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1화 (413/427)

모든 게이트가 사라진다면

정부 기관의 한 널찍한 회의실.

대통령실과 국방부, 행정부, 게이트 괴물 연구소 등에서 나온 이들이 하나둘 자리를 채웠다. 커다란 스크린에도 게이트 사태로 협력 중인 세계 각국 관계자의 영상이 떴으나, 아직 회의 시작 전이라 드문드문 빈 자리가 보였다.

게이트 방어 지휘부 김관식 소장이 함께 온 정상욱 중위에게 속닥거렸다.

“한율 씨가 늦네.”

“아까 통화했는데, 이제 막 도착해서 주차 중이라고 합니다.”

한율은 회의 시작 1분 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서 와요, 한율 씨.”

가장 높은 직책을 가진 이들부터 반갑게 알은체하며 악수를 청했다.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은 터라 아주 빠르게 꾸벅꾸벅 인사한 후, 국방부 장관과 김관식 소장 사이에 앉았다.

오늘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건 지금까지 수집된 게이트 관련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 보통은 연구 기관끼리 진행하지만, 최근 한율이 실험을 진행한 두 개의 게이트 크기가 줄어든 현상, 그리고 쌍두 족제비 정보를 공유하고자 특별히 더 많은 인원이 모였다. 회의는 게이트 연구를 맡은 행정부 직원이 주도했다. 언어는 영어로 통일.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한국 게이트 괴물 연구소가 쌍두 족제비 관련 실험 및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에 생포한 쌍두 족제비 두 마리의 DNA를 전 세계 게이트 괴물 데이터베이스에 넣고 돌려보니, 지금까지 나타난 괴물들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앞서 보내드린 자료를 참고해주십시오.]

전문가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려운 이야기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한 줄로 요약하면, 모든 게이트 괴물과는 근본부터가 전혀 다른 미지의 생물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다음엔 한율이 게이트 목적 가설을 설명했다.

쌍두 족제비 괴물 ‘담이’가 펫펫바이오에 갇힌 아픈 동물들을 목격한 뒤, 곧바로 동물들을 탈출시키고 인근의 동물까지 움직이게 한 이야기부터.

[또한 게이트 괴물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오는 모습을 미루어 짐작건대, 게이트는 멸망 위기에 처한 세상의 생물체를 구해주기 위해 열린 초자연적 현상으로 추측됩니다. 그렇기에, 괴물들이 나오자마자 재가 된 게이트만 축소된 거고요.]

한율이 처음으로 괴물을 가지고 결계 실험을 했던 이탈리아. 그곳의 게이트 대책위원회 인사가 가볍게 손을 들어 말했다.

[한율이 한동안 머물면서 실험했던 자국의 게이트가 최초 발생 시점 기록보다 절반 줄어든 걸 확인했습니다.]

[오오…!]

[원래 작았던 게이트이긴 하지만요.]

[많은 사람의 추측대로, 이대로 한율이 괴물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결계를 계속 만든다면 지구를 그들의 구원 행성으로 삼았던 게이트 모두 목적을 잃고 소멸할 수 있겠군요.]

[그렇다면 노란색 게이트는… 우리를 위해 생긴 거라고 볼 수 있을까요?]

한율은 곧바로 부정했다.

[아니요. 출현 의도는 그럴지 몰라도…. 현재 전 세계 괴물을 보십시오. 무사히 안착해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었나요?]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나오자마자 미사일에 두들겨 맞고 있죠.]

[네. 우리 역시 다른 세상으로 멋대로 쳐들어갔다가, 지금의 괴물들처럼 처참하게 당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해저 깊숙한 곳에 생긴 게이트. 그곳에서 나오자마자 질식해 죽는 괴물의 처지가 될 수도 있고요.]

잠깐의 한숨.

[우리는 오히려 노란색 게이트로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등지려는 사람들, 그리고 온갖 범죄자들이 악용할 소지가 다분하니까요.]

[음….]

[그렇다면, 만약 모든 적색 게이트가 소멸하고 지구도 안전해지면 그땐 노란색 게이트도 사라질까요?]

한율은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한 사람이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니 모두 게이트로 탐사선 보낼 생각 하지 맙시다. 게이트가 사라지기라도 하면 영영 못 돌아오잖습니까.]

회의가 끝난 뒤.

한율은 국방부 장관에게 잡혀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러나 불편하거나 부담스럽다는 티 대신, 한국군이 가진 최신 무기에 관해 질문하며 그가 신나게 떠들도록 두었다.

