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구력이 있다고 여겨졌나?
하지만 왜 내 고향엔 멸망을 피해 도망칠 수 있는 게이트가 생기지 않았던 걸까. 자구력이 있다고 여겨졌나? 아니면….
불현듯이 떠오르는 생각.
‘혹시… 나 때문에?’
“정말 고마워, 한율아.”
생각에 잠기려던 한율은 이건우를 바라보았다. 이건우가 씩 웃었다.
“여러 번 말해서 새삼스럽겠지만, 네가 너라서 참 다행이고, 고맙다.”
“으오, 이건우건우!”
길우성이 닭살 돋는다는 듯 질색하며 부르르 떨었다. 강보배가 그런 길우성을 타박했다.
“가람이 형처럼 그러는 거 아니야, 우성아. 진심을 놀리면 못 써.”
“넹….”
달냥도 한마디 했다. 므앙.
한율은 입가를 올리곤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감사 인사는 게이트가 모두 사라지면 그때 받을게요. 아직은 한참 이른 것 같아서요.”
“그래도 5m 줄어든 기념으로, 저녁은 한우 먹자. 내가 산다.”
“오오, 이건우 님!”
“호 형이랑 남석이한테도 톡한다?”
“그래, 그래.”
므앙.
“그나저나 아까 나올 때 보니까 숙소 앞에 모인 사람들 줄었더라. 한율이가 왔으니 전처럼 복작거릴 줄 알았는데.”
“나 옥상에서 봤는데, 어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이러면 오히려 서한율을 방해하는 거다, 그걸 원하는 거냐’라는 식으로 막 설득해서 해산시키던데? 사람들이 또 모이면 어디선가 또 나타나서 또 설득하고. 써한, 네가 고용한 사람들이야?”
한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회사에서도 아무 말 못 들었는데?”
“최근에 한율이 팬 카페에서, 한율이 사생활 침해 행위 근절에 앞장서자는 조직적인 움직임? 그런 게 있다더라. 이프림 내에서도. 그 사람들인 것 같은데?”
“그렇구나. 보배 넌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어?”
“동생한테. 동생이 한율이 팬 카페에 가입했거든. 그리고 이건 확실하지 않은 정본데, 미국 SNS 회사에서 세은이랑 보람이가 당한 사건과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지면, 한국이 요청할 시 바로 정보 넘겨서 수사 협력해주기로 약속했대. 한율이를 자극하는 행위는 곧 지구의 안전을 흔드는 위험한 행위라고.”
“오오.”
이건우가 감탄하자 달냥도 비슷한 톤으로 따라 울었다. 므아앙. 오래간만에 한율과 외출에 나서자 신난 모양이었다.
길우성이 탄산을 마신 것처럼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크. 내 친구가 이젠 전 세계의 비호를 받네.”
정작 당사자인 한율은 담담했다.
‘귀찮은 일 줄면 나야 좋지.’
* * *
[미국에 이어 한국 게이트 5m 축소 확인! 모두 서한율 실험 진행된 곳]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의 레드 게이트 너비가 약 2m 줄어들었다는 미국 정부의 발표에 이어, 게이트 방어 지휘부는 우리나라 게이트 역시 최초 발생했을 때보다 약 5m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두 게이트 모두 서한율이 각성자의 능력에서 추출한 힘과 괴물의 생명력을 이용해 실험을 진행한 곳으로…(중략).
한편 서한율은 능력이 회복되는 동안 본업인 아이돌 일에 집중할 계획이다.]
-서한율 사랑해
-ㅅㅂ미쳤다ㅜ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무언가 영향을 준 게 있었나 보네요ㄷㄷ
-핵무기로도 못 없앤 게이트가 축소되다니 와ㅠㅠ 눈물밖에 안 나온다ㅠㅠ
ㄴ저도 대피소에서 이 뉴스 보자마자 엄마랑 손잡고 울었음ㅜㅜ
-서한율 동물 학대 혐의로 고발한 시민 단체 나와라ㅋㅋㅋ 이래도 실험하지 마?
ㄴ그거 정신 나간 한 단체만 그런 거고... 대부분은 괴물이 아니라 각성자 데리고 비윤리적인 실험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토끼 인형 못생기게 만들었다고 놀려서 미안
-한번 할 때마다 2m씩 줄어든다고 치면 몇 번 더 해야 하는 거냐
ㄴ서한율 안 거치고 각성자 스스로 결계에 힘 보낼 수 있는 실험도 진행해봤다고 하니까, 요령 같은 거 늘면 효율이나 속도도 올라갈 듯
-깊은 해저나 하늘에 생긴 게이트는 어쩔 건데? ㅋㅋㅋ
ㄴ우리나라 게이트 크기 줄었다고 하기 무섭게 다른 게이트는 어떻게 할 거냐고 방구석에서 어쩔? 어쩔? ㅇㅈㄹ ㅆ극혐
ㄴ각성을 못 했으면 총이라도 잡아서 괴물 잡는 데에 힘을 보태든가, 복구 지역에 가서 일손이라도 보태고 징징거려라. 배달 음식 쓰레기 그만 늘리고
ㄴ방금 치킨 시켰는데ㅜㅜ
ㄴ부자네ㅎ 요즘 치킨 한 마리 기본이 3만 원이던데
“흐.”
