인데 가람아ㅎㅎ
-호텔에서 갈비찜 만들어 먹어도 돼?
-ㅋㅋㅋㅋㅋㅋ
-이 와중에 율톢 와인 잔 집은 손 진짜 섹시하다
“어? 우성이한테서 영통 왔다. …하이, 우성. 이프림한테 인사부터 해.”
[나만 두고 가니 속이 후련하냐!]
버럭 외쳤던 길우성은, 핸드폰 화면을 카메라로 돌리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안녕, 이프림?]
그들은 마치 이프림도 실제로 함께 있는 것처럼 편하게 웃고 떠들었다. 채팅창에 올라오는 물음에도 대답했다.
“네. 이제 각성자 3천 명… 아니, 열다섯 분이 더 많았나? 아무튼 그분들 능력에서 빼낸 힘을, 결계에 사용할 수 있도록 가공하고, 게이트에서 직접 실험하는 일만 남았어요.”
“나 궁금한 거 있는데, 각성자 능력에서 빼낸 힘을 대체 어디로 흡수해서 저장하는 거야?”
-와 시청자 수 봐 ㄷㄷ
-미국 언론사와의 인터뷰는 거절했지만 멤버들과의 인터뷰는 와인 마시며 편하게ㅎ
“보여줄게요.”
한율은 가방에서 어스래빗 굿즈 중 하나인 작은 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은은한 푸른색 결계가 신비롭게 상자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 안에다 안전히 봉인해뒀습니다.”
“열면 큰일 나는 거지?”
“보통 사람 힘으론 안 열려요. 만약 열린다고 해도 이중으로 봉인해둬서 괜찮은데. 한번 열어볼래요, 형?”
차남석이 정색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괜히 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며칠 동안 고생한 거 날아가면 어떡해.”
“어떡하긴. 미국의 주적이 되는 거지.”
“그럼 미국인인 네가 열어봐.”
“싫어.”
“아무튼, 이 상자에 잘 담겨있다고 합니다. 그럼 너 또 이상한 인형 직접 만드는 거야?”
“이상한 인형이라뇨….”
-율톢 또 일어난다.
-점점 취기 올라오나 봐 애 웃음이 점점 풀어져ㅋㅋㅋ
-[SNS에선 늘 무례한 사람들 탓에 화가 나 있었는데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 무척 행복해 보여서 좋네요. :)]
라이브 방송은 한율이 밤마다 한 땀 한 땀, 열심히 만든 비대칭 토끼 인형을 자랑하는 것으로 끝났다.
* * *
대형 포털사이트 메인.
[건강 이상설 서한율, 멤버들 미국 방문에 미소 활짝!]
-고1 앳됐을 때부터 의지했던 형아들 오니까 얼굴 확 핀 거 보고 나도 눈물 날 뻔ㅜㅜ 5년 전에 남석이랑 꽃을 단 토! 끼! 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지구(를 구하는 위대한)토끼가 되어버렸고
ㄴ그게 벌써 5년이나 됐음? 와..
ㄴ나 그때 초등학생이었는데 지금 보컬3 나간 서한율 나이 됨ㄷㄷㄷ
ㄴ뮤닷은 <보컬리스트 시즌 3> 재방송을 틀어라!
ㄴ틀겠음?ㅋㅋㅋㅋㅋ
ㄴ데뷔 안 하거나 했다가 망해서 비연예인 된 출연자들 있어서 안 틀어줄걸요ㅋ
ㄴ거기 안ㅇㅅ도 출연해서 안 됨..
ㄴ안ㅇㅅ이 누구임?
ㄴ연습생이랑 아이돌 이상한 업소에 소개하고 스폰이랑 연결해주고 본인도 스폰받으면서 음악차트 시상식 관여한 더러운 놈 하나 있었음. 지금은 군대 감.
-서한율 결계 실험에 쓸 이상한 토끼 인형 또 만들었던데ㅋㅋㅋ 꼭 본인이 직접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어스래빗 숙소.
침대에 누워 기사를 보던 길우성은 반대로 몸을 굴렸다.
“나도 가고 싶었는데…. 나도 1130 증상잔데 왜 나만 각성 안 되는 건데….”
구시렁거리던 길우성은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달냥에게 영양제를 줄 시간이었다.
‘아.’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유호와 박가람이 함께 사용하는 방으로 향했다. 박가람은 미국에 갔으니, 유호 혼자 있을 터다.
‘형이 어제 늦게 들어와서, 왜 갑자기 송파 쪽으로 가지 말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못 들었단 말이지.’
문이 살짝 열린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길우성은 화장실이나 1층에 갔겠거니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1층 거실에선 강보배가 장난감 낚싯대로 달냥과 놀아주고 있었다.
“보배 형, 큰형 내려왔어?”
“아니?”
“2층에도 없던데. 나갔나?”
“나가는 것도 못 봤는데. 3층이나 옥상에 있는 거 아냐?”
“그런가? 달냥아, 영양제 먹자.”
므앙?
영양제를 챙겨준 길우성은 함께 광합성 하자면서 달냥을 데리고 옥상으로 향했다. 유호는 옥상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 노트북으로 작업하고 있었다. 옆에선 구동이 웬 잎사귀를 물고 우물거리는 중.
“큰형. 어젠 왜 송파로 가지 말라고 한 거야?”
유호가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미니 게이트가 생겼다는 소문이 돌아서. 게방부가 확인해봤는데, 없었다더라. 헛소문이었나 봐.”