“그나저나 우리 한율 씨, 여자친구는 있어요?”

불과 1초 전까지 차기 중형 잠수함에 관해 신나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더니, 화제가 급선회했다. 점심의 목적이 애초부터 이것인 모양.

“아니요.”

“그럼 우리 딸 한번 만나볼래요? 내 딸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공부도 굉장히 잘해서 지금 커다란 대학병원 인턴으로 있고, 예뻐요. 자, 우리 딸 사진.”

“아니요, 괜찮습니다.”

“에이, 사진 보고 거절해도 늦지 않아요.”

장관이 핸드폰을 들이밀었으나, 한율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재차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어이구, 똑 부러지고 솔직하니 더 마음에 드네. 우리 딸이랑 아주 잘 맞겠어요.”

“장관님.”

함께 끌려왔으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던 김관식 소장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한율 씨, 썸 타는 분 있습니다.”

“음? 방금 한율 씨 스스로 없다고 했는데.”

“연예인이지 않습니까. 대외적으론 없다고 말하는 게 직업상 암묵적인 약속이라고 들었습니다. 장관님이 따님을 소개하고 싶을 정도로 훤칠하고 훌륭한 청년인데, 짝이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장관의 어깨가 살며시 내려갔다.

“정말입니까, 한율 씨?”

한율은 나중에 김관식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래, 한창 연애할 나이이긴 하지…. 여자친구가 참 불안하겠어요. 남자친구가 한율 씨라서.”

한율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식당을 나온 후엔 국방부 장관 일행이 먼저 떠났다. 김관식보다 더 조용히 자리를 지켰던 정상욱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한율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닥거렸다.

“장관님이 참 주책이시네요. 그런데 오늘 어쩌다 늦은 거예요? 늦잠?”

“고양이가 토한 거 치우느라요.”

“어디 아픈 거예요?”

“아니요. 단순히 헤어볼 토한 거예요.”

사실은 게이트 괴물 연구소에서 쌍두 족제비를 살핀 날마다 달냥이 그 냄새를 맡곤 질색했었다. 잘 때 침대에 올라오지 않을 정도로. 그게 며칠 이어지다 보니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았다.

“아픈 게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중위님.”

한율은 김관식 소장에게도 따로 감사 인사를 전한 후, 자신의 차에 올랐다.

오늘 회의는 ‘게이트가 더 축소되는지 살피려면 서한율이 더 뛰어야 한다’로 귀결되었으나, 한율은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노란색 게이트를 향한 자신의 부정적인 견해에, 모두 수긍했으므로.

‘만약 내가 세계 최강의 각성자도, 대규모 결계 및 실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겠지만.’

그동안 열심히 돌아다니며 마력을 낭비한 게 헛되지 않았다.

그래도 계나리가 모르는 노란색 게이트, 나라마다 알리지 않은 게이트가 있을 테고, 엄중한 보안 속에서 몰래 온갖 실험을 해댈 게 뻔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듯이 길우성을 단속하고, 본래 세상과 이어진 마요르카 게이트만 지키면 그만이다.

‘그나저나.’

한율은 저 멀리 하늘에 뜬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회의 중 누군가가 말한 낙관적인 바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만약 정말로 지구가 안전해져서 모든 게이트가 사라지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 * *

시간이 정신없이 흘렀다.

하양 토끼 까망 토끼 크리스마스 기념곡 녹음이 끝나자, 한율은 다음 달에 나올 자신의 첫 솔로 앨범 타이틀곡을 녹음했다. 녹음 다음 날엔 어스래빗 멤버들과 이우전자 브랜드의 새로운 광고를 촬영했다. 지난번처럼 광고 드라마 형식이 아니라서 하루 만에 끝났다. 이우그룹의 이채환도 찾아와서 알짱거리지 않았고.

크리스마스 기념곡과 자신의 솔로곡 M/V 촬영이 있기 전까진 게이트 방어선에 드나들며 괴물을 이용한 실험을 대놓고 진행했다. 쌍두 족제비 ‘장이’를 데리고 게이트 앞까지 가보기도 했다.

…….

괴물이 쏟아져 나오는 게이트 앞에 선 장이는 ‘담이’를 마주했을 때처럼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흉포하고 큰 괴물이 바로 앞을 지나칠 때 겁을 집어먹은 듯 몸을 움츠린 것 빼곤.

한율은 숙소에서 달냥에게 솜방망이 펀치를 맞았다.

