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2화 (414/427)

비윤리적인 실험은 안 해

[어스래빗 서한율, 12월 17일 첫 솔로 앨범 발매!]

[인기 아이돌그룹 어스래빗의 멤버이자 배우 서한율이 12월 17일, 어스래빗 데뷔 4년 만에 싱글 앨범을 발매하며 솔로로 데뷔한다.

WB래빗 엔터 관계자는 녹음과 M/V 촬영은 모두 마친 상태이며, 따로 데뷔 쇼케이스와 앨범 활동은 하지 않을 계획이지만 12월 17일 비대면으로 열리는 뮤닷 <2021 RMMA> 에서 최초로 무대를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서한율은 게이트 결계 실험을 위해 오늘 23일 러시아 모스크바로 출국했으며 그가 실험을 진행한 게이트 세 곳 모두 크기 축소 현상이 관찰되었다.]

-기념비적인 첫 솔로 데뷔인데 쇼케를 안 한다니 이게 무슨 소리요ㅠㅠ

-서한율 첫 솔로 데뷔 축하해! 사랑해♡♡♡♡♡

-바쁜 와중에도 팬들 위해서 광고 행사도 참여하고 녹음도 하고 예능도 찍고ㅜㅜ

-세 개? 두 개 아니었음?

ㄴ한국보다 먼저 이탈리아에서 실험하던 거 있었대요ㅇㅇ

ㄴ이탈리아 눈나랑 살림 차리고 알콩달콩했던 게 아니었네ㅎㅎ

ㄴ넌.. 에휴 말을 말자

ㄴ포기하지 마라죠 외로워ㅠㅠ

-한율아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ㅠㅠ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차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레드 게이트 경계 지역.

“대체 이게….”

한율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말을 잃었다. 하루에 수백 명씩 실험을 진행할 테니 그렇게 준비해달라고 했건만, 막상 현장에 와보니 수천 명의 인원이 탄내 가득한 허허벌판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통역가가 그대로 전달하자, 온몸이 근육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군인이 딱딱한 얼굴로 대답했다.

[좌측은 실험에 참여할 민간인 각성자. 우측은 죽어도 싼 각성 범죄자들입니다. 마음껏 쓰십시오.]

한율 옆에 있던 권한정이 낮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우측. 각성자 아닌 사람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

각성자 판별 능력자가 함께 온 걸 알면서 뻔한 거짓말을. 한율은 항의하는 눈으로 러시아 군인을 바라봤지만, 그는 아무 문제 없다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괴물의 생명력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건 인간의 목숨도 게이트를 막는 힘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조국을 지킴으로서 죗값을 치를 수 있다면 기꺼이 목숨도 내놓겠다며 온 놈들입니다.]

씩. 누런 치아를 드러내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사양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건 우리가 당신에게 보내는 사죄의 선물이기도 하니까요. 위대한 러시아의 피를 가지고도 멍청한 짓으로 당신의 분노를 산 머저리들을 대신해. 당신 역시 본인 능력의 한계, 그리고 어디까지 얼마나 효율적인 결과를 낼 수 있는지, 그 끝을 확인해보고 싶지 않습니까?]

한율은 통역을 듣자마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비윤리적인 실험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 모두 자진해서 모인 게 아니라면, 실험은 없던 일로 하고 당장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오, 장난이었습니다. 노여움 푸시길. 각성자 판별 능력자가 옆에 있으니 바로 문제점을 찾으셨겠지만, 바로 들킬 거란 생각도 못 하고 각성자라고 사기 쳐서 나온 멍청한 재소자들이 많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찔러보는 것 같았는데?

“충분히 사전에 검증할 수 있었을 텐데요.”

[인력이 부족해서 말입니다. 이놈이 마술을 부리는 건지, 사기를 치는 건지 일일이 확인하기엔 모두의 피로가 극에 달한 상태라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저 빌어먹을 게이트는 지도에 없던 놈이기도 하고요. 당신이 불과 두 달 전, 이곳에서 벌어진 참상을 봤다면 상당히 놀랄 겁니다. 괴물 사체와 648명을 한꺼번에 화장한 곳이거든요.]

“……!”