“그렇구먼. 그나저나 오늘 날씨 진짜 좋다. 바람도 선선하고, 햇볕도 적당히 따뜻하고, 하늘도….”
우웅. 전투기 여러 대가 묵직한 소음을 내며 날아다닌다.
“음, 맑지만 좀 시끄럽고.”
청각이 예민해 전투기 소리가 무서울 법도 하건만. 익숙해져서 그런지 달냥은 아무렇지 않게 햇볕이 내리비치는 바닥에 드러누워 뒹굴뒹굴했다.
“그나저나 우리나라 게이트에서 나타나는 괴물 수가 줄어들고 있단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 봐. 예전보다 약간… 덜 시끄러워진 것 같지 않아?”
유호가 길우성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게방부 기록에 따르면 조금씩이지만 줄고 있다더라.”
“크.”
띠링. 알림 소리에 길우성은 핸드폰을 꺼냈다. 고등학생 시절, 서한율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동창 김유일이 웬일로 DM을 보냈다.
-[너 황성연한테 돈 빌려줬었어? 너한테 빌린 돈 갚고 싶은데 네 번호 바뀌어서 연락 못 하겠다고 나보고 대신 전해달라네? 황성연 번호 010….]
황성연 또한 대한예고 실용무용과 동창으로, 어스래빗보다 일찍 데뷔한 아이돌 선배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속사가 자금 사정으로 정산금도 못 주고 폐업하며, 그 또한 아이돌 일을 접게 되었다. 그러다 작년. 월세가 밀려 쫓겨나게 생겼다면서 길우성에게 50만 원을 빌린 뒤 잠적했다.
“큰형.”
“응?”
길우성은 황성연과의 일을 간단히 추려서 말했다. 유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유일이란 친구한테, 돈 안 갚아도 되니까 건강하게 살라는 말만 전달해달라고 그래. 요즘 세상이 무서워서, 계좌 번호 유출하는 것도 위험하다더라.”
“헉. 정말?”
“초코톡 통하면 계좌 번호 몰라도 되기는 하지만, 그럼 직접 연락이 닿게 되는 거잖아. 그러면 또 비슷한 일 벌이지 말란 법도 없고, 넌 마음이 약해서 또 넘어가 주겠지?”
“아니, 내가 형처럼 그렇게까지 호구는 아니거든?”
“막내, 혼날래?”
그때였다.
기분 좋게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다가 배를 내놓은 채 스륵 눈을 감던 달냥이 화들짝 일어났다. 므얅!
“깜짝이야. 달냥 왜 그….”
하악! 달냥이 전신의 털을 크게 부풀리며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므야얅. 잔뜩 성난 모습으로 달려가는 곳은 옥상 난간.
당장이라도 올라갈 것 같은 기세라, 유호와 길우성은 달냥을 잡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달냥이 더 빨랐다.
파바밧. 순식간에 난간으로 올라간 달냥이 아래를 보며 다시 이를 드러냈다. 하아악!
“달냥아, 왜 그래…. 아래에 뭐 있어?”
달냥이 이렇게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 길우성과 유호는 섣불리 잡지 못하고 쩔쩔맸다. 뒤늦게 결계로 막혀 달냥이 추락할 일이 없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유호는 조심스럽게 난간을 짚으며 달냥이 노려보는 곳을 살폈다.
“어….”
옆집 사이에 난 길. 등에 작은 애견용 산책 가방을 멘 큰 개 한 마리가 서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유심히 개를 살피던 유호는 입을 벌렸다. 가방 주머니에서 꿈지럭거리며 나오는 새하얀 무언가를 보고.
“그때 그…?”
지난 6월. 어스래빗 숙소를 털었던 도둑들이 잡혔단 소식을 듣고 조유찬과 함께 담당 경찰서로 향할 때였다. 수십 마리의 개떼가 도로를 가로지르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앞장서서 걷던 개였다.
“엉? 뭐야? 아는 개야?”
“아는 개는 아닌데….”
달냥의 위협적인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므아와앍오오옭!
개, 정확히는 가방 주머니에서 나온 새하얀 동물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황금색 눈에 은은한 푸른빛이 서렸다.
…탓. 한참 떨어져 있어 그리 위협적이지 않을 텐데도, 잔뜩 얼어서 달냥을 쳐다보던 큰 개가 몸을 돌려 달아났다. 달냥이 두 앞발을 번쩍 치켜들어 결계에 기댄 채 외쳤다.
므와오옭!
“워, 워. 달냥아, 그만, 그만.”
언제 왔는지 강보배가 달냥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훅, 훅. 달냥은 흥분이 가시지 않는 듯 크게 콧바람을 불다, 강보배를 발로 퍽 차면서 내려갔다.
“아야얏…. 달냥이 왜 저렇게 화났어?”
“모르겠어. 아까 골목에 서 있던 개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개? 남석이네 찐빵이랑 잘 놀았었잖아. 새삼 저렇게까지 경계할 이유는 없을 텐데….”
“모르겠당. 달냥아아, 캣닢 줄까?”
달냥이 여전히 털이 바짝바짝 선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므아앙!
유호는 핸드폰을 꺼내, 당시 개떼를 발견했을 때 신기해서 촬영한 동영상을 찾아보았다.
‘설마 족제비나 애완 페럿이 아니라, 정말로 게이트 괴물이었던 건가?’
한편, 뒤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구동은 우물거리던 잎사귀를 퉤 뱉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