강보배와 라이언의 ‘트레리안’은 컴백 일정이 잡혀 한율보다 더 바빠졌고, 길우성과 이건우, 차남석은 RMMA 특별무대를 준비했다. 그래도 밤엔 모두 어스래빗 연습실에 모여, RMMA에서 할 무대를 연습했다.

그렇게 어느덧 21일.

한율의 러시아 출국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날, 경기도의 한 대기업 연수원.

[제1회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수련회]

tv Mu의 예능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날 한율은 앨범 재킷 촬영이 있었던 터라,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연수원에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한창 게임이 진행 중인 넓은 잔디밭으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비췄다. VJ의 카메라가 한율을 잡아 클로즈업했다. 쌀쌀한 가을바람에, 어두운 보라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런데… 다들 상태가?”

두 뺨에 분홍색 연지를 찍고 거북이 인형 탈을 뒤집어쓴 길우성이, 대왕 주걱을 들고 한율을 반겼다. 인형 탈 머리엔 ‘크으’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우와, 연예인이다. 안녕하세요~.”

다른 WB래빗 소속 아이돌과 배우들 또한 그리 멀쩡한 모습이 아닌 터라, 한율은 왔던 길을 가리켰다.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어딜 가시려고요, 선배님!”

‘진짜요?’란 이름표가 붙은 빨간색 파마머리 가발에, 커다랗고 이상한 신발을 신은 드림래빗의 박세은이 터벅터벅 팔자걸음으로 다가왔다. 사고로 다친 팔은 나은 모양이었다. 얼굴에 생겼던 상처도 감쪽같이 사라졌고.

박세은이 다짜고짜 물었다.

“한율 씨, 호랑이가 차를 끌고 와서 하는 말은?!”

한율은 미간을 찡그렸다.

“호랑이가 차를 몰면 안 되잖아요.”

“아니, 아니, 넌센스!”

PD가 외쳤다.

“박세은 씨 앞으로 기회 한 번 남았어요!”

SPRabbit의 변지욱이 큭큭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저 형, 쉽게 대답 안 해줄 거라고.”

박세은이 필사적인 얼굴로 물었다.

“호랑이를 영어로 하면 뭐죠, 한율 씨?”

한율은 조금 전 자신이 몸을 반쯤 돌리며, 박세은이 있는 방향으로 등을 보였단 사실을 떠올렸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 스타일리스트가 등에다 뭔가를 붙이더라니. 상대방 몸에 붙은 단어를 말하게 해서 점수를 따는 게임인가?

드림래빗 멤버들이 야유를 보냈다.

“저건 너무 직접적이잖아요!”

“박세은, 우우!”

“박세은 씨 경고예요!”

“아…!”

“써한!”

길우성이 뿌듯한 표정으로 손 구호를 하며 선창했다.

“어스!”

내가 말하면 안 되는 단어가 ‘타이거’인가? 말하도록 유도하기엔 ‘크으’나 ‘진짜요?’처럼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단어인데.

머릿속엔 의문이 떠올랐으나, 습관은 무서운 법.

한율은 반사적으로 손 구호를 하며 이어 말했다.

“래빗.”

와아아! 동시에 모든 출연자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고, 한율은 그제야 자신이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게 영어란 걸 알 수 있었다.

PD가 신나게 외쳤다.

“한율 씨, 벌칙 받을 분장과 배드민턴에 사용할 장비 중 하나 골라주세요!”

매부리코 수염 안경을 쓴 박가람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로 흔들었다.

“길우성! 길우성!”

길우성이 거들먹거리며 두 팔을 위로 뻗었다.

“크으! 내가 바로 서한율 담당…!”

“길우성, 세 번 말해서 탈락!”

“…엉?”

잠시 후, 휴식 시간.

어스래빗 멤버들을 제외한 아이들이 하나둘 한율에게 다가와 솔로 데뷔 축하 인사를 건넸다. 같은 소속사가 된 지 3년이나 지났지만, 그동안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던 유제희도.

“그리고 사람 대 사람으로 진심으로 존경해요, 한율 씨.”

5년 전 처음 감성소녀 M/V 촬영장에서 만난 열일곱 살 앳된 고등학생이, 이젠 세상을 구하는 최강의 각성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회에 젖은 얼굴로.

한율은 겸손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엔 배드민턴 경기에서 라켓으로 사용하게 된 화려한 요술봉 장난감이 쥐어져 있었다.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서 한 건데요,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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