웃으면서 기사 댓글을 훑던 박가람은 또 다른 기사를 클릭했다.
[강원도 쌍두 족제비로 인해 집 잃은 개들 “주인님, 여기예요”]
[강원도에서 포획된 쌍두 족제비의 보금자리로 추정되는 산에서 수백 마리의 개가 발견되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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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에 살던 주민은 ‘가끔 개 짖는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쌍두 족제비가 잡혔다는 뉴스가 뜬 후 산에서 개들이 끊임없이 내려오는 걸 보곤 두 눈을 의심했다’라며 목격 당시 놀랐던 상황을 설명했다.
개들은 쌍두 족제비와 거리가 멀어지자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보이며, 경찰과 동물보호단체는 등록 칩이 있는 개들부터 확인해 주인에게 인계하기도 했다.]
박가람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꽃집 강아지 찾았대? 쌀떡이 친구.”
-[응. 기사에 나온 사진 보고, 가게 문 닫고 바로 개들 있는 임시 보호소로 갔다더라.]
“다행이네. 쌀떡인 몸 어때?”
-[많이 나아졌어. 가람이 넌 한국 언제 와?]
“라이언 면허 따면 그때 같이 들어가려고.”
-[조심히 다녀. 괴물 만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고.]
“넵, 어마마마도 늘 몸조심 하십쇼, 사랑합니다.”
통화를 끊은 박가람은 라이언을 돌아보았다. 라이언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웃으면서 봐.”
“부럽기도 하고, 보기 좋아서.”
자랑하려고 그런 건 아닌데. 그러나 여기에서 미안하다고 하면 라이언만 이상한 사람이 된다. 미안해할 일도 아니고.
박가람은 대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전히 어머니랑은 연락 안 돼?”
연습생 시절부터 라이언은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멤버들 또한 무슨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묻지 않았다.
라이언이 처음으로 어머니를 언급한 건 작년 여름. 트레리안 믹스테이프에 수록된 <자존감>이란 노래를 통해서였다.
[엄마 없는 가난 맞아 But 사랑해요, Mom]
며칠 전 워싱턴에 있는 라이언의 집에 갔을 때, 라이언은 어릴 적 사진이 담긴 앨범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 안엔 젊은 여성이 어린 라이언을 안고 환하게 웃는 사진도 있었다.
『이 사람이 우리 엄마.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몰라. 마음먹으면 찾을 순 있겠지만…. 엄마가 곤란해지거나 싫어할지도 모르니까 안 찾아.』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괜찮아. 앨리가 그랬거든. 만나게 될 인연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고.”
앨리는 라이언을 돌봐주었던 베이비시터였다. 라이언이 가족보다 더 자주 연락하는 사람.
슥슥. 이번엔 박가람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라이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이구, 의젓해라.”
그때 라이언의 핸드폰이 울렸다.
“응? 앨리다. 호랑인가 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속담을 떠올린 모양. 라이언이 전화를 받으며 침실로 들어갔고, 박가람은 다시 인터넷 기사를 훑었다.
“가람.”
“응?”
곧 라이언이 다시 거실로 나오며 머리를 긁적였다.
“엄마가 앨리 SNS로 연락했대. 나랑 만나고 싶다고. 내 SNS는 금방 다른 사람들한테 묻혀서 연락이 힘들다고.”
“……!”
박가람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 어머니도 호랑인가 보다.”
* * *
-[다 하뉼 덕분이야. 고마워.]
11월 1일. 한율은 운전 중 라이언의 전화를 받았다.
-[하뉼 덕분에 우리 팀이 유명해졌고, 엄마가 트레리안 믹스테이프 <자존감>에 적힌 가사도 볼 수 있었으니까.]
“아니에요. 내가 아니더라도 형은 충분히 성공해서 어머니 귀에 들어갔을 거예요. 그럼 곧 어머니랑 만나는 거예요?”
-[아니. 아직은 영상 통화만. 이제 ‘하양까망’ 크리스마스 노래 준비해야 하잖아. RMMA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엄마도 일하느라 바쁘고 멀리 살아서, 나중에 서로 여유 생기면 만나기로 했어. 아 참.]
