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6화 (408/427)

전생에 매국노였나 봐

검붉게 물들었던 길우성의 눈은 차에 탈 무렵 본래대로 돌아왔다. 운전석에 앉은 이건우는 ‘말해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아직 멍한 길우성의 얼굴을 보곤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아 참.”

어스래빗 숙소에 도착, 차고에다 주차할 때 길우성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까 그… 푸들은 어떻게 됐어?”

“순식간에 공원 밖으로 빠져나가서 놓쳤어. 두리번거리다가 그 괴물이 너한테 접근하는 걸 본 거고. 정말 괜찮아, 우성아? 병원에 안 가봐도 돼?”

“응, 괜찮아…. 아무것도 안 닿았거든.”

길우성이 구동이 든 이동 가방을 품에 꼭 안았다.

“헬스장 건물 무너질 때 본 괴물보다 더 외계인 같아서 좀 놀랐던 것 같아. 아니, 어떻게 주둥이가 본인 몸집보다 더 크게 벌어질 수 있는 거지?”

“어쨌든 이 동네도 게이트랑 조금 멀다고 안심해선 안 될 것 같다.”

“어. 곰순이한테 톡 보내야겠다….”

“…….”

이건우는 재차 길우성의 눈을 살핀 후 차에서 내렸다.

밤. 유호와 강보배가 숙소로 돌아왔다. 이건우는 유호를 찾아가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정말로 눈 색이 변한 걸 봤어?”

“어, 확실히. 전에 박가람이 한율이가 팀 반지에 새긴 힘을 사용하면서 눈이 파랗게 물들었었다고 했었지? 그런데 내가 봤을 땐 그 힘이 발동한 것 같지 않았거든? 괴물이랑 그렇게 가까웠던 것도 아니고. 혹시….”

이건우가 목소리를 낮췄다.

“막내, 각성한 거 아닐까?”

“큰일 날 소릴.”

“어?”

저도 모르게 솔직한 말을 내뱉었던 유호는 고개를 흔들며 당혹감을 감췄다.

“아니, 우성이까지 각성하면 큰일이잖아. 한율이 쓰러졌던 거 생각해봐.”

“하긴. 사람들이 아이돌이라고 더 부담 주는 것만 봐도….”

“어쨌든 우성이한텐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괴물 영향으로 눈 색이 일시적으로 변했을 가능성도 있잖아. 각성하지 못한 각성자라고 해외 출국 허가 못 받아서 상심했는데, 괜히 희망 심어줬다가 나중에 더 실망할 수도 있고.”

이건우가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건우가 방을 나갔다. 유호는 곧바로 서한율에게 연락했다.

* * *

-[한율이 네가 전에 그랬잖아. 우성이가 게이트 근처로 가면 모두 죽는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각성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불안해서. 그냥 괴물의 영향으로 일시적으로 변한 거겠지?]

한율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차창 밖을 보았다. 잔잔하게 흐르는 포토맥강이 보였다. 현재 그는 마나를 정제할 만한 장소로 이동 중이었다. 혼자 운전하면서.

“네, 그럴 거예요. 어떤 괴물을 만났는지는 제가 직접 길우성한테 들을게요.”

-[응. 수고해, 한율아.]

통화를 끊은 한율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었다.

본래 세상. 그는 길우성이 능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각성자 중엔 드물게, 능력을 사용하면 눈 색이 변하는 경우가 있었다. 각성자 감지 능력을 지닌 권한정이 바로 그 예.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각성자를 구별하기 힘들어.’

권한정이 길우성을 본다면 곧바로 정답을 알 수 있겠으나, 만에 하나 정말로 길우성이 각성했다면?

‘그 괴물의 정체부터 캐야겠지.’

길우성은 게이트로 가야지만 각성하고, 게이트에서만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특이 능력자다. 괴물과 마주쳐 각성했다면 그 괴물은… 각성자의 능력이 반응하도록 자극하는 힘을 지녔을 수도 있고, 혹은 게이트의 기운을 짙게 품고 있거나 게이트와 연결된 존재일 지도 모른다.

아니면 괴물의 형태를 한, 움직이는 게이트 그 자체이거나.

마지막은 최악을 상정한 가설이었다.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

‘그런 괴물이 있었다는 정보는 어디서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어. 하지만….’

동물 집단 이상 행동. 그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개들이 나타난 직후 그 괴물과 마주쳤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한율은 간밤에 자신이 박가람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중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개체도 많다니까요.』

마지막 가설처럼 그 괴물이 움직이는 게이트라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니다. 길우성의 능력은 게이트 코팅. 만약 그 괴물이 다른 세상과 연결된 노란색 게이트고, 길우성이 저도 모르게 각성하면서 내부를 코팅시켰다면?