놀라는 한율을 향해 군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보존하고자 괴물을 사방으로 풀어두는 건 더 많은 죽음을 부르는 어리석은 짓 아닙니까. 희생된 이들 역시 그걸 바라진 않을 테고요. 그래서 미사일을 퍼붓고 모두 불태웠습니다.]

한율은 분노를 거두고, 대신 무거운 슬픔을 연기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이곳에 수천 명이나 되는 대규모 인원을 한꺼번에 모은 건 위험한 행동입니다. 게이트에서 육눈박이처럼 상당히 위험한 놈이 나오기라도 했다면, 각성자가 모조리 몰살당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습니다.”

군인이 씩 웃었다.

[당신이 왔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무례하고 능글맞다.

한율은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당장 실험을 시작해달란 뜻으로 해석하겠습니다.”

* * *

사람들 앞에선 범죄자들을 마음껏 써도 된다는 러시아 군인의 말에 분노하는 척했으나, 사실 한율은 각성자의 생명력으로 이미 실험한 바 있었다.

한타오와 김대현으로.

그러나 고작 둘만 가지고 실험한 결과를 신뢰하는 건 위험하다. 더 정확한 결과를 얻기 위해선 더 많은 실험체가 필요하다.

첫날 실험을 끝내고 온 호텔.

한율은 입욕제를 푼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생각에 잠겼다.

‘이미지를 챙겨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기꺼이 모두 생명력을 흡수하는 마법진에다 밀어 넣었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수백 명이라도 실험체로 사용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실수인 척 이용할 만한 방법이 없을까?’

비윤리적인 궁리는 욕실을 나와 기초 화장품을 바르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쿠웅! …타타탕!

“……?”

밖에서 굉음과 총성이 들릴 때까지.

창밖을 살피자 번쩍거리는 불빛과 호텔로 달려오는 여러 대의 차가 보였다. 호텔을 지키던 러시아 군인들이 무어라 악을 쓰면서 그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타타탕!

러시아로 오기 전, 정상욱 중위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러시아 내 백인우월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게이트 사태의 원흉이 당신이라는 헛소문이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동양인에게서 위대한 영웅이 나올 리 없다면서요.』

‘그놈들인가?’

똑똑똑.

“한율 씨,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한율은 큰 소리로 대답하곤 문을 열어주었다. 정상욱이 심각한 얼굴로 들어왔다.

“한율 씨, 이곳으로 오기 전에 제가 한 얘기 기억하십니까?”

“백인우월주의자들이요?”

“네. 그중 과격한 놈들이 뭉쳐서 이쪽으로 오는 것 같습니다.”

“지금 밖에서 난리 치는 놈들이 다가 아니라요?”

정상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닫은 문 쪽을 힐끗했다. 문 앞에는 지난번 미국에 갔을 때도 동행한 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동안 러시아가 폐쇄적으로 정보를 통제하는 바람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뿐이지, 생각보다… 헛소문에 휘둘린 사람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본래 백인우월주의자가 아니지만, 게이트 괴물에게 가족을 잃은 분노를 어떻게든 표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요. 그리고 오늘 모인 각성자 중에도, 군인 중에도 그 무리가 섞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오랫동안 절 노린 범죄를 계획했겠네요. 러시아로 오겠다고 공표했을 때부터.”

한율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정상욱에게 말했다.

“우리나라 일행 모두 가장 넓은 한 객실로 모이게 해주세요. 저를 직접 노리기보단, 여러분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아주 커 보이거든요.”

한율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대한민국 외교부와 각성자 연구소 직원들, 군인들을 모두 한 객실로 집어넣고 보호 결계를 친 직후.

띠리리리! 바깥의 소란과 시끄러운 화재 경보음. 무장 괴한들의 공격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한 호텔 직원이 ‘대피하세요!’를 외치며 대한민국 외교부 직원이 사용하던 객실 문을 열었다. 허리춤에 숨겼던 총을 꺼내며.

퍽.

[악! …뭐야! 너, 한율이지?! 게이트를 불러낸 악마 새끼! 나와! 비겁하게 숨지 말고…! 아악!]