라이언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첫 솔로 앨범 축하해, 하뉼.]
오늘 아침, WB래빗 엔터는 서한율의 솔로 앨범 제작을 공식화했다. 지난번 A&R팀이 보낸 파일이 타이틀곡으로 정해졌으며, 유명한 작사가로부터 가사도 받았다. 이제 가이드보컬 버전이 넘어오면 연습 후 녹음을 진행하면 된다. 이후엔 뮤직비디오와 앨범 재킷 촬영.
“고마워요, 형.”
잠시 후. 한율은 한국 게이트 괴물 연구소 앞에 차를 세웠다. 경계 근무를 서는 군인에게 연구소장에게 받았던 통행증을 제시하자, 두꺼운 철문이 느릿느릿 열렸다.
소장은 한율이라면 어디든 프리패스라고 했으나, 한율은 다른 사람으로 감쪽같이 둔갑할 수 있는 각성자가 있으니 남들처럼 제대로 보안 절차를 거치겠다고 말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연구소 건물로 들어서자, 마중을 나온 소장이 친근하게 물었다.
“오늘도 쌍두 족제비 보러오신 거죠?”
“네, 어제 잡힌 놈도 같이요. 두 놈 컨디션은 어때요?”
“눈으로 봤을 땐 아무 이상 없습니다. 당근과 닭고기를 좋아하더군요. 강아지 장난감 공을 넣어줬더니 그거 가지고 혼자 잘 놀기도 하고요.”
“삼키지는 않던가요?”
“네. 음식이나 물을 마실 때도, 게이트가 없는 머리로만 먹는 게 관찰되었습니다.”
강원도에서 잡힌 놈은 먼저 잡힌 ‘담이’보다 몸집이 작았고, 다소 소심했다. 그러나 아픈 괴물, 포동포동한 괴물이 든 케이지 두 개를 내밀었더니, 담이처럼 아픈 괴물이 든 케이지를 삼키려 들었다.
한율은 이번엔 말리지 않고 가만히 두었다.
덥석, …크응.
게이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걸린 케이지. 쿵. 쌍두 족제비는 케이지를 뱉은 뒤 앞발로 주섬주섬 문을 열어, 아픈 괴물을 직접 끄집어내서 삼켰다.
꿀꺽. 이번엔 바로 넘어갔다.
한율은 우리 밖에서 지켜보는 소장에게 물었다.
“신호는요?”
아픈 괴물의 몸에 GPS를 심어두었다.
소장이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코팅되지 않은 상태라 케이지는 통과하지 못했지만, 육체 안에 박힌 작은 기기는 괜찮은 건가.
‘아니지. 여기에선 보이지 않아도, 게이트 내부에서 기기에 대한 거부 반응으로 살이 찢겨 분리되었을지도 몰라.’
캬륵. 한율은 만족한 것처럼 히죽 웃는 쌍두 족제비 괴물을 바라보다가, 따라 입가를 올렸다.
‘어쨌든, 같은 세상에서 건너온 괴물을 삼켰다…. 이놈이 품은 게이트, 이놈들이 있던 세상과 연결된 건 아닌가 본데?’
코팅되어 뭐든 삼킬 수 있는 담이보다, 이쪽이 더 여러 가지 실험하고 연구하기에 더 적합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신, 담이의 게이트엔 김 상병을 위한 물품을 잔뜩 삼키게 했다. 게이트 너머로 간 김 상병이 여전히 살아있는지, 물건이 닿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로 외면해선 안 된다는 김 상병 가족의 강한 요청과 국민의 바람 탓에 어쩔 수 없이.
“소장님. 이 녀석, 이름 아직 안 지었죠?”
사흘 후. 박가람과 라이언이 무사히 귀국했다.
WB래빗 엔터테인먼트 2층 사무실 내 회의실.
오래간만에 어스래빗 멤버 전원이 착석했다. 긴 회의용 탁자 앞에 선 오동식 팀장이 화이트보드에 글자를 휘갈겼다.
[뮤닷 2021 RMMA 비대면 공연]
[tv Mu WB래빗 아티스트 수련회 예능]
[이우전자 브랜드 광고 촬영 및 행사]
[서한율 러시아 출장]
[트레리안 컴백]
[하양 토끼 까망 토끼 디지털 싱글 5집]
[서한율 첫 솔로 데뷔]
[크리스마스 기념 플리마켓]
[연말 자선 콘서트]
“여러분. 게이트 크기도 조금씩 줄어들고, 괴물 수도 점차 줄어들고.”
점점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날려서 쓰던 오 팀장이 미소 지으며 돌아보았다.
“이제 다시 일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