하아. 무거운 한숨. 한율은 길우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우성은 평소처럼 소란스럽게 응답했다.

-[미국의 아침은 어떠냐, 친구! 잘 잤냐?]

“너 옥상에서 달냥이가 난리 쳤을 때부터 공원에서 겪은 일까지, 기억나는 거 세세하게 말해. 맡았던 냄새, 들렸던 소리 전부.”

길우성의 목소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엉….]

잠시 후. 한율은 계나리와 게이트 방어 지휘부 김관식 소장에게 연락해, 길우성이 백범광장공원에서 마주친 괴물, 어스래빗 숙소 옆 골목에 나타난 산책용 가방을 진 큰 개를 추적해달라고 부탁했다. 유호가 찍었던 동영상도 첨부해서.

“동물처럼 인간을 흔적도 없이 삼킬 수 있는 괴물일지도 모르니 서둘러 주세요.”

다시 길우성에게 연락해 신신당부했다.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지금부터 숙소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마. 널 잡아먹으려던 괴물, 널 노리고 숙소 얼씬거리면서 따라다닌 것 같으니까.”

부탁이 아닌, 거짓을 친 협박에 가까운 말로.

“네가 나가면 괜히 주변 사람들만 다치거나 죽을 수 있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길우성은 한참 동안 말없이 있다가 힘없이 되물었다.

-[…왜 하필 날?]

“이유야 잡으면 알 수 있겠지. 어쨌든 명심해. 절대 숙소 밖으로 나가지 마.”

-[엉….]

한율은 잠시 차를 갓길에 세워놓곤 어스래빗 단톡방에도 글을 올렸다.

[길우성을 타깃으로 삼은 위험한 괴물이 있으니, 길우성은 절대 외출 금지. 다른 분도 웬만하면 외출 자제해주세요.]

몇 년 동안 쌓은 신뢰 덕분일까. 멤버들은 군말 없이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한율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빨리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야겠어.’

* * *

기나긴 하루 끝. 여러 가지 생각과 두려움에 뒤척거리다 간신히 잠이 들었던 길우성은, 공원에서 마주친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악몽을 꿨다.

“흐억…!”

소스라치게 비명을 지르며 벌떡.

므얅! 뀽?! 침대 옆 쿠션에서 자던 달냥과 구동도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아…. 미안해, 얘들아. …그런데 너희 왜 내 방에 있어? 오빠 걱정돼서 온 거야?”

믕….

뭐라는 거야. 달냥이 꼭 이렇게 말하듯 게슴츠레한 눈으로 길우성을 바라보다 다시 쿠션에 누웠다. 구동은 긴 귀를 부르르 떨다가 앙증맞은 두 앞발을 들었다. 툭, 폴짝.

길우성은 침대로 올라온 구동을 쓰다듬으며 악몽으로 놀란 마음을 달랬다.

“네 잘못 아니야, 구동아. 서한율 말처럼 그 괴물이 날 노리고 따라다닌 거라면, 언젠가 마주쳤을 테니까.”

그러곤 멍하니 있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생각하면 우울해질 게 뻔해서 피했던 의문이 스르륵 떠올랐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딱히 큰 잘못을 저지르고 산 것 같지 않은데, 어릴 적부터 따돌림과 괴롭힘을 다했다. 가해자 중 한 명은 가방에 흉기를 넣고 본가 담을 넘으려 했고, 그도 모자라서 공범을 데리고 숙소까지 침입하려 했다.

처음으로 사귄 아이돌 친구는 범죄자가 되질 않나, 사정이 안타까워 돈을 빌려준 동창은 잠적하고, 피가 섞인 사촌 형이란 사람은 은근히 하이에나처럼 굴었다.

그런데 이번엔 게이트 괴물까지 자신을 노린단다.

“구동아.”

길우성은 큰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구동에게 말했다.

“나 전생에 매국노였나 봐…!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박복할 순 없어. 암.”

끼웅?

“아니지. 그래도 우리 멤버들이 다 좋은 사람인 거 보면…? 아, 그리고 써한율 없었으면 진작 죽었겠구나. 응? 그러면 운이 없는 게 아니라 좋은 건가? 전생에 나라를 팔아치운 게 아니라, 구한 장군이었던 건가?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긍정적으로….”

점점 웅얼거리던 길우성은 옆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잠이 든다고 해도 또 악몽을 꿀 것 같아 무서워, 핸드폰을 집었다.

‘이럴 땐 이프림이랑 수다 떠는 게 최고지. 며칠 밖에 안 나가는 것 정도는 문제없어. 숙소에 먹을 것도 많겠다, TV도 있고, 인터넷도 잘 되고, 안락한 내 방에 고양이랑 토끼 같은 귀여운 구동이까지…. 응?’