죽이지 않으려고 살살 쳤더니 오히려 총을 사방에다 쏘려고 하길래, 한율은 놈을 거꾸로 돌리고선 탈탈 털었다. 그러곤 뒤늦게 달려온 러시아 군인들에게 넘겼다.

한율은 영어로 말했다.

[당장 이 호텔을 떠나야겠습니다. 차 준비해주세요.]

몇 시간 후, 모스크바에 있는 한국 대사관.

일행의 안전을 위해 동행한 한율은, 놀라고 지친 그들에게 말했다.

“게이트 결계 실험엔 저 혼자 가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곳에 계세요.”

“네?! 그건 안 됩니다! 위험해요!”

“저 때문에 여러분이 위험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율 씨는 우리나라에 있어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혼자만 보낼 순….”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이해원이 말했다. 그의 눈이 은은한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허튼 놈들이 한율 씨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잘 지키고 업무 보조도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러시아어 통역가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러시아 한국 대사관 소속이자, 러시아어 통역을 맡은 ‘최중’이 손을 들었다.

“저도 동행을 허락해 주십시오.”

통역도 필요하지.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이해원 일병과 최중 씨. 이렇게 우리 셋만 가도록 하겠습니다.”

최중에게 어스래빗 굿즈 인형을 건넸다.

“제가 만든 보호 부적이에요. 몸에 지니고 다니세요. 불시에 날아오는 총알은 힘들지만, 다른 물리적인 충격은 어느 정도 막아줄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레드 게이트 경계 지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른 호텔 주변은, 몇 시간 사이 아주 엉망이 되어 있었다. 호텔은 정문과 창이 모조리 박살 나 있었고, 거리엔 혐오성 발언 혹은 허황한 주장을 담은 슬로건이 나뒹굴었다.

레드 게이트 군사 작전 지역에서 다시 만난 군인은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을 노린 테러를 계획하고 실행한 자들 모두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려 한 반역죄로 처벌될 겁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길.]

한율은 피곤함을 감추지 않은 채 미소 지었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아 크게 화나진 않았습니다만, 제대로 쉬질 못했더니 저도 모르게 실수하게 되진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느새 둘째 날 아침이 밝은 황폐한 대지. 한율의 시선 끝에 사기꾼이 다수 섞인 각성 범죄자의 천막촌이 잡혔다.

“다소 거칠게 다뤄도 되는 분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하고 싶습니다만.”

군인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비윤리적이지 않은 선에서?]

말로는 화나지 않았다곤 하지만, 알맹이 없는 사과는 거절하겠다는 뜻을 알아챈 것.

한율도 입가를 더 올렸다.

“네. 비윤리적이지 않은 선에서.”

한편, 극단적인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한율이 묵던 호텔을 공격했다는 소식은 금세 전 세계로 퍼져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다.

사실 한율을 지지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현실을 외면한 광신도 같은 자들이 곳곳에 숨어있다는 주장도 함께.

WB래빗 엔터테인먼트, 어스래빗 연습실.

박가람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쯧쯧 혀를 찼다.

“반대로, 서한율을 신으로 모시는 신흥 종교도 있대.”

“우와. 그럼 나는 신이랑 친구인 거야?”

“달냥인 신의 고양이가 되는 건가.”

길우성에 이어 강보배까지 진지하게 반응하자, 이건우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한율이가 먼 타지에서 테러당할 뻔했는데, 걱정은 안 돼?”

박가람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전혀?”

“…….”

“이건우, 네가 서한율이 엄청나게 크고 흉포한 괴물을 단번에 때려잡는 걸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그래.”

“그거랑은 전혀 다른 문제지. 한율이도 사람이잖아. 전에 한율이, 미국 가기 전에 쓰러졌었던 거 잊었어? 만약 그렇게 또 쓰러졌을 때 다시 이상한 놈들이 한율이 노리면?”

“으음….”

“너무 걱정하지 마.”

유호가 안심하라는 얼굴로 이건우를 달랬다.

“해원이가 옆에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이해원이 그렇게 강해요?”

옆에서 몸을 풀던 차남석이 물었다. 유호와 박가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진 것보다 더?”

“엉. 아마 지구에서 서한율 다음으로 강한 각성자가 해원이 형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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