그때 가물가물 떠오르는 누군가의 질문.

『너 만약에 누가 의식주, 인터넷 등등 편의 다 제공해 줄 테니 평생 집에만 갇혀 살라고 하면 들을래?』

이거 누가 물어봤더라?

곰곰이 기억을 더듬을 때였다.

우웅.

“깜짝이야.”

대형 기획사 스엔 엔터 소속 인기 아이돌그룹, 스카이러너 멤버인 친구 하신이 00즈 단톡방에 톡을 올렸다.

-[야 큰일 남]

-[중국이 기어코 게이트에다 핵무기 썼다고 함ㄷㄷ]

-[방사능물질 한국으로 날아오면 어떡하냐ㅜㅜ]

-[우리 다 머머리 돼서 주금ㅜㅜ?]

그레이트7의 완언.

-[넌 탈모가 가장 무섭냐;]

하신의 답장.

-[난 죽더라도 무대 위 아이돌답게 멋있게 죽고 싶거든ㅋ]

길우성은 울컥해서 톡을 썼다.

[죽는다는 말 하지 마ㅡㅡ]

-[넵]

* * *

중국의 핵무기 사용 소식은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핵을 사용한 곳은 고비 사막 서쪽. 게이트가 열린 곳이었다. 위성을 통해 결과를 확인한 미국은 침통한 반응을 보였다.

[중국, 결국 방사선 피폭 괴물만 만들어]

게이트 사태가 벌어진 후 미국은 핵보유국에 여러 차례 경고했다. 아주 강한 화력을 퍼부어도 끄떡도 하지 않는 게이트다. 그러니 핵을 사용해도 효과는커녕 오히려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으니 자제해 달라고.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처참하게 돌아왔다.

아침.

한국의 각종 매체는 중국의 핵무기 사용 이슈로 도배되었다.

[중국의 섣부른 핵 사용, 최악의 사태 불러와]

[게이트 통과 직후 방사선 뒤집어쓴 괴물들, 곳곳으로 흩어져]

[방사선 노출에도 쓰러지지 않는 괴물은 곧 강한 개체… 중국 초비상]

[몽골은 무슨 죄? 방사선 피폭 조류 괴물 등장에 패닉]

[고비 사막에 뿌려진 죽음의 재… 우리나라는 안전한가?]

-ㅅㅂ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것만 말해줌. 우리나라 봄이랑 겨울에 하늘 덮는 누런 황사가 고비 사막에서 날아오는 거임. 지금은 북서풍이 안 불어서 괜찮은데 관건은 겨울임.

-원래 얘네 고비 사막에서 핵 실험하지 않았나? 새삼ㅋ

ㄴ그거랑 상황이 같냐? 쿨찐 코스도 멍청하면 자제해라

-쌍욕도 아깝다, 진짜. 하지 말라고 한 건 하지 좀 말아야지

ㄴㄹㅇㅋㅋ 러시아도 서한율 실험 기다리면서 얌전히 기다리는데ㅋㅋㅋ

-거기에 떨어진 낙진이야 우리나라에 날아와도 크게 위험한 수준은 아니지만, 진짜 몽골은 무슨 죄냐고;

-방사선 피폭 괴물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게 더 큰 공포 아님? 심지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현재 진행형이잖아; ㄷㄷㄷ

ㄴ짝퉁도 모자라 하다 하다 방사선 피폭 괴물까지 찍어내는 대륙 클라쓰ㅋㅋㅋㅋㅋㅋ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 레드 게이트 방어선 본부.

한율은 자신을 위해 마련된 대기실에서 계나리와 통화했다. 삐뚤빼뚤하게 만들어진 토끼 인형을 손 안에서 굴리며.

-[진짜 미쳤나 봐요. 청개구리들인가?]

“몸소 경고 사례가 되어준다며 나섰으니, 저들이 알아서 감당해야지. 그 괴물, 추적은 해봤어?”

-[네. 오빠들 숙소 근처에 나타났던 개가 찍힌 CCTV랑 SNS에 올라온 목격 썰을 종합해서 경로를 추적해봤거든요? 어제 우성 오빠랑 건우 오빠가 마주친 하얀 괴물, 그 개 가방에 있었던 놈 맞아요. 하지만 우성 오빠를 노리고 쫓아온 건 아니고, 오빠들이 구동이 데리고 공원 가기 전부터 그 근처에 있었어요. 무리에서 이탈한 푸들을 쫓아서요.]

“정말로 재수 없이 마주쳤단 소리네. 이후 행적은?”

-[송파로 이동했어요. 아무래도 그 괴물의 본거지가 송파에 있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랑 자주 CCTV에 찍혔던 장소, 지도로